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들보의 어원자료
대들보의 어원자료

대청마루 전체를 세로로 지붕을 떠받는 대들보는 외형의 크기만큼 이나 듬직하게 집을 상징하는 형상으로 자리하고 있다.
마당에서 기단을 올라 대청을 바라보면 가장 눈에 띄는 대들보는 왼쪽에 보이는 안방의 대보와 툇보 그리고 상부의 종보를 모두 합해 놓은 듯하고, 집 전체를 나타내는 상징처럼 느껴진다. 집안의 대들보라는 말로 함축해 지칭하는 상징성이 한옥에서 그 정점에 자리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처럼.
지붕을 바라보며 누운 대들보의 위치는 나무가 자랄 때 살던 방향을 가늠해 북쪽을 말구(나무가 자랄 때 땅쪽)로 원구(나무가 자랄 때 하늘쪽)는 마당이 있는 남쪽으로 배치했다. 이백 년이라는 긴 시공의 흐름에도 이 자리에서 집 구조의 대들보 역할을 하는 것은 나무 본연의 품성과 도편수의 배치에 안목이 있음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안방과 건너방에 자리한 대들보와 툇보 그리고 동자주 위에 얹어진 종보가 떠받는 종도리를 대청에서는 이 대들보가 직접 받치고 있으니, 마루의 널찍한 공간은 대청 대들보의 역할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는 기둥을 없애고 수평의 공간적 확연만을 만든 것이 아니라 수직으로 보이는 천정의 영역을 넓히는 역할까지도 하고 있다. 즉 조견당 대청의 휘인 대들보는 수직, 수평의 공간적 확대에 있어 구조상의 핵심적 역할과 함께 의장의 상징성을 더하고 있다.
등허리가 하늘로 휘인 대들보 곡선은 등마루 언덕의 고개 처럼 눈에 익은 선의 물결을 띄고 있다. 아마도 목수의 손이 가다듬은 곡을 만들고 그 선이 익숙한 곡선이 된듯하다. 한자를 넘는 두툼한 대청의 대들보가 무겁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목수의 손길이 또 다른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 일반적인 조선시대의 대들보처럼 가공하지 않은 조견당은 우물마루로 향해 움푹들어간 보의 아랫면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고려시대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항아리보 형식으로 아래면을 가공해, 보아지 폭의 세네치 너비 길을 만들어 아래에서 바라볼 때는 반듯하게 정렬돼 있고, 단면으로 볼때는 항아리처럼 밑둥이 좁게 돼있다. 한 발자국 떨어져 볼 때는 자연곡이 반듯한 시각적 효과를 내며 큰 대들보가 무겁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다. 고래 등줄기 같은 대들보 상면 곡과 하부에서는 좁은 너비로 모아 반듯하게 정돈된 길의 조화가 대청마루 위에서 물길을 가르고 움트는 고래의 형상을 느끼게 하는 이유이다.
또 기둥이 대들보를 받는 보아지의 초각에서 이 집의 기품과 성향 그리고 목수의 정성을 가늠할 수 있었다. 고래의등 처럼 휜 대들보를 받고 기둥과 조화를 이루게 하는 보아지 역할은 구조적 의미의 중요성과 의장적 상징에서 그 본연의 역할보다 더욱 빛을 발하고 있었다. 마치 파도를 형상화한 듯 단단하며 기품 있는 조각의 균형은 당시 집주인의 위세를 상상하게 만드는 무게감과 조형의 조화를 이루고 있다. 어쩌면 흥선대원군의 운현궁에서도 느껴보지 못했던 저 단순하고 기운차게 형상화한 초각은 기나긴 세월의 흐름에도 이곳이 존재하는 상징처럼 느껴진다. 내게 조견당 대청마루의 대들보와 이를 받치는 보아지는 단단한 파도를 가르는 고래의 움틈처럼 남성적 상징과 절재의 균형감을 아름답게 그려낸 한 폭의 수묵화 같다.

‘대들보'는 집과 지붕을 떠받치는 ‘큰 보'이다. 대들보는 작은 보에서 전달되는 무게를 받기 위해 기둥과 기둥 사이에 건너지른 ‘보'여서, 이것이 없으면 집의 하중을 견디지 못해 집이 무너져 버릴 것이다. 그래서 대들보는 ‘우리 집안의 대들보' 등에서 보는 것처럼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사람을 비유적으로 말할 때에도 사용된다.
