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두문자

의열단 의거 두문자 : 박부최익 총상나동

noksan2023 2025. 1. 20. 0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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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 의건 두문자 : 박부최익 총상나동

 

 

광복 이후 촬영된 의열단 단원 모습

 

 

 

박 : 재혁

부 : 산경찰서

최 : 수봉

밀 : 양경찰서

익 : 김

총 : 조선독부

상 : 김

종 : 로경찰서

나 : 석주

동 : 양척식주식회사

 

 

1. 재혁 산경찰서 폭탄 투척

 

 

박재혁_부산경찰서 폭파

 

 

 

박재혁의 부산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이라 함은 1920년 9월 14일 의열단원(義烈團員) 박재혁(朴載赫)이 부산경찰서에 들어가 서장에게 폭탄을 던진 의거를 말한다. 

 

의열단에서는 1920년 초 일명 ‘진영사건(進永事件)’ 등으로 인하여 많은 동지들이 계속 부산경찰서에 붙잡히자 이에 대한 보복을 하기 위하여 이를 계획하였다. 의열단장 김원봉(金元鳳)은 무역상인으로서 싱가포르에 와 있던 단원 박재혁을 상해(上海)로 소환하여 부산경찰서장을 죽일 것을 지시하였다.

 

박재혁은 1920년 9월 초상해를 떠나 나가사키(長崎)로 향하였다. 그는 상해를 떠나기 전 부산경찰서장이 고서수집가라는 사실을 탐지, 많은 중국고서를 사들여서 고서상으로 위장하였으며, 그 고서더미 속에 폭탄과 전단(傳單)을 감추었다. 그는 나가사키에서 대마도(對馬島)를 거쳐 9월 13일 고향인 부산에 도착하여 자기집에서 하룻밤을 지낸 뒤, 이튿날 아침 부산경찰서를 찾아가 서장에게 면회를 요청하였다.

 

고서에 관심이 많은 서장은 쾌히 면회를 승낙하였다. 박재혁은 서장과 단독으로 탁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대좌하여 고서를 보여주는척하다가 폭탄과 전단을 꺼내어 전단을 서장 앞에 뿌리고,

 

“나는 상해에서 온 의열단원이다.”

 

라 하고, 계속하여 서장의 죄를 일일이 열거한 다음, 폭탄을 서장 앞에 던졌다. 폭탄이 터지자 두 사람은 모두 중상을 입고 쓰러졌다. 박재혁은 그 뒤 단식과 함구로 9일을 버티다 순국하였고, 서장도 중상을 입어 죽었다.

 

 

2. 수봉 양경찰서 폭탄 투척

 

 

최수봉 밀양경찰서

 

 

 

최수봉 일제강점기 밀양경찰서폭탄투척의거와 관련된 의열단 소속의 독립운동가를 말한다. 일명 경학(敬鶴). 경상남도 밀양 출신. 밀양의 사립 동화학교(同和學校)에 들어갔으나 일제의 강압으로 폐교되자, 1912년 동래 범어사 안에 있는 명정학원(明正學院)을 졸업하고 1913년 평양 숭실학교(崇實學校)에서 수업하다가 중퇴하였다.

 

1916년 평안북도 창성군에 있는 사금광에 가서 날품팔이 노동을 하다가 1919년 고향으로 돌아와 윤세주(尹世胄)·윤치형(尹致衡)과 더불어 3월 13일 밀양 장날에 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이 만세시위로 수배를 받게 되자 윤세주·윤치형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여 봉천(奉天)과 안동(安東) 사이를 다니다가 길림(吉林)으로 가서 의열단(義烈團)에 가입, 동료들로부터 폭탄제조법을 배우고 밀양으로 돌아왔다.

 

1920년 임태호(林泰昊)의 격려와 그해 9월 박재혁(朴載赫)의 부산경찰서투탄사건 소식을 듣고 거사를 도모하기로 결심하였다. 그해 12월 밀양경찰서장이 경찰서 직원 19명을 사무실에 모아놓고 훈시하고 있을 때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되고 말았다. 이에 일본경찰이 추격하자 경찰서 근처의 황씨 집에 들어가서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실패, 경찰에 붙잡혔다. 부산지방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검사가 불복, 대구복심법원에 상소되어 1921년 4월 사형을 선고받았다. 다시 경기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기각당하고, 7월 대구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되었다.

