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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두문자

장수왕 두문자 : 장 평 다 광 중 지 경

by noksan2023 2023. 8.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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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왕 생애
장수왕 생애

 

장수왕 : 장 평 다 광 중 지 경

 

장 : 수왕(413~491)

평 : 양천도(427 한강 점령)

다 : 면외교 + 다물정책

광 : 개토대왕비

중 : 원고구려비

지 : 두우(흥안령 점령)

경 : 당(최초 지방 사학)

 

 

장수왕 업적
장수왕 업적

 

1. 수왕(413~491)

장수왕은 삼국시대 고구려의 제20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413~490년이며 광개토왕의 장자이다. 재위 기간 동안 중국의 분열을 이용해 다각적인 외교를 적극 전개하여 서방의 안정을 기했다. 이를 토대로 왕권 강화와 중앙집권체제 정비에 박차를 가했고 427년에는 평양성으로 천도를 단행했다. 이후 백제·신라 방면으로의 진출을 적극 추진하여, 475년에는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살해했다. 신라와는 평화관계를 유지하다가 백제와 군사동맹을 맺자 실직주성을 빼앗았다. 고구려 시기 최대의 영토를 확보한 왕으로 98세에 서거했다.

 

2. 양천도(427 한강 점령)

427년에는 국내성(지금의 길림성 집안현)에서 평양성(平壤城 : 지금의 평양 시가지 동북방 6~7km 지점에 위치한 대성산성 일대)으로 천도를 단행하였다. 이는 국내성 일대에 뿌리깊은 기반을 가진 고구려 귀족세력을 약화시키고, 국가운영을 뒷받침할 경제적 기반을 확대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 평양천도를 계기로 백제 · 신라 방면으로의 진출을 적극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455년에는 백제의 왕이 교체되는 틈을 이용해 백제를 공격하였으며, 475년에는 승려 도림을 이용해 백제의 국력을 피폐하게 한 다음 왕 자신이 3만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백제의 수도 한성(漢城)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살해함으로써, 백제의 도읍을 웅진(熊津 :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으로 옮기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서해의 해상권을 장악해 백제 및 백제와 교류하는 왜가 중국 남조에 접근하는 것을 적극 차단하였다.

 

한편 신라와의 관계에서는 417년 신라의 왕위계승분쟁에 개입해 눌지마립간을 옹립하는 등, 처음에는 우월적인 입장에서 평화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신라가 백제와 군사동맹을 맺고 고구려에 대해 적대적인 입장으로 선회하자 468년에는 신라의 실직주성(悉直州城)을 공격해 빼앗았다. 481년에는 호명성(경상북도 청송군) 등 7성을 빼앗고, 미질부(彌秩夫 : 지금의 경상북도 흥해)까지 진격하였다.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는 고구려와 신라가 적대관계로 돌입하기 직전, 고구려가 아직 우위를 점하고 있던 시기에 건립된 것이라 생각된다. 이로써 고구려는 서쪽으로는 요하(遼河), 동쪽으로는 북간도 혼춘(琿春), 북쪽으로는 개원(開原), 남쪽으로는 아산만 · 남양만에서 죽령에 이르는 넓은 판도를 차지하게 되었다. 인구도 약 2세기 전에 비해 3배로 늘어나는 일대 전성기를 이루게 되었다.

 

3. 면외교 + 물정책 : 등거리외교

장수왕은 내부적으로 왕권의 위상을 높여서 국내성의 귀족세력을 약화시키고, 남진정책을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하여 427년에 평양성으로 천도하였다. 또한 대외적으로는 남조(南朝)의 여러 왕조들과 북조(北朝)의 북위에 모두 화친을 맺고 조공을 바치는 등거리 외교를 통해 정세를 안정시켰다. 북위와는 풍홍의 망명이나 후궁을 보내는 문제로 일시 마찰을 빚기도 하였으나 대체로 꾸준히 우호관계를 유지하였다. 이러한 적극적인 외교를 통해 고구려 및 장수왕의 국제적 위상은 매우 높았으며, 장수왕은 높은 직위로 책봉을 받았고 고구려의 사신 또한 높은 대우를 받았다. 북위는 고구려의 조공을 특별하게 우대하여 427년에는 타국보다 더 자주, 더 많이 조공을 할 수 있게 하였다. 

