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 투쟁사 두문자 : 봉훈청 참한자
만주 투쟁사 두문자 : 봉훈청 참한자
봉 : 봉오동 전투
훈 : 훈춘조작사건
청 : 청산리전투
참 : 간도참변
한 : 대한독립군단
자 : 자유시 참변
1. 봉오동 전투
봉오동전투는 1920년 만주 봉오동에서 독립군 부대가 일본 정규군을 대패시킨 전투이다. 전투는 홍범도와 최진동이 이끄는 독립군이 일본군 헌병 국경초소를 습격·격파하면서 시작되었다. 일본군을 유인해 낸 독립군은 일본군 120명을 사살한 뒤 일본군을 계속 봉오동으로 유인하는 작전을 펼쳤다. 연합부대를 재편성하여 봉오동 계곡에 매복해 있던 독립군은 일본군이 포위망에 들어서자 일제히 사격을 퍼부어 일본 정규군 157명을 사살하고 200여 명의 부상자를 내었다. 이 압도적인 전승의 원인은 독립군의 앙양된 사기와 지휘관의 예지, 뛰어난 작전계획에 있었다.
1920년 6월 4일 독립군 홍범도 · 최진동 부대의 1개 소대가 북간도 화룡현(和龍縣) 월신강(月新江) 삼둔자(三屯子)를 출발하여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에 주둔하고 있던 1개 소대 규모의 일본군 헌병 국경초소를 습격 · 격파하였다.
당시 일본군은 독립군의 국내 진입전과 대안(對岸)의 독립군의 활발한 활동에 방비책을 강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강양동의 전투는 대전투의 도화선이 되었다. 급보를 받은 일본군 남양수비대(南陽守備隊)는 1개 중대를 출동시켜 반격전을 전개하였다.
독립군사령부는 1개 소대를 삼둔자 서남쪽 봉화리(烽火里)에 매복시켰다. 그리고 약간의 병력으로 총격전을 벌이면서 일본군을 유도하였다. 일본군이 잠복해 있는 독립군 부대 앞까지 추격해왔을 때가 6월 6일 오전 10시였다. 독립군은 100m 고지에서 일제히 사격을 퍼부어 60명을 사살하였다. 이때 독립군 2명이 전사하고 재류동포 9명이 유탄에 맞아 사망하였다. 이 전투에서 발군의 전공을 세운 이화일 소대장의 교묘한 유도작전은 높이 평가된다.
이렇게 되자, 일본군 제19사단장은 보병 소좌 야스카와(安川二郎)가 지휘하는 보병 및 기관총대 1개 대대를 출동시켰다. 홍범도 · 최진동 등 독립군 수뇌부에서는 열세한 병력으로 우세한 적과 대결하려면 작전상 요지를 점령하는 것이 최상책이라 판단하였다. 그리고 북편으로 퇴각하여 안산(安山) 촌락 후방 고지에서 수세를 취하였다. 6월 7일 새벽 야스카와 부대가 전방 300m의 텅빈 안산 촌락으로 돌입하자 잠복 중이던 독립군이 일제히 총격을 가하였다. 야스카와 부대는 니히미(新美) 중대와 합세하여 응전했으나 지리적 악조건과 불의의 기습으로 상당한 타격을 받았다.
다시 대오를 정비한 야스카와 부대는 야마자키(山崎) 중대를 주력으로 독립군을 추격하였다. 야스카와 부대가 고려령(高麗嶺) 서방에 도착했을 때, 북방 및 동북방 고지에서 매복하고 있던 소수 독립군의 치열한 사격을 받고 참패를 당하였다. 일본군은 안산과 고려령 두 전투에서 120명의 전사자를 낸 뒤에도 거듭 독립군의 유도작전에 말려들어 봉오동으로 유인되었다. 봉오동 전투는 삼둔자 부근 전투에 이어 전개되었다.
봉오동은 두만강에서 40리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려령의 험준한 산줄기가 사방을 병풍처럼 둘러쳐진 장장 수십 리를 뻗은 계곡 지대이다. 봉오동에는 100여 호의 민가가 흩어져 있었는데 독립군 근거지의 하나로서 최진동의 가족들이 살고 있었다. 이들 민가는 상촌(북촌) · 중촌(남촌) · 하촌 등 3개 부락에 흩어져 있었으며, 상촌은 봉오동을 대표하는 곳으로 독립군의 훈련장이 있었다.
독립군은 6월 7일 아침부터 일본군의 침입에 대비해 홍범도와 최진동의 연합 부대를 재편성하였다. 1 · 2 · 3 · 4중대의 각 책임자로 이천오(李千五) · 강상모 · 강시범(姜時範) · 조권식(曺權植)을 정하였다. 그리고 별도로 2개 중대를 두었다. 안무는 사령부 부관으로, 이원(李園)은 연대부 장교로, 최진동을 사령관으로, 홍범도를 연대장으로 정하였다. 그러나 이는 형식에 불과하고 실제로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사람은 홍범도 장군이었다. 작전 진행은 다음과 같다. 제1중대는 상촌 서북단에, 제2중대는 동쪽 고지에, 제3중대는 북쪽 고지에, 제4중대는 서산 남단 밀림 속에 매복하도록 하였다.