 

 

3. 김상 조선 독부

 

 

김익상 조선총독부 폭탄투척

 

 

 

김익상은 일제강점기 총독부폭파, 다나카암살사건 등과 관련된 독립운동가를 말한다. 경기도 고양 출신. 평양 숭실학교를 졸업한 뒤 기독교학교의 교사로 근무하다가 서울로 올라와 광성연초공사(廣城煙草公司)의 기계 감독으로 근무하였다. 

 

1920년 만주 봉천(奉天)으로 전근된 것을 기회로 비행사가 되기 위해 비행 학교가 있는 중국 광둥[廣東]으로 갔다. 그러나 중국 내전으로 인해 학교가 폐교되었으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상해로 돌아왔다. 상해에서 전차 회사의 전차 감독이 되어 잠시 일을 보다가 항일 운동에 몸바칠 것을 결심하고 북경으로 가서 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義烈團)에 입단하였다.

 

1921년 단장 김원봉(金元鳳)으로부터 총독 암살 밀령을 받고 국내로 들어와 전기 수리공으로 변장하고 9월 12일 총독부에 잠입하여 2층 비서과(총독실로 오인)와 회계과장실에 폭탄을 던졌다. 비서과에 던진 폭탄은 불발이었으나 회계과장실에 던진 폭탄은 폭발하였다. 총독부가 폭발로 인해 혼란 상태에 빠진 틈을 이용하여 현장을 빠져 나와 평양을 거쳐 중국으로 무사히 탈출하였다.

 

1922년 일본의 전 육군대신이며 육군 대장인 다나카[田中義一]가 필리핀을 거쳐 상해에 도착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의열단으로부터 다나카 암살이라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이를 위해 동지 오성륜(吳成崙, 본명 李正龍)과 같이 치밀한 계획을 세워 1차 저격은 오성륜이 담당하고, 만약 실패할 경우를 대비하여 2차 저격을 담당하기로 하였다.

 

거사 당일인 3월 28일 선편으로 황푸탄[黃浦灘]에 도착한 다나카가 배에서 내려오자, 준비하고 있던 오성륜이 다나카를 향하여 권총을 발사하였으나, 발사 순간 신혼여행차 상해에 오던 영국 여인이 다나카의 앞을 막아섬으로써, 총탄은 영국 여인에게 명중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이 때 계획에 따라 달아나는 다나카를 향하여 폭탄을 투척하였으나, 폭탄마저 불발하여 거사가 실패로 돌아갔다. 그리고 재빨리 현장을 탈출하려고 할 때 중국 경찰이 추격해 오자 공포를 쏘며 주장로[九江路]를 지나 쓰촨로[四川路]로 달아났으나, 즉사한 영국 여인의 남편이 쏜 권총에 맞고 쓰러져 붙잡히고 말았다. 4월 1일 상해 일본 총영사관에서 예심을 마치고 5월 3일 일본 나가사키[長崎]로 압송되어 9월 25일 나가사키지방재판소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았으나, 검사의 공소로 공소원(控訴院)에서 사형이 언도되었다.

 

그 뒤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다시 20년형으로 감형되었다가 1936년 8월 2일 가고시마형무소에서 출옥하였다. 귀국후 조카 김기복(金基福)의 이태원 집에 머물렀으나 일본 형사에게 연행된 뒤 소식이 끊겨 생사를 알 수 없었다. 그의 최후에 대한 이강훈 독립지사의 회고에 의하면 용산경찰서 연행 중 한강에 투신해 생을 마감하였다고 한다.

 

 

4. 김상옥 종로경찰서 폭탄투척

 

 

김상옥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김상옥은 종로경찰서 투탄 의거 등 의열 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대한광복회 가입과 3 · 1운동에 참여한 후에는 혁신단을 조직하여 혁신공보를 발행하고 암살단을 조직하여 미국 의원단이 국내에 들어올 때 의열 투쟁을 벌일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하였다. 이후 의열단에 가입하여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졌다.

 

김상옥(金相玉, 1889~1923)은 한성부(지금의 서울특별시) 출신으로, 본관은 김해(金海), 별명은 김영진(金永鎭), 아호는 한지(韓志)이다. 집안이 어려워 어려서부터 노동을 하며 살았다. 14세에 대장간에서 일하면서 한문을 배우고 연동교회를 다녔다. 2년 후에는 동대문교회 부설 신군학교 안에 설치된 야학에서 공부하였다. 18세 때인 1907년 9월경 동흥학교 내에 동흥야학을 설립하고 그곳에서 자신도 공부하였다.