 

435년, 북연 황제 풍홍이 밀사를 보내 망명을 요청하였으며, 장수왕은 이를 받아들여 이듬해 북연이 북위에 의해 멸망당할 때 군대를 보내 풍홍 및 그 일족들을 구출하였다. 고구려로 도망쳐온 풍홍은 스스로의 세력을 믿고 행패를 부렸으며 이에 장수왕은 풍홍의 태자를 인질로 잡고 시중드는 인원도 몰수하였다. 이에 풍홍은 송나라에 망명을 요청하였으며, 이 사실을 알게 된 장수왕은 군대를 보내 풍홍을 살해하였다. 이때 송나라 사신 왕백구가 군사를 이끌고 고구려군을 공격하여 장수 고구가 죽고 손수가 생포되었는데, 장수왕은 다시 왕백구를 붙잡아 송으로 압송하였다. 고구려와 외교 관계를 망칠 수 없었던 송나라에서는 왕백구를 감옥에 가둬 고구려의 눈치를 본 후 석방하였다.

 

4. 개토대왕비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는 중국 지린성 집안시에 있는 고구려 광개토왕의 비석이다. 삼국시대인 고구려의 제20대 장수왕에 의해 건립되었다. 19세기 말에 재발견된 광개토왕릉비문은 사료가 부족한 4~5세기 고구려의 정치 · 사회사와 더불어 한반도를 비롯한 만주 일대 여러 세력들의 정세도 함께 살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사료라고 할 수 있다.

 

중국 지린성〔吉林省〕 통화시(通化市) 소속의 집안시(集安市)에 있는 석비로서, 고구려의 제20대 장수왕(長壽王, 394~491, 재위 412~491)에 의해 건립되었다. 광개토왕릉비(이하 능비)의 구체적인 위치는 압록강 중류의 북한 만포진(滿浦鎭)에서 마주 보이는 통구분지(通溝盆地) 일대이며, 고구려의 평지 도성이었던 통구성(通溝城)에서 동북쪽으로 약 4.5㎞ 지점인 태왕촌대비가(太王村大碑街)에 서 있다. 1928년 이래로 비를 보호하기 위한 비각(碑閣)주1이 두어지기도 하였는데, 현재는 대형 석조 비각이 설치되어 있으며, 그 사방을 방탄유리로 막아서 외부인들의 접근을 차단하고 있다. 

 

능비는 광개토왕(廣開土王, 374~412, 재위 391~412)이 묻힌 무덤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능비의 서남쪽 약 400m 지점에는 왕릉급 무덤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태왕릉이 있으며, 능비의 동북쪽으로 약 1.7㎞ 지점에는 구조적으로 국내성 도읍기의 가장 늦은 시기에 조영된 왕릉급 무덤인 장군총이 있다. 현재 우리나라 학계에서는 장군총이 광개토왕의 무덤이라고 보는 연구자가 많다. 구체적인 건립 시기에 대해서는 능비문에 갑인년(甲寅年) 9월 29일에 왕릉으로 시신을 옮기면서 비를 세웠다는 언급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414년(장수왕 3)으로 볼 수 있다. 능비에 대한 명칭은 여러 가지인데, 광개토왕의 사후에 그의 공적을 기록하였다는 점, 아들인 장수왕이 부왕의 무덤 인근에 세웠다는 점 등을 감안하여 ‘광개토(대)왕릉비’, 혹은 ‘광개토왕비’로 칭하는 경우가 많다. 그 외에 ‘광개토왕’이라는 왕호 대신, 능비문에 보이는 묘호인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을 줄여서 ‘호태왕비(好太王碑)’로 부르는 경우도 있다.

 

능비는 자연석을 채취한 뒤 다듬어서 세운 사면비(四面碑)로서 재질은 강력 응회암주2이며, 건립 당시의 모습 그대로 현재의 위치에 서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비는 동쪽으로 45도 정도 치우친 동남향 방향으로 서 있으며, 높이는 약 6.39m에 달한다. 제작 당시 글자의 크기와 간격을 균일하게 하기 위해 네 비면의 가장자리에 외곽선을 그리고, 그 안에 세로로 약 13㎝ 간격의 괘선들을 그어 공간을 구획한 뒤 글자를 새긴 것으로 보인다.

