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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두문자

고구려 동천왕 두문자 : 동 오 서 관 국 밀 유

by noksan2023 2023. 8.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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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천왕
동천왕

 

고구려 동천왕 : 동 오 서 관 국 밀 유

 

동 : 천왕(227~248)

오 : 와 통교(위나라 견제 목적)

서 : 안평 격(242)

관 : 위장 구검 침입(244)

국 : 수도 내성 함락

밀 : 

유 : 

 

 

위나라를 막은 동천왕
위나라를 막은 동천왕

 

1. 천왕(227~248)

동천왕은 삼국시대 고구려 제11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227년~247년이며 산상왕의 아들이다. 재위 전반기에는 요동 지방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던 공손씨와 계속 대립하다가 238년에 위나라 군대를 도와 공손씨 세력을 멸망시켰다. 하지만 위나라와 국경을 접하게 되면서 본래의 낙랑군 관할지역을 다시 확보하려던 위의 동방정책과 부딪히게 되었다.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의 침입을 받아 일시 환도성이 함락되는 위기를 겪었지만 밀우·유유 등의 활약으로 그들을 몰아내었다. 동천왕이 승하하자 왕의 은덕을 사모한 많은 백성들이 따라 죽었다고 한다.

 

동천왕은 ‘동양왕(東襄王)’이라고도 한다. 이름은 ‘우위거(憂位居)’ 또는 ‘위궁(位宮)’이며 아명은 교체(郊彘)이다. 위궁이라는 이름은 태어나면서부터 눈을 뜨고 능히 사물을 본 것이 할아버지뻘인 태조왕 궁(宮)을 닮았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라 한다. 산상왕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관노부 주통촌(酒桶村) 출신의 산상왕소비(小妃)이다. 성품은 관대하고 인자하였다. 213년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부왕이 승하하자 즉위하였다. 요동(遼東) 진출로를 놓고 위(魏) 나라를 선제공격했으나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주1의 침입을 받아 일시 환도성이 함락되는 등 위기를 겪었으며 국세를 만회하는 데 노력하였다.

 

2. 와 통교

치세 초기에는 조위(조조의 위나라)와 우호 관계를 유지했다. 이때 동쪽의 오나라의 손권이 요동 공손씨 정권의 수장 공손연에게 사신을 보내 동맹을 맺으려고 했는데, 오히려 공손연은 손권을 배신하고 사신들의 목을 베어 위나라에 보냈다. 이 사신들 중 일부가 탈출하여 고구려까지 넘어왔는데, 동천왕은 그들을 잘 대접하고 보물과 호위 무사를 딸려서 오나라로 도로 보내주었다. 죽은 줄 알았던 사신들이 돌아오자 손권은 기뻐하며 공손연 대신에 고구려와 동맹을 맺기로 하고 다시 고구려에 사신을 보냈고, 이때 손권이 동천왕을 '흉노 선우'로 책봉했다.

 

3. 안평 격(242)

238년에는 위나라 군대를 도와 공손씨 세력을 멸망시켰다. 그러나 공손씨 세력 멸망 이후 위나라와 국경을 접하게 됨에 따라 위와도 긴장관계로 바뀌었다. 그래서 242년 위의 서안평현(西安平縣)을 선제공격하기에 이른다. 이것은 고구려가 242년 당시 촉(蜀)의 강유가 북벌(北伐)을 재개하여 위를 침공한 시기를 노려 요동과 낙랑군(樂浪郡)을 잇는 요충지를 확보하고자 한 것이다.

 

4. 위장 구검 침입(244)

관구검은 자가 중공이고 하동군 문희현 사람입니다. 위명제(魏明帝 : 造詣)의 아들과 친하여 명제에게 총애를 받았고, 사마의(司馬懿)를 도와 공손연(公孫淵)을 정벌하였습니다. 명제는 그에게 유주자사와 도요장군, 호오환교위를 맡게 하였으며 그는 오환족을 끌어들임으로써 북방에서 입지를 굳힙니다. 이때, 고구려가 요동을 침공하였으므로 북방을 맡고 있던 관구검이 정벌에 나섰고. 그 공으로 좌장군 등 승진했고 이후 오나라와 전투에서 군공을 세웁니다. 그러나 관구검은 사마씨의 독재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킴으로써 사마씨와 대립하지만. 점점 전세가 사마씨에게 기움으로써 안풍진 도위가 관구검을 죽였고 이로써 '관구검의 난'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

 

서기 242년 관구검은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하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동천왕(위궁)은 2만의 군대로 비류수에서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위군의 우세로 점쳐졌던 전투는 의외로 예상 밖 결과를 냅니다. 바로 고구려군의 승리로 위군 3천여 명을 전멸시키는 쾌거를 이루어 낸 것입니다. 하지만 동천왕은 자만에 빠진 나머지 신하 득래의 충고를 무시하다가 관구검의 유인책에 걸려 사방의 공격을 당해 고구려군 1만 8천여 명이 죽음을 당하고 동천왕은 겨우 1천여 명만을 데리고 압록원으로 퇴각하는 뼈아픈 패배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관구검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현도태수 왕기를 보내 추격하도록 하고, 환도성을 점령하자 동천왕은 난을 피해 남옥저로 패주합니다. 다행히도 밀우, 유옥구가 위군을 저지하고 유유가 적장을 암살함으로써 위군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위나라와 고구려의 전투는 사실 국제전이었습니다. 선비족과 부여가 각각 병사와 군량을 위군에 보급했고 백제는 위나라 낙랑군을 공격하는 등 역사상 동아시아 첫 국제전이었습니다. 또한 동천왕이 이러한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 준 충신 밀우, 유옥구, 유유가 나온 까닭은 동천왕이 어질고 인자한 후덕한 군주였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동천왕이 죽자 그를 따라 죽으려는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만주에는 아직도 관구검이 만든 관구검공적비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에게는 아주 뼈아픈 역사이기도 한 역사의 한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5. 수도 내성 함락

