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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두문자

소수림왕 두문자 : 소 불 태 율 전

by noksan2023 2023. 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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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림왕
소수림왕

 

소수림왕 : 소 불 태 율 전

소 : 수림왕(371 ~ 384)

불 : 교공인(전진 순도 372)

태 : 학 설립(유학 한학 교육)

율 : 령반포(고대국가 완성) 

전 : 진과 수교

 

 

소수림왕 구부
소수림왕 구부

 

1. 수림왕(371 ~ 384)

소수림왕은 삼국시대 고구려 제17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371~384년이며, 부왕인 고국원왕이 백제군을 맞아 싸우다 전사하자 뒤를 이어 즉위했다. 부왕의 팽창정책 실패로 인한 사회의 동요를 극복하기 위해 일련의 체제 정비에 나섰다. 불교를 수용하고 보급하기 위해 전진의 승려 순도와 아도를 맞아들였고, 유교 교육기관인 태학을 설립해 유교이념의 확대를 꾀했다. 국가 통치의 기본법인 율령을 반포하여 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국가체제 정비에 나섰다. 이러한 일련의 정책은 4세기말∼5세기 고구려의 전성기를 가져오는 기틀이 되었다.

 

2. 교공인(전진 순도 372)

371년 10월 부왕이 평양성(平壤城 : 지금의 평양 大城山城)까지 진격해 온 백제군을 맞아 싸우다 전사하자 그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고국원왕 대의 대외 진출 기도의 실패 등으로 말미암은 고구려 사회의 동요를 극복하기 위해 일련의 체제 정비를 도모하였다. 즉 372년(소수림왕 2)에는 전진(前秦)에서 외교 사절과 함께 온 승려 순도(順道)를, 374년에는 아도(阿道)를 각각 맞아들였고, 375년에는 초문사(肖門寺) 이불란사(伊不蘭寺)를 창건해 이들을 거주하게 하는 등 불교의 수용 및 보급에 노력하였다.

 

순도(順道)는 소수림왕 때 고구려에 불교를 최초로 전한 승려이다. 370년(고국원왕 40) 전진(前秦)의 왕맹(王猛)이 연(燕)을 공파하자 연의 태부(太傅) 모용평(慕容評)이 고구려에 망명하였는데, 고국원왕은 그의 귀순을 받아들이지 않고 전진으로 압송해 보냈다. 고구려의 이러한 조치는 북중국의 통일에 전력을 쏟고 있던 전진의 왕 부견(符堅)에게는 큰 힘이 되었다. 372년(소수림왕 2) 부견은 고구려에 답례로서 사신과 승려 순도를 파견하고 불상과 경문 등을 전해주었다. 이에 소수림왕은 전진에 사신과 토산물을 보내 답례하였고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에 따르면 순도는 뛰어난 덕행과 고상한 인품을 지녔고, 일찍부터 불교의 교화에 뜻을 두고 중국 각지를 유력하였다고 한다. 그는 주로 불교의 인과(因果)의 원리에 입각하여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자신의 행동에 따라 결정된다는 점을 일깨워주었다.

 

소수림왕은 고구려 최초의 사찰인 성문사(省門寺)를 세우고 순도를 머무르게 하였다. 고려 후기 일연이 지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서는 성문사가 아니라 초문사(肖門寺)라고 하였다. 한편, 순도가 고구려에 들어온 직후 동진(東晉)에서 아도(阿道)가 들어왔는데, 이불란사(伊佛蘭寺)를 지어 머무르게 하였다.

 

3. 학 설립(유학 한학 교육)

372년에는 유교 교육 기관인 태학(太學) 을 설립해 유교 이념의 확대를 도모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상 정책은 이전의 부족적 관념 체계를 극복하고, 나아가서는 초부족적 국가 질서를 뒷받침할 수 있는 이념 체계를 수립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태학은 기록에 전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학교이다. 고구려는 국초부터 문자를 사용하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미 부여시대부터 사용하던 한자를 건국 초부터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는 중국과 접경하고 있고 일찍부터 대륙문화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한자의 사용은 건국 초부터 있었을 것이나, 학교설립의 기록은 건국 후 400여 년이 지난 뒤에야 나타나고 있다.

 

문자의 사용이 건국 초부터 있었다면 학교설립도 거의 비슷한 시기였을 것으로 생각되나 기록상으로는 소수림왕 2년에 태학을 설립, 자제를 교육하였다고 되어 있다. 소수림왕은 그동안 중국과 계속된 전쟁 및 적대관계를 중단하고 전진(前秦)과 우호관계를 맺으면서 대륙문물을 수용하여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국력배양에 힘썼다. 그리하여 불교를 수용하게 되고 국립교육기관으로서 태학을 설립하게 된 것이다. 태학은 귀족자제의 교육기관으로 유교의 경전과 문학·무예 등을 교육하였다. 당시 경당(扃堂)이 사립교육기관이며 지방에도 설치되었던 것에 비하여 태학은 서울에 설치된 국립대학교였다.

 

4. 령반포(고대국가 완성) 

373년에는 국가 통치의 기본법인 율령(律令)을 반포했는데, 이는 전통적 관습법 체계를 일원적인 공법 체계로 재구성하고 성문화함으로써 왕을 중심으로 중앙집권적 국가 체제의 정비에 박차를 가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5. 진과 수교

372년(소수림왕 2) 전진에서 사신을 보내 왔다. 전진은 고구려와 앙숙이었던 전연을 멸망시킨 나라로, 다행히 고구려와는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때 전진의 사신과 함께 온 이들 중에는 승려인 순도(順道)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는 전진의 황제인 부견(符堅)이 보낸 불상과 불경을 전해 주었다.

전진 황제 부견은 당시 떠오르는 해의 기세로 영토를 확장하여 화북 지역 통일을 목전에 두고 있었는데, 한편으로 불교를 적극적으로 비호했던 왕이었다. 소수림왕의 입장에서는 부견이야말로 당대에 모범으로 삼을 만한 군주라고 보았을 법하다. 소수림왕은 불교를 적극 장려하면서 외교적으로 전진과의 친교를 강화하였고, 국내적으로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데 활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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