1면 11행, 2면 10행, 3면 14행, 4면 9행의 총 44행에 걸쳐 글자들이 음각(陰刻)되어 있으며, 글자 형태는 예서(隸書)주3에 가깝다. 총 글자 수는 원래 1,775자 정도였다고 추정되나, 그 가운데 최소 140여 자 이상이 자연적인 손상 내지는 후대의 인위적 파손으로 인해 현재 판독이 불가능한 상태이다.

 

5. 원고구려비

1981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높이 203㎝, 너비 55㎝이다. 중원 고구려비라고도 하였다. 입석마을에 글자가 새겨진 돌이 있다는 정보에 따라 1979년 4월 8일 단국대학교 학술조사단에 의하여 발견, 조사되었다. 발견 당시 전면(全面)에 바위이끼가 많이 끼어 있어 육안으로는 물론 탁본을 하여도 판독이 어려울 정도였다. 석비의 형태는 석주형(石柱形)으로서 자연석을 이용해 각자면(刻字面)을 갈고 비문을 새겼다. 앞면과 한쪽 옆면에서만 글자를 확인했으나 뒷면과 또 한쪽의 옆면에서도 글자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석질은 견고한 화강암으로 글자의 흔적이 뚜렷하게 보인다. 이렇게 볼 때 4면에 모두 글자를 새긴 4면비(四面碑)로서 글자는 앞면이 10행으로 각 행 23자씩이고, 한쪽 옆면은 7행 23자씩이며, 또 한쪽의 옆면은 6행이 분명한데 뒷면은 너비로 보아서 9행 정도로 추측된다.

 

석비가 있는 마을 주위에는 골짜기마다 많은 고분이 있고, 그리 멀지 않은 탑평리 7층석탑 주변에서는 삼국시대의 기와들이 수집되며, 뒤쪽 장미산(長尾山)에는 삼국기 축조로 보이는 산성이 있다. 그리고 불과 4㎞ 직선거리인 북쪽 봉황리에는 삼국시대의 마애불상들이 있다. 특히 면계(面界)를 이루는 노은면에서는 일찍이 “건흥5년세재병진(建興五年歲在丙辰)”의 명문이 있는 고구려시대 금동광배(金銅光背)가 출토된 일이 있다. 이러한 모든 점을 종합해 볼 때, 이곳 입석마을을 중심한 역사·지리적인 여러 가지 문제를 생각할 수 있는 동시에 이 석비 건립의 시대적 배경과 입지적 조건 등을 이해할 수 있다. 국내에서 발견된 유일의 고구려비이므로 역사적 가치가 매우 크다고 하겠다. 또한 5세기 고구려·신라 관계, 고구려 관등조직, 인명표기방식 등 문헌에 없는 내용이 담겨 있는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6. 두우(흥안령 점령)

최근 중국에서도 타타브 설을 따르는 것으로 보인다. 479년 고구려 장수왕이 지두우를 유연과 분할 점령하려 하였다고 중국인이 쓴 『위서(魏書)』에 쓰여 있다. 나중에 지두우가 나타나지 않고 고구려의 영토가 넓어진 것을 보아 지두우족이 고구려에 복속된 것으로 본다.

 

7. 당(최초 지방 사학)

경당이 언제부터 건립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유교를 교육했다는 점에서 태학이 설립된 372년(소수림왕 2) 이후부터 세워졌다고 보는 데 큰 이견은 없다. 대부분 427년 평양 천도 이후부터 건립되었다고 생각한다. 경당은 고구려의 멸망 이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통일신라와 발해의 지방 학교가 상정되는 만큼 이를 경당과 연관하여 생각하기도 한다.

 

경당이 지방 촌락에 소재했고 평민을 위한 학교였다고 보는 견해에서는 경당의 건립이 전국적인 군사동원체계 즉 국민개병제주3의 정비를 반영한다고 해석한다. 지방 촌락의 평민까지 군사로 동원하기 위해 기존의 청소년 연령집단을 재편해 활쏘기와 같은 군사훈련을 실시했다고 본 것이다. 이와 달리 왕도와 지방의 주요 도시에 소재했고 상층민 이상을 위한 학교였다고 보는 견해에서는 지배층의 정치 · 사회적 역할이 분화한 결과를 반영한다고 해석한다. 이 견해에서는 경당의 학생이 하급의 실무관원 내지 무관으로 진출하였다고 보고, 지배층 내부에서 상층과 하층이 분화하면서 하층의 지배층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경당이 세워졌다고 이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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