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문_청나라로부터 독립

독립문은 왕실과 국민들의 모금으로 자금을 마련한 후, 1896년 공사를 시작해서 1897년에 완공하였다. 이때는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던 시기가 아니었다. 그런데 왜 건물 이름에 독립이 들어간 것일까?
독립 협회나 독립문의 독립은 외세, 그중에서도 오랫동안 조선을 간섭한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의미하였다. 조선이 중국의 간섭에서 벗어나 독립 의지를 확고히 한 것은 청일전쟁(1894~1895)에서 청이 패배한 이후였다. 독립문 앞에 남아 있는 영은문의 주춧돌이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 준다. 영은문의 영은은 맞이할 영迎, 은혜 은恩으로, 중국의 은혜에 감사해하며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문이라는 뜻이다. 새 임금이 즉위하면 임금이 직접 나가서 조칙을 가져온 중국 사신을 영은문에서 맞아들여야 했다. 중국에 대한 사대 관계를 상징하는 영은문이 헐린 자리에, 독립 협회는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상징하는 독립문을 세운 것이다. 독립문과 영은문 주춧돌은 하나의 세트처럼 독립문을 옮길 때 같이 이동하였다.
독립문을 세우자는 이야기는 아관 파천으로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 있을 때 나왔다. 한 나라의 군주가 다른 나라 공사관에서 지낸다는 것은 독립 국가로서 체면을 구기는 일이었다. 독립문 건립은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려는 조치의 하나이기도 했던 것이다. 또한 세계 각국에 조선이 독립국임을 나타내고자 하는 뜻도 있었다.
독립 협회는 1896년 7월 창립 후 국민들에게 독립문 건설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다. 조선의 독립은 정부만의 경사가 아니라 인민의 경사이니 함께 돈을 내자는 것이었다. 왕실이 왕태자(후에 순종) 명의로 1,000원이라는 거액을 기부했고, 국민의 모금으로 12월 말에는 4,700여 원의 기금이 모였다. 독립문은 대한 제국을 선포한 직후인 1897년 11월 20일에 완공되었다. 독립문의 앞쪽에는 한글로 독립문과 태극기, 그리고 대한 제국 황실의 상징인 오얏꽃을 새겨 독립의 의지와 함께 새로 태어난 대한 제국을 적극적으로 드러내었다. 반면 중국 사신이 들어오던 방향인 독립문의 뒤쪽에는 보란 듯이 중국인들이 읽을 수 있는 한자로 獨立門(독립문) 글자를 새겼다.
청으로부터 독립이라는 상징성을 지닌 독립문은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으로부터 독립이라는 의미도 가졌다. 「독립군가」에는
"나가 나가 싸우러 나가, 독립문의 자유종이 울릴 때까지 싸우러 나가세"
라는 노랫말이 나온다. 그렇다면 일제는 왜 이것을 헐지 않았던 것일까? 일제는 청일전쟁에서 청을 패배시켜서 조선을 독립시켜 준 은인이 바로 일본이었다는 것을 선전하기 위해서 남겨 두었을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도 그 자리를 지켰던 독립문은 1979년 고가도로 공사로 현재의 자리로 옮기게 되었다. 독립도 개발 앞에선 힘을 쓸 수가 없었다.
서울 독립문 (서울 獨立門)

독립문은 높이 14.28m, 너비 11.48m 크기의 문으로, 자주민권과 자강운동의 기념물이다.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이후 자주독립의 결의를 다짐하려고 중국 사신을 영접하여 사대외교의 표상으로 인식된 영은문(迎恩門)을 헐고 그 자리에 건립하였다. 곧 1896년(건양 1)에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徐載弼)은 독립협회를 조직하고서 독립문 건립을 발의하였는데, 그 뒤 고종 황제의 동의를 얻고 뜻있는 많은 애국지사와 국민들의 호응을 받아 1896년 11월 21일에 정초식(定礎式)을 거행하였다. 1년 뒤인 1897년 11월 20일에 완공하였다.
