한국사 두문자

근대 국립병원 두문자 : 혜 제 대 자

noksan2023 2025. 1. 15. 05:12
반응형

근대 국립병원 두문자 : 혜 제 대 자

 

 

호러스 알렌이 민영익을 치료하고 있는 장면

 

 

 

혜 : 광원 1885

제 : 광원 1899

대 : 한의원 1907

자 : 혜원 1909

 

 

1. 광원 1885

 

 

광혜원 전경

 

 

 

광혜원이라 함은 1885년(고종 22) 개원한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을 말한다. 처음 명칭은 국립 광혜원(廣惠院)이었다. 1876년 문호개방 이후 고종과 조선 정부는 총체적인 근대화 작업에 착수하였다. 이때 의료 근대화도 구상하였다.

 

1881년 일본에 파견한 조사시찰단을 통해 서양식 병원을 탐색하고, 1884년 정부 신문인 『한성순보』의 사설을 통해 서양의학 교육기관의 설립과 양의(洋醫) 양성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1884년 미국 북감리회 선교사 매클레이(Robert S. MaClay)가 서양식 병원 설립을 제안했을 때 이를 긍정적으로 검토하였다. 이때 발생한 갑신정변 당시 미국 북장로회 의료선교사 알렌(Horace. N. Allen, 安蓮)이 우정국사건 당시 중상을 입은 민영익을 서양의술로 살림으로써 서양식 국립병원 설립이 가속화되었다.

 

고종은 알렌의 서양식 병원건립 건의를 받아들여 1885년 2월 29일(음력)[4월 14일(양력)] 광혜원(House of Extended Grace)을 설치하였는데, 이것이 곧 한성 재동에 설치된 국립병원이었다. 건물은 홍영식의 집(지금의 헌법재판소 자리)을 쓰게 하였는데, 광혜원이라는 명칭은 2주일 만에 백지화되고, 그 해 3월 12일(음력)[4월 26일(양력)]에 새로 제중원(濟衆院: House of Universal Helpfulness)이라는 이름을 붙여 개원 당시부터 소급 적용하였다. 제중원의 명성은 날로 높아져 하루에 최고 70명의 환자를 보게 된 때도 있었다고 하는데, 그 뒤 환자의 수가 늘어나서 진료업무가 복잡하게 되자 알렌은 한때 미국 감리교회 선교의 스크랜턴(Scranton, W. B.)의 도움을 받기도 하다가, 곧 추가로 파견된 선교의 헤론(Heron, J. H.)과 함께 진료에 종사하였다.

 

1886년에는 다시 미국으로부터 여의(女醫) 엘러스(Elless, A. J.)가 파견되어 제중원에 부인부(婦人部)를 신설하고 여인들의 진료에 종사하였다. 이렇게 제중원의 진료업무가 더욱 번창하자 1887년 초 조선 정부는 한성 남부 동현의 왕실 소유 부지(지금의 을지로 입구와 2가의 중간, 구 한국외환은행 본점 자리)로 제중원을 옮겼다.

 

1887년 가을 알렌이 미국특파전권대사 박정양의 수행원으로 떠나게 되자 제중원의 진료업무는 헤론이 전담하게 되었고, 부인부의 여의는 엘러스가 혼인하게 됨에 따라 호르톤(Horton, L. S.)으로 교체되었다. 그 뒤 알렌이 돌아왔으나 미국 공사관 서기관이 되었으므로 병원진료는 하지 않았고, 1890년 여름 헤론이 병사하자 캐나다에서 다시 파견된 빈턴(Vinton, C. C.)이 의료업무를 이어 맡다가 1893년 다시 추가로 파견된 에비슨(Avison, O. R., 魚丕信)에게 인계되었다.

