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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항섭 생가 터_독립운동가4

noksan2023 2025. 4. 4. 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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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항섭 생가 터_독립운동가4

 

 

엄항섭 생가 터

 

 

엄항섭 생가 터는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 및 국무원 선전부장 등을 지낸 엄항섭이 태어난 곳이다. 흔히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대표하는 인물'하면 많은 이들은 백범 김구를 생각할 것이다. 이러한 김구를 도와 평생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키며 독립운동에 헌신한 인물 중 한 명이 일파一波 엄항섭嚴恒燮이다.

 

엄항섭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선전부장, 김구의 보좌관으로 김구와 함께 민족의 자주독립과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온몸을 바쳤다. 특히 엄항섭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파수꾼이자 지킴이'로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어려울 때는 몸소 돈을 벌어 사람들을 도와주었으며, 한 평생을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키며 독립운동에 전념하였다.

 

중국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중심으로 김구와 함께 항일독립운동을 펼쳤던 엄항섭의 고향은 경기도 여주시 금사면 주록리이다. 경기도 이천이나 곤지암에서 주록리계곡(또는 금사 저수지) 방향(양평이나 여주 금사에서 동막골저수지 방향)로 향하다 고개 정상에서 노루목길로 접어들면 몇몇 가구들이 모여 있는 노루목에 다다르게 된다. 이곳 노루목에 엄항섭이 태어난 곳이 있다.

 

 

 

엄향섭

 

 

 

1.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지킴이 엄항섭

 

 

가족 사진

 

 

 

엄항섭은 1898년 음력 9월 1일욍'력 10월 15일), 승지를 지낸 엄주완嚴柱完의 이-들로 태어 났다 엄항섭의 본관은 영월이고, 다른 0 틈으로 ‘예빗 엄'이라 불리기도 하였다 중국에 망명 해서는 ‘일과ㅡ波'라는 호를 주로 사용했으며, 필명으로 ‘대위大衛를 사용한 적도 있다 그의 장과정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으며, 1919년에 보성법률상업학교를 마친 것으로 되어 있다.

 

그가 보성법률상업학교를 다닐 때 3.上은동이 일어났는데, 온 국민이 일어나 조국의 자주 독립을 부르짖는 것을 보면서 엄항섭은 독립운동에 헌신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중국 상하 이로 망명하였다 그가 상하이에 도착하였을 때는 그곳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세워져 있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한 엄항섭은 거기서 김구를 만났고, 김구와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하였다.

 

엄항섭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여 활동을 시작한 것은 1919년 9월 법무부 참사에 명되면서부터였다 당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새로운 체제를 갖추어 출범한 상태였다 3.1운동 직후 연해주 상하이, 한성에서 수립되었던 세 곳의 임시정부가 통합을 실현하고, 대통령 이승 만李承晩과 국무총리 이동휘李東輝를 중심으로 새롭게 출범한 때였다 엄항섭은 법무부의 참사 가 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였는데,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오래 있지 않았다 당시 그의 나이 22살로서 상하이로 찾아온 청년들 대부분이 그랬듯이 그 역시 공부를 쳬속히고자 하였 다 그가 입학한 곳은 항주에 있는 지장芝江대학이었다 그는 지장대학에서 중국어, 영어, 어 등 어학을 공부하였는데, 어학을 공부한 것이 뒷날 그가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활동하는 데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1922년 지장대학을 졸업한 후 엄항섭은 상하이로 돌아왔다 그동안 상하이 대한민국임시 정부는 크게 변해 있었다 수립 초기 국내외에서 많은 인사들이 모여들어 대한민국임시정부 를 구성하고 있었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뿔뿔이 흩어진 것이다 미국에 있던 대통령 이승만은 상하。1로 잠시 왔다zl- qxl 미국2로 돌아갔고, 국무총리 이동휘도 떠났다 그리고 각원들도 대부분 사퇴하였다 시일이 지나면서 젊은 청년들 역시 임시정부에서 멀어져 갔다 이로 인해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정부로서의 조직을 유지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고, 김구와 동녕을 비롯한 몇몇 인久卜들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부둥켜안고 있었다.