연대장 홍범도는 직접 2개 중대를 인솔하고 서남산 중턱에 위치하여 일본군의 선봉이 봉오동 어구를 통과하도록 유도하도록 하였다. 일본군 주력 부대가 독립군이 잠복한 포위망에 들어설 즈음에 일제히 사격을 단행하도록 하였다.
일본군은 독립군의 작전계획대로 봉오동 상촌 독립군 700명이 잠복해 있는 포위망 가운데로 들어왔다. 홍범도 장군의 명령에 따라 동 · 서 · 북 3면에서 협공하니 일본군은 갈팡질팡하면서 쓰러졌다. 오후 3시 소좌 야스카와는 가미야(神谷) 중대와 나카니시(中西) 소대를 지휘하여 동쪽 고지에 매복한 강상모 중대를 향하여 반격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강상모 중대는 이를 격퇴하여 100여 명을 사살하였다. 여기서 일본군은 온성 유원진(柔遠鎭)으로 패주하였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157명의 전사자와 200여 명의 부상자를 냈다. 반면 아군은 장교 1명, 병졸 3명이 전사하고 약간의 부상자를 냈을 따름이다. 이 압도적인 전승의 원인은 독립군의 앙양된 사기와 지휘관의 예지, 지리적 요지를 선용한 뛰어난 작전계획에 있었다. 한마디로 봉오동 전투는 홍범도 · 최진동 부대가 일본군 정규군을 대패시켜 독립군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킨, 항일 무장독립운동사에 빛나는 전과 중 하나이다.
2. 훈춘조작사건
훈춘사건이라 함은 1920년 9월 만주 무장 독립군을 탄압할 명분을 만들기 위해 일제의 사주를 받은 마적단이 훈춘(琿春)을 습격한 사건을 말한다.
1919년부터 1920년에 걸쳐 만주 지역에서 무장 독립 투쟁이 활발하게 전개되자, 조선 총독부와 조선주둔군은 이른바 ‘간도 지방 불령선인 초토 계획(間島地方不逞鮮人剿討計劃)’을 세워 독립군을 대대적으로 공격하려 하였다. 그러나 뚜렷한 명분 없이 한중 국경을 넘어서 군사 행동을 하는 것은 외교적 마찰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일제는 훈춘 사건을 일으켜(조작사건) 군사 행동의 근거를 마련하였다.
훈춘 사건은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났는데, 모두 일본의 사주를 받은 마적단의 소행이었다. 1920년 9월 12일 오전 5시경 마적 300여 명이 약 3시간에 걸쳐 훈춘 시가를 습격하여 약탈, 방화하고 인질을 사로잡아 동쪽으로 빠져 나갔는데, 이것이 제1차 훈춘 사건이다. 그리고 10월 2일, 제2차로 마적단은 훈춘을 습격하여 일본 영사관을 불태우고 일본인 거류지를 공격하였다. 일본군은 훈춘을 공격한 마적단 속에 ‘불령선인’과 ‘러시아 과격파’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이는 훈춘을 공격한 마적단이 단순한 마적단이 아니라 배일(排日) 의도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 공산주의 세력과도 연계되어 있는 정치적인 집단이라는 것을 주장함으로써 일본군의 군사 행동 명분을 만들고자 했다.
1920년 10월 7일 일본 내각은 ‘제국신민의 보호’를 명분으로 일본군의 파견을 결정하고 훈춘 및 간도 지방에 있는 독립군을 ‘소탕’할 것을 명했다. 이에 따라 약 2만여 명의 일본군이 만주로 이동하여, 독립군을 공격하였다. 일본군은 독립운동의 기반을 완전히 말살하기 위하여 수천 명의 한인들을 살해하고, 수천여 호의 가옥을 불태우는 등 한인 거주지를 철저하게 파괴하였다.(간도 참변 또는 경신참변) 이로써 1919년 3⋅1 운동 이후 키워진 독립 역량이 크게 손상되었고, 독립군 부대들은 북만주로 이동하게 되었다.
3. 청산리 전투
청산리 전투라 함은 1920년 10월 김좌진(金佐鎭) · 나중소(羅仲昭) · 이범석(李範奭)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군(北路軍政署軍)과 홍범도(洪範圖)가 이끄는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등을 주력으로 한 독립군부대가 독립군 토벌을 위해 간도에 출병한 일본군을 청산리 일대에서 10여 회의 전투 끝에 대파한 전투를 말한다.
