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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두문자

고구려 태조왕 두문자 : 태 형 옥 동 기

by noksan2023 2023. 8.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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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태조왕
고구려 태조왕 : 고구려 밑그림을 그리다

 

고구려 태조왕 : 태 형 옥 동 기

 

태 : 조왕(53~146) 소노부 < 계루부 고씨 

형 : 왕위 제상속

옥 : 저(56) 복속

동 : 예 일부 복속

기 : 고대국가 틀마련(5부족 < 5부)

 

1. 조왕(53~146)

태조대왕은 고구려의 제6대왕이다. 국조왕(國祖王)이라고도 하며, 이름은 궁(宮)이다. 태조대왕의 아버지는 유리왕(琉璃王)의 아들인 재사(再思)이고, 어머니는 부여 출신이라고 전한다. 태조대왕 앞의 왕은 모본왕(慕本王)인데, 성품이 사납고 잔인하여 사람을 깔고 앉거나 베개로 삼는가 하면, 함부로 죽이기까지 하였다. 폭정을 펼치던 모본왕은 결국 자신의 시중을 들던 모본 사람 두로(杜魯)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태자가 있었지만 나라 사람들은 그가 어리석다고 하여 궁으로 하여금 대신 왕위를 잇게 하였다. 이때 태조대왕의 나이 겨우 7살이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태조대왕은 태어나면서부터 눈을 뜨고 볼 수 있었고, 어렸을 적부터 뛰어나게 영리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왕이 되기에는 지나치게 어린 나이였으므로 한동안 태후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했다고 한다.

 

2. 왕위 제상속

수성은 태조대왕의 친동생으로 날쌔고 용감하였으나 인자함이 적은 성품의 인물이었다. 그는 태조대왕이 한나라와 전쟁을 벌일 때 군사를 이끌고 큰 활약을 하였으나 야심 또한 작지 않았다. 어느 날엔가는 그를 따르는 주변 신하들이 태조대왕이 이미 늙었음에도 왕위를 수성에게 물려주지 않음을 비난하고, 미리 계획을 세울 것을 권하였다. 수성은 처음에 짐짓 사양하는 듯한 언행을 보였지만 이미 속으로는 다른 마음을 품었고, 나중에는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고 직언하는 이를 해하기도 하였다.

 

수성이 반란을 일으킬 조짐을 보이자 우보(右輔) 벼슬을 하던 고복장(髙福章)이 태조대왕에게 수성을 죽이지 않으면 자손들에게 해가 갈 것이라 경고하였다. 하지만 태조대왕은 이미 나이를 먹고 늙어 사리판단이 어두워져 있는 상태였다. 결국 146년(태조대왕 94) 수성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별궁으로 물러났다. 76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차대왕(次大王)은 자신의 심복들에게 높은 관직을 맡기는 한편 고복장을 죽이고, 태조대왕의 맏아들인 막근(莫勤)까지 죽였다. 그 아우인 막덕(莫德)은 자신에게 화가 미칠 것이라 여겨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잘못된 판단으로 충신과 아들들을 잃은 태조대왕은 165년(차대왕 20) 별궁에서 11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3. 저(56) 복속

태조대왕 치세의 고구려는 사방으로의 영토 확장이 이루어진 시기였다. 한(漢) 나라와의 전쟁은 물론 주변 소국들에 대한 병합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중국의 역사서에서도 태조대왕이 여러 차례 요동 지역을 침입하여 한나라를 괴롭혔음을 전하고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태조대왕은 56년(태조대왕 4) 동옥저(東沃沮)를 정벌하였다. 그 결과 국경이 동쪽으로는 창해(滄海)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살수(薩水)에 이르게 되었다. 68년(태조대왕 16)에는 갈사국(曷思國)이 항복해 왔고, 72년(태조대왕 20)에는 관나부(貫那部)의 패자(沛者) 달가(達賈)를 시켜 조나(藻那)를 정벌하는가 하면, 74년(태조대왕 22)에는 환나부(桓那部)의 패자 설유(薛儒)를 시켜 주나(朱那)를 정벌하였다.

 

98년(태조대왕 46)에는 나라의 동쪽 국경인 책성(柵城)을 돌아보았다. 신하들과 함께 잔치를 열고 관리들에게 물건을 하사하였으며 바위에 공적을 기록하였다. 태조대왕이 책성으로 간 것은 봄 3월이었는데, 왕도로 돌아온 것은 겨울인 10월이었다. 따라서 단순히 책성만을 방문한 것이 아니라 그동안 확장한 고구려 영토를 순수(巡守)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태조대왕은 114년(태조대왕 62)에도 남해(南海) 지역을 두루 살피고 돌아다니는 등 순수 행보를 이어갔다.

121년(태조대왕 69)에는 한나라와의 큰 전쟁이 있었다. 봄에 유주 자사를 비롯해 현도 태수, 요동 태수 등이 병력을 이끌고 국경을 넘어와 고구려를 공격하고 병마와 재물을 빼앗자, 태조대왕은 동생인 수성(遂成)에게 군대를 거느리고 가 맞서 싸우게 하였다. 수성은 거짓 항복을 하는 등 기만술을 사용하여 적들을 방심시켰다가 몰래 요동과 현도를 공격하여 성곽을 불태우고 2,000여 명을 살상하였다. 한나라군의 구원 병력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고구려군이 철수한 뒤였다. 같은 해 여름에는 요동의 선비족(鮮卑族)) 8,000여 명과 함께 요대현(遼隊縣)을 공격하여 약탈하였고, 추격해 오는 요동 태수와 그 이하 관속들을 살해하였다. 얼마 뒤 고구려는 마한과 예맥의 군사 수천 명을 거느리고 현도성을 포위하였는데, 이때 현도성을 구원하러 온 북부여의 2만 병력에게 대패를 당하기도 하였다.

 

4. 예 일부 복속

 

5. 고대국가 틀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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