 

1910년 21세 때 미국으로 유학을 가려고 황성기독교청년회관 부설 야간 영어반에 등록하였다. 이듬해부터는 종로 기독교청년회관(YMCA) 체육교사 이필주의 지도 아래 청년부장으로 활동하였다. 1911년에는 동대문교회 근처에서 기독교서점을 운영하였으나 경영난으로 1년 만에 폐업하였다.

 

1912년에는 삼남 지방을 돌며 기독교 서적을 보급하면서 약을 파는 행상을 하였다. 이 무렵 훗날 동지로 함께 활동하게 되는 한훈을 만났고, 철물점을 개업할 자금을 마련하였다. 그해 가을에 동대문 밖 창신동에 형 김춘옥, 동생 김춘원과 함께 영덕철물점을 열었다.

 

1913년 24세 때 경상북도 풍기(지금의 경상북도 영주시)에서 풍기광복단이 결성되자 채기중, 한훈과 함께 참여하였다. 1916년 5월 한훈, 유장열 등과 전라남도 보성군 조성면의 조성헌병대 기습 작전에 참여하여 헌병 2명을 죽이고 무기를 탈취하였다.

 

1917년 28세 때 영덕철물점에서 말총 모자를 제조 · 판매하여 인기를 끌었으며, 양말과 장갑 등도 제조 · 판매하였다. 이 시기 직공이 50여 명이나 될 정도로 번창하였는데, 공인조합을 만들어 직공들을 보호하였고 동업자들의 결속을 위한 동업조합도 조직하였다. 또한, 사회 계몽과 인재 양성 사업을 위한 백영사(白英社)를 조직하였다.

 

1919년 3월 1일 오후 철시(撤市)주1하고 직원들과 함께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으며, 상인들의 만세 시위 참여도 독려하였다. 그날 오후 동대문 근처에서 경찰에게 쫓기는 여학생을 구하고 일본도를 빼앗았다. 1919년 4월 1일 중앙학교 학생인 박노영, 윤익중, 정설교, 불교학원 학생인 신화수 등과 동대문교회 내 영국인 피어슨 여사 집에 모여 혁신단을 조직하고 기관지인 『혁신공보(革新公報)』를 발행하였다. 4월 17일 제1호를 시작으로 5월 11일까지 주 6회, 그 후부터는 주 1회 발행하였으며 6개월 동안 지속하였다. 그해 8월에 『혁신공보』 발행과 관련해 체포되어 기소되었으나 증거 부족으로 석방되었다. 하지만 결국 그해 10월에 발각되고 자금난까지 겹치는 바람에 『혁신공보』를 발행할 수 없게 되었다.

 

1920년 1월 하순 혁신단은 『혁신공보』 발간 대신에 조선총독부의 고관과 친일파들을 처단하는 의열 투쟁의 전개를 결의하였다. 이 무렵 김좌진의 길림군정서 요원으로 국내에 파견한 김동순에게 군자금을 지원하였다.

3월에는 상하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협의 하에 무기를 가지고 입국한 광복단 충청지구 결사대장 한훈을 만나 무기와 폭탄을 확보하고, 함께 암살단을 발족하였다. 이후 세 달간 암살단원들은 북한산 등지에서 특공 훈련에 들어갔다. 암살단원들은 8월 24일 미국 의원단 42명이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와 일본을 방문한다는 사실을 알고, 조선총독을 비롯한 고관들을 처단하고 총독부를 폭파하며 일대 시가전을 벌일 계획을 세웠다.

윤익중과 김상옥은 각자의 집을 저당(抵當)하여 각각 1천 원과 2천 원의 운동자금을 만들었고, 박영효 등 사회 저명 신사들과 박승직 같은 동대문 지역 상인들의 협조를 받아 무기와 트럭 3대를 확보하였다.

 

암살단의 계획은 먼저 미국 의원단 환영 인파 속에서 태극기와 미국 국기를 흔들며 만세 시위를 선도하고 ‘암살단 취지서’와 ‘철시경고문’을 배포하는 것이었다. 또한, 트럭 1대에는 폭탄과 폭약을 실어 조선총독 이하 고관들을 처단하고, 다른 2대에는 사격대를 태워 출동 병력과 전투를 벌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8월 24일 당일 오전 경찰이 자신의 집에 들이닥치자 2층 창문을 통해 피신하였다. 경찰은 2층 방을 수색하여 ‘암살단 취지서’, ‘암살단 명부’ 등의 문건을 발견하였다. 때마침 이곳에 총과 탄환을 전달하러 온 한훈이 포박당하였다. 결국 몇 개월간 준비해 왔던 모의가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로부터 3개월간 서울 시내 각처를 돌며 은신하였는데, 그동안 단원들이 차례로 붙잡혔지만 다행히 국외 탈출에 성공하여 만주 선양으로 피신하였다. 궐석재판(闕席裁判)주2에서 사형 언도를 받았다.