국권상실을 전후해 간도와 연해주지방으로 옮겨온 의병 출신의 애국지사와 교민들은 각기 독립운동단체를 결성하고 독립군기지를 설치해 장차 독립전쟁에 대비한 독립군을 양성하고 있었다. 간도지방의 독립군부대는 1919년의 3 · 1운동을 계기로 더욱 활발한 활동을 벌여나갔다.
1919년 8월에 서일(徐一) · 김좌진 · 이장녕(李章寧) · 김규식(金奎植) · 최해(崔海) · 정훈(鄭勳) · 이범석 등이 조직한 북로군정서는 북만주 일대 독립운동의 중심이었다. 북로군정서는 국경에 가까운 밀림지대인 길림성 왕청현(吉林省汪淸縣) 서대파구(西大坡溝)에 본부를 두고 있었으며, 사관연성소(士官練成所)를 설치해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1919년 8월 이후에는 의병장 출신인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및 국민회군 등이 국경을 넘어와 일본군과 격전을 벌이고 철수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유명한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도 독립군의 침공작전에 시달린 일본군이 그 근거지를 공격하다가 패배한 전투였다.
이처럼 활발한 독립군의 활동에 커다란 위협을 느낀 일본은 간도지방의 독립군을 소탕할 방법을 찾기 위해 고심하였다. 그러던 중 1920년 10월의 혼춘사건(琿春事件)을 조작, 이를 구실로 간도에 대규모의 병력을 파견하였다. 일본군의 간도 출병에 앞서 중국군측으로부터 독립군 ‘토벌’ 방침을 통고받은 독립군부대들은 봉천성(奉天省)의 경계지역인 화룡현(和龍縣)의 이도구(二道溝) · 삼도구(三道溝)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이와 함께 북로군정서도 일단 안도현(安圖縣)으로 이동해 서로군정서와 합류한 다음 백두산 지역에 기지를 새로이 건설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9월 17일부터 이동을 시작하였다. 연길현(延吉縣)을 거쳐 화룡현 서부지역으로 이동한 북로군정서부대는 10월 10일경안도현 경계지역인 삼도구 청산리에 도착하자, 부근의 이도구로 이동해 있던 홍범도부대와 더불어 일본군의 간도 출병에 대한 대책을 협의하였다.
10월 19일의 회의에서는 일본군과 싸워야 한다는 주전론과 일본군과의 싸움을 피해야 한다는 피전론이 맞섰으나, 여러 가지 이유로 피전론이 채택되었다. 그런데 이 때 이미 일본군이 부근까지 진출해 있었기 때문에 독립군부대는 일본군을 피하기 위해 병력을 급히 후방으로 이동시켰다. 김좌진부대는 계속 일본군의 동태를 파악하면서 자제했으나, 추적을 따돌릴 수 없다고 판단해 일본군과 일전을 감행하기로 결정하였다.
10월 21일 비전투원들로 편성된 제1제대와 전투요원으로 편성된 제2제대는 각각 김좌진과 이범석의 지휘 하에 청산리 백운평(白雲坪) 바로 위쪽의 고개마루와 계곡 양쪽에 매복, 전투준비에 돌입하였다. 청산리계곡은 동서로 약 25㎞에 달하는 긴 계곡으로서, 계곡의 좌우는 인마(人馬)의 통행이 곤란할 정도로 울창한 삼림지대였다.
오전 9시경 야스가와(安川)가 이끄는 추격대가 계곡의 좁은 길을 따라 이범석부대의 매복지점으로 들어서자, 매복한 독립군들은 일제사격을 가해 일거에 그들을 전멸시켰다. 뒤이어 야마타(山田)가 지휘하는 본대가 그 곳에 도착하면서, 독립군과 사이에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일본군은 유리한 지형을 이용한 독립군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독립군의 정확한 조준사격에 견디지 못한 일본군은 200명이 넘는 전사자를 남긴 채 패주하였다. 김좌진은 이범석에게 명령을 내려,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지 말고 부대원을 이끌고 갑산촌(甲山村)으로 철수하도록 하였다.
김좌진부대가 철수하던 시각에 그 곳에서 얼마 안 떨어진 이도구 완루구(完樓溝)에서는 홍범도부대가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홍범도부대는 한때 남북으로 협공하는 일본군의 포위 속에 빠졌으나 재빨리 빠져나왔다. 그리고 중앙으로 진격한 일본군의 한 부대를 공격해서 결과적으로 일본군의 다른 부대와 함께 중앙의 일본군을 협공하는 데 성공하였다.
결국, 오후 늦게부터 시작되어 다음 날 새벽까지 계속된 전투에서 일본군 한 부대 400여명이 전멸당하였다. 독립군과 일본군은 군복의 색깔이 거의 같았기 때문에 일본군이 자기 부대를 독립군으로 오인했던 것이다.
