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대 북간도 독립군 기지 두문자 : 북서명 중간의
1910년대 북간도 독립군 기지 두문자 : 북서명 중간의
북 : 북간도 북로군정서
서 : 서전서숙
명 : 명동학교
중 : 중광단(대한정의단)
간 : 간민회
의 : 의민단(천주교 무장단체)
1. 북간도 북로군정서
북로군정서는 1919년 만주에서 결성되었던 독립군 단체를 말한다. 북간도에서 서일(徐一) 등의 대종교인들 중심으로 이루어진 중광단(重光團)이 3·1운동 이후 정의단(正義團)으로 확대·개편되면서 무장독립운동을 수행하기 위해 대한군정회(大韓軍政署, 약칭 군정회)를 조직하였다. 이후 대한군정부(大韓軍政府, 약칭 군정부)로 확대 개편하였으며 임시정부로부터 대한군정서로 인준받았다.
창립 당시의 주요 인물은 서일·현천묵(玄天默)·계화(桂和)·이장녕(李章寧) 등으로, 이들은 무장독립운동을 위해 신민회(新民會)·광복회(光復會) 계열의 김좌진(金佐鎭)을 초빙하여 독립군의 조직과 훈련을 담당하게 하였다. 1919년 10월 대종교와 신민회 주도로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과 대한군정회(大韓軍政會)가 통합되어 대한군정부(大韓軍政府)로 개편되었다. 그 해 12월 상해 임시정부는 명칭을 ‘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로 변경할 것을 조건으로 승낙하였다. 이때부터 ‘대한군정서’가 공식 명칭이 되었다. 한편, 상해 임시정부는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와 구분해 대한군정서에 대해서는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라는 명칭을 애용하였다.
북로군정서 개편 당시의 임원은 총재 서일, 총사령관 김좌진, 참모장 이장녕, 사단장 김규식(金奎植), 여단장 최해(崔海), 연대장 정훈(鄭勳), 연성대장(硏成隊長) 이범석(李範奭), 경리 계화, 길림분서고문 윤복영(尹復榮), 군기감독 양현(梁玄) 등이었다. 군정서는 근거지를 왕청현(汪淸縣)의 서대파십리평(西大坡十里坪) 일대의 약 30리에 걸친 삼림 지대에 두고 8동의 병영을 지어 사관연성소(士官練成所)를 설립하였다. 신흥무관학교에 도움을 요청하여 소장에 김좌진 이하 교관 이범석·이장녕·김규식· 김홍국(金洪國)·최상운(崔尙雲)·오상세(吳祥世) 등 다수의 장교와 각종 교재를 공급받고, 관할 지역내 주민들과 국내로부터 오는 청년들을 뽑아 본격적인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다.
6개월 과정의 속성과는 정신교육·역사·군사학·술과(術科: 병기와 부대지휘 운용)·체조 및 규령법(叫令法) 등을 과목으로 정하고, 군사 훈련은 구한국 군대식 방법을 기본으로 실시하였다. 1920년 6월 기초 훈련을 끝낸 600명 중에 300명만이 회색 군복을 입고 본격적인 군사훈련에 들어갔다. 군정서는 군사 훈련 외에 노령·간도의 각 독립 운동 단체와 제휴했을 뿐 아니라 북만 독립운동자의 연락 중심지가 되기도 하였다. 지방 행정에도 유의하여 소학교·야학·강습소 등을 설립하는 한편, 지방 산업 진흥에도 편리를 도모하였다.
독립군 편제는 소·중·대대로 하되 1개 소대를 50명으로 구성하여, 2개 소대를 1개 중대로, 2개 중대를 1개 대대로 편성하였다. 병력 규모는 초기에는 500여 명이던 것이 1920년 8월에는 1,600명을 넘어섰으며, 소총 1,300정, 권총 150정, 기관총 7문 등으로 무장된 동북만주 최강 정예 부대가 되었다. 그리고 운영 자금은 관할 지역 주민이나 혹은 국내에서 징수되는 모금액으로 충당되었다. 자금은 주로 연해주에서 무기를 구입하는데 사용했는데 독립군 1인당 개인장비로는 소총 1정, 탄환 500발, 수류탄 1개, 비상식량용 조 6되, 짚신 1켤레 등이었다.
