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C 백제 왕 : 비 나 개 북 위 문 웅 동 결 탐
비 : 비유왕(427~455)
나 : 눌지마립간 나제 동맹(433:위례성)
개 : 개로왕(455~475)
북 : 북
위 : 위에 국서(472 고구려 공격해주세요)
문 : 문주왕(475~477)
웅 : 웅진 천도 후 귀족에게 피살
동 : 동성왕(479~501)
결 : 소지마립간과 결혼 동맹(493)
탐 : 탐라복속(498)
1. 비유왕(427~455)
재위 427∼455. 제19대 구이신왕의 맏아들이다(일설에는 제18대 전지왕의 서자라 한다.). 제21대 개로왕은 그의 맏아들이다. 풍채가 수려하고 말을 잘하여 사람들의 높임을 받았다. 429년에 중국 남조(南朝)의 송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였고, 다음해에는 송나라으로부터 선왕(先王)이 받았던 사지절 도독 백제제군사 진동장군 백제왕(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鎭東將軍百濟王)이라는 작호(爵號)를 다시 받았다. 이는 송과의 동맹정책이 비유왕대에도 계속되었음을 뜻한다. 또한, 왜와의 동맹관계도 그대로 유지되어 사신이 오가고 있었다.
2. 눌지마립간 나제 동맹(433:위례성)
새로운 변화도 있었는데, 433년에 이르러 종전에는 고구려의 보호국 상태에 놓여 있어 백제와 적대하게 되던 신라에 화친의 사절을 파견하게 되었다. 그 결과 당시 고구려의 지배에서 벗어나고 있었던 신라의 호응을 얻어 고구려에 대항하는 나제동맹(비유왕 vs 눌지마립간) 형성되었다.
눌지마립간은 삼국시대 신라의 제19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417년~458년으로 내물마립간의 아들이다. 고구려에 볼모로 가 있던 실성이 귀국해서 마립간에 즉위한 뒤 고구려를 이용해 내물마립간의 아들 눌지를 해치려 했으나 오히려 고구려의 지원을 받은 눌지가 정변을 일으켜 그를 살해하고 마립간이 되었다. 즉위 후에는 고구려의 평양천도 이후 남진정책에 대항하기 위해 백제와 나제동맹(눌지마립간 vs 비유왕)을 맺었다. 왕실 내부의 분쟁을 막기 위해 왕위계승에서 부자상습제를 확립시켰고 저수지 축조, 우거 사용법 보급 등 민생안정에도 힘을 쏟았다.
3. 개로왕(455~475)
개로왕은 삼국시대 백제의 제21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455년~475년이며, 비유왕의 맏아들로서 왕위를 계승했다.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해 요충지에 목책을 설치하고, 북위와 협력관계를 만들고자 외교를 펼쳤으나 실패했다. 왕궁을 화려하게 짓고 대귀족들을 주요 관직에서 배제하여 왕권 강화를 시도했지만 오히려 백제 내부의 결속을 와해하고 왕실의 영도력 자체를 약화시켰다. 475년 백제의 발상지이자 중심부인 한강 유역 일대를 고구려에 빼앗기면서 고구려에 포로가 되어 살해당했다.
4. 북위에 국서(472 고구려 공격해주세요)
475년에 백제는 그 발상지이자 중심부인 한강유역 일대를 고구려에 빼앗기고 개로왕은 포로가 되어 살해당했다. 이러한 참담한 패배에 대해 <삼국사기> 개로왕 21년조에서는 고구려 장수왕이 간첩으로 파견한 승려 도림(道琳)의 계략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도림은 개로왕이 바둑을 좋아하는 점을 이용해 신임을 얻은 뒤, 개로왕이 고구려의 침공에 대비할 생각을 못하게 하였다. 화려한 궁궐의 축조 등 대대적인 토목역사를 일으키게 함으로써 국력을 피폐화시켰다. 이 기록은 당시의 상황을 생동감 있게 전해주는 반면, 도림의 계략만을 중요시해 단순화되었으므로 보충설명이 필요하다.
이 기록의 설명과는 달리 개로왕은 475년 이전부터 고구려의 침공에 대비했고 469년에는 고구려의 남부지역을 선제공격하였다. 한편 고구려와 사이에 있는 요충지 청목령(현재의 개성 부근으로 추정됨)에 대책(大柵)을 설치, 방어태세를 보강하였다. 472년에는 북위(北魏)주1에 구원병 파견을 요청하는 국서를 보내, 북위가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협공해야 하는 이유와 성공 가능성을 보고하며 설득하였다. 이는 북위의 세력을 이용해 고구려의 남침세력을 분산, 약화시키려는 개로왕의 외교적인 시도였으나 결국 실패로 끝났다. 당시 남조의 송(宋)과 대치하고 있던 북위로서는 요동까지 아우르며 동북아시아의 대 제국으로 발전해 나가는 고구려를 적대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개로왕은 전대부터 결성된 나제동맹의 유지 · 강화에도 힘썼다. 475년에 개로왕이 왕자(뒤의 문주왕)를 보내 구원을 요청하자 신라가 군대 1만 명을 파견해 준 것은 동맹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개로왕이 이처럼 고구려의 남침 위협에 고심했음에도 고구려의 침공을 받자 백제는 힘없이 무너졌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를 공격한 고구려의 병력은 3만이었는데, 백제는 불과 7일 만에 방어전선이 무너졌고 도성이 공격당해 개로왕은 탈출하는 도중 잡혀 참수되고 말았다.