일반인들은 ‘대들보'가 분석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인식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현대인들에게 ‘보'나 ‘들보'가 낯선 단어이기 때문이다. 특히 ‘들보'보다는 ‘보'가 더 낯설기 때문에, 혹시 대들보를 먼저 ‘대들 + 보'로 분석하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들보'는 ‘들보'에 ‘대(大)'가 붙어서 만들어진 단어이다. 그리고 ‘들보'는 ‘보'에 ‘들'이 붙어서 만들어진 단어이다. 그러니까 ‘대들보'는 역사적으로 처음에 ‘보'로 쓰이다가 여기에 ‘들-'이 붙어
‘들보'가 되고, 이 ‘들보'에 다시 ‘대'가 붙어 ‘대들보'로 쓰이게 된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까지도 이 세 단어가 동시에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훈민정음이 창제되던 당시인 15세기에는 ‘대들보'나 ‘들보'라는 단어가 보이지 않는다. 대들보를 뜻하는 것으로서 단지 ‘보'만이 보인다. ‘보'는 음절 말에 ㅎ을 가지고 있는 ㅎ종성체언이어서 ‘봏'로 쓰였는데, ‘보' 자체로서 ‘대들보'의 뜻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보에 대응되는 한문 원문으로서 알 수 있다. 「두시언해」(1481) 9권에 "뫼헷 즁이 헌옷 닙고 덠마라와 보히 믈어뎨쇼말 니라나다'라는 예문이 보이는데, 그 한문 원문은 "山僧衣藍縷告訴陳梁崖'이다. 이때 ‘마라와 보(마루와 보)'는 한자어 ‘동량(棟梁)'에 해당한다. 이때의 ‘량(梁)'은 ‘대들보'를 뜻한다. ‘보'는 고유어로서 그 자체의 어원은 아직 알 수 없다. ‘보'의 예문 몇 개를 보이도록 한다.
王ㄱ 꾸메 집 보히 것거늘<1447석보상절, 24, 6a>
堂閣이 날가 담과 바람괘 므르 드르며 긷 불휘 석고 보히며 말리 기울어늘사 휫두루 한끠 믄득 브리 니러 舍宅이 붇더니<1459월인석보, 12, 21b>
이 ‘보'에 ‘들다[擧]'의 어간 ‘들-'이 연결되어 ‘들보'가 만들어졌는데, 이것은 16세기 후반부터 보이기 시작하여 오늘날까지도 사용되고 있다.
들보 량(梁) <1576신증유합, 상, 23a>
들보 우희 듣글(梁上塵) <1613동의보감, 1, 20a>
들보(過樑)<1690역어유해, 상, 17b>
모다 문채 잇난 남그로 들보 하고 화반셕으로 뜰의 깔며<1852태상감응편도설언해, 2, 61a>
이 ‘들보'는‘듦보'나 '들ㅅ보'로도 표기된다.
모롬이 이 몬져 上頭에 上面이란 말이니 듦보해나 므슴 나모에 노 맨 곳이라<1792증수무원록언해, 2, 10b>
或 이 노히나 띄랄 듦보해나 或 나모가지 우희 몬져 매야<1792증수무원록언해, 2, 12a>
들ㅅ보(架剛<1715역어유해보, 12b>
들ㅅ보(過樑)<1768몽어유해, 상, 26a>
들ㅅ보 량(楔)<1781왜어유해, 상, 32a>
이 ‘들보'의 ‘들-'에 대해 ‘대[竹], 다리[橋]'의 조어형(租語形)인 ‘닫(달)'과 동원어(同源吾)로 해석한 학자도 있으나 그 근거를 증명할 수 없다. 오히려 ‘들창'의 ‘들-' 등과 연관을 시키는 해석이 옳을 것이다.
그러다가 18세기에 ‘대들보'가 생겨났는데, 이것은 ‘들보'에 ‘대(大)'가 붙은 것이다. 즉 ‘들보'에 의미를 부가시켜 ‘큰 들보'란 뜻을 가진 단어를 만들어낸 것이다. 처음에 ‘대들보'가 나타나는 문헌은 「해동가요(일석본).(18
세기)로서 사설시조의 앞머리에 ‘엇던 남근 八字 有福하야 大明殿 大들보 되고'가 보인다. 여기에 ‘대들보'의 ‘대'를 ‘大'로 표기한 예가 보여서 ‘대들보'의 ‘대'가 ‘大'에서 왔음을 알 수 있다. ‘대보름, 대광대' 등 접사로서 ‘대'
가 붙은 단어는 매우 흔하다. ‘대'는 ‘듸'로도 표기되었다. 이제 그 예문들을 제시한다.