 

1920년 11월 의열단원과 함께 국내로 들어와 최경학의 밀양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을 지원하였다. 이듬해 1921년 1월 김원봉 의열단에 참여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갔다. 같은 해 7월에 국내에 들어와 서울, 충청, 전라 등지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독립자금을 모금하였고, 자신의 활동을 돕다가 체포되어 고문을 받고 병중에 있던 장규동을 대동하여 상하이로 탈출하였다. 이듬해인 1922년 4월 상하이에서 한당(韓黨) 혁명사령부장에 임명되었다.

 

1922년 12월 다시 경성에 돌아와 암살단 동지를 재규합하고, 조선총독을 비롯한 총독부 고관과 친일파 처단, 총독부 폭파 및 시가전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1923년 1월 12일 밤 8시 10분 종로 2정목의 경찰서 서쪽 창문을 향해 던진 폭탄이 폭발하면서 폭음이 종로거리를 뒤흔들었다. 파편이 사방으로 튀어 근처를 지나던 매일신보(每日申報)주3 사원 5명과 기생 1명, 어린이 1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스스로 폭탄의 성능을 알아보기 위해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폭파하고는 삼판통 고봉근 집에 몸을 숨겼다. 종로경찰서에 수사본부가 설치되고 별동수사대까지 꾸려진 가운데 서울 전역에 비상경계령이 내려졌으며, 거리의 행인들은 곳곳에서 몸수색을 당하였다. 결국 경찰 정보망에 은신처가 탐지되었다.

 

1923년 1월 17일 새벽 4시 종로경찰서 형사부장 다무라〔田村〕를 중심으로 경찰 21명이 체포에 동원되었다. 17명은 집 주변을 포위 · 매복하고, 다무라를 비롯한 4명은 담을 넘어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이들 체포조 4명과 대치하며 총격을 가해 다무라를 처단하고, 재빨리 포위망을 벗어나 남산으로 탈출하였다. 군인과 경찰 500여 명이 남산을 포위하고 추적하였으나 찾지 못하였다.

 

남산을 가로질러 왕십리 안장사(安藏寺)에서 승복을 빌려 변장하였다. 수유리 이모 댁으로 가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경성 시내 효제동 73번지 이태성의 집으로 숨어들었다. 이 집은 어릴 적 살던 집의 옆집으로 잘 알 뿐만 아니라 장녀 이혜수와 자매들이 협력을 아끼지 않던 곳이었다. 이 집에 숨어 은밀하게 동지들과 접촉하였다. 그러던 중 1월 21일 동지 전우진이 경찰에 체포되면서 은신처가 발각되었다. 경찰은 1월 22일 새벽 군경 1,000여 명을 동원하여 이태성 집을 4중으로 포위하였다. 김상옥은 양손에 권총을 쥐고 집들의 담을 넘나들면서 세 시간 동안을 혼자서 지붕 위와 담벼락 등에서 공격해 오는 경찰에 대항해 총격전을 벌여 16명을 사상케 하였다. 탄환이 떨어지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5. 석주 양척식주식회사

 

 

나석주

 

 

 

나석주 조선식산은행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지며 의열 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국내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의열 투쟁을 벌이다가 상하이로 망명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 경무국 경호원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의열단과 한국노병회에 가입하여 활약하다가, 김창숙이 제공한 자금을 기반으로 경성(지금의 서울특별시)에 들어와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투척하였다.

 

나석주(羅錫疇, 1892~1926)는 황해도 재령군 출신으로 본관은 나주(羅州), 이명은 나리(羅李) · 김영일(金永一) · 나석주(羅石柱) · 마중덕(馬中德) · 마중달(馬中達) 등이다. 어려서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으며, 16세 때 보명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였다.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하자 중국으로 망명을 꾀하다가 실패하고 체포되어 4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911년에 보명학교를 졸업한 후, 1914년에 가족을 데리고 만주 모아산으로 이주하였다. 왕칭현〔汪清縣〕 나자구에 이동휘가 세운 동림무관학교에 들어가 8개월 동안 군사훈련을 받았다. 하지만 어머니가 위독하여 1916년에 귀향하였다. 1918년에는 재령군과 이웃한 황주군 겸이포로 이주하여 쌀가게를 운영하였다.

