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합작 두문자 : 혁신 국민 독립 혁명 호쌍대 의흥영
1930년대 한중합작 두문자 : 혁신 국민 독립 혁명 호쌍대 의흥영
혁신 : 혁신의회(28)
국민 : 국민부(29)
독립 : 한국독립당(30)
혁명 : 조선혁명당(29)
호 : 호로군
쌍 : 쌍성보
대 : 대전자령
의 : 의용군
흥 : 흥경성
영 : 영릉가 전투
1. 혁신의회(28)
혁신의회는 1928년 만주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이다. 삼부(三府) 통합운동의 과정에서 김동삼(金東三), 김좌진(金佐鎭), 지청천(池靑天)[일명 이청천(李靑天)] 등이 중심이 되고, 일부 좌익계열 단체가 합류한 민족유일당(民族唯一黨)의 성격을 가진다. 재만 한인 보호, 대일 무장투쟁 등을 목표로 하고, 군정부(軍政府) 설립을 추진하였다.
1928년에 접어들면서 민족유일당 운동이 독립운동단체들에게 전해지면서, 독립운동단체들의 통합 문제가 활발히 제기되었다. 만주에서도 민족유일당을 건설하기 위해 1928년 5월의 '전민족유일당조직촉성회(全民族唯一黨組織促成會)'에서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 등 삼부를 비롯한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이 논의되었다. 그러나 조직 방식을 둘러싸고 이해가 상충되면서 1개 단체로의 통합은 실패하고 혁신의회와 국민부가 결성되었다.
혁신의회는 1928년 12월 신민부 군정파(軍政派), 참의부 주류파(主流派), 정의부 탈퇴파(脫退派)가 통합하여 임시기관으로 조직되었다. 신민부의 군정파는 김좌진, 참의부 주류파는 김승학, 정의부 탈퇴파는 김동삼, 지청천 등이 대표하였다. 이들은 각기 소속 단체의 해산을 선언한 뒤, 개인 자격으로 참여하였다. 여기에 좌익 진영의 재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 재만농민동맹, 남화한인청년동맹의 일부가 지지를 표명하였다.
의장에 김동삼, 중앙집행위원장에 김원식, 군사위원장 황학수, 민정위원장 김승학 등을 선임하였다. 재만 한인 보호, 대일 무장투쟁, 자치기관 조직 등의 주요 과업을 선정하여 실행하고자 하였으며, 1년 이내에 군정부를 수립하기로 하였다.
또한, 민족유일당 건설을 위해 '민족유일독립당재만책진회'를 결성하였다. 책진회의 집행위원에는 촉성회 측의 지청천 · 김동삼, 참의부 측의 김희산(金希山) · 김소하(金筱廈), 신민부 측의 김좌진 · 황학수 등이 선임되었다. 하지만 목표한 기한인 1년 이내에 군정부를 설립하지 못하였고, 내부 문제와 일본 관헌의 압박으로 1929년 5월 해산하였다. 이후 한족총연합회, 재만(在滿) 한국독립당으로 이어졌다.
2. 국민부(29)
국민부라 함은 1929년 만주에 설립된 한인 자치 기관이자 항일 독립운동 단체를 말한다. 1927년경 만주에는 3부(三府)가 각기 세력권을 이루면서 한인 사회의 자치와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압록강 연안은 참의부(參議府), 남만주의 길림성(吉林省)과 봉천성(奉天省) 일대는 정의부(正義府), 북만주 중동선(中東線) 일대는 신민부(新民府)의 관할 지역이었다. 그러다 1926년 7월부터 중국 관내에서 전개되기 시작한 민족 유일당 운동에 영향을 받아 만주 3부의 통합도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1928년 5월에 정의부를 비롯하여 18개 단체 대표들이 모여서 재만 민족 유일당 결성 문제를 논의하였지만, 그 건설 방법에 있어 기존 단체를 중심으로 조직하자는 입장과 기존 단체를 모두 해체하고 재조직하자는 입장이 대립하였다.