한편, 22일 새벽갑산촌에서 합류한 김좌진부대의 제1 · 2지대는 그 곳 주민들로부터 부근의 천수동(泉水洞)에 일본군 기병대가 머물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그 곳으로 이동해 일본군 기병중대를 전멸시켰다. 이들은 독립군부대를 공격하기 위해 어랑촌(漁郎村)에 주둔하고 있던 아즈마(東正彦)부대의 일부였다.
일본군 대부대의 반격이 있으리라 생각한 김좌진은 부대원을 어랑촌 부근의 고지로 이동시켜, 오전 9시부터 포위공격해오는 일본군을 막아냈다. 이 때 부근에 있던 홍범도부대도 포위되어 있던 김좌진부대를 도와 일본군과의 전투에 참가하였다. 어랑촌 일대의 치열한 접전에서 독립군은 일본군의 공격을 약화시키며 커다란 승리를 거두었다.
날이 저물자 김좌진부대와 홍범도부대는 추격하는 적을 최종적으로 분쇄하고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다음 날인 23일부터 이들은 추적하는 일본군 수색대와 산발적인 접전을 벌이면서 고동하(古洞河)를 따라 상류로 이동하였다. 독립군의 행방을 추적하던 일본군은 25일 밤 고동하계곡의 독립군 야영지를 포착하고 급습하였다.
불의의 습격을 당한 독립군은 어둠을 이용해 신속히 대피하였다가 전열을 정비, 진지를 점령한 일본군을 역습하였다. 독립군이 사방을 포위하고 사격을 가하자 공수(攻守)가 바뀐 데 당황한 일본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고지로 퇴각하였다. 후퇴한 일본군이 새벽에 방어태세를 갖추자 독립군은 이들을 버려둔 채 안도현 지역으로 이동하였다.
이와 같이 10월 21일부터 시작된 청산리대첩에서 독립군은 26일 새벽까지 10여 회의 전투를 벌인 끝에 적의 연대장을 포함한 1,200여 명을 사살하였고, 독립군측은 전사자 100여 명을 내었다. 청산리대첩은 독립군이 일본군의 간도 출병 후 그들과 대결한 전투 중 가장 큰 규모였으며, 독립군이 최대의 전과를 거둔 가장 빛나는 승리였다. 이 전투에 참가한 주력부대의 하나인 북로군정서군의 병력은 그 해에 사관연성소를 졸업한 298명을 포함해 약 1,600명이었고, 무기는 소총 1,300정, 권총 150정, 기관총 7문을 갖추고 있었다.
전투에 참가한 간부는 총사령관 김좌진, 참모부장 나중소, 부관 박영희(朴寧熙), 연성대장 이범석, 종군장교 이민화(李敏華) · 김훈(金勳) · 백종렬(白鍾烈) · 한건원(韓建源), 대대장서리 제2중대장 홍충희(洪忠憙), 제1중대장서리 강화린(姜華麟), 제3중대장 김찬수(金燦洙), 제4중대장 오상세(吳祥世), 대대부관 김옥현(金玉玄) 등이었다. 또 하나의 주력부대인 홍범도부대는 대한독립군 · 국민회군 · 의군부 · 한민회(韓民會) · 광복단 · 의민단 · 신민단 등이 홍범도의 지휘 아래에 연합한 부대였으며, 그 병력은 약 1,400명이나 되었다.
4. 간도참변
간도참변이라 함은 1920년 일본군이 만주를 침략해 간도에 거주하던 한국인을 대량으로 학살한 사건을 말한다. 1919년 3 1 운동을 계기로 한ㆍ만 국경지대에는 수많은 독립군 부대가 편성되어 활발한 독립 전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독립군 부대는 만주로 망명해 오는 청년을 포섭해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한편, 국내외에서 모금된 동포들의 의연금으로 시베리아로부터 최신식 무기를 대량으로 구입함으로써 전투력이 급속히 향상되었다. 그 결과 독립군 부대는 부단히 한ㆍ만 국경을 넘어 국내로 진입, 일본 군경과 전투를 전개하고, 또 일본의 식민 통치기관을 습격, 파괴함으로써 큰 전과를 올릴 수 있었다.
1920년에 들어서면서 독립군의 국내 진입 작전이 더욱 활기를 띠자 일본은 중국 정부를 위협해 공동으로 독립군 토벌 작전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일본은 정규군 대부대를 만주에 투입해 일거에 한국 독립군을 소탕할 음모를 꾸미게 되었다.
1920년 10월 일본은 일본군의 만주 침략의 구실을 만들기 위해 훈춘사변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를 빙자하여 간도를 침략한 일본군은 독립군을 소탕한다는 명목 아래 초토화 작전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만주 침략과 거의 때를 같이하여 재만 독립군은 이미 일본군의 추격이 미치지 않는 깊은 산속이나 중ㆍ소국경지대로 부대 이동을 단행함으로써 일본군의 작전은 처음부터 차질을 가져왔다.
