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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두문자

근초고왕 두문자 : 근 마 원 안 부 서 동 칠 아 서

by noksan2023 2023. 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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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초고왕
근초고왕

 

근초고왕 : 근 마 원 안 부 서 동 칠 아 서

 

근 : 초고왕(346~375)

마 : 한 병합(369)

원 : 고국왕 사망(황해도)

안 : 고대국가의 성기

부 : 자상속, 왕비족 진씨 고정

서 : 고흥의 기 국사 편찬(374)

동 : 진과 외교관계

칠 : 지도 하사(369)

아 : 직기 왕인 박사 파견(일본에 천자문 전래 : 아스카 문화)

서 : 요지역 획득

 

 

근초고왕
근초고왕

 

1. 초고왕(346~375)

근초고왕은 삼국시대 백제의 제13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346년∼375년이다. 즉위 후 왕권 강화·확립에 주력한 후 활발한 정복활동을 전개했다. 낙동강 서쪽의 가야 세력을 영향권 안에 넣었고, 371년 벌어진 평양성 전투에서는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고 대방 고지까지 차지하여 백제 역사상 최대의 영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요서지방에 백제군을 설치하여 무역기지를 확보하는 등 해상로를 장악하여 활발한 상업활동도 전개했다. 일본에 유학사상 등 새로운 문물을 전해주기도 했으며 이 같은 신기운을 배경으로 『서기』라는 국사 책을 펴냈다.

 

2. 한 병합(369)

왕권 확립을 바탕으로 해 사방으로 정복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남으로는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백제의 세력권에서 이탈해 있던 마한의 잔여 세력을 경략 · 복속시킴으로써 전라도 지역 전부를 지배 영역으로 확보하였다. 그리고 낙동강 서쪽의 가야 세력에도 손을 뻗쳐 이들을 부용(附庸)하게 함으로써 백제의 영향권 내에 넣었다.

 

3. 고국왕 사망(황해도)

남방 지역의 평정이 일단락된 뒤에는 북방으로의 진출을 도모하였다. 이러한 북진은 당시 남진 정책을 추구하던 고구려와의 대립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양국의 군사적 충돌은 369년 치양성(雉壤城 : 지금의 황해도 배천)싸움에서부터 비롯되었으며, 그 절정은 371년에 벌어진 평양성(平壤城) 싸움이었다. 이 싸움에서 왕은 태자와 더불어 정기(精騎) 3만 명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해 마침내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고 대방고지(故地)까지 차지하는 개가를 올렸다. 이리하여 백제는 사상 최대의 영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4. 고대국가의 성기

즉위 후 왕권 강화 및 확립에 주력해 왕위 계승에서 초고왕계의 계승권을 확고히 하였다. 이는 왕과 아들 근구수왕의 왕명이 각각 초고왕 · 구수왕 앞에 ‘근(近)’자를 붙여 만들어진 것에서 알 수 있다. 또 진 씨(眞氏) 가문에서 왕비를 맞아들여 왕실을 지지하는 배경 세력으로 삼았다. 그리고 지방을 보다 효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영역을 나누어 지방 통치 조직을 만들고 지방관을 파견하는 담로제(檐魯制)를 실시하였다. 이로써 왕은 중앙 집권화를 보다 확고히 할 수 있었다.

 

5. 자상속, 왕비족 진 씨 고정

근초고왕은 조고왕(照古王) 또는 초고왕(肖古王)으로도 전해진다. 『진서(晉書)』에는 ‘여구(餘句)’라고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제11대 비류왕의 둘째 아들이다. 왕비는 진 씨이고, 아들은 근구수왕 (近仇首王, 재위 375~384)이다. 346년부터 375년까지 30년간 백제를 다스렸다. 서울 석촌동 3호분을 근초고왕의 무덤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백제사에서 분서왕(汾西王, 재위 298~307)부터 근초고왕까지의 왕위계승은 매우 독특한 양상을 보인다. 백제 왕계를 이원적으로 보는 입장에서 보면 이른바 초고계 고이계가 번갈아서 왕위에 오르는 상황이 전개되는 것이다. 먼저 10대 분서왕은 고이왕-책계왕으로 이어지는 고이계 왕이었다. 그런데 분서왕 사후 비류왕(比流王, 재위 307~344)이 왕위를 계승했다. 비류왕은 초고왕-구수왕으로 이어지는 초고계이다. 그런데 11대 비류왕이 죽자, 이번에는 분서왕의 맏아들인 고이왕계 계왕(契王, 재위 344~346)이 즉위했다. 계왕은 즉위 3년 만에 사망하는데, 그 뒤를 이어 비류왕의 둘째 아들이자 초고계인 근초고왕이 즉위하게 된다.

