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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두문자

소지마립간 두문자 : 소 우 행 시 결

by noksan2023 2023. 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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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지마립간
소지마립간

 

소지마립간 : 소 우 행 시 결

 

소 : 지마립간(479 ~ 500)

우 : 역설치(역로 개설)

행 : 정적 6부 마련(수도정비)

시 : 사설치(490 최초 시장)

결 : 혼동맹(493) VS  동성왕

 

 

삼국의 경쟁 : 4~6세기
삼국의 경쟁 : 4~6세기

 

1. 지마립간

소지마립간은 삼국시대 신라의 제21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479~500년이고, 자비마립간의 장자로 왕위에 올랐다. 어려서부터 효행을 지녔으며 겸손하고 공손해 사람들이 모두 감복했다고 한다. 기간 도로를 수리하고 수도에 시장을 열어 물화를 유통하게 했으며 전국적 연락망을 갖추는 등의 업적을 남겼다. 잦은 고구려의 침략을 백제와 동맹을 맺거나 가야와 연합해 막아냈고, 병사 위문과 민심 수습을 위해 지방 순행에 나서기도 했다. 백제 동성왕과는 결혼동맹을 맺기도 했으며 변경지방 요충지의 성을 개축하거나 증축해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했다.

 

2. 역 설치(역로 개설)

487년(소지마립간 9) 사방에 우역(郵驛)을 설치하고, 국내의 기간 도로인 관도(官道)를 수리하였다. 우역은 중앙 관아의 공문을 지방 관아에 전달하며 외국 사신의 왕래, 벼슬아치의 여행과 부임 때 마필(馬匹)을 공급하던 곳이었다. 주요 도로에 대개 30리마다 두었다. 소지마립간은 신궁 설치(487년)에 이어 같은 해 3월, 사방에 우역(郵驛)을 설치하고, 담당 관청에 명하여 관도(官道)를 수리하였다.

 

우역이란 공문서 전달이나 관물의 운송, 관리에게 숙박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설치한 일종의 교통·통신시설이다. 이러한 우역을 설치하고, 더불어 관도를 수리했다는 것은 중앙과 지방의 원활한 연결이 가능해졌다는 의미이다. 즉, 중앙의 명령이 지방까지 신속하게 전달되고, 역으로 지방의 일은 중앙으로 신속히 보고될 수 있도록 전달체계를 정비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조치들은 신라의 지방통치와 관련이 깊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관도의 정비는 신라가 지방관을 파견하기 위한 사전 정지작업으로, 문헌상 도사(道使)가 파견된 첫 시점으로 보기도 한다. 이후 활발히 이루어지는 축성사업에 지방민이 동원되는 것을 보면, 중앙의 지배력이 지방까지 직접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소지마립간은 지방에 대한 통치 방식을 직접지배로 전환해 감으로써, 왕권의 강화와 함께 중앙집권화를 추진한 것이다.

 

우역과 관도의 정비는 지방통치 뿐만 아니라 물자의 유통과도 관련이 있다. 앞서 눌지마립간은 사람들에게 우차(牛車)의 사용법을 알려주어 물자 수송을 편리하게 하였다. 운송 수단으로 소를 사용할 정도로 물자의 유통량이 증가한 것이다. 그리고 469년(자비마립간 12)에는 수도의 행정구역인 방리(坊里)의 이름을 새로 정하였다. 그만큼 수도의 인구가 증가하고, 규모가 확장되었다는 의미이다.

 

3. 정적 6부 마련

자비왕 대의 경주의 방리명(坊里名) 확정과 아울러 족제적(族制的) 성격이 강하게 남아 있는 육부(六部) 체제를 개편해 중앙 집권적인 통치 체제를 수립하려는 노력으로 이해된다. 또한 왕은 비열성(比烈城 : 지금의 함경남도 安邊) · 일선군(一善郡 : 지금의 경상북도 구미) · 날이군(捺已郡 : 지금의 경상북도 榮州) 등지를 순행(巡幸)주3해 병사를 위문하고 재해나 전쟁지역의 주민들을 위로해 민심을 수습하는 한편, 하는 일 없이 놀고먹는 백성들을 귀농시키기도 하였다. 이러한 치적은 신라의 대내적 결속력의 강화와 아울러 농업 생산력 증대에 어느 정도 기여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행정적 6부 체제란 신라 때에, 씨족을 중심으로 나눈 경주의 여섯 행정 구역. 급량부, 사량부, 본피부, 점량부, 한지부(漢祇部), 습비부(習比部)를 이른다.