 

제중원은 1885년 국립병원으로 개원하여 진료활동을 한 이래, 1894년 6월 갑오개혁의 행정관제개혁 때 내무아문 아래 위생국(衛生局)을 설치하여 종두(種痘)주2 및 의약 · 전염병예방업무 등을 맡게 하면서 7월 18일 내무아문으로 폐합되었다. 이후 에비슨은 병원 운영을 맡은 관리들의 부패로 업무를 수행할 수 없어 정부에 쇄신을 건의하였다. 고종은 이 건의를 받아들여 모든 권리를 에비슨에게 맡겨 설립한 지 9년 만에 경영권도 완전히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로 이관되었다. 그리고 미국인 실업가 세브란스(Severance, L. H.)의 재정지원으로 1904년에 남대문 밖 복숭아골[桃洞]로 현대식 병원을 지어 옮기고 세브란스병원이라 하였다. 에비슨에 의하여 1899년 제중원학교가 설립되었다가 1904년 세브란스병원으로 개편되면서 제중원이라는 이름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한편 1886년 3월 29일, 서양의학을 교육하고 양의(洋醫)를 양성하기 위한 국립 제중원의학당이 개교했다. 아울러 1886년 5월 미국 의사들의 공로에 대한 보상으로 알렌과 헤론에게 당상관(堂上官)의 벼슬이 하사되었다. 조선 정부는 건물과 예산을 제공하고 학생들을 선발했으며, 제중원 의사 알렌은 교수들을 섭외하고 교육에 필요한 의학도구 등을 준비했다. 본과 학생은 12명이었으며 영어, 화학, 해부, 약 조제법 등을 배웠다. 그러나 제중원의학당에서 정식 졸업생은 단 한 명도 배출되지 못했고, 1893년 에비슨이 내한하면서 의학교육이 재개되었다.

 

2. 광원 1900

 

광제원이라 함은 1900 서울에 설치하였던 내부 직할의 국립병원을 말한다. 1899년 4월 24일 칙령 제14호 「병원관제」에 의하여 설립된 내부병원이 1900년 6월 30일 칙령 제24호 「병원관제 중 개정건」에 따라 보시원(普施院)으로 발족되었다가 며칠 뒤 광제원으로 개칭되었다.

 

주요업무는 내부병원의 업무를 계승하여 일반 환자를 구료하는 이 외에 전염병을 취급하는 피병원(避病院)의 별도시설 및 진료와 5일 간격으로 감옥의 죄수들의 진료를 맡았고, 1906년 4월부터 창녀들의 검진도 실시하였다. 내부병원에는 종두업무를 취급하기 위하여 15명의 의사 중 10명의 종두의를 두었으나 광제원으로 개칭되면서 한성종두사(漢城種痘司)가 독립되어 종두업무는 분리되었다.

 

직제는 원장 1명, 기사 1명 등 2명의 주임관(奏任官)과 의사 7명, 제약사 1명, 서기 1명 등 9명의 판임관을 두었는데, 의사는 대방의(大方醫) 3명, 외과의 2명, 소아의 1명, 침의(針醫) 1명으로 구성되었다. 기사는 의사와 제약사의 업무 및 매약을 관리하는 직책이었고, 제약사는 각종 약료의 검사 뿐만 아니라 학생 수명을 두어 제약법과 화약법(化藥法)을 학습시키는 기능도 가지고 있었다. 의료비는 국고보조를 받았으나 약값은 무의탁자와 죄수를 제외하고는 시중 약값을 고려하여 싼값으로 환자가 부담하였다. 또, 오전 8시부터 12시까지는 외래환자의 진료, 오후 2시부터 4시까지는 환자의 집에 왕진하는 시간으로 정하여 일과를 운영하였다. 1907년 3월 10일 칙령 제9호로 의정부 직할의 대한병원으로 이관되었다.

 

 

3. 한의원 1907

 

 

대한의원 본관

 

 

 

대한의원이라 함은 1907 서울에 설립되었던 국립병원을 말한다. 1899년 4월 내부병원(內部病院)을 처음 설치하였다가, 1900년 6월에 내부병원관제를 폐지하고 새로 광제원관제(廣濟院官制)를 정하였다. 그러나 1907년 3월 10일 광제원 및 의학교관제를 폐지하고 의정부(議政府) 직할인 대한의원관제를 반포하였는데, 이 대한의원은 광제원의 업무를 인계하는 것 이외에 교육부와 위생부를 증설하여 서양의학에 의한 의료 및 의학교육제도를 확충하였다.