이 문의 건축 양식은 서재필의 구상에 따라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본땄다. 다만 미적 배려가 부족하고 석재를 쌓는 수법도 이전의 성벽을 쌓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서재필의 자서전에 의하면, 설계는 독일 공사관의 스위스인 기사가 하였고, 조선인 목수가 시공하였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경성부사(京城府史)』에는 러시아인 사바틴이 설계를 하고, 조선인 심의석(沈宜錫, 1854~1924)이 공사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문은 화강석 쌓기로 건립하였는데, 가운데 부분에는 홍예문(虹霓門)이 있고, 문 안쪽의 왼쪽에는 정상으로 통하는 돌계단이 있으며, 정상에는 돌난간이 둘러져 있다. 홍예문의 이맛돌에는 오얏꽃[李花] 문장이 새겨져 있고, 그 위의 앞뒤 현판석에는 각각 한글과 한자로 ‘독립문’이라는 쓴 글씨와 함께 그 좌우에 태극기가 새겨져 있다. 문 앞에는 이전의 흔적인 서울 영은문 주초 2개(사적, 1963년 지정)가 서 있다.
1917년에 수리공사를 하였고, 1928년에는 조선총독부가 받침 부분이 내려앉을 위험이 있다고 하여 공사비 4000원을 경성부에 위탁하여 크게 수리하기도 하였다. 당시에 벽체 안쪽에 새로운 재료로 강조한 철근콘크리트를 보강하였다. 1979년에 성산대로 공사로 인해 원래의 위치에서 서북쪽으로 70m 떨어진 지점으로 옮겼다. 원래 자리에는 ‘독립문지. 이전일자 1979. 7. 13. 서울특별시장’이라고 새긴 가로 · 세로 각 70㎝ 크기의 기념동판을 묻었다. 이전공사는 1980년 1월에 마쳤다.
독립문에 관한 서재필의 논설
서재필은 그가 발행한 독립신문의 1896년 6월 20일자 국문본 논설에서 독립문 창건의 취지를 처음 본격적으로 제안하였는데, 그 내용은 주로 청나라로부터의 독립과 연관지어 설명되고 있으므로, 독립문의 취지는 일본제국이 아닌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조선 인민이 독립이라 하는 것을 모르는 까닭에 외국 사람들이 조선을 업신 여겨도 분한 줄을 모르고 조선대군주 폐하께서 청국 임금에게 해마다 사신을 보내서 책력을 타 오시며 공문에 청국 연호를 쓰고 조선 인민은 청국에 속한 사람들로 알면서도 몇 백 년을 원수 갚을 생각은 아니 하고 속국인 체 하고 있었으니 그 약한 마음을 생각 하면 어찌 불쌍한 인생들이 아니리요 백성이 높아지려면 나라가 높아져야 하는 법이요 나라와 백성이 높으려면 그 나라임금이 남의 나라 임금과 동등이 되서야 하는데 조선 신민들은 말로 임금께 충성이 있어야 한다고 하되 실상은 임금과 나라 사랑 하는 마음이 자기의 몸 사랑하는 것만 못한 까닭에 몇 백 년을 조선대군주 폐하께서 청국 임금 보다 나진 위에 계셨으되 그 밑에서 벼슬하든 신하들과 백성들이 한 번도 그것을 분히 여기는 생각이 없어 조선대군주 폐하를 청국과 타국 임금과 동등이 되시게 한 번을 못하여 보고 삼년 전 까지 끄어러 오다가 하나님이 조선을 불쌍히 여기셔서 일본과 청국이 싸움이 된 까닭에 조선이 독립국이 되어 지금은 조선 대군주 폐하께서 세계 각국 제왕들과 동등이 되시고 그런 까닭에 조선 인민도 세계 각국 인민들과 동등이 되었는지라 이 일을 비교 하여 볼진대 남의 종이 되었다가 종 문서를 물은 셈이니 이것을 생각하거드면 개국 한지 오백여 년에 제일 되는 경사라 … 근일에 들으니 모화관에 이왕 연주문 있던 자리에다가 새로 문을 세우되 그문 이름은 독립문이라 하고 새로 문을 그 자리에다 세우는 뜻은 세계 만국에 조선이 아주 독립국이라 표를 보이자는 뜻이요 이왕에 거기 섰던 연주문은 조선 사기에 제일 수치 되는 일인즉 그 수치를 씻으라면 다만 그문만 헐어 버릴 뿐이 아니라 그문 섰던 자리에 독립문을 세우는 것이 다만 이왕 수치를 씻을 뿐이 아니라 새로 독립하는 주추를 세우는 것이니 우리가 듣기에 이렇게 기쁘고 경사로운 마음이 있을 때에야 하물며 조선 신민들이야 오직 즐거우리요 남의 나라에서들은 승전을 한다든지 국가에 큰 경사가 있다든지 하면 그 자리에 높은 문을 짓는다든지 비를 세우는 풍속이라 그문과 그 비를 보고 인민이 자기 나라에 권리와 명예와 영광과 위엄을 생각 하고 더 튼튼히 길러 후생들이 이것을 잊어 버리지 않게 하자는 뜻이요 또 외국 사람들에게도 그 나라 인민의 애국 하는 마음을 보이자는 표라 …
— 독립신문 국문본 1896년 6월 20일자 1면 1단 논설 번역문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을 염원하며 세운 서울 독립문

서울 독립문은 독립협회가 자주독립국가의 결의를 다지기 위해 세운 석조문이다. 19세기 말 열강에 의한 이권침탈과 주권침해 압력이 거세지자 자주독립에 대한 열망이 생겨났다. 이에 서재필이 조직한 독립협회 주도하에 국왕의 동의를 얻고 애국지사와 국민들의 뜻을 모아 중국 사신을 영접하던 영은문 자리 근처에 독립문을 건립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중국 사신을 접대했던 모화관을 고쳐 독립관이라고 이름하고 독립협회의 집회 장소와 사무실로 사용하였다. 조선시대부터 중국에 대한 사대의 상징으로 존재했던 영은문과 모화관은 자주독립의 상징들로 변모해 나갔다.
