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켄지의 「자유를 위한 한국인의 투쟁」_"I plead for Freedom and Justice"

1907년, 한 외국인 기자는 조선 의병을 만날 수 있다는 정보에 경기도 양평의 깊은 산골짜기를 헤매고 다녔다. 운 좋게도 곧 대여섯 명의 의병을 만날 수 있었다. 기자는 그들의 행색을 살펴보았다. 모두 총을 들고 있었지만, 쓸만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잠시 후, 의병 대장으로 보이는 인물이 나타났다. 기자는 그에게 자기가 본 일본군은 전력이 강해 보였다며, 여기에 맞설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의병 대장은 뜻밖의 대답을 하였다.
이기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자피 싸우다 죽게 되겠지요. 그러나 좋습니다. 일본의 노예가 되어 사느니 자유민으로 죽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이 기록을 남긴 기자는 영국 신문 「데일리 메일」의 매켄지이다. 한국에 오기 전에는 한국보다 일본에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이다. 그는 1904년 러일 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대한 제국을 찾았고, 2년 후 재차 방문하였다. 매켄지가 만난 의병들은 '정미의병'이었다. 을사조약 체결로 활발해진 의병 활동은 1907년(정미년) 강제 해산된 대한 제국의 군인들이 합류하면서 더욱 거세졌다.
매켄지는 의병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의병들은 무기도 군복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지만, 영롱한 눈초리와 자신만만한 미소를 보였다고 기록하였다. 그는 1908년 이러한 취재를 바탕으로 일제 침략의 실상과 대한 제국의 저항을 생생히 담은 「대한 제국의 비극」을 출간하였다. 일본에 호감을 가지던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망국의 위기에 빠진 대한 제국과 한국인을 돕기 위한 그만의 싸움이었다.
메켄지는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이후에는 한국에 관심을 가졌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한국의 독립을 지원하고, 일제의 만행을 알리기 위해 노력하였다. 「자유를 위한 한국인의 투쟁」이라는 책을 저술하여 한국의 독립운동을 세계에 알렸다. 그뿐만 아니라 1920년 10월 영국 런던에서 한국 친우회를 창립해 한국의 독립을 실질적으로 돕는 방안을 고민하기도 하였다.
매켄지는 자신의 저서 「자유를 위한 한국인의 투쟁」서문 마지막에
"나는 자유와 정의를 기원한다(I plead for Freedom and Justice)"
라고 썼다. 매켄지가 한국을 도운 것은 결코 동정심이나 정치적 계산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의병 전쟁과 31운동에서 자유를 향한 한국인들의 갈망과 불의로 가득한 일제의 폭압을 보았다. 자유인으로서 그는 폭압에 맞서 싸우는 또 다른 자유인들을 돕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2014년 대한민국 정부는 매켄지에게 건국 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독립운동가 프레드릭 아서 맥켄지(Frederick Arthur McKenzie, 1869~1931)
나는 지금 ‘자유’와 ‘정의’를 외치고 있다. 세계는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가?
I am crying for freedom and justice. Is the world listening to me?
프레드릭 아서 맥켄지(Frederick Arthur Mackenzie, 1869~1931)는 1904년 런던 ‘데일리 메일(Daily mail)’의 아시아 특파원으로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이후 잠시 귀국하였다가 1906~1907년에 다시 한국을 찾아 멸망해 가는 한국의 역사를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그는 특히 1907년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무명의 의병들을 직접 만나 취재했습니다. 맥켄지는 이때의 경험을 『대한제국의 비극 (Tragedy Of Korea)』 이라는 책으로 출간하였는데, 그의 책은 국제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또한 1919년 3·1 운동의 현장에 있었습니다. 그해 4월 일제가 3·1운동의 보복으로 ‘제암리 학살 사건’을 일으키자, 그 현장을 직접 목격한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의 증언을 토대로 그 진상을 세계에 알렸습니다. 고국으로 돌아간 맥켄지는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1920년에 『한국의 독립운동(Korea’s Fight for Freedom)』을 출간하여 일제의 만행과 한국인들의 독립의지를 세계에 알렸습니다. 이후 맥켄지는 1920년 영국 에서 한국친우회를 조직하며 한국의 독립운동을 계속 지원했습니다.
맥켄지가 처음 한국을 방문했을 때 그는 일본에 호의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취재를 통해 한국인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일제의 만행과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한국인들을 목격하고 그의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언론인으로서 자신이 발견한 진실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언론인으로서 자유와 정의를 위해 일본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싸운 프레드릭 아서 맥켄지는 우리의 위대한 영웅입니다.
“이 책에서 나는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한 고대 민족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비극적인 공포 속에서 살다가 오랜 잠에서 어렴풋이 깨어난 한 몽고계 민족에 관해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문명에 있어서는 빼놓을 수 없는 요소들, 이를테면 자유, 자유로운 신앙, 그들의 여성의 명예, 그리고 그들 자신의 영혼의 계발과 같은 것들을 누린 적이 있으며 지금도 그것을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나는 지금 ‘자유’와 ‘정의’를 외치고 있다. 세계는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가?”-『한국의 독립운동』 서문 중
한국친우회 (韓國親友會)
한국친우회는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나타난 한국인의 독립 열망을 전파하고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기 위해 조직된 친한 외국인 단체이다. 서재필이 톰킨스 목사 등과 함께 1919년 5월 16일에 결성하였다. 설립 취지문에 기독교와 인도적 차원의 민간 단체임을 밝혔지만 서재필은 한국독립을 위한 정치적 운동을 계획하였다. 1921년까지 미국 각지의 21개소와 영국과 프랑스 등 해외에 2개소가 조직되어 총 25,000여 명의 회원을 확보하였다. 한국의 실정을 국제적인 조직망을 통해 효과적으로 선전함으로써 한국의 독립을 위한 친한 여론을 일으키는 데 기여하였다.
