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사 두문자

미천왕 두문자 : 미 서 점 낙 대 출

by noksan2023 2023. 8. 10.
반응형

 

소금장수 미천왕

 

미천왕 : 미 서 점 낙 대 출

 

미 : 천왕(300~331)

서 : 안평(311)

점 : 

낙 : 랑(313)

대 : 방(314)

출 : 축

점 : 제현 신사비

 

1. 천왕(300~331)

미천왕은 삼국시대 고구려 제15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300~331년이다. 서천왕의 손자로 아버지가 봉상왕에 의해 반역혐의로 죽임을 당하자 피신해 소금장수를 하며 살다가 봉상왕 폐위 후 국상 창조리 등에 의해 왕으로 옹립되었다. 재위 중에 중국 진나라가 와해되는 국제적 격동기를 맞아 대외팽창정책을 적극 추진했다. 낙랑군과 대방군을 병합했고 현도성을 공격하는 등 남방으로 급속한 팽창을 도모했다. 선비족 일파인 모용부와 요동지방을 두고 오랫동안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기도 했다. 재위 32년 만에 죽자 미천 지원에 장사 지냈다.

 

2. 안평 령(311)

미천왕 즉위 초, 중국의 서진(西晉)에서는 8왕의 난(291~306)이 일어나 내분이 극심한 상황이었다. 8명의 왕들은 정권을 다투는 과정에서 흉노와 선비 등 북방민족을 병력으로 동원하였다. 8 왕의 난은 진정되었지만, 북방민족들이 화북지역에서 힘을 키우며 독자세력화 함으로써 이른바 5호 16국 시대의 혼란기가 도래하였다. 그중에서 요동 지방의 경우, 선비족의 하나인 모용씨(慕容氏)가 성장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요동 지역에는 서진 중앙의 힘이 제대로 미치지 못했다. 미천왕은 이런 상황을 틈타 302년(미천왕 3)에 직접 군사 3만을 거느리고 현도군(玄菟郡)을 공격해 8천 명을 포로로 잡았다. 그리고 311년(미천왕 12)에는 요동 서안평을 점령해, 요동 진출의 발판을 마련했다.

 

3.  방 축

310년대에 이르러 모용외(慕容廆) 세력이 급성장하자, 미천왕은 본격적인 요동 진출에 앞서 남쪽의 낙랑군(樂浪郡)과 대방군(帶方郡)을 공략하게 된다. 서진의 지배력 약화로 힘의 공백이 생긴 것은 한반도 서북쪽의 낙랑과 대방 지역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낙랑과 대방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사람은 요동 출신의 장통(張統)이었다. 고구려의 서안평 점령으로 서진 중앙과의 육상 연결이 차단되자, 장통은 고구려의 공격에 시달리게 되었다. 전쟁을 거듭하던 장통은 이를 견디지 못하고, 백성들을 이끌고 요동으로 달아나 모용외에게 귀부했다. 이에 미천왕은 313년(미천왕 14) 낙랑군을 멸망시켰고, 이듬해에는 대방군마저 점령했다. 이로써 낙랑과 대방은 고구려의 영역이 되었다.

 

미천왕이 낙랑과 대방을 먼저 점령한 것은 요동 진출의 한 과정으로 설명할 수 있다. 과거 동천왕 때 고구려는 위(魏)와 연합하여 요동의 공손씨(公孫氏) 정권을 멸망시켰다. 그러나 위는 그 직후 낙랑과 대방을 점령함으로써 배후에서 고구려를 압박해 왔다. 고구려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서안평을 공격했다가, 위 관구검의 대대적인 침입을 받아 환도성이 함락되는 위기를 겪기도 했다. 이런 국가적 위기를 겪은 고구려였기에, 미천왕은 낙랑과 대방을 점령함으로써 이 지역이 요동의 모용씨와 연결되는 것을 막고자 했다. 비록 장통이 요동에 투항하기는 했지만, 그 근거지를 고구려가 점령했기 때문에 배후의 위협은 제거된 셈이었다.

 

미천왕이 낙랑과 대방을 점령함으로써 중국의 군현은 한반도에서 모두 축출되었다. 낙랑과 대방은 본국과 동방 여러 나라와의 무역을 중계하면서 많은 이익을 남기고 있었다. 그리고 본국과의 잦은 교류로 주변국에 비해 선진적인 문물을 향유하고 있었다. 고구려는 낙랑과 대방의 이러한 이점들을 그대로 흡수하여 내적·외적 발전의 동력으로 삼았다. 그리고 고구려의 전통적인 염원이자 낙랑·대방 점령의 궁극적 목적이었던 요동으로의 진출을 본격적으로 시도하게 된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