 

1920년 사리원에 거주할 무렵 관전현(寬甸縣)에 자리한 대한독립단의 국내 파견 대장인 이명서가 대원 8명과 함께 국내로 들어와 8월에 황해도 은율군수를 처단하는 사건에 관여하였다. 그해 4월부터 자신도 직접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만주의 독립운동단체를 지원하기 위해 군자금 모집에 나섰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 말부터 국내에 군사 주비단 결성을 추진하였다. 군사 주비단은 단원을 모집하고 군수품을 확보하며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을 홍보하는 동시에 의열 투쟁에 나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나석주의 군자금 모금 활동은 이러한 군사 주비단의 일원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나석주는 군자금 모집 과정에서 밀정(密偵)주1이 드러나자 이를 처단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경찰의 감시망이 좁혀 오면서 국내 활동이 여의치 않자 1921년 10월 나무로 만든 배를 타고 중국 톈진〔天津〕을 거쳐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였다.

 

상하이에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곽 단체인 한국노병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22년 12월 한국노병회의 추천에 따라 중국 군벌 우페이푸〔吳佩孚〕가 설립 운영하는 허베이성〔河北省〕의 한단군사강습소에 입교하였다. 졸업 후 장교로 임관되어 바오딩〔保定〕에 있는 중국군 공병단 철도대에 배속되었다.

 

1924년 쑨더푸〔順德府〕에 있는 중국군 제1사단 사령부로 보직되어 근무하다가 상하이로 돌아오면서 베이징〔北京〕에 들러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1924년 6월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경무국 경호원에 임명되었고, 상해대한교민단을 호위하는 의경대 사무도 맡았다. 김구의 지시를 받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보위를 위한 행동대원으로 활동하였다.

 

1925년 3월경부터는 상하이를 떠나 국내 의열 투쟁 계획을 추진하였다. 권총과 폭탄 등 무기를 준비하고 경성으로 출발하려고 계획하였으나 귀국 비용 등이 부족해 결국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폭파 대상 기관은 조선총독보 동양척식주식회사,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 조선은행 등이었다.

 

1926년 국내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고 상하이에 돌아온 김창숙이 의열 투쟁 계획을 내놓았을 때 김구로부터 그 일을 실행할 인물로 추천되었다. 그해 4월 초 톈진에서 김창숙과 처음 만난 후 7월 최종적인 계획을 확정한 다음, 김창숙으로부터 1,000원을 지원받았다.

 

유자명 · 한봉근 · 이승춘과 함께 웨이하이웨이〔威海衛〕에서 배로 국내로 잠입하려고 하였으나 여의치 않아 5개월 가량 시간을 소비하고는 단독으로 12월 24일 배에 올라 12월 27일에 인천항으로 들어왔다. 그날 밤 경성으로 올라와 숭례문 근처에 중국인이 경영하는 여관에 묵었다.

 

다음날인 12월 28일 여관을 나와 중국인 행세를 하며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 경성 지점을 사전 답사하였다. 오후 2시 5분경 조선식산은행에 들어가 대부계를 향해 폭탄을 던졌으나 터지지 않았다. 곧바로 동양척식주식회사 경성 지점으로 갔다.

 

오후 2시 15분경 정문에 들어서면서 책상에 앉아 있던 조선부업협회 잡지 기자를 권총으로 쏘아 쓰러뜨렸다. 2층으로 뛰어 올라가다가 총소리에 놀라 뛰어나오는 직원을 쏘고 토지개량부 기술과장실로 들어가 과장과 과장 차석에게 총을 쏘았다. 곧바로 개량부 사무실로 들어가 권총을 난사하며 폭탄을 투척하였으나 폭발하지 않았다.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와 현관에 있던 수위와 시계방 점원을 쏘았다. 건물을 나와 황금정 길가에서 만난 경찰복을 입은 경기도경찰부 경무과 경부보를 쏘고 전찻길을 건넜다. 4~5명의 일본 경찰이 쫓아오자 걸음을 멈추고 “우리 2천만 민중아, 나는 조국의 자유를 위하여 투쟁하였다. 2천만 민중아, 분투하여 쉬지 말아라.”라고 외친 후 권총으로 자신의 가슴에 세 발을 쏘았다. 병원에 실려가 주사를 맞고 정신이 들어 경찰이 신분과 소속에 대해 묻자 자신은 의열단원으로 황해도 재령의 나석주라고 말을 하고는 4시간 만에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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