 

근초고왕의 즉위 이전 왕위계승은 초고계와 고이계에 의해 분립적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근초고왕 이후부터는 근초고왕의 직계가 계속 왕위를 계승하면서 초고계에 의한 단선적인 왕위계승이 확립되었다. 왕위계승이 안정됨으로써 왕권이 안정되었고, 정국 운영의 주도권도 귀족이 아닌 왕이 장악할 수 있었다. 이러한 국내 정치의 안정은 근초고왕이 대외 정복활동을 추진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진씨(眞氏) 가문에서 왕비를 맞아들여 왕실을 지지하는 배경 세력으로 삼았다.

 

6. 고흥의 기 국사 편찬(374)

지배 영역의 확대와 통치 조직의 정비를 통해 왕권이 확립되고 문화가 발전하게 되자, 왕은 이와 같은 신기운을 배경으로 박사(博士) 고흥(高興)으로 하여금 <서기(書記)>라는 국사 책을 편찬하게 하였다. 『서기』의 편찬은 왕실 중심의 계보 정리와 더불어 왕실 전통의 유구성 · 신성성을 과시하고 왕권의 위엄을 돋보이게 하려는 데에서 취한 조처였다고 할 수 있다. 이리하여 근초고왕 대에는 백제의 최대 전성기를 이룰 수 있었다.

 

『삼국사기』백제본기 근초고왕 30년조의 말미에(374년)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백제는 개국 이래 아직 문자로 사실을 기록함이 없더니, 이에 이르러 박사 고흥을 얻어 비로소 서기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고흥은 일찍이 다른 책에는 나타나지 않으므로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하겠다.”라고 하여, 백제의 역사 편찬에 관한 구절이 보이고 있다. 여기서 서기를 역사서 이름이 아닌 보통명사로, 즉 공식적인 문자기록이 제도화되기 시작하였다는 의미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근초고왕 때와 결부되어 전해지고 있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백제는 오랫동안 낙랑군(樂浪郡)·대방군(帶方郡)에 인접해 있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한인들을 많이 흡수할 기회가 주어져 있었으며, 바로 그들의 영향으로 한문이 보급된 것은 비교적 이른 시기의 일로 짐작된다.

 

따라서, 『삼국사기』의 “아직 문자로 사실을 기록함이 없었다.”는 기사는 『서기』라는 국사의 편찬이 아직 없었다는 의미로 보아야 할 것이다. 더욱이, 정복국가로 대두한 근초고왕 때는 『국사(國史)』가 편찬된 신라의 진흥왕 때와 견주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서기(書記)』는 단순한 문자의 기록이 아닌 역사서로 규정하는 것이 마땅하다. 백제가 국가의 제도를 정비하고 대외적인 발전을 시작할 무렵에 편찬한 이 책은 중앙집권적 귀족국가 건설의 문화적 기념탑이라고 할 수 있다.

 

7. 진과 외교관계

왕은 정복 활동과 더불어 대외 활동도 활발히 전개하였다. 우선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 신라와 형제와 같은 우호 관계를 맺음으로써 한반도에서 힘의 균형을 이루었으며, 중국의 동진(東晉)과도 외교 관계를 수립해 동진으로부터 진동장군영낙랑태수(鎭東將軍領樂浪太守)에 책봉되기도 하였다.

 

 

8. 지도 하사(369)

일본열도 방면으로도 활발히 진출해 백제 계통의 세력들과 긴밀한 관계를 가졌다. 백제와 일본열도 세력과의 관계에 대한 물적 증거로는, 일본의 이소노가미신궁(石上神宮)에 간직되어 온 칠지도(七支刀)가 있다. 이 칠지도는 당대의 금석문 자료로서 칼에 새겨진 명문(銘文)의 내용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하지만, 내용의 핵심은 이 칠지도가 근초고왕 때 만들어졌고 백제의 후왕(侯王)인 왜왕(倭王)에게 하사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9. 직기 왕인 박사 파견(일본에 천자문 전래 : 아스카 문화)

근초고왕 대에 백제는 문화의 진흥과 일본으로의 전수 면에서도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대방 지역을 점령하면서 중국계 사람들을 포섭해 문화의 질을 높였고, 나아가 일본열도에 새로운 문물을 전수해 주었다. 그 좋은 예로는 왕인과 아직기(阿直岐) 등을 일본에 보내 <천자문>과 <논어>를 전해 줌으로써 일본에 유학 사상을 일으킨 것을 들 수 있다.

 

10. 요지역 획득

중국이 호족(胡族)의 침입으로 분열된 시기를 이용, 요서(遼西) 지방으로 진출해 백제군(百濟郡)을 설치하였다. 백제의 요서 지역 진출은 요동 지역으로 진출해 오는 고구려 세력을 견제함과 동시에, 상업적인 측면에서 무역 기지의 확보라는 의미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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