더욱이 청산리에서 한국 독립군에 의해 대패를 당한 일본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무차별 한인 학살 작전을 감행하였다. 3, 4개월 동안 벌어진 일본군의 무차별 학살로 수많은 동포가 참혹한 죽음을 당하였다.
일본군은 한국인 마을을 포위, 습격한 뒤 모든 남자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총이나 창으로 학살했고, 부녀자들은 보이는 대로 겁탈하고 살해하였다. 뿐만 아니라, 모든 민가를 소각하고 가축을 약탈함으로써 마을을 폐허로 만들었다.
화룡현 장암동(和龍縣獐巖洞)에서는 28명의 기독교인을 세워 놓고 소총 사격 연습의 과녁으로 만들었으며, 연길현 의란구(延吉縣依蘭溝)에서는 30여 호의 전 주민을 몰살하고 어떤 4형제를 불타는 가옥 속으로 밀어 넣어 태워 죽이기도 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연길현 와룡동(延吉縣臥龍洞)에 거주하는 교사를 붙잡아 얼굴 가죽을 모두 벗기고 두 눈을 빼내어 누구인지 식별할 수도 없게 만들었다. 또, 어린아이를 칼로 찔러 죽이고 시체를 태워 버렸으며 어린 소녀를 폭행한 뒤 죽이는 등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다.
이와 같은 일본군의 잔인한 만행은 만주에서 선교 활동을 하고 있던 외국인 선교사들에 의해 생생하게 폭로되었다. 일본군의 학살 장면을 목격한 미국인 선교사는 “피 젖은 만주 땅이 바로 저주받은 인간사의 한 페이지”라고 개탄하고 있으며, 선교사 마틴(Martin, S.H.)과 푸트(Foote)의 수기에서 생생하게 입증하고 있다.
또, 당시 이와 같은 일본군의 만행을 취재하기 위해 현지에 갔던 동아일보 기자 장덕준을 일본군이 암살한 사건도 일본군의 만행을 은폐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였다. 1920년 10월 9일에서 11월 5일까지 27일간 간도 일대에서 학살된 한국인은 3,469명이었다. 그렇다면 3, 4개월 동안 계속된 일본군의 학살로 희생당한 한국인의 수효는 이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
5. 대한독립군단
대한독립군단이라 함은 1920년 만주에서 조직된 독립군 연합부대를 말한다. 일제의 압력을 이기지 못한 중국측의 요구에 남·북만주 각지, 특히 북간도에 있던 독립군 부대들은 새로운 항일전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중·소 국경 부근인 밀산(密山)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1920년 12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주도 아래 대한독립군·대한신민회, 구춘선(具春先)이 회장인 대한국민회, 혼춘(琿春)의 대한국민회·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의군부(義軍府)·혈성단(血誠團)·야단(野團)·대한정의군정사(大韓正義軍政司)의 대표들이 노령(露領) 연해주(沿海州)로 건너가 장기 항일전을 준비하기로 결정하고, 밀산에서 이 단체를 조직하였다.
총재는 서일(徐一), 부총재는 홍범도(洪範圖), 고문은 백순(白純)·김호익(金虎翼), 외교부장은 최진동(崔振東), 참모부장은 김좌진(金佐鎭), 참모는 이장녕(李章寧)·나중소(羅仲昭), 군사고문은 지청천(池靑天), 제1여단장은 김규식(金奎植), 참모는 박영희(朴寧熙), 제2여단장은 안무(安武), 참모는 이단승(李檀承), 제2여단 기병대장은 강필립, 중대장에는 김창환(金昌煥)·오광선(吳光鮮)·조동식(趙東植) 등을 선임하였다.
군단 휘하에 상급부대로 여단을 두고, 그 아래 3개 대대 9개 중대 27개 소대가 편성되어 있었으며, 총병력은 3,500여 명이었다. 자유시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무장해제에 불응한 부대는 연해주 이만(현재의 러시아 연해주 달네레첸스크 지방)에서 만주로 회군하였다. 자유시로 이동한 부대는 통합 과정에서 흑하사변(이칭: 자유시사변)을 겪었다. 흑하사변 뒤 자유시에 남은 군대는 고려혁명군으로 재편되었다. 이후 고려혁명군은 이르쿠츠크로 이동하였다.
항일무장독립군 부대를 통합하여 독립군단을 만들려는 노력은 지속되었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1924년 9월 군사연합회의준비회가 조직되었다.총재에 이범윤(李範允), 총사령관에는 김좌진이 선임되었다. 김규식·최진동(崔振東)·현천묵(玄天默)·강국모(姜國模)·남성극(南星極)·최호(崔灝)·박두희(朴斗熙)·유현(柳賢)·이장녕 등이 활동하였다. 만주 동녕현(東寧縣)을 중심으로 수분하(綏芬河)에서 하얼빈[哈爾濱]을 잇는 동지연선(東支沿線)을 따라 세력을 확장시켜나갔다.