설립목적
1. 기독교와 자유독립국가를 위해 고통받고 있는 한국민족에게 미국민의 동정과 도덕적인 지원을 보낸다.
2. 한국민족이 지금까지 받아 온 일제의 학정과 부당한 대우가 가능한 더 이상 재발되지 않도록 미국민의 도덕적 영향
력과 호의적인 조정을 다한다.
3. 한국에 관한 진실한 정보를 미국민들에게 알린다.
4. 세계 모든 민족과의 우정과 사랑 그리고 영원한 평화를 증진시키며 하나님의 법이 온 세계에 수립되도록 돕는다.
연원 및 변천
한국친우회의 결성을 처음 제안한 사람은 서재필이었다. 그는 필라델피아한인자유대회(제1차 한인회의)에서 친한 미국인들의 단체설립의 필요성을 처음으로 제시한 뒤, 대한인국민회 북미총회장 백일규(白一圭)에게 보낸 1919년 4월 29일자 편지에서 친한 미국인단체를 조직하여 한국에 대한 동정여론을 일으키며, 독립을 위한 미국정부의 압력단체로 활용할 수 있음을 구체적으로 밝혔다.
서재필은 자신의 뜻에 동조하는 톰킨스(F.W.Tomkins) 목사·오버린대학 사회학과 교수 밀러(H.A.Miller)·International News Service 기자 베네딕트(G.Benedict) 등과 함께 한국친우회 결성에 적극 나섰다. 서재필이 톰킨스 목사와 함께 1919년 5월 2일필라델피아시티클럽에서 저명인사 22명을 초청하여, 발기모임을 가짐으로써 본격화되었다. 발기위원으로는 톰킨스 목사·서재필·베네딕트 기자가 선임되었다.
1919년 5월 15일 이들 발기위원들이 중심이 되어 리딩(Reading)시 라자(Rajah)극장에서 대규모 대중집회를 개최한 후, 5월 16일필라델피아에서 정식 결성되었다. 취지문에 따르면 한국친우회는 극동에 있는 기독교와 민주주의의 지원을 위해 미국민의 여론 조성이 무엇보다도 필요하지만, 이는 기독교인으로서 기독교와 인도주의 측면에서 도덕적 의무를 다하기 위함이지, 한·중·일의 정치적 문제에 간섭하고자 함이 아니라 하여 인도적 차원의 민간단체임을 밝혔다. 한국친우회의 결성은 3·1운동으로 한국의 실정을 국제적인 조직망을 통해 효과적으로 선전함으로써, 한국의 독립을 위한 친한여론을 일으키는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1922년 2월 초 워싱턴회의 종결 이후 서재필이 모든 활동을 중지하기로 하면서, 한국친우회는 침체에 빠졌다. 그러나 근본적인 침체의 원인은 3·1운동을 이용한 선전활동이 시간이 지나면서 미국 내에서 선전재료로서의 가치가 줄어든 점, 워싱턴회의에서 미국정부가 현상유지 정책의 일환으로 일본을 자극할 수 있는 한국문제에 무성의로 일관한 점, 워싱턴회의 이후 세계열강들의 질서가 일시적인 안정기로 돌아섬으로써, 친우회 활동이 더 이상 미국민의 호응을 얻기가 힘들어진 점 등이었다.
기능과 역할
그러나 서재필은 이 조직이 정치적인 성격을 띨 것임을 예고하였다. 즉 한국친우회가 성공하여 100만 이상의 회원을 얻으면, 사람의 힘과 금전의 힘을 아울러 얻어 우리가 원하는 무슨 일도 할 수 있다고 하였듯이 한국독립을 위한 정치적 운동까지 계획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친우회는 필라델피아한국통신부와 상호 유기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협력하였다. 그러나 필라델피아한국통신부나 구미위원부 등으로부터 어떠한 재정지원을 받지 않고 회비 수입과 의연금에 의해 운영되었기 때문에, 독립된 자치기관의 성격을 유지하였다. 1921년까지 미국 각지의 21개소와 영국과 프랑스 등 해외에 2개소가 조직되어, 총 25,000여 명의 회원을 확보하였다.
의의와 평가
한국친우회의 결성과 활동에는 몇 가지 특징이 발견된다. 첫째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인도적이고 비정치적인 시민단체로 출발한 친우회가 한국문제에 관한 정치적인 압력단체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이것은 각 지역에서 친우회를 결성할 때 결의문에도 나타나고 있다. 둘째 한국친우회 결성이 미국의 중부와 동부지역에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선전활동이 이들 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한국통신부와 친우회 본부가 서재필이 있는 미 동부지역인 필라델피아에 있었던 사실과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셋째 친우회의 결성이 주로 대중집회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대중집회를 열기 위해서는 장소의 선정이나 진행 절차, 소요비용·인원동원 등 많은 준비가 필요한데, 친우회가 이러한 방법을 통해 결성되고 있는 것은 미국 시민들의 자발적인 호응이 컸다는 점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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