 

사람만 떠난 것이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매우 어려워졌다 수립 초기에는 대한민국임시정 부에 대한 기대로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고, 이와 함꼐 독립자금도 적지 않게 들어왔다 그러 냐 사람이 떠나면서 자금도 함께 줄어들었고, 대한민국임시정부 청사의 집세를 내지 못할 편이 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유지하고 있던 김구. 이동녕 등의 인사들조 차끼니걱정을 해야할정도로경제적 곤궁은 극심한 형편이었다.

 

엄항섭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어떻게 해서든 유지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방편으로 그는 프랑스 조계의 공무국에 취직하였다 자신이 월급을 받아 그 돈으로 임시정부 사람들의 끼니를 해결하고, 또 일본영사관에서 한인들을 체포하려는 정보를 얻어내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다.

 

엄항섭이 프랑스 조계의 공무국에 취직한 것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유지古끼 위한 방편이 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최소한 이를 지키고 있는 요인들의 먹고 자는 것만이라도 해결되어야 했다 그 역할을 엄항섭이 맡은 것이다 엄항섭 뿐만 아니라 그의 부인 연미당延薇堂 여사도 임시정부 요인들을 극진히 모셨다 김구는 자신이 엄항섭 집에 갔다가 올 때면 문 밖刃찌 따라 나와 은전 한 두 개씩을 내 손에 쥐어주며 "하키 사탕이나 사주세요' 라고 말하던 부인의 고마움을 잊지 못하였다 그리고 상하이에서 숨진 엄항섭 부인의 무덤이 눈앞에 아른거린다며, 무덤에 묘미를 세워주지 못한 것을 가슴 아파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의 섕활만이 아니라 이들 요인들이 일제 경찰에 체포되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도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켜내는 주요한 방법이었다 상하이의 일본영사관에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을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들을 체포하려면 사전에 랑스 조계 당국과 교섭하여 양해를 얻어야 했다 엄항섭이 프랑스 공무국에 근무하고자 한 은이러한 정보들을 알아내어 미리 피신하도록 하고자 함이었다.

 

이처럼 대한민국임시정부가 1920년대 중반에 부딪혔던 어려움을 극복하고 임시정부라는 조직이 존립할 수 있었던 데에는 엄항섭의 공헌이 적지 않았다 딩시 엄항섭은 20대의 청년이 었다 엄항섭이라는 한 20대 청년의 힘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켜낸 원천이 되었다 엄항섭 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켜내는 일에 한눈팔지 않고 성실히께 헌신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파수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지킴이'라고 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2. 김구와 함께 독립운동을 펼친 엄항섭

 

엄항섭은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한 이래 줄곧 김구와 함께 활동하였다. 자신의 활동이나 역할이 대외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았지만, 김구가 활동하는 곳에는 거의 엄항섭이 있었다. 김구와는 스물두 살의 나이 차이가 있었다. 그는 김구를 선생님처럼 모시고, 그의 활동을 뒤에서 도운 것이다. 박찬익朴贊翊, 안공근安恭根 같은 이들이 측근으로 김구를 보좌하기도 하였으나 엄항섭도 이러한 역할을 하였다. 1926년 12월 김구는 국무령에 취임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활성화시킬 방안을 강구하였다. 그 방안의 하나가 헌법을 개정하는 것이었다. 당시 엄항섭은 프랑스 조계의 공무국에 근무하면서 이 일에 관여하였다. 헌법개정기초위원이 되어 그 일익을 담당한 것이다. 보성법률상업 학교를 졸업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 법무부에서 근무한 경험도 있었고, 김구의 의도를 누구보다도 잘 간파할 수 있는 인물이 엄항섭이었다. 헌법의 개정은 대통령, 국무령 같은 단일지도체제의 폐단을 극복할 수 있는 방향으로 설정되었고, 집단지도체제인 국무위원제를 도입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1927년 4월 11일 제정 공포된 「대한민국임시약헌」 바로 그 헌법이었다. 김구가 미주교포들에게 재정적인 지원을 요청하는 ‘편지정책'을 할 때도, 엄항섭이 그것을 도왔다. 김구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재정을 마련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미주교포들에게 재정지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써서 보냈다. 편지의 내용은 김구가 직접 썼지만, 영어를 할 줄 몰랐던 김구는 겉봉에 주소를 쓸 수 없었다. 김구 옆에서 이 일은 한 것이 안공근과 엄항섭이었다.