대들보(大樑)<1895국한회어, 71>
들보(樑)<1895국한회어, 29>
대들보 양(樑)<1916통학경편, 21a> cf. 들보 동(棟)<1916통학경편, 21a>
되들보 동(棟)<1918초학요선, 24>
기다란 수건을 걸처 굵다란 대들보에 척 걸처 노왓다<18xx신숙주부인전, 32>
하인은 놉다란 누 마루 대들보에 길다란 허연 무명 수건에 목을 걸고 늘어진 주인마님 윤 씨의 시체를 보왓다<18xx신숙주부인전, 36>
광한루 건네 갈 졔 되명젼 듸들보의 명매기 기름으로<18xx춘향전(철종 때), 상, 11b>
특히 19세기의 문헌에는 ‘대들보'와 ‘들보'가 동시에 출현해서, 이 시기에 이 두 단어가 같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의 「김원전」에 보이는
"머리 업산 등신이 일떠나며 되들보랄 바드니 들뵈 부러지난 지라'"
와 같은 예문에서 ‘대들보'를 받았더니, ‘들보가 부러졌다는 표현은 그 두 단어가 같은 뜻을 가졌음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좋은 예일 것이다. 그러나 대개 ‘대들보'는 크다는 의미를 부가하여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棟 들보 동<1884정몽유어, 16b>
대들ㅅ보 동<1908아학편, 21b>
樑 들ㅅ보 량<1781왜어유해, 상, 32a>
대들보 양<1916통학경편, 21a>
보는 도리와 직각으로 만나며, 집의 규모가 커서 구조가 복잡해지면 여러 가지 형태의 보가 구성된다. 보는 대들보[大樑]·종보[宗樑]·충량(衝樑)·퇴보[退樑]·우미량(牛尾樑) 등으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으며, 이밖에 합보·귀보·중종보[中宗樑] 등도 있다.
보의 단면을 대개 구형(矩形 : 직사각형)이나, 모서리를 깎아서 둥그스름하게 다듬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들보나 종보 등은 자연목을 거의 다듬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휜 부분을 위로 하고, 양옆을 따서 장방형에 가깝도록 한다.
고려시대 말기에 지어졌던 부석사 무량수전, 봉정사 극락전 등의 보는 속칭 항아리보라 하여 단면이 항아리의 옆모습처럼 만들고 있다. 항아리보의 밑면은 그 폭을 장혀의 두께에 맞추어서 다듬어 기둥 위의 공포와 만나게 될 때 첨차 위에 소도로 물리도록 하였다.
① 대들보 : 대들보는 가장 큰 보로서 평주와 평주 사이, 평주와 고주 사이, 또는 고주와 고주 사이에 걸린다. 천장이 꾸며지더라도 대들보는 노출이 되며, 평주 위에서는 보 머리를 내밀어 새김질을 한다. 특수한 경우 중간의 고주에서 합보가 되도록 하는 경우도 있다. 삼량집에서는 대들보의 중심에 마루대공이 올라서고 그 위에 종도리를 받치게 하나, 오량집 이상이 되면 동자주가 올라서서 종보를 받치게 한다.
② 종보 : 종보는 마루보라고도 하며 대량 위에 세운 동자기둥 사이 또는 동자기둥과 고주 사이에 건다. 오량집에서는 종보만 걸리게 되나, 칠량집 이상이 되면 중종보가 하나 더 걸리게 된다. 종보의 양쪽에는 중도리가 올라앉게 되고 도리 밖으로 보 머리를 내밀게 하여 간략한 새김질을 한다. 종보 위로는 대공이 세워진다.
③ 충량 : 충량은 저울대보라고도 하며, 지붕의 구조가 팔작이나 우진각일 때 나타나는 보로서 측면의 평주와 대들보 사이에 걸린다. 충량이 걸리는 상태는 대들보의 윗면과 평주 사이에 고저차가 있기 때문에 상당히 휜 나무를 골라서 써야 한다. 충량의 앞머리는 일반적인 보와 같이 다듬지만 뒤뿌리는 대들보와 맞추어지면서 일부가 대들보 위로 노출된다. 이 노출된 부분을 그대로 두기도 하지만, 감추어주면서 모양을 내기도 한다. 특히 사찰에서는 이 충량의 뒤뿌리에 용머리를 조각하여 꽂아놓음으로써 장엄한 모양의 효과를 내기도 한다. 충량의 위에서는 측면으로 지나가는 중도리의 중심을 받쳐주는데, 동자기둥을 세우거나 접시받침 등이 놓인다.