244∼245년 2년에 걸쳐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의 침입을 받아 수도인 환도성이 함락당해 왕이 남옥저(南沃沮)를 거쳐 북옥저 방면으로까지 패주하였다. 관구검의 군사 행동은 현도태수(玄菟太守) 왕기(王頎)를 거느리고 직접 고구려를 정벌하는 것과 낙랑태수(樂浪太守) 유무(劉茂)주2와 대방태수 궁준(弓遵)주3으로 하여금 고구려에 예속된 동예를 정벌케 하는 두 가지 방향에서 진행되었다. 그 결과 낙랑군과 대방군의 군대는 동예의 항복을 받아 낙랑군에 종속시켰다. 고구려는 이 전쟁으로 인해 환도성이 파괴되어 247년 평양성(平壤城: 현재의 북한 평양이 아니라 국내성 부근에 위치한 임시 도성으로 추정)으로 일시 천도하기까지 했다.

 

고구려는 집안 지역을 오랫동안 도읍으로 삼아 발전하였다. 집안 지역에서 고구려의 도성은 평시성인 국내성과 방어성인 환도성(丸都城) 체제로 운영되었다. 즉,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평상시에는 평지에 자리하고 있는 국내성에 거주하던 왕은 외적의 침입과 같은 위기 상황에서는 산 위에 마련해 놓은 환도성으로 들어가 농성을 하곤 하였다. 국내성은 지금의 압록강과 통구하가 만나는 지점에 돌로 쌓은 방형의 성이다. 두 물길이 자연스럽게 성의 해자 역할을 하도록 조성되었다. 지금도 집안 시내에는 돌로 쌓은 성벽 유적이 뚜렷이 남아 있다. 학자들은 이 성 안에 고구려 왕궁과 관청들이 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환도성은 지금의 산성자산성(山城子山城)에 해당한다. 국내성에서 통구하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나오는 산성자산성은 동쪽․북쪽․서쪽이 높은 산봉우리로 둘러싸여 있고 트여 있는 남쪽에 돌로 성벽을 쌓아 틀어막은 천연의 요새이다. 산성자산성 내부에서는 왕궁 터를 비롯해 고구려 당시 조성된 여러 건물지가 발굴된 바 있다. 고구려는 이곳 국내성을 도읍으로 삼아 외적의 침입을 견디고 국난을 극복하며 힘차게 성장하였다.

 

6.  

밀우는 동부(東部) 출신이다. 244년(동천왕 18)과 그 이듬해 두 차례에 걸친 조위(曹魏)의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의 침입(『삼국사기』, 『삼국지』 魏書 齊王芳紀, 『자치통감』 등에서는 246년에 한 차례, 삼국지 위서 관구검전 및 동이전, 北史 고려전 등에는 244년과 245년의 두 차례 침입으로 기술되어 있음.)으로 동천왕은 수도인 환도성(丸都城 : 지금의 集安縣 山城子山城)을 함락당하고 남옥저로 피신하였다. 죽령(竹嶺 : 지금의 황초령) 부근에서 관구검 군의 별동부대인 현도태수(玄菟太守) 왕기(王頎))의 추격으로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이때 밀우 등이 결사대를 조직하여 추격병을 저지함으로써 동천왕을 무사히 피신하게 하였다. 이러한 전공으로 거곡(巨谷)·청목곡(靑木谷) 두 곳을 식읍(食邑)으로 받았다.

 

고구려 5부의 하나로 추정되는 동부(東部) 출신이다. 244년과 245년의 두 차례에 걸친 조위(曹魏)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毌丘儉)의 침입으로 고구려의 동천왕은 국도인 환도성(丸都城 : 지금의 集安縣山城子山城)을 함락당하고 멀리 남옥저(南沃沮 : 지금의 咸興)까지 피신하였지만, 계속적인 위군의 공세로 말미암아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이 때 유유는 밀우(密友)와 같이 위군의 진영에 가서 항복을 청하는 척하면서 위의 지휘관을 살해하고 함께 죽음으로써, 고구려가 위군에 대한 일대 반격을 가하여 위군을 패주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관구검의 고구려 침입기사는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지(三國志)』 위서 제왕방기(齊王芳紀), 『자치통감(資治通鑑)』 등에는 246년 한 차례 침공으로 되어 있으나, 『삼국지(三國志)』 위서 관구검전과 『삼국지(三國志)』 동이전 및 『북사(北史)』 고려 전에는 244년과 245년 두 차례 침공한 것으로 되어 있다. 관구검 군을 격퇴시킨 뒤 고구려는 유유에게 구사자(九使者 : 大使者의 오기로 추정됨)를 추증하였고, 그의 아들 다우(多優)도 대사자(大使者)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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