 

김구가 작성하여 빌표하는 각종 글을 번역하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李奉昌과 윤봉길尹奉吉의사 의거를 주도하였던 김구는 의사의 의거를 세상에 알리고자 하였다. 그 하나로 김구는 이봉창 의사가 사형에 처해진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봉창이란 인물의 행적과 그가 결행한 일왕저격의거 경과와 사실을 「동경작안지진상東京炸案之眞伺」이란 제목으로 작성하였다. 국한문 혼용으로 된 이 글을 엄항섭이 중국어로 번역하였고, 이 글은 중국의 「신강일보申江日瑪」와 「중앙일보中央日報」에 「진동전세계 동경작안지진상」이란 제목으로 보도되었다.

 

김구가 자싱嘉興으로 피신해 있을 때도 그 곁에는 엄항섭이 있었다. 이봉창과 윤봉길 의사의 의거 이후 일제는 현상금을 걸고 김구를 체포하려고 하였다. 김구는 일단 상하이에 있는 미국인 피치 박시의 집으로 몸을 숨겼다. 엄항섭은 박찬익, 안공근 등과 함께 김구가 안전하게 피신할 곳을 찾았다. 중국 측과 교섭하여 자싱에 았는 추푸청楮輔成의 집을 피신처로 마련 하였고, 엄항섭은 이동녕 선생과 김의한 가족들과 함께 먼저 그곳으로 가 자리를 잡았다 리고 김구를 모셔왔다 당시 일제가 내건 현상금은 천문학적인 액수로, 일제뿐만 아니라 중국 인과 한국인들도 자칫 현상금에 눈이 어두울 수 있는 상황이어서 믿을 수 았는 것은 최측근 뿐이었다.

 

엄항섭은 김구가 장제스蔣介石를 만나러 갈 때도 수행하였다 중국 측은 김구가 주도한 이봉 창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대해 크게 감격하였고, 이 일을 계기로 김구와 장제스외의 면담이 루어졌다 1933년 봄 난징南京에서 이루어진 이 면담에 엄항섭은 박찬익, 안공근과 힘꼐 김구 를 수행하였다 이 담에서 중국 측이 리의 독립운동을 극적으로 지원히기로 하였고, 한인청년들 을 낙양군관학교에서 훈련하도록 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몇 가지 예와 같이 엄항섭은 상하이에서 김구를 만난 이래 그가 세상을 떠난 순간刃卜] 김구를 보좌하며 활동하였다 때로는 김구의 명의로 발표된 각종 선언문이 나 글들을 번역하는 일을 맡기도 였고,대필을 한 경우도 없지 않았다 1932년 중국 상하이에서 한인애국단 활동에 대해 김구가 쓴 것을 엄항섭 이 정리 .서술하여 匹i왜실기屠倭實記. 를펴냈으며,고국으로 돌아온이후인 1946년 내용을 보완.번역하여 다시 발간한 것이그러한예이다 한편,엄항섭은 정당 결성에 참여 古끼도 하였다 1929년 말 민족유일 당을 조직하려는 시도가 좌절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활동 하던 인사들이 정당의 결성을추진하 였다 그 방향은 민족주의 세력을 집하여 정당을 조직하고, 이를 기초 세력으로 삼아 임시정부를 유지 .옹호하는 것으로 추진되 었다 정당의 추진은 국내에서 광주학생운동이 발발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급진전되었고, 1930년 1월 김구 이동녕, 안창호, 조소앙 등과 함께 엄항섭도 한국독립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1931년에는 김구가 단장으로 있는 한국교민단의 의경대장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1935 년 뵤월 김구를 이사장으로 한 한국국민당 창당에 참여하여 7명의 이사 가운데 한 사람인 동 시에 선전부장을 맡9느으며, 1936년부터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에 뽑혀 활통하였다 이후 엄항섭은 한국국민당의 세력을 확대해가면서 디한민국임시정부를 유지 . 옹호해 갔다 엄항섭이 추진한 방법은 청년들을 조직화하는 것이었다 당시 김구 주위에는 낙양군관학교 출신들을 비롯하여 많은 청년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엄항섭은 이들을 중심으로 한국국민당청년단,한국청년전위단을 결성 하였다. 이렇게 한국국민당 의 외곽단체이자 전위조직을 만들고, 이를 기반으로 임시 정부를 유지.옹호하고자 였다 그리고r한민韓曷,f한 청韓西 등의 기관지를 발행하 였다 청년들에게 독립운동의 노선과 지도이념을 교육하고 선전하고자한 것이다. 

