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사 두문자

고구려 문자왕 두문자 : 문 부 복 최 영

by noksan2023 2023. 8. 11.
반응형

 

부여 통합 문자왕
부여통합 문자왕

 

문자왕 : 문 부 복 최 영

 

문 : 자왕(491 ~ 519)

부 : 여(494 선비족의 공격으로 쇠퇴)

복 : 

최 : 고구려 

영 : 

 

 

고구려 최대 영토 : 문자왕(494)
고구려 최대 영토 : 문자왕(494)

 

1. 고구려 자왕

일명 명치호왕(明治好王)이라고도 한다. 이름은 나운(羅雲)이다. 장수왕(長壽王)의 손자이며, 아버지는 고추대가(古鄒大加) 조다(助多: 高助多)이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할아버지에게 양육되다가 장수왕이 죽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문자명왕(文咨明王)은 선대 왕에 이어 중국 남·북조(南北朝)와 등거리 외교를 맺어 국제관계를 안정시켰고, 고구려 남쪽 영토를 확장하는가 하면 금강사(金剛寺)를 창건하여 불교를 진흥시키는 등 고구려의 최대 전성기를 이룩하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등 관련 사료가 소략하여 문자명왕이 어떻게 나라를 다스렸는지는 잘 알 수 없으나, 498년에 금강사(金剛寺)를 창건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불교를 장려함으로써 고대 국가의 정신적 기반 확립에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2.  

494년 물길족(勿吉族)에게 멸망당한 부여(夫餘: 北夫餘)의 왕과 그 일족(一族)의 투항을 받아들였으며, 백제와 신라를 침공해 497년 신라의 우산성(牛山城), 512년 백제의 가불성(加弗城) 및 원산성(圓山城)을 점령하기도 했으나, 나·제동맹(羅濟同盟)을 통한 백제와 신라의 연합 작전으로 일진일퇴(一進一退)를 거듭하였다.

 

3. 고구려  

문자명왕 대에 북부여를 흡수하면서 고구려가 최대 영토를 일구었다고 보는 시각이 학계에서도 제기되지만 반론도 있어 확실하지는 않다. 영토를 확장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물길의 침략으로 쫓겨난 부여의 유민을 받아들인 것이며 부여 영역의 회수는 이후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 이후 《당서》에 고구려 국경이 기존 2,000리에서 동서 3,100리로 확장되어 요서의 조양(영주)에 접했다는 기록이나 《통전》, 《태평환우기》에 수나라 시절 고구려 영토가 동서 6,000리였다는 기록 등이 전해지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인식되는 전성기 이후에도 고구려가 영토를 확장했다고 보기도 한다.

“고구려는 대대로 큰 나라의 도움을 받아 외국을 다스리고 오랑캐의 교활한 무리들을 모두 정복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의 보물이 줄어들어 우리를 부끄럽고 창피하게 만들었는데, 이는 누구의 잘못인가? 지난날 조공이 충실하지 못한 책임은 지방의 관리한테 있는 거지. 그대는 나의 뜻을 문자명왕에게 전달하여 위엄과 회유의 책략을 잘 사용하여 나쁜 자들을 없애고, 동방의 백성들을 편안케 하여 부여와 섭라가 각각 옛 땅으로 돌아오게 하여 토산물의 공납을 지키라고 해라.

 

문자왕에 대한 평가는 무색무취한 태왕, 전성기를 무난히 유지한 태왕으로 보이지만 적은 사료로도 상당히 많은 문제를 내재한 군주라고 평가받을 만하다. 사실 후대인 안장왕이 깔끔하게 뒤처리를 하며 전성기를 유지시켰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전성기가 백제처럼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단 2세대로 끝나버렸을 수도 있었다. 이렇게 선대 왕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박한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외정에서 북방, 남방을 가리지 않고 실책을 거듭했기 때문. 북방의 기마 민족들인 물길, 거란과 남방의 농경 국가인 웅진 백제이 동성왕왕, 무령왕과 같은 중흥 군주들에게 힘에서 밀리기 시작했으며 특히 백제와 1:1에서 밀리기 시작한 게 문자명왕의 시대였다. 덕분에 장수왕 시기에 차지한 한강 유역을 일시적으로 빼앗긴 것으로 추측되는 사료들도 나오며 장수왕 시절부터 지속적으로 추진되던 남진 정책이 중단된 것 또한 문자명왕의 시기였다. 또한 지지부진한 외정의 결과 주변의 장악력도 장수왕 시기에 비해 떨어졌고 고구려의 국력이 이전과 같지 않음을 보여주고 말았다. 이 이후 안원왕 말기부터 평원왕 초반까지 고구려는 침체기에 접어들게 된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