1920년 10월 일제는 재만 독립군 토벌을 목적으로 대규모의 출병을 했지만, 그에 앞선 8월 중국군 연길영장(延吉營長)인 맹부덕(孟富德)의 종용으로 재만 독립군은 이미 산간의 안전 지대로 부대 이동을 개시한 뒤였다.
군정서도 장백산(長白山)으로 향해 가던 중, 10월에 청산리(靑山里) 어귀인 화룡현 삼도구(三道溝)에 이르러 보병·기병·야포병·공병 등의 혼성 부대인 일본군 동지대(東支隊) 37여단 소속의 1만 명과 접전을 벌이게 되었다. 이것이 유명한 청산리대첩으로, 10월 20일에서 23일까지 10여 차례의 전투에서 수많은 일본군을 사살한 뒤 일군의 반격을 피하여 소만국경지대인 밀산으로 이동하였다.
전투 당시 독립군 부대는 임시 전투 편제인 둘로 나뉘었다. 즉 훈련 정도가 낮은 비전투원은 사령관 김좌진 밑에 전지와 떨어진 곳에 대기하였고, 사관 훈련소를 졸업한 600여 명의 정예 병력은 이범석 휘하에서 일군과 대결하였다. 그 뒤 군정서는 일본군을 피해 이동해 온 대한독립군·대한신민회·도독부·의군부·혈성단 등 10여 개 독립군 부대와 함께 밀산에 집결하였다. 무장독립군부대는 러시아와 교섭하며 밀산에서 연해주 이만 일대로 이동하였다. 러시아는 이만에 집결한 항일무장독립군을 자유시로 이동시키며 무장을 해제할 것을 종용하였다. 서일과 김좌진이 이끈 부대는 무장해제를 거부하며 만주로 회군하였다. 남은 북로군정서 군대는 박두희(朴杜熙)의 지휘 아래 홍범도 부대에 편입되어 자유시로 이동하였다.
2. 서전서숙
서전서숙이라 함은 1906년 만주 용정에 설립되었던 민족교육기관을 말한다. 이상설(李相卨)을 중심으로 여준(呂準)·정순만(鄭淳萬)·이동녕(李東寧)·박정서(朴禎瑞)·김우용(金禹鏞)·황달영(黃達永)·홍창섭 등의 애국지사들이 교육을 통한 독립사상의 고취를 위하여 연길현(延吉縣) 육두구(六頭溝) 용정촌에 설립하였다. 이상설이 천주교회장 최병익(崔秉翼)의 집을 사재로 매입하여 학교건물로 개수하였으며, 학교명은 서전평야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건물 면적은 231m²로 정도의 규모에 학생 22명으로 출발하였다. 숙장은 이상설이, 운영은 이동녕·정순만 등이 맡아보았으며, 교사는 이상설·여조현·김우용·황달영 등이었다. 교사의 월급·교재비·학생의 학용품 등 일체의 경비는 이상설이 사재로 부담하는 완전 무상교육이었고, 교과목은 역사·지리·수학·정치학·국제공법·헌법 등의 신학문을 가르쳤다. 특히, 이상설은 ≪산술신서≫ 상·하권을 저술하여 가르쳤으며, 교육내용은 철저한 항일민족교육에 초점을 두었다. 또한, 그는 용정 외에도 온성·종성·회령에 이르기까지 교포들을 방문하여 신교육 및 민족교육의 필요성과 서전서숙의 설립목적 등을 역설하며 자제들을 입학시킬 것을 권유하기도 하였다.
설립 초기에는 고등반인 갑반과 초등반인 을반으로 나누었으며, 그 뒤에는 갑반에 20명, 을반에 20명, 병반에 34명으로 분반하여 교육을 실시하였다. 전해지는 학생들의 명단을 보면 갑반에 윤정희(尹政熙)·이병휘(李丙徽)·윤규한(尹圭漢)·김정문(金鼎汶)·남세극(南世極)·채우석(蔡禹錫)·이근용(李瑾鎔)·구자승(具滋昇)·구정서(具貞書), 을반에 김학연(金學淵)·박일병(朴一秉)·오병묵(吳秉默)·이정휘(李庭徽)·박효언(朴孝彦)·구자익(具滋益)·박세호(朴世豪) 등이 있었고, 소속을 알 수 없는 남위언 등이 있었다. 그러나 1907년 4월 이상설이 이동녕·정순만과 함께 헤이그의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나게 되자 재정난을 겪게 되었고, 또한 통감부 간도출장소가 설치되어 일제의 감시와 방해가 심해지자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하고 폐교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 때 당시 통감부출장소 소장은 흉계를 감춘 채 회유책으로 매월 보조금을 내겠으니 서숙을 계속 운영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를 일축한 학교측은 문을 닫고 혼춘 방면으로 떠났다가 갑반 학생들만 데려다 탑두구(塔頭溝) 근처에서 수업을 계속하여 졸업식을 올린 뒤 해산하고 말았다.