1940년 5월에는 우익진영 의 3당 통합을 이루어냈는 테, 우익진영의 3당은 엄항섭이 참여한 한국국민당을 비롯하여 민족혁명당에 참여하였던 소앙이 탈퇴하여 재건한 한국독립당 지청천 등 만주세력이 중심이 된 조선혁명당을 말한다. 이들 3당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옹호를 전제로 통합히기로 하고, 1939년 10월부터 통합을 위한 논의에 들어갔다 엄항섭은 한국국민당 대표로 통합회의에 참여하였고, 결국 1940년 월 3당이 통합하여 새로이 한국독립당을 결성하였다 이를 중경에서 결성되었다고 하여, 경 한국독립당이라한다 한국독립당의 창당은 몇 가지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하나는 1935년 민족혁명당 결성을 계기로 분파되었던 민족주의 세력이 총결집을 이루었다는 점이다 둘째는 대한민국임 시정부로 민족주의 세력이 결집함으로써,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세력기반이 크게 확대되었다는 점이다 한국독립당의 중앙집행위원장으로는 김구가 뽑혔으며, 엄항섭은 조소양 이청천 등과 함께 중앙집행위원이 되었다 이후 엄항섭은 한국독립당을 중심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호.유지하면서 활동하였다 이렇게 한국독립당 중앙집행위원으로 활약하면서 김구를 도와 한국광복군 창설의 실무책임을 맡기도 하였다 여전히 엄항섭은 김구와 함께 대한민국임시 정부를중심으로독립운동에 전념하였다.

 

 