 

직제는 원장 1인, 고문 1인, 의원 17인, 교관 7인, 약제사 9인, 통역관 3인, 통역관보 5인, 사무원 10인, 기사 3인으로 되어 있다. 원장은 내부대신이 겸무하며, 고문과 협의한 다음 원무(院務)를 정리하고, 원장관방(院長官房)에서는 중요한 문서를 처리하며, 또 병원의 서무·회계를 총괄하게 하였다. 그리고 치료부·교육부·위생부의 3부를 두었는데, 치료부는 질병구료(疾病救療)와 빈민시료(貧民施療), 교육부는 의사양성, 약제사양성, 산파 및 간호부양성, 교과서편찬, 위생부는 의사·약제사 및 산파의 업무 및 약품매약취체에 관한 조사, 전염병 및 지방병의 예방, 종두 기타 공중위생에 관한 조사, 검미(檢黴), 검역 및 정선(停船)에 관한 조사 등을 관장하였다.

 

이러한 대한의원관제는 1907년 12월 27일 폐지하고 새로운 관제를 반포하였다. 이 관제에서 대한의원은 내부대신의 관할에 속하고 치병(治病)·의육(醫育) 및 위생의 시험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게 하였다. 당시 이 관제에 따른 원장·부원장을 비롯한 의관·기사·교수·약제관·사무관들은 거의 일본인으로 충당하고 우리나라 사람은 불과 몇 사람 뿐이었다. 의관은 이규준(李圭濬:정3품, 주임)·최국현(崔國鉉:9품, 주임), 교수는 유세환(劉世煥:정3품, 주임)·유병필(劉秉泌:정3품, 주임), 학생감은 지석영(池錫永:정3품, 주임) 등이었다.

 

이 대한의원관제는 1909년 2월 4일 개정하였는데, 이 때 치료부·의육부·위생시험부를 폐지하고 새로 대한의원에 부속의학교를 두어 의사·약제사·산파 및 간호부 양성에 관한 사항을 관장하게 하였다. 대한의원은 경술국치 후 1910년 9월 30일 조선총독부의원관제 공포와 더불어 조선총독부의원으로 개칭되었는데, 오늘날의 서울대학교병원의 전신이라 할 수 있다.

 

 

4. 혜원 1909

 

 

전북대병원 전신_전주 자혜원

 

 

 

의료원의 전신인 자혜원 1909년 순종의 칙령으로 1910년 함흥, 전주, 청주에 시범적으로 세워진 서양식 병원이었다. 그 후 1932년에는 진주 중심에 당시로써는 최대 규모인 연건평 2,000여 평의 건물을 짓고 경남도립 진주의원으로 개명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진주의료원 문제는 존폐 여부를 떠나 한국 보건의료 역사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우리나라에서 서양 근대의학의 역사가 시작됐다고 할 수 있는 시점인 1876년 개항 즈음부터 1910년 경술국치 무렵까지 보건의료 환경의 변화를 다룬 책이 출간됐다. 그간 비슷한 주제들로 출간된 책들과 달리 저자는 철저한 사료 비판과 충실한 근거에 바탕을 둔 글쓰기로 그 방향을 달리한다. 당시 보건의료를 다룬 논문이나 책 가운데 사실이 부정확하거나 근거가 미약한 것, 사건과 인물을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이 적지 않아 이 시기 역사에 대한 왜곡된 지식과 역사상을 갖게 하는 원인이 됐다는 게 그 이유다. 이 책은 당시 시대상에 대한 주도면밀한 관찰로 부족한 자료의 빈 공간을 채운다. 한국 근현대 의학, 의술, 의학교육, 의료행정, 의문화사, 의생활사 뿐만 아니라 이와 연관시켜 볼 수 있는 다양한 분야의 자료들과 함께 1,000여 장에 가까운 사진을 펼쳐 보여주는 이 책은 우리 의료계가 돌아보는 역사이자 조감도라 할 수 있다.

그동안 통사적으로 한국 근현대 의료 문화사를 기술한 책은 있었지만, 너무 학문적으로 치우친 나머지 일반인들도 흥미롭게 펼쳐볼만한 의학사는 없었다. 그러나 이 책은 독자들에게 정확한 자료와 사료를 보여주면서도 사회적, 생활사적인 측면을 아우르는 의료 문화 전반을 쉽고 명쾌한 필치로 ‘의료’를 키워드로 한 근대의 우리의 삶을 이해하는 생생한 지식을 전달한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