이 같이 비록 1년 미만의 짧은 역사로 폐교되고 말았지만, 민족주의에 입각한 교육기관으로서, 그 뒤 북간도뿐만 아니라 서간도와 노령 연해주, 한국 내의 각 지역에서 우리의 민족교육이 일제식민교육정책과 대항하면서 발전, 성장해 나가는 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서전서숙의 설립목적이 일반적인 신교육실시가 아니라 민족교육을 통한 만주지역에서의 항일독립운동의 기본방향을 제시하고자 한 것이기 때문에 항일독립운동사상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3. 명동학교
명동학교라 함은 1908년 김약연(金躍淵, 1868~1942) 등이 북간도 한인들을 교육하기 위해 설립한 민족 교육 기관을 말한다. 1908년 4월 간도의 명동촌(明東村)에서 명동 서숙(明東書塾)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개교하였다. 명동촌은 용정(龍井)의 남쪽 화룡현 지신향 장재촌(長財村)에 위치한 조선인 마을로서 규암(圭巖) 김약연을 비롯하여 김하규, 문치정, 남위언 등이 가솔들을 이끌고 집단적으로 이주하여 건설하였다. 명동촌을 개척한 이후, 민족 교육 기관의 필요성에 따라 명동 서숙을 세우고 박무림(朴茂林)이 숙장(塾長), 김약연이 숙감(塾監), 문치정이 재무를 담당하였다.
1909년 북간도 교육단이 학교 운영에 참여하면서 기독교 학교로 개편하고, 명칭도 명동 학교로 개칭하였다. 북간도 교육단 단장이었던 정재면(鄭載冕, 1882~1962)은 서울 상동교회 부설 기독 청년 학원을 졸업하고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간도로 왔다. 이후 명동 학교의 교무주임으로 취임하여 독립운동을 교육 이념으로 하는 교육 체계를 적극적으로 도입하였다. 이를 위해 국내로부터 역사에 황의돈, 윤리에 박태항, 한글에 장지영, 체육에 김홍일 등을 초빙하여 명동 학교의 쇄신을 이끌었다.
학교가 변화함에 따라 간도 일대뿐만 아니라 국내와 연해주 등지에서 학생들이 모여들어, 1910년 중학부가 증설되었고 1911년에는 북간도에서 처음으로 여학부가 신설되었다. 당시의 학생 수는 중학부 160명, 소학부 280명, 여학부 65명 등 총 505명에 이르렀다. 소학부에서는 국어, 동국역사, 성경, 교육학, 창가, 체조 등의 과목을 가르쳤다.
명동 학교 출신들은 1919년 3⋅1 운동 때 용정에서 벌어진 만세 시위인 3⋅13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또한 여러 민족주의 교육 기관의 교사가 되거나 독립군으로 참여하는 등 간도 지역, 나아가서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 윤동주, 나운규, 문익환 등도 명동 학교에서 공부했다.
4. 중광단(대한정의단)
중광단(重光團)은 1911년 3월 북간도에서 대종교단(大倧敎團)에 의해 설립된 무장단체이다. 초기에는 민족학교를 설립해 인재 양성에 힘썼으며, 1917년부터 본격적으로 무장투쟁을 준비하였다. 북간도의 3 · 1운동을 주도하였으며, 1919년 5월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으로 발전적으로 해체되었다.
1911년 3월 북간도로 망명한 대종교단에 의해 왕청현(汪淸縣)에서 설립되었다. 서일이 단장이었으며 백순, 현천묵, 박찬익, 계화, 김병덕(金秉德)[김성(金星)], 채오(蔡伍), 양현(梁賢), 이홍래 등 대종교의 간부들이 참여하였다.