④ 퇴보 : 퇴보는 평주와 고주 사이에 걸리는 보로서 홍예처럼 휠 경우에는 홍예보라고도 부른다. 툇간에 걸리기 때문에 퇴보라고 하는데, 길이가 짧기 때문에 단면도 작은 것을 쓴다. 퇴보의 아랫면은 보아지가 끝나는 부분에서부터 훌치기를 하는 것이 보통이다. 훌치기는 30㎜ 정도를 깎아내는 것으로, 보아지가 양쪽에 있을 때에는 평주측 보아지가 끝나는 부분에서부터 시작한다.
⑤ 우미량 : 우미량은 기둥과 관계없이 도리와 도리 사이에 걸리는 보로서, 도리 사이의 고저차 때문에 상당히 휜 모습이 된다. 우미량의 단면은 장혀와 비슷한 장방형이며, 앞머리는 도리와 결구되면서 보 머리를 만들어주고, 뒤뿌리는 도리 밑의 장혀 등과 결구되면서 보아지 형태를 만들어주기도 한다.
⑥ 귀보 : 귀보는 중층 이상의 경우 귀고주[隅高柱]와 우주(隅柱) 사이에 걸리는 것으로 대개는 상층 우주를 받쳐주는 구실을 한다. 아래층 바닥으로부터 상층의 우주를 별도로 세우는 경우에는 귀보가 생략된다.

큰 재목이 될 만한 인물을 동량지재(棟梁之材)라고 부른다. 마룻대(용마루) 동(棟)에 들보 량(梁)이니, 건물의 힘을 가장 크게 지탱하는 뼈대다. 들보 중에서도 대들보는 기둥과 기둥 사이에 건너지르는 큰 들보를 말한다. 건물 중앙의 힘을 받쳐 주는 가장 중요한 구조물이므로 나무도 제일 좋은 것으로 쓴다.
한자로 들보 량(梁)은 물 위에 걸쳐 놓은 나무, 즉 다리를 뜻한다. 교량(橋梁)이라는 한자말도 여기에서 나왔다. 물의 이편과 저편을 가로지르는 다리처럼 가로축의 힘을 가장 크게 받는 게 대들보다. 주춧돌 위에 기둥을 세우고 중앙에 대들보를 달아 올리면 건물의 골격이 완성된다. 요즘으로 치면 콘크리트 골조가 완성되고 이후 내부 공사가 시작된다.
대들보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옛말도 많다. ‘기와 한 장 아끼다 대들보 썩힌다’는 말은 사소한 것을 아끼다 낭패 보는 어리석음을 빗댄 것이다. ‘노랫소리가 3일이나 사라지지 않고 대들보를 두르고 있다’는 요량삼일(繞梁三日)은 매우 아름다운 노랫소리를 의미한다. 손자병법 36계에 나오는 투량환주(偸梁換柱·대들보를 훔치고 기둥을 바꾼다)는 겉을 그대로 두고 본질을 바꿔 놓음으로써 승리하는 전략이다. 대들보 위의 도둑을 점잖게 부르는 양상군자(梁上君子)도 유명하다.
이처럼 중요한 대들보를 올리는 의식이 상량식(上梁式)이다. 안전과 번영을 기원하는 글을 새겨 넣고, 떡과 술을 준비해 고사를 성대히 지내는데, 이때 ‘龍(용)’자와 ‘龜(구)’자를 함께 새긴다. 용과 거북이 ‘물의 신’이어서 화재를 막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저께 롯데월드타워 123층에 올린 대들보에도 ‘龍(용)’과 ‘龜(구)’자가 새겨져 있다. 7m 길이의 철골 대들보에 일반 시민들의 소망도 함께 적혔다. 오복을 내려 달라는 옛 문구와 달리 ‘대학 가게 해주세요’ ‘연애하게 해주세요’ ‘스트레스 안 받고 건강하고 행복하게’ 등 애교 섞인 문구가 많아 시대 변천을 실감케 한다.