그러나 이 때 여러 독립군 부대가 공식적으로는 단일 독립군단으로 통합되어 있었으나, 재정이 궁핍하고 군세(軍勢)가 분산되어 있어 실제로는 완전한 통합을 이루지 못하였다.
6. 자유시 참변
자유시사변은 1921년 러시아 자유시(알렉세예프스크)에서 독립군 부대와 러시아 적군이 교전한 사건이다. 흑하사변이라고도 한다. 소련은 차르 정권이 몰락한 혼란을 틈타 시베리아 연해주를 점령하고 있던 일본군을 협상을 통해 철수시키려 했다. 그러자 일제는 소련 영내에 집결해 있던 독립군의 무장해제를 강력히 요구했다.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던 소련은 대한독립군을 볼셰비키로 흡수하여 일본과의 마찰을 피하고자 무장해제 명령을 내렸다. 상해 고려공산당의 입장을 따르던 독립군이 이에 불응하자 공격을 감행하여 사망자 272명 등 600명이 넘는 희생자를 내었다.
1921년 러시아 자유시(알렉세예프스크)에서 독립군 부대와 러시아 적군이 교전한 사건으로 흑하(黑河)사변이라고도 한다. 자유시는 러시아 제야 강(Zeya river)변에 위치한 ‘알렉세예브스크(Alekseyevsk)’ 마을이며, 현재는 ‘스바보드니(Svobodny)’라는 지명으로 불린다. 러시아어로 ‘스바보다(Svoboda)’가 ‘자유’를 뜻하기 때문에 ‘자유시’라고 불렸다. 그리고 제야 강이 흘러 흑룡강(黑龍江)과 합류하는 지점에 있는 중국의 국경도시 헤이허[黑河]의 지명을 따서 ‘흑하사변(黑河事變)’이라고도 한다.
대대적인 독립군 토벌을 감행한 일본군을 피해 만주 일대 독립군 부대는 항일 근거지를 마련하기 위해 조직을 대한독립군단으로 규합하고 연해주로 이동하기로 결정한다. 1921년 3월 부대별 이동을 시작해 국경을 넘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부대가 만주에 남고 일부가 연해주까지 이동했다.
러시아로 이주한 독립군은 소련 적군(공산군) 소속 한인 부대장을 통해 군사훈련에 도움을 받는가 하면, 소련 정부와 군사협정을 맺고 무기를 공급받는다. 이에 일제는 강력한 외교공세를 벌여 소련 정부에 독립군의 무장해제를 요구한다.
혁명 후 내란 발생이 불안했던 소련은 1921년 6월 22일 자유시에 주둔한 한국 독립군에게 무장해제의 명령을 내리는 동시에 저항하는 독립군을 사살하고 포로로 잡은 사건이다. 이 사건은 직접적으로는 사할린의용군이 소련 적군의 포위와 공격에 의한 참변이었지만 그 배경에는 한국독립군의 해체를 요구하던 일본군과 볼셰비키 공산당의 협상이 있었다.
시베리아 연해주를 점령하고 있던 일본군을 협상으로 철수시켜야 했던 볼셰비키 공산당은 일본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고 대한독립군을 볼셰비키로 흡수하여 일본과 마찰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또한 독립군 내부적으로는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대 상하이 고려공산당 간의 정치적 대립투쟁까지 겹쳐진 결과로 일어난 복합적인 배경으로 발생한 사건이다.
일본군은 봉오동 전투에서의 대패에 대한 보복으로 간도를 침략하였는데, 이 보복을 정당화하기 위해 마적단을 매수하여 훈춘사건을 조작하고, 간도에 군대를 투입했지만, 청산리전투에서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 독립군에 대패하고 만다. 이후 일본군은 양민학살의 형태로 보복작전을 벌이면서, 간도의 동포들뿐만 아니라, 노령 연해주에 살고 있던 동포들도 많은 피해를 당했다.
당시 소련은 혁명이후 내전 중으로 볼셰비키를 중심으로 한 적군과 반혁명파의 백군의 대립이 심화되고 있었다. 일본군은 백군 지원 명분으로 시베리아로 출병했고, 1920년 4월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 등 한인 거주지역을 습격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독립군은 적군에 가담한 후 적군이 후퇴함에 따라 연해주로 이동했고, 연해주 한인무장세력은 볼셰비키 세력의 강화에 따라 일본의 추격을 피해 자유시로 집결했다.
1920년 봉오동전투 · 청산리전투 등에서 독립군에게 참패를 당한 일본은 5만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한국독립군 토벌작전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였다. 상황이 위태롭게 돌아가자 서일,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이청천의 대한독립단,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등 여러 조직으로 분산되어 있던 독립군은 일단 중국 독립군의 근거지였던 헤이룽장성 밀산(密山)에 집결했다.
