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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환 생가_경기도 여주군 대신면 보통리 190-2

noksan2023 2025. 4. 14. 0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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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환 생가_경기도 여주군 대신면 보통리 190-2

 

 

경기도 여주군 대신면 보통리 190-2

 

 

 

조성환 생가는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국무위원과 군무부장 등을 역임한 조성환이 태어난 곳이다 조성환曺成煥은 대한제국의 군인 출신으로 일제의 침략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던 1907년 민회를 조직하여 항일 구국운동에 투신,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국무위 원, 군무부장 등을 역임하다가 만주로 넘어가 서열, 김좌진 등과 함께 북로군정서를 조직하고 청산리전투에참가하였다 이후 만주지역에서 활동하며 독립운동단체를 하나로 묶기 위해 노력하였고, 1926년 민족 유일당운동에 나서 독립운동단체들을 하나로 묶고 만주지역에 이주한 한인들의 정착을 도왔 다 1932년 임시정부가 윤봉길 의거 이후 일제의 추격을 받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위기에 古卜F 요인들과 함께 힝쩌우로 이동했다 그리고 혼란에 빠졌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습에 썼다 1934년 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선출되어 군久- 업무를 총괄하았g며, 1940년 한국광복군 을 창설하고 군무부장으로 활동하며 임시정부의 군사업무를 담당하였다.

 

 

 

조성환 생가 전경

 

 

 

1. 신민회를 조직하여 항일구국운동에 투신하다

 

 

1875년 여주에서 태어난 조성환은 26세 때인 1900년 한제국 무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부패한 군부를 숙청하려다 발각되어 사형선고를 받고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뒤 3년 만에 칙령으로특사되어 참위로임괸되었으나사직하였다 1906년 안창호.양기탁 등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하여 항일 구국운동에 투신하였다 신민회는 민족교육과 민족산업의 성이라는 애국켸몽의 틀을 일부 벗어나 만주에 독립운동 기 지를 건설하는등적극적인 구국운동을모색하였다1907년1 월 연해주로 망명하여 헤이그특사파견 때 이싱설을 원조하였 다 그리고1908년 노우키에프스크에서 최채형과 구국방략을 협의하고 북경으로 가서 항일독립운동에 가담한 뒤 귀국하여 민족종교인 대종교에 입교하였다 그 뒤 북경으로 건너기서 북경을 근거지로 간도.연해주를 왕래하면서 중국 혁명 원로 진기미와 함께 한중공동전선을 펴 항일투쟁을 전개할 것을 주창 하였다.

 

1912년 일본 총리대신 가쓰라가 중국 동북지방을 시찰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암살을 기도 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 체포되어 거제도에 1년간 감옥 생활을 하였다 석방된 뒤 다시 항일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던 만주와 연해주로 건너갔다 그 뒤 지린성 당국과 섭하여 흑룡강성 오운현에 약 5,000호가 거주할 수 있는 농지를 마련하고 항일독립운동의 기 지와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둔전제를 실시하려고 기도하았으나 러시아혁명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2.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무장 독립운동을 펼치다

3.1운동이 일어나기 전 그는 노령 니콜리스크에서 유동열 등과 무력투쟁을 켸획하디가 싱亐F 이에서 대한만국임시정부가 수립히케 되자 이동녕、이시영 등 30여명과 함께 1919년 3월 하순 하아로 와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여 군무부久卜寸에 임명되었다 1919년 4월 임시정부 의정 원의원에 노령대표의.인으로 당선되고 군무부위원이 되었다 또한 1919년 4월 23일 서울에서 열린 국민대회에서 평정괸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일제의 침릭쩨 대항히기 위해서는 무력 투쟁이 효과적이라고 판단히고 다시 만주로 가 븍로군정서 조직에 참여하여 침모장에 임명되었다 이 북로군정서는 1920년 幻월 청산리에서 일본군 대부대를 상대로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다 청산리전투 이후 일제의 반격을 피하여 미산密山으로 이동 10여 개의 독립단체를 하나로 통일한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여 외교부장이 되었다 그러나 1921년 6월 공산당의 배반으로 이른바 자유시참변을 당하는 커다란 손실을 입고 그는 북경으로 돌이와 대한민국임시정부 무위원으로중국정부와의외교교섭활동을수행하였다.

 

 

3. 민족유일당운동의 전개

1926년 8, 9월경 북경의 독립운동켸에서는 분열되어 있던 독립운동단체들을 대동단결시키 기 위한 새로운 방략이 모색되었다 안창호가 중심이 되어 원세훈과 함께 대 독립당을 결성하 고자 시도한 끝에 동년 10월 북경에서 ‘한국독립유일당촉성회를 조직하였으며 이때 선생은 음과같은내용의 선언서를빌표하였다.

 

 

선언문

 

 

 

조성환은 동시에 닥:성보丁를 간행하여 단체의 단결과 단일투쟁을 호소하였다 그의 이런 력이 기폭제가 되어 1927년 4월에는 홍진과 홍남표 등을 중심으로 한국유일독립당 상하이촉성 회가 조직되고 이어서 광동 남켱, 무한 등지에도 파급되었다 1927년 브월에는 각지 촉성회가 연합하여 상하이에서 ‘한국독립당촉성회 대표 연합회'가 개최될 때 북경대표로 참가하여 한국 독립당관내촉성회 연힙회를 조직하였으며 각지의 촉성회를 연결하여 유일당 조직준비회1를 정하는 것이 동 조직의 목적이라고 밝혔다 민족진영은 이와 같은 유일당 결성을 통하여 독립 운동켸의 통일을 묘하고자 하였으나 코민테른의 12월 테제에 의하여 좌익세력이 1929년 11월 에 상하이 촉성회의 해체선언을 발표함으로써 유일독립당 운동은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4. 다시 임시정부로 돌아오다

 

민족유일당운동이 큰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면서 그는 다시 임시정부활동에 주력하였다. 윤봉길의 의거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일제에 의해 추격을 받아 본래 있던 상하이에서 항저우로 이주하였다. 이 때 조성환은 항저우로 옮겨가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찾아갔고, 이동녕, 조완구 등과 함께 혼란스러운 상황을 타계하기 위해 논의하였다. 1933년 3월 국무위원을 11인으로 늘리고 여러 독립운동단체들을 끌어들이는 한편 중국 국민당정부와도 긴밀히 협력하였다. 김구와 장제스는 한국청년을 낙양군관학교에 입교시키기로 하였고, 조성환은 지청천 등 독립군의 지도자들을 데려와 이들을 교육시키도록 하였다. 이후 1935년부터 군무장에 임명되어 군사업무 방면을 계속 담당하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 터지자 조성환은 군사인재 양성 및 군사통일기관 설치를 위해 지청천 등과 더불어 군사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40년 한국 광복군을 창설하고, 군무부장이 되어 대한민국 임시통수부臨時統帥府 막료를 맡았다. 광복 1945년 12월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귀국하였고, 1948년 10월 7일 만 73세의 나이로 서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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