영은문 자리에 세워진 독립문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 서대문 독립공원에는 1897년 11월 20일에 세워진 독립문이 우뚝 서 있다. 이 독립문은 독립협회가 자주독립국가의 결의를 다지고 위상을 강화하기 위해 세운 석조문이다. 1896년을 전후해 열강에 의한 이권침탈과 주권침해 압력이 거세지자 자주독립에 대한 열망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에 서재필이 조직한 독립협회 주도하에 국왕의 동의를 얻고 애국지사와 국민들의 뜻을 모아 중국 사신을 영접하던 영은문(迎恩門)을 허문 자리 근처에 독립문을 건립하였다.
개혁파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창립한 독립협회
1986년 내정개혁과 제도개혁을 추진했던 갑오개혁이 외국세력의 간섭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나라의 자주독립을 이루지 못한 국민들은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열망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개혁파 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창립한 단체가 독립협회였다. 독립협회는 나라의 자주독립을 강화하기 위해 국민이 스스로 정치에 참여하고 주권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민들의 성금을 모아 건축한 독립문
독립문이 있던 자리에는 조선 중종 때 건립된 영은문이 있었다. 그러나 1894년 청국에 대한 사대외교 철폐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영은문은 중국에 대한 굴욕외교 상징물이라고 여겨져 1895년 2월에 철거되었다. 그리고 독립협회는 영은문이 헐린 장소에 독립문을 세우기로 결정한다. 당시 독립문이 무악재를 향하고 있었는데 중국에 대한 자주독립을 상징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무악재는 중국 사신들이 한양으로 오는 유일한 길목이었기 때문이다.
독립문 건립이 결정되자 서재필이 앞장서서 주도하였고 독립문 건립 배경을 『독립신문』에 실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렸다. 필요한 비용은 각계각층과 국민들의 성금을 모아 마련했다. 공사 총괄은 당시 유명한 건축기사였던 심의석이 담당하고, 석재 가공은 한국의 고급 기술자들이 맡았다.
독립협회는 독립문뿐만 아니라 독립관과 독립공원 건립도 함께 추진하였으나 경비 부족으로 계획이 모두 실천되지는 못했다. 대신 중국 사신이 우리나라를 방문할 때 맞이하여 접대했던 모화관을 고쳐 독립관이라고 명명하고 독립협회의 집회 장소와 사무실로 사용했다. 이처럼 조선시대부터 중국에 대한 사대의 상징으로 존재했던 영은문과 모화관은 19세기 말에 이르러 자주독립의 상징들로 변모하였다.
오랜 세월 수난을 겪어온 독립의 상징
그러나 자주독립의 큰 뜻으로 세워진 독립문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여러 차례 수모를 겪었다. 1908년 독립문 옆에 서대문형무소가 건립되면서 일제가 독립문에 철책을 치고 사람들의 접근을 막아버리는 바람에 방치되었다. 그리고 1919년 3.1 운동 당시에는 청년들이 독립문 태극기에 채색을 하자 일제는 이를 지우려고 소방대를 동원해 물을 뿌리는 등 독립문 기둥을 훼손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1979년에는 성산대로 고가 공사가 진행되면서 무악재를 바라보고 있던 독립문이 옮겨져 서대문형무소를 향하게 되었다. 오랜 세월 풍파를 겪어온 독립문은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32호로 지정되었으며, 서대문형무소역사관, 3.1독립선언기념탑 등과 함께 서대문 독립공원을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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