이들은 독립군 10개 부대를 통합 · 재편성하여 1920년 12월 병력 3천5백 명의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조직했는데, 3개 대대로 편성되어 사실상의 북간도 독립군 통일군단이 되었지만, 무장이 빈약했기 때문에 제3국으로부터의 군사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소련은 약소민족의 독립을 위해서는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대한독립군단 지도자들은 이에 고무되어 1921년 정월 소만 국경선을 넘어 시베리아 땅을 밟았다. 김좌진은 이 때 소련으로 가는 것을 반대했다. 반대 이유는 공산주의자를 믿을 수 없다는 것으로, 어렵더라도 우리 동포가 많이 사는 간도 땅에서 다시 일어서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한독립군단은 다시 동쪽 이동하여 우수리강을 건넜고, 안전지대인 연해주의 이만(Iman, 달네레첸스크)에 집결했다.
시베리아에 들어선 독립군단은 부대를 나누어 1여단을 이만에 두고, 2여단을 영안에 주둔시켰다. 이 때 소련 전역에서는 왕당파라 할 백군과 공산당을 지지하는 적군간의 전투가 계속되었고, 적군은 우리 독립군을 흡수하여 백군과의 전투에 투입할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독립군 역시 그러한 의도를 알고 있었지만, 당시 워낙 추위와 굶주림, 빈약한 무장과 보급으로 인해 공산당의 군사지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독립군은 적군으로부터 대포 15문, 기관총 500정, 소총 3,000정 등의 장비를 지원받게 되었다.
1921년 1월 중순부터 3월 중순에 걸쳐 시베리아와 간도로부터 한인무력이 자유시로 집결해, 간도지역의 한인무력으로 최진동 · 허욱 등의 총군부군대, 안무 · 정일무 등의 국민회군, 홍범도 · 이청천 등의 독립군과 김좌진 · 서일 등의 군정서군대가 있었으며, 노령지역의 의병대로는 이만군대 · 다반군대 · 이항군대 · 자유대대 · 독립단군대 등이 있었다.
총병력수는 1,900여 명이었다. 그런데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무장부대 중 자유대대와 이항군 사이에 한인무력군통수권을 둘러싼 갈등이 일어났다. 이때 자유대대는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이 장악한 대한국민의회를 지지했고, 이항군은 상해파 고려공산당이 장악한 상해임시정부를 지지했으므로 결국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 간의 정면대결이 발생한 것이다. 즉 이항군을 이끌었던 박 일리아는 군통수권장악을 위해 극동공화국 원동부(遠東部) 내의 한인부를 찾아가 이항군대는 자유대대 편입 거부를 통고했다.
이때 극동공화국 한인부에는 상해파의 이동휘계 인물인 박애 · 장도정 등이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이들은 대한국민의회 및 자유대대측과의 협의도 없이 극동공화국 군부와 교섭하여 박창은을 총사령관, 그레고리예프를 참모부장으로 지정하여 자유시로 보내는 동시에 이항군대를 사할린 의용대로 개칭하고 그 관할하에 자유시에 집결한 모든 한인무력을 두도록 했다.
1921년 2월 중순 자유시에 도착한 박창은 일행은 총사령관으로서의 지휘권을 행사하려 하다가 실패하고 총사령관직을 사임했다. 이를 접수한 한인부는 다시 극동공화국 군부와 교섭하여 그레고리예프를 연대장, 박 일리아를 군정위원장으로 지정했다. 두 사람은 즉시 군대관리에 착수하고 자유대대에 편입되었던 종래의 이항군대 · 다반군대를 마사노프로 이주시키고 간도군대에 대해서도 강제 이주시켰다.
그러나 자유대대는 끝까지 불응하다가 장교들이 체포당하고 기관포와 대대문서를 압수당하는 등의 횡포에 못이겨 크라스노야르스크로 이주했고, 이주 즉시 이항군대와 다반군대에 의해 무장해제당하고 지방수비대로 강제 인도되었다.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무력에 대한 군권이 일단 상해파를 지지하는 이항군대의 승리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에 불만을 품은 자유대대의 오하묵 · 최고려 등은 이르쿠츠크에 있던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에 가서 한인무력군의 통수권을 자기들이 가질 수 있도록 교섭했다. 이를 받아들인 동양비서부는 임시고려군정회의를 조직하고 총사령관에 갈란다라시윌린, 부사령관은 오하묵, 군정위원은 김하석 · 채성룡으로 임명했다.
이무렵 이용 · 박 일리아 등은 사할린 의용대가 주둔하는 마사노프에 와서 전한군사위원회(全韓軍事委員會, 이칭: 한인군사위원회)를 조직하고, 이 위원회의 합법성을 주장하면서 한인무력군 통수권을 위해 극동공화국정부와 교섭했으나 실패하게 되면서 실력으로 대항하려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극동공화국 군무총장에게 체포되어 이르쿠츠크로 압송당했다.