3.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함게 한 엄항섭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40년 9월 충칭中京에 정착하였다 1932년 윤봉길의시의 의거를 기로 상하이를 떠나 항주로 옮겼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면서, 강. 창사. 광주.유주 .기강 등지로 옮겨 다니다가 중경에 도착한 것이다 당시 중경은 중국국민 당 정부가 임시수도로 정한 곳이었는데, 중경에 도착한 임시정부는 김구 주석 체제로 정비되 였고,활발하게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중경에 정착하여 추진한 첫 사업은 한국광복군의 창설이었다 임시정 부는 수립 초기부터 군대를 편성하여 대일항전을 전개한다는 계획을 수립하였지만, 이를 실행 에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중경에 정착하면서 이를 추진한 것이다 그 방법은 만주지역에서 동하던 독립군들과 중국군관학교를 졸업한 한인청년들을 중심으로 우선 총사령부를 성립하 는 것으로 추진되었고, 1940년 9월 17일 광복군총사령부성립전례식을 거행하였다 엄항섭은 광복군총사령부성립전례식의 실무를 담당하였다 성립전례식은 충칭에서 가장 좋은 호텔인 가릉빈관에서 개최되었고, 당시 충칭에 있는 외국사절들을 비롯하여 중국국민 당 중국공산당 인사들과 중국군 관계자 등 2백여 명이 참석하는 대규모 행사였다 행사는 본 공군기의 공습을 피해 아침 弘1부터 3시간 동안 진행되었고, 이를 통해 한국광복군이 설되었다 이 행사의 제반준비와 실무를엄항섭이 맡아하였다 나아가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추진하는 사업이다 활동을 미주교포들에게 알리는 일도 항섭이 맡아하였다 딩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해결해야 했던 주요한 과제의 하나는 자금을 련하는 일이었다 중국정부로부터 재정적인 지원을 받기는 하였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턱없이 모자랐다 광복군을 창설하였지만, 그 대원들의 의식주도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독립운 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히기 위해서는 적지 않은 자금이 필요하였고, 그것을 미주교포들에게 의지하지 않을수 없는것이 현실이었다 재정적인 지원을 얻기 위해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어떠한 활동을 추진하고 있는지를 려야 했고, 엄항섭이 그 일을 맡았다 엄항섭은 F광복군총사령부성립전례배관기光復軍總司令部成 立典禮拜觀軋, F광복군에 관한 보고J, F대한철혈남아 사방에서 운집. 등의 글을 작성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광복군을 창설하여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엄항섭이 보내는 글들은 대부분 미주에서 발행되는 찐한민.박에 그대로 보도되었다 엄항섭의 이러한 활동은 크게 드러나지 않는 일이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추진하는 사 업이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위한 일에 엄항섭이 관켸되지 않은 일들이 별로 없을 정도고, 는 한국독립당의 중앙집행위원, 임시의정원 의원, 그리고 주석 판공실 비서로도 활약하고 였지만,이름을내세우지 않았다 엄항섭이 대외적으로 그의 이름을 나타낸 것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선전부장이었다 1944 년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새로운 체제를 갖추었는데, 좌익진영이 참여하여 좌우연합정부를 구 성한 것이다 좌익진영은 1942년 그 무장세력인 조선의용대를 광복군으로 편입하고, 10월에는 의정원에도 참여하였다 그리고 1944년 4월에는 정부에도 참여함으로써, 좌우연합정부를 구 성하케 되었다 좌우연합정부가 구성되면서 정부의 조직도 확대 개편하였다 부주석제를 신설 하여 김구와 김규식은 주석 .부주석으로 뽑혔고, 예전의 너무.외무.군무.법무.쟤무의 5부에 서 문화부와 선전부를 증설하였다 이때 엄항섭이 선전부장으로 임명되었다 광복 후인 1945년 11월 23일, 엄항섭은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함께 귀국하였다 그 뒤 국내 에서도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함께 활동하며 김구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국토는 38선 으로 분단되었고, 미군정하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이름으로 활동할 수 있는 공간과 여건 도 없었다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이 추진되札 엄항섭은 김구와 함께 단독정부 수딛에 대하며 남북협상에 참여하였다 통일된 하나의 정부 수립을 위해 노력하였지만, 남븍에 각각 정부가 수립보어 민족이 분단되고 말았다 그리고 선생님처럼 모시던 김구가 안두희의 흉탄 에 서거하면서 희망도 없어져 버렸다. 그리고 민족의 분단은 전쟁을 불러왔고, 엄항섭은 6 .25전쟁 속에 1950년 9월 납븍되었다 북한에서도 통일을 위해 진력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지만, 1962년 7월 30일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의 표는 북한 신미리 애국열사능에 모셔져 있다 묘비에는 1898년 10월 15일 생으 로 표기되어 있는데,이는 양력으로 음력으로는 9월 1일에 해당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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