3부에서는 이를 둘러싸고 각각 내부 갈등에 휘말렸다. 1928년 9월, 정의부 주관으로 3부 통합 회의가 개최되었다. 그러나 통합에 대한 입장 차이가 해결되지 못하면서 회의는 결국 결렬되었다. 이후 민족유일당촉성회를 통해 기존 단체를 해산하고 재조직하자고 주장하던 신민부 군정파, 참의부 주류파, 정의부 탈퇴파가 1928년 12월에 혁신의회를 조직하였다. 그러자 신민부 민정파, 참의부 잔존파, 정의부 다수파는 1929년 1월 민족유일당조직동맹을 결성하였다. 그리고 1929년 3월 새로운 군정부를 조직하기 위한 회의를 개최하였다. 회의 결과 이들은 통합에 합의하고, 1929년 4월 1일 국민부를 출범시켰다.
국민부는 1929년 5월 28일 중앙집행위원회를 구성하고, 중앙집행위원장에 현익철(玄益哲), 민사위원장에 김이대(金履大), 외교위원장에 최동오(崔東旿), 교육위원장에 고이허(高而虛), 군사위원장 겸 사령관에 이웅(李雄), 1중대장에 양세봉(梁世奉) 등을 선출하였다. 그리고 6월에는 본부를 길림에서 요녕성(遼寧省) 신빈현(新賓縣)으로 이전하였다. 이는 길림성 내 일본의 영향력이 강화되어 활동이 어려워졌기 때문이었다. 1929년 9월 20일에는 제1회 중앙의회를 개최하고, 이당치국(以黨治國)의 원칙에 따라 혁명 사업은 민족 유일당 조직에 위임하고 국민부는 남만주 지역의 한인 사회를 담당하는 자치 기관의 기능만을 담당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1929년 12월 조선 혁명당을 결성하였고 군사 조직으로 조선 혁명군을 창설하였다.
성립 초기 국민부는 흥경(興京), 환인(桓仁), 유하(柳河), 통화(通化), 집안(輯安), 관전(寬甸), 본계(本溪), 해룡(海龍), 무순(無順), 봉성(鳳城) 등에 지방집행위원회를 세우고 대의원을 선출했다. 지방집행위원회 아래에 위원장과 백가장(百家長), 십가장(什家長)을 두고 호구 조사와 각종 의무금의 징수를 맡겼다. 이렇게 징수된 의무금은 경무감과 조선 혁명군 중대장 등이 협의하여 조선 혁명군 유지비로 사용되었다.
1932년 만주국이 수립된 이후 일제가 독립운동 세력을 대대적으로 탄압하고, 재만 한인 사회에 대한 단속을 강화하면서 한인 자치 기관으로서의 국민부는 사실상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참모장 김학규(金學奎)를 관내에 파견하여 중국 국민정부에 지원을 요청해 보았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특히 1934년 9월 조선 혁명군 총사령관이었던 양세봉이 일제에 의해 피살되면서 큰 타격을 입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치 기관인 국민부와 영도 기관으로서 조선 혁명당, 군사 조직으로서 조선 혁명군의 역량을 결집시킬 필요가 대두되었다. 결국 1934년 11월에 열린 군민 대표 대회에서는 국민부와 조선 혁명군을 통합하여 조선 혁명군 정부(朝鮮革命軍政府)를 결성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해서 국민부는 조선 혁명군 정부로 해소되었다.
3. 한국독립당(30)
한국독립당이라 함은 1930년 1월 25일 중국 상해(上海)에서 민족주의 계열의 인사들이 창립한 독립운동단체이자 광복 이후 건국운동에 참여하고 제1공화국 때 몰락하였다가 1962년에 재건된 보수정당을 말한다.
약칭 한독당이라고도 한다. 1930년 당의 결성식에 조완구(趙琬九)·윤기섭(尹琦燮)·김구(金九)·엄항섭(嚴恒燮)·김홍숙(金弘叔)·이시영(李始榮)·옥성빈(玉成彬)·김철(金澈)·안공근(安恭根)·한진교(韓鎭敎)·김갑(金甲)·김두봉(金枓奉)·선우 혁(鮮于赫)·송병조(宋秉祚)·조상섭(趙尙燮)·이유필(李裕弼)·차이석(車利錫)·김붕준(金朋濬)·백기준(白基俊)·박창세(朴昌世)·최석순(崔錫淳)·장덕로(張德櫓)·이탁(李鐸)·강창제(姜昌濟)·박찬익(朴翊翊) 등 26명이 참석하여 독립투쟁전선 통일과 지방파벌 청산을 목표로 내세웠다.