한편 1921년 5월 23일 고려군정회의의 갈란다라시윌린 일행이 치타를 출발하여 6월 6일 자유시에 도착해보니 옛 이항군대 · 총군부군대 · 독립단군대 · 다반군대 · 국민군대 · 이만군대 등 1,400여 명이 사할린 의용대라는 이름으로 1개 연대를 편성하고 있었지만, 고려군정의회의 통제권 바깥에 있었다. 같은 해 6월 7일 갈란다라시윌린은 자유시의 전 부대를 소집하여 자기가 고려군정의회의 총사령관임을 선포하고 고려군정의회의 사명을 역설하며, 6월 8일 박 일리아에게 군대를 인솔하고 자유시에 출두하라고 명령했다.
박일리아는 이를 거부했지만, 홍범도 · 안무의 군대는 자유시로 돌아갔고, 이후 사할린 의용대는 점점 고립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박일리아는 고려군정의회에 대한 반항을 조금도 늦추지 않았다. 1921년 6월 27일 오후 11시 사할린 의용대의 연대장 그레고리예프도 갈란다라시윌린에 투항하자, 갈란다라시윌린은 사할린 의용대의 무장해제를 단행하기로 결정했다.
6월 28일 자유시수비대 제29연대에서 파견된 군대가 사할린 의용대에 접근했고, 이후 제29연대 대장은 사할린 의용대 본부에 들어가 복종할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사할린 의용대가 불응하자 공격명령을 내려 무장해제를 단행했다.
자유시사변은 사할린 의용군이 러시아 적군의 포위와 집중총격에 쓰러진 참변이었지만, 근본적으로는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대 상해파 고려공산당 간의 대립투쟁이 불러일으킨 사건이었다. 이 전투 끝에 무장해제를 당한 사할린 의용대는 전사자 · 도망자를 제외한 864명 전원이 포로가 되었다. 교전 당시의 병력은 1,000여 명가량이었다.
1921년 6월 2일 소련적군은 독립군의 무장해제를 요구하였는데, 이는 우리 독립군이 소련 공산당을 위하여 싸워달라는 요구를 거절했기 때문이다. 소련 공산당을 위해 싸우라는 요구에 독립군은 항의하였으나 그들은 이미 독립군을 2증 3증으로 포위하여 무조건 수락을 강요하고 있었다. 이 때 소련군 배후에서 고려공산당(이르크츠크파)이 일을 꾸미고 있었으며, 김좌진은 이 때 이미 소련공산당의 이상한 눈치를 간파하고 극비리에 부하를 거느리고 흑룡강주7을 건너 중국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한편 독립군과 소련정부(당시 치타정부)간의 협상은 결렬되면서 소련군의 공격이 6월 28일에 시작되었고, 이때 독립군은 사망자 2백72명, 강을 건너 중국 땅으로 탈출하다 물에 빠져 죽은 익사자 31명. 행방불명 2백 5명, 포로 97명 도합 6백명이 넘는 희생자를 내고 나머지 인원이 가까스로 소련을 탈출하였다. 자유시사변 뒤 1921년 7월 코민테른 동양비서부는 고려혁명군을 이르쿠츠크로 이동시키고 8월말 1개 여단으로 재편하여 러시아 적군 제5군에 예속시켰다. 고려혁명군은 이르추크에서 사관을 양성할 사관학교(교장 지청천)를 개교하고 군사 훈련에 매진하였다.
자유시사변은 사할린의용군이 러시아 적군의 포위와 집중공격에 쓰러진 참변이었지만, 그 배경에는 한국독립군의 해체를 요구하는 일본군과 러시아 볼셰비키 공산당 간의 협상의 결과가 있다. 차르 정권이 몰락한 혼란을 틈타 시베리아 연해주를 점령하고 있는 일본군을 협상으로 철수시킬 필요가 있었던 볼셰비키 공산당은 일본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고 대한독립군을 볼셰비키로 흡수하여 일본과 마찰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또한 독립군 내부적으로는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대 상하이 고려공산당 간의 정치적 대립투쟁까지 겹쳐진 결과로 일어난 복합적인 배경으로 발생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운동노선을 둘러싼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 대립에서 야기된 이 사건이후 두 공산주의 조직의 분열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악화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청산리대첩 이후 고난의 행군으로 새로운 독립운동 근거지를 찾아 연해주로 들어갔던 만주지역 독립군단은 독립운동사상 가장 어려운 시기를 보내야만 하였다. 그러나 만주지역 독립군단들은 경신참변과 자유시사변 등 두 차례에 걸친 참담한 수난에도 불구하고 만주지역을 중심으로 다시 항일무장투쟁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다. 독립군단들은 남북만주를 연결하는 통신연락의 재개와 독립군단들의 전열정비 등에 박차를 가하였으며, 이는 1920년대 중반 이후 만주지역에서 새로운 독립운동이 전개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