국내 최고층 건물의 대들보가 착공 5년 2개월 만에 올랐으니 상량식 주제가 ‘가장 위대한 순간’이라고 할 만하다. 땅을 마련하고 대들보를 얹기까지 30여 년이 걸렸다. 그런 만큼 감회도 남달랐을 것이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한 해 200만 명의 해외 관광객이 찾고, 2만여 명의 고용 효과와 내수 활성화까지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 말처럼 한 기업의 차원을 넘어 국가경제에 기여하고 우리나라의 국격을 높이는 랜드마크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대들보

보는 앞뒤 기둥 또는 공포 위에 걸린 구조재이며, 기둥과 도리보다 큰 부재로서 도리가 모인 지붕의 하중을 기둥에 전달한다. 규모가 큰 건물은 하나의 보로 가구를 구성할 수 없기 때문에 대량과 종량 등을 걸어 지붕 하중을 받도록 한다. 가구는 측면 주칸 거리가 커질수록 보와 도리의 수량이 증가하며, 대량·중량·종량 등을 걸어 상부 하중을 기둥으로 전달한다. 대량은 대들보, 중량은 중보, 종량은 종보라고 부른다. 대량은 다른 보보다 단면이 크고 길이도 길다.
보는 측면 주칸 거리와 가구 구성 방식에 따라 보의 수가 다르다. 가구는 삼량가구, 평사량가구, 오량가구, 칠량가구 등으로 나뉜다. 삼량가구는 앞뒤 기둥에 보를 걸고 전후 보 머리와 용마루에 도리 세 개를 거는 방식이다. 오량가구는 기둥 중심열과 용마루열, 기둥 중심과 용마루 사이 열에 도리를 거는 방식으로 도리 5개를 거는 방식이다. 대량과 종량을 짜 맞춤하는 방식이다. 평사량가구는 오량가구의 용마루 열 도리를 생략하고 앞뒤 중도리에 서까래를 수평으로 거는 방식이다. 대량과 종량이 도리와 짜 맞춤을 한다. 칠량가구는 규모가 큰 목조건물에서 볼 수 있는 예이다. 주심과 용마루의 도리 열 사이에 2열의 도리를 더 건 형식으로 총 일곱 개 도리를 거는 방식이다. 보통 대량, 중량, 종량의 세 보가 걸린다. 따라서 가구의 량 수가 늘어나면 측면 주칸 길이가 늘어나기 때문에 대들보도 자연스럽게 커지게 된다. 그러나 목재의 자료 한계로 대들보는 무한정 크게 계획될 수 없다. 삼량가구는 대부분 측면 주칸이 한 칸 또는 두 칸으로 규모가 작은 건물 또는 살림집의 문간채, 행랑채 등에서 볼 수 있다. 삼량가구의 대들보는 앞뒤 기둥에 결구한 후 도리를 받으며, 대들보 등 위 중앙에 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받는다. 대들보와 기둥은 민도리 방식으로 짜맞춤 하거나 익공 방식으로 짜 맞춤을 한다. 민도리 방식은 기둥 상부에서 보와 도리가 직접 결구하는 방식으로 보 밑에 직절한 보아지를 끼워 보 머리 부분을 받도록 한 예도 있다. 공포 위 대들보는 포부재 첨차와 장혀, 주두, 소로 등과 맞춤을 한다. 보는 측면 주칸 거리가 크면 클수록 보의 길이, 단면 크기, 수가 늘어난다. 커다란 보를 구하지 못할 경우 대들보는 단일 부재가 아닌 두 개의 보를 사용한다. 이때 보는 내부에 세운 고주에 짜 맞춤하여 가구를 구성한다. 대체로 대들보와 고주는 장부 맞춤을 한 후 산지 두 개를 박아 부재 간 결속력을 높인다.
살림집은 대부분 대청에 반자를 하지 않기 때문에 상부 가구재인 대들보, 도리, 서까래를 드러내고 있다. 대청은 죽은 자와 산 자가 만나기 위한 제사를 지내는 곳이면서 민속신앙의 대상인 성주신이 있는 곳이자 사람들의 일상생활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또한 대청은 온돌방으로 출입할 때 통과 공간으로, 우리나라 전통가옥의 독특한 공간이다. 따라서 대청은 좌식보다 입식 중심의 공간이다. 집주인은 이사, 명절, 제사 때 첫 상을 가신인 성주신께 올린다. 성주신은 색 헝겊이나 한지를 대들보 또는 대공, 종도리에 붙여 놓거나 걸쳐 놓는다. 이때 대들보를 성주보라 한다. 성주가 더러워지면 날을 받아 고사를 올리고 새것으로 바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