당의 조직으로는 이사장에 이동녕(李東寧), 당무이사에 김구·조소앙(趙素昻)이 선출되었으며, 이동녕·안창호(安昌浩)·이유필·김두봉·안공근·조완구가 당의와 당강을 기초하였다. 이 때 조소앙의 삼균주의(三均主義)를 당의 및 당강으로 채택함에 따라 이 당은 주의와 정강을 갖춘 정당으로서 반일적 민족운동과 무력적 파괴운동을 투쟁방식으로 하는 혁명적 정당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 당은 직할단체로서 상해한인청년당·상해한인애국부인회·상해한인여자청년동맹·상해한인소년동맹을 두고 있었고, 지방조직으로 항저우[杭州]·상해·난징[南京]에 지부를 설치하였다.
초기 활동은 알려져 있지 않으나, 김구의 한인애국단을 중심으로 대일투쟁을 적극 전개한 점은 주목된다. 그러나 1932년 4월 윤봉길(尹奉吉)의 훙커우공원[虹口公園] 의거(義擧)로 안창호가 체포되어 한국으로 압송된 뒤, 당의 지도력은 무너지고 분열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그 해 6월 항주이사회에서의 당내 결속 도모를 위한 최종 모색이 시도되었으나 실패로 끝나고, 독립운동 진영은 항주파[조소앙·김철], 가흥파[嘉興派, 김구], 상해파[이유필]로 나누어졌고, 결국 당은 조소앙·송병조·차이석 등 10여 명이 중심이 되어 이끌어 나갔다.
이러한 여건에서도 난징·광둥(廣東) 지부와 베이핑[北平]·항저우의 당원들은 꾸준히 활동하였다. 상해사변과 만주사변으로 일본의 중국본토침입이 본격화되자, 조소앙은 당을 이끌고 그 해 10월 25일 난징에서 조선혁명당·조선의열단·한국혁명당·광복동지회 등과 연합하여 좌파 인사들이 발기한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에 참가하였다. 그리고 1933년에는 뤄양[洛陽] 분교를 설치하여 훈련된 청년간부 100여 명을 한국혁명군 건립을 위한 기간으로 배출시켰다.
한편,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에서는 처음에는 선전공작에 주력하였으나, 1933년 대동단결을 위한 단일당조직을 도모하게 되자 한국독립당은 신당 참가문제와 임시정부 존립문제로 찬·반 양파가 대립하였다. 그러나 5월 27일 개최된 당대회에서 신당참가 찬성파가 승리함에 따라 반대파인 송병조·차이석·조완구 등을 제외하고는 조소앙 및 대부분의 당원이 한국민족혁명당에 합병할 것에 동의하였다. 그러나 한국민족혁명당에 병합된 뒤 김원봉(金元鳳)[일명 김약산(金若山)]의 의열단이 중심이 된 좌파 인사들의 전횡이 극에 달하고, 공산주의운동을 주목표로 활동함에 따라 의열단계에 반감을 품은 조소앙은 문일민(文逸民)·박창세(朴昌世) 등을 이끌고 그 해 9월민족혁명당에서 탈당하여, 그 달 25일 한국독립당을 재건하였다.
재건 당시 당원수가 10여 명에 불과하였고, 경제적으로도 곤궁한 처지였기 때문에 사실상 김구의 한국국민당에서 지원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도이념상 뚜렷한 정의와 정책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1937년 7월부터 1939년 9월까지의 민족단일대당결성운동이 실패한 뒤 민족진영만의 3당통합[김구의 한국국민당, 조소앙의 한국독립당, 지청천의 조선혁명당]이 추진됨에 따라 1940년 5월 8일 3당 해체선언을 계기로 민족진영의 대표당으로서 김구를 중앙집행위원장으로 하는 한국독립당의 창립을 이룩할 수 있었다.
이 새로운 한국독립당은 명의상 한국독립운동의 주류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도 계속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집권당 구실을 담당하였다.
중일전쟁 이후 상해·난징의 함락으로 임시정부와 함께 충칭[重慶]으로 이동하였다가, 1945년 11월 23일 임시정부 당원들과 함께 환국한 한국독립당은 김구를 중심으로 국내에서의 기반을 확충 강화하여 이듬해 1월 전국적인 반탁운동에 앞장서는 한편, 그 해 2월 1일 임시정부 명의로 비상국민회의를 소집하고 과도정권 수립을 위한 준비에 착수하였다.