 

4. 사설치(490 최초 시장 설치)

490년에는 왕경(王京)인 경주에 처음으로 시사(市肆)를 열어 사방의 물화(物貨)를 유통시켰다.

 

5. 혼동맹(493 VS 백제 동성왕)

소지마립간 대에는 고구려가 신라의 변경 지방을 자주 공격하였다. 이에 신라는 백제와 동맹을 맺거나 또는 가야와도 연합해 니하(泥河) · 모산성(母山城 : 지금의 충청북도 鎭川으로 추정됨.) 전투에서 고구려를 격파하였다. 특히 493년에 소지마립간은 백제 동성왕의 결혼 요청을 받아들여 이찬 비지의 딸을 시집 보냄으로써 결혼 동맹을 맺었다. 그 뒤 고구려의 남하에 대비하는 신라와 백제 양국의 공수(攻守) 관계가 더욱 공고해져 494년 고구려가 신라를 침입했을 때는 백제가, 495년 백제를 공격했을 때는 신라가 각각 구원병을 파견해 고구려의 남하를 강력하게 저지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고구려와의 전투 과정에서 변경 지방의 요충지에는ㅡ삼년산성(지금의 보은) 등을 개축하거나 증축해 고구려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6. 금갑 설화

『삼국유사』에는 소위 ‘사금갑 설화’라고 하는 이야기가 전한다. 소지마립간이 488년(소지마립간 10)에 천천정(天泉亭)에 갔을 때, 쥐가 나타나 까마귀의 뒤를 따라가라고 했다. 왕이 까마귀를 따라가던 중 돼지 두 마리가 싸우는 것을 보다가 행방을 놓쳤는데, 그때 연못에서 한 노옹(老翁)이 나타나 글을 올렸다. 봉투의 겉에 ‘떼어보면 두 사람이 죽고, 떼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을 것이다’라고 쓰인 것을 보고, 일관(日官)은 ‘두 사람은 서민이고, 한 사람은 왕입니다’라고 해석하였다. 이에 왕이 봉투를 열어보니. 그 안에 ‘사금갑(射琴匣, 거문고갑을 활로 쏘아라)’이라고 쓰여 있었다. 왕이 궁에 들어가 거문고갑을 쏘았더니, 내전의 분수승(焚修僧)과 궁주(宮主)가 간통을 하고 있었다. 이에 두 사람은 처형되었다.

신라의 불교는 눌지마립간 때 묵호자(墨胡子)가 들어와 활동하면서 민간은 물론 왕실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만 하더라도 토착신앙과 귀족세력들의 반발로 왕실에 정착하지 못했다. 그런데 사금갑 설화를 보면 소지마립간 때 왕실에 분수승(향을 피우며 불교의식을 주관하는 승려)이 상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삼국유사』의 또 다른 기록에서는 소지마립간 때 아도화상(我道和尙)이 과거 묵호자가 머물던 일선군 모례(毛禮)의 집에서 여러 해를 머물렀고, 시자(侍子) 3명이 그곳에서 불경을 강독하며 불교신자가 생기기 시작했다고 한다. 이상의 기록들을 볼 때, 법흥왕(法興王)의 불교 공인 이전인 소지마립간 대에도 왕실과 민간에 불교가 널리 퍼져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신라의 불교는 기존 토착신앙의 강한 견제를 받는다. 사금갑 설화에서 토착신앙은 노옹과 일관으로 상징되는 세력으로, 기득권층인 귀족세력을 의미한다. 반면 불교는 왕궁에 상주하던 분수승과 궁주로 상징되며, 왕실세력이 불교의 수용을 주도한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노옹이 준 글과 일관의 해석으로 인해 분수승과 궁주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금갑 사건은 왕실에서 불교세력이 커지자, 토착신앙을 신봉하던 귀족세력이 이를 견제하기 위해 일으킨 사건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 한편으로는 내전의 분수승을 단순한 승려가 아니라, 고구려에서 보낸 첩자 내지 자객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앞서 고구려는 한성을 공격하기 위해 승려 도림(道琳)을 먼저 백제 왕실에 잠입시킨 바 있는데, 분수승을 도림과 마찬가지의 예로 보는 의견이다. 즉, 분수승이 실제로 궁주와 소지마립간 암살을 모의하고 있었고, 이것이 사전에 발각되어 죽음을 당했다는 것이다. 이런 해석에 따르면, 사금갑 사건은 소지왕 암살미수 사건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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