무장투쟁을 지향하였으나 무기를 갖출 여력이 없었기에 한인 사회의 역량 강화에 주력하였다. 재만 한인의 실력 양성을 위해 민족학교를 설립해 인재 양성에 힘썼다. 1911년부터 1916년까지 25개에 이르는 학교를 설립하여 교장이나 교사로 활동하며 학교를 운영하고 교육을 실시하였다.
1916년 대종교 제2대 도사교에 오른 김교헌이 이듬해 북간도로 망명하면서 본격적으로 무장투쟁을 준비하고 외교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왕청현을 대일 항쟁을 근거지로 삼고 고평을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민복(李敏馥)을 니콜스크-우수리스키에, 백순을 북만주 밀산(密山)에, 진학신(秦學新)을 북만주 소수분(小綏芬)에 파견하여 만주와 연해주의 독립운동 세력들과 연계하고자 하였다.
백순은 이범윤과 함께 러시아와 중국 국경 지방을 순회하며 의병 모집을 하였다. 1918년 10월 계화는 폭탄 제조인을 고용해 길림(吉林)으로 가기도 하였다. 김성 · 정신을 파리평화회의 대표단으로 파견하였으나, 중도에 귀환하고 말았다.
1919년 3 1 운동이 일어나자 대종교인들을 모아 왕청현, 안도현(安圖縣), 연길현(延吉縣)을 중심으로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3 13 용정 만세시위운동 직후에는 연길현 국자가(局子街)에서 대일 항전을 위한 인적 지원과 군자금 마련을 위해 비밀조직 '자유공단(自由公團)'을 결성하고 매월 1인당 1원씩 회비를 징수하기로 결의하였다. 1919년 5월 대종교단이 대일 항전의 실행 단체로 대한정의단을 설립하면서 발전적으로 해체되었다.
5. 간민회
간민회라 함은 1913년 북간도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를 말한다. 애초에는 회명을 간민자치회(墾民自治會)라 하였으나 중국 당국이 ‘자치’라는 말을 삭제하도록 요구함으로써 간민회라 하였다.
1913년 1월 26일 이동춘(李同春), 김립(金立) 등 25인 발기인은 150여 명이 집회한 가운데 간민회설립협의회를 개최하였다. 4월 26일백옥보(白玉甫)가 간민회총회 임시회장으로 선출되어 간민회 성립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대회에서 회장에 김약연(金躍淵), 부회장에 백옥보가 선임되었다. 또 민적과(民籍課), 교육과, 법률과, 재무과, 식산흥업과(殖産興業課) 등등 9개 부서 임원을 임명하였다.
이후 연길·화룡·왕청 등 3개 현에 분회를 세웠고 분회 아래 많은 지회를 설치하였다. 그리하여 교민에 관한 모든 사항들을 자치적으로 해결하여 중국 관헌도 한인문제는 간민회와 협의하였다. 또한, 교민에게 애국심을 고취하여 독립운동의 기반조성에 크게 기여함으로써, 북간도지방은 후일 항일무장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북간도지방의 만세운동을 주도하였고, 그 이후에는 간도대한국민회로 개편되었다.
6. 의민단(천주교 무장단체)
의민단은 1919년 북간도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를 말한다. 왕청현(王淸縣) 춘화향(春華鄕)에서 천주교인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무장독립단으로 단장 방우룡(方雨龍, 또는 方渭龍), 부단장 김연군(金演君), 참모장 김종헌(金鍾憲), 영장(營長) 허은(許垠), 서무부장 정준수(鄭駿秀), 재무부장 홍림(洪林) 등이 주축이 되었다.
재정은 천주교인들의 헌금으로 충당하였으므로 다른 단체에 비하여 윤택하였다. 한때는 홍범도(洪範圖)와도 제휴하여 활동하였으나, 그 뒤 분리하여 독자적 행동을 하였다. 이 단체의 목적은 국내진공이었고, 조직이 강력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인정하여 군무보고를 하였고, 그 지시를 받았다. 대원은 약 300명이었으며, 소총 약 400정, 권총 약 50정, 수류탄 약 480발을 소유하여 충실한 군비를 갖추었다.
1920년 6월 이후 국민회·북로군정서·광복단·의군단(義軍團)·신민단과 대한민국임시정부 파견 안정근(安定根)·왕삼덕(王三德)의 조정으로 연합활동을 폈다. 1920년 10월에는 청산리전투에도 참여하였다. 그 뒤 노령 자유시에 가서 참변을 겪고 해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