이를 계기로 대중적 기반을 확대 강화하려는 노력을 전개하였으며, 그 일환으로 1946년 3월한국민주당·조선국민당·신한민족당과의 합당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한국민주당과의 연합에는 실패하고, 4월 18일 한국독립당·조선국민당·신한민족당의 3당 합동이 이루어져 한국독립당으로 합당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당내 조직 및 인사개편이 단행되었지만 주도권은 구한국독립당 계열의 임시정부 요인들이 계속 장악하였다. 이러한 여건은 후일 국민당계와 신한민족당계의 반발을 사게 되었고, 김규식(金奎植)을 비롯한 몇몇 요인들이 당을 이탈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당의 정치노선은 반탁·좌우합작·남북협상통일정부수립·단일정부반대 등으로 민족적 견지에서는 당연한 노선이었다. 그러나 당시 반탁운동에 있어서는 이승만(李承晩)과 공동전선을 형성하였으나, 단독정부수립에는 반대하였기 때문에 자연히 당세가 쇠퇴하게 되었다.
4. 조선혁명당(29)
조선혁명당이라 함은 1930년대 만주에서 활약한 대표적인 독립운동단체를 말한다. 1929년 9월 “일본 제국주의를 박멸하여 한국의 절대 독립을 이룬다.” 는 강령하에 국민부(國民府)의 정당적 성격을 갖춘 자매기관으로 길림성(吉林省)에서 결성되었다. 1927∼1929년 사이에 유일당촉성론(唯一黨促成論)이 논의되어 대집회를 개최하였으나 실패, 만주 일부만의 조직체를 결성한 것이다.
출범 당시에는 현익철(玄益哲, 중앙책임비서)·현정경(玄正卿, 정치)·이웅(李雄, 군사)·고이허(高而虛, 조직)·최동오(崔東旿, 외교)·장승언(張承彦, 재무)·김보안(金輔安, 교육)·고할신[高轄信, 일명: 고활신(高豁信), 선전] 등이 간부로 활약하였다. 성당부(省黨部)·현당부(縣黨部) 등 100여 지부당에 정원 3,500명, 준당원 2,000명을 두고 있었다.
한편, 조선혁명당은 그 산하에 조선혁명군을 두었다. 조선혁명군은 당의 이념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하여 1929년 12월 20일 기존 조직을 크게 개편하였다. 이 개편을 통해 조선혁명군은 총사령에 이진탁(李辰卓), 부사령에 양세봉(梁世奉), 참모장에 이웅을 임명하고 기존 10개 대(隊)를 7개 대로 편성하였다. 1931년 9월의 만주사변 이후 만주를 벗어나 국내로 남하, 1932년 11월에는 대일전선통일동맹(對日戰線統一同盟) 결성에 가담하였다.
그 뒤 1935년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에 합병되었다가 이탈, 1937년 4월난징[南京]에서 재건되었다. 이때 중앙위원은 지청천(池靑天)·최동오·유동열(柳東說)·이광제(李光濟)·박창세(朴昌世)·양기탁(梁起鐸)·현익철·김학규(金學奎)·이운환(李雲煥)·강창제(姜昌濟) 등이었다. 그 해 8월김구(金九)의 한국국민당(韓國國民黨)이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구성할 때 이 연합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이 당은 비록 ‘연아용공(聯俄容共)’을 주장하고 한국국민당과 함께 단일 정당을 추구하였으나 시종 전통 있는 이론을 수립하지는 못하였다.
특히 당내에 청년이 극히 소수이고 대부분 중년 간부로 구성되어 있어 적극적인 활동을 보이지 못했다. 또한 조선민족혁명당에서 이탈한 뒤에는 재정이 궁핍하여 한국국민당으로부터 매월 수백 원씩 받아 유지한 점으로 미루어, 경제적으로는 이미 한국국민당에 부속된 상태였다.
5. 호로군 : 쌍성보 대전자 사도하자 동경성 전투
쌍성보 전투라 함은 1932년 9월 20일과 11월 17일에서 22일까지 두 차례에 걸쳐 한국독립군과 중국 측 항일의용군(호로군)인 길림자위군(吉林自衛軍)이 연합해 하얼빈[哈爾濱] 서남방의 쌍성보에서 일본군과 만주국군을 상대로 벌인 전투.
1차 전투에서는 대승했으나, 2차 전투에서는 패전하였다. 만주사변 직후인 1931년 11월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의 산하 한국독립군은 난관을 겪으면 서도 북만주 일대의 동포들을 기반으로 중국 측 항일의용군과 함께 각지에서 일본군 및 만주국군과 투쟁하였다. 쌍성보는 장춘(長春)∼하얼빈 간 철도 사이에 있는 도시로서 만주 물산이 집결되는 요충지였고, 친일부호와 고관들이 많이 살고 있는 일제침략의 거점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이 곳에는 독립군과 중국 측 항일의용군, 반만의용군을 탄압하려는 목적으로 설치된 만주국군 차오페이단(剿匪團)의 주력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이에 한국독립군과 중국 측 항일의용군은 이 곳에서 일본군과 만주국군을 상대로 격전을 벌이게 되었다.
쌍성보전투 당시 한국독립군은 총사령 지청천(池靑天)과 부사령 김창환(金昌煥), 참모장 신숙(申肅), 그리고 조경한(趙擎韓)·최악(崔岳)·안종명(安鍾鳴)·심만호(沈萬湖)·차철(車澈) 등이 거느리는 각 지대가 합류해 500명 내외의 병력이었다. 중국 측 항일의용군 부대는 가오펑린[考鳳林] 등이 거느리는 수천명의 길림자위군 제1·제2·제3군과 훙창대[紅槍隊]·헤이창대[黑槍隊] 등의 종교세력 항일의용군도 참가해 2만∼3만명에 달하였다.
1차 쌍성보전투는 1932년 9월 20일 밤 8시부터 약 2시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당시 쌍성보에는 약 3,000여 명의 만주국군과 소수의 일본군이 주둔해 있었다. 이 전투에서 한국독립군은 가오펑린이 거느린 길림자위군과 함께 쌍성보성의 서문측 공격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길림자위군 제1·제2군은 성의 동·남문을 공격하고, 훙창대·헤이창대 등의 부대는 북문 밖에 매복해 퇴각하는 일·만군을 기습하기로 작전계획을 세웠다.
이 전투에서 세 방면을 포위한 한중연합군은 치열한 공방전 끝에 쌍성보성을 점령하고 많은 군수물자를 노획하고 약 2,000여 명의 만주국군을 생포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한국독립군은 서문 돌파의 주역으로 크게 활약하였다. 쌍성보를 점령한 연합군은 일·만군의 역습에 대비해 소수의 중국 측 항일의용군을 주둔시키고 부근의 우가둔(牛家屯)으로 철수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에 일·만군 연합의 대부대가 반격해와 쌍성보는 다시 적의 수중에 들어갔다.
2차 쌍성보전투는 11월 17일부터 22일까지 5일간이나 계속되었다. 한국독립군과 가오펑린이 거느린 길림자위군는 17일 밤쌍성보를 공격해 점령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때 성안에 있던 일본군 1개 중대가 거의 전멸하였고 만주국군 일부는 투항하였다. 쌍성보가 한중연합군에 점령된 뒤 하얼빈에 주둔하고 있던 일·만군은 쌍성보를 다시 탈환하기 위해 그 달 20일 폭격기까지 동원해 대규모 병력으로 반격해 왔다. 연합군은 완강히 저항했으나, 일·만군의 우세한 군사력에 밀려 쌍성보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그 뒤 한중연합군은 4일간이나 계속해서 추격을 당하였다.
이 전투 직후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던 길림자위군은 겨울을 견디기 어렵다는 이유를 내세워 투항하려 하였다. 이 때 한국독립군도 많은 손실을 입었으나, 동요하기 시작한 길림자위군과 결별하고 독자적 항전을 계속하였다. 한국독립군은 2차 쌍성보전투 후반에 비록 고전했지만, 중국 호로군과 협동작전을 전개해 1차 쌍성보 전투에서 대승하는 등 일제에 상당한 타격을 가하였다. 이 전투는 이후 한중 양민족의 공동전선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다.
한편, 대전자령 전투는 1933년 지청천(池靑天)이 지휘하는 한국 독립군이 중국 호로군과 연합 작전을 전개하여 대전자령을 지나는 일본군을 격파한 전투를 말한다.
1930년 홍진(洪震)·지청천·신숙(申肅) 등은 한족자치연합회를 모체로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소속 독립군으로 ‘한국독립군’을 편성하여 일본군에 대한 항전을 전개하였다. 1931년 한국독립군 총사령관 지청천은 중국군과 연합 작전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중국호로군 사령관(中國護路軍司令官)과 협의하여 한중연합군을 편성하였다. 이후 중국 의용군이 분화함에 따라 길림구국군과 연합하여 중한연군토일군(中韓聯軍討日軍)을 조직하기도 했다. 1932년 독립군과 중국 의용군은 연합하여 쌍성보(雙城堡)·사도하자(四道河子)·동경성(東京城) 등지에서 전개된 전투에서 대승을 거뒀다.
동경성전투 이후 한국독립군과 길림구국군 시세영(柴世榮) 부대는 1933년 6월 25일경 동서검자에 이르렀다. 여기서 연합군은 대전자에 주둔 중인 일본 19사단 소속 간도파견군이 연지시엔[延吉縣]으로 철수한다는 첩보를 입수한다. 연합군은 3일간 100㎞를 행군하여 28일경 대전자 북방 노모저하(老毋猪河)에 도착하였다.
연합군은 부대를 3분하여 각 요지에 배치하였는데, 공격의 주동은 한국독립군이 담당하게 되었다. 연합군은 이곳에서 추위와 굶주림을 무릅쓰며 30일까지 매복하였다. 30일 아침 6시경 일본군은 많은 장비를 가지고 대전자령을 향해 출발했다. 오후 1시경 일본군 전초부대가 대전자령 깊숙이 들어왔다.
일본군 후미가 산중턱에 이르렀을 무렵, 연합군은 일제히 사격을 퍼부었다. 불의의 기습을 받은 일본군은 대부분 총탄에 쓰러졌으며, 4시간의 격전 끝에 연합군은 일본군의 군복 3,000벌, 군수품 200여 마차, 대포 3문, 박격포 10문, 소총 1,500정, 담요 300장 등 막대한 전리품을 노획하였다. 그런데 전리품을 독립군과 중국군이 분배하는 과정에서 불화가 생겨, 연합은 곧 깨지고 말았다.
6. 의용군 흥경성 영릉가 전투
1932년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은 중국의 반만항일군(反滿抗日軍)인 요령민중자위군(遼寧民衆自衛軍)과 연합하여 일본군과 항전하기로 하고 한중연합군을 편성, 이듬해 5월 8일영릉가(永陵街)에서 일본군을 대파하였다. 패전한 일본군은 같은 해 6월 15일 양대령(楊臺嶺)을 넘어 흥경(興京)·청원(淸原) 지방으로 공격하여 왔는데, 이 정보를 사전에 입수한 조선혁명군은 총사령관 양세봉(梁世奉)의 지휘하에 1,000명의 병력으로 청원지방을 수비하고, 중국군은 1만 명의 병력으로 흥경성을 사수하도록 작전계획을 세웠다.
조선혁명군은 기습공격으로 비행기까지 동원한 일본군을 저지하였으나 중국군이 패전함으로써 남산성(南山城)으로 퇴각하게 되었으며, 이 전투에서 30여 명의 희생자를 내었다.
1931년 일본군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석권하고 우리 독립군기지를 공격하자 국민부의 양세봉(梁世奉) 지휘하의 조선혁명군은 중국의용군과 연합하여 항일전투를 전개하였다. 1932년 3월 총사령 양세봉은 참모장 김학규(金學奎)와 중대장 조화선(趙化善)ㆍ최운구(崔雲龜)ㆍ정봉길(鄭鳳吉)의 3개 중대를 인솔하고 중국의용군왕동헌(王彤軒)ㆍ양석복(梁錫福) 등과 합세하여 신빈(新賓) 남방의 두령지(陡嶺地)에 도착하여 숙영하고 있었다.
이 때 신빈현성(新賓縣省)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이 이 정보를 탐지하고 총출동하여 한중연합군을 공격하였다. 1시간의 전투 끝에 연합군은 일본군의 공격을 격퇴하고 추격전을 전개하였다. 추격하기를 30리, 연합군은 일본군 점령하에 있는 영릉가성을 공격하여 치열한 전투 끝에 일본군을 격퇴하고 이 성을 탈환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전투에서 패전한 일본군이 흥경성(興京城)을 거점으로 복수전을 기도하고 있다는 정보를 들은 조선혁명군은 즉시 흥경성 공격작전을 감행하여 흥경성도 탈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