고구려의 3만 병력에 백제가 이토록 무참히 짓밟힌 중요한 원인 중 하나는 개로왕의 내정의 실패였다. 개로왕은 왕권 강화를 시도해 왕족 중심의 집권체제를 만들었다. 개로왕이 458년에 송나라에 관작제수를 요청한 11명 가운데에는 그의 두 아들 여도(餘都 : 뒤의 문주왕)와 여곤(餘昆 : 문주왕의 아우이자 동성왕의 아버지인 昆支로 추정됨)을 비롯해 8명이 왕족인 여씨(餘氏)였고, 당시 백제의 주요 세력이었던 해씨(解氏)나 진씨(眞氏)는 없었다. 또한 문주왕은 왕자로서 백제의 최고 관직인 상좌평을 지냈다. 이러한 사실들은 개로왕이 구래의 대 귀족들을 배제시키면서 왕족 중심의 집권체제를 추구했음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왕권강화를 위한 시도이기도 했다.
이는 개로왕의 왕족 중심 정권 운영이 백제 지배층 내에 왕실에 대한 적대세력을 키워냈고, 그로 인해 지배층의 내분이 심화되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무리한 왕궁 건축 등을 강행해 하층민을 위시한 국민들은 왕실에 대한 원망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삼국사기』 도미전(都彌傳)의 개루왕은 고구려영토와의 위치로 보아 근개루왕, 즉 개로왕으로 보이는데, 이 전설에서 왕은 잔인하게 하층민의 아내를 빼앗으려 한 폭군으로 묘사되어 있다. 도성이 함락되기 직전에 개로왕이 자신의 과오를 후회하며, “백성은 쇠잔하고 군대는 약하니, 비록 위급한 일이 있어도 누가 나를 위해 기꺼이 싸우려 하겠는가.”하고 탄식했다는 이야기도 개로왕이 널리 국민들의 신망을 잃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5. 문주왕(475~477)
문주왕은 삼국시대 백제의 제22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475∼477년이다. 왕자로 있을 때 아버지 개로왕을 보좌하여 최고관직인 상좌평을 역임했다. 475년(개로왕 21) 고구려의 침략으로 위기를 맞자, 동맹국 신라에 구원을 청하러 파견되었다. 구원병 1만 명을 얻어 돌아왔을 때는 이미 도성이 함락되어 파괴되고 개로왕은 살해된 뒤였다. 국난의 상황에서 즉위한 문주왕은 웅진천도를 단행하여 새로운 출발을 시도했으나 난립한 귀족 파벌간의 쟁투는 더 심각해졌고, 결국 재위 3년 만에 정권을 장악한 병관좌평 해구가 보낸 자객에게 피살되었다.
6. 웅진 천도 후 귀족에게 피살
문주왕은 대내외적으로 국난의 상황에서 즉위하였다. 대내적으로 개로왕대의 전제권력 행사로 인해 야기된 지배세력 사이에서 대립과 분열이 끊이지 않았고, 대외적으로 고구려의 한성공격으로 야기된 후유증을 앓고 있었으며, 신라의 성장과 잠재적인 위협 등 어려운 국면을 맞고 있었던 것이다. 백제의 왕도(王都)인 한성은 고구려군의 공격으로 많은 시설이 불타 훼손되었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군이 퇴각하면서 한성에 거주하던 8천명의 백성을 포로로 잡아갔기 때문에 도읍지로서 기능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었다. 게다가 당시 신라는 보은 지역에 삼년산성을 축조하여 상주와 소백산맥을 넘어 영동 · 옥천 등 금강 중 · 상류지역까지 진출해 중부 내륙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하여 백제를 위협하고 있었다.
그해 10월 피난지인 웅진(공주)을 새 도성으로 정하고, 참담한 패전의 수습에 임하였다. 문주왕이 웅진으로 천도한 것은 정치적 · 군사적 · 경제적 이해관계를 종합적으로 고려한 것이다. 웅진은 지리적으로 북으로 차령산맥과 금강에 둘러싸여 있고, 동으로는 계룡산이 막고 있어서 고구려와 신라로부터 침략을 방어해주는 천험의 요새지였다. 그리고 475년 문주가 신라에 원병을 청하러 남행하였을 당시 목협만치와 조미걸취 등과 함께 한성 함락 이후를 대비하여 천도 후보지에 대한 문제를 어느 정도 검토했을 가능성도 있다.
웅진으로 천도하여 새로운 도읍지를 갖췄다고는 하지만 건국 이래의 중심지를 상실한 백제사회는 큰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우선 한강유역에서 온 난민들을 정착시켜야만 했다. 문주왕 2년(476) 2월에는 한성에서 남쪽으로 이주해 온 주민들을 아산의 대두산성 등에 분산시켜 살게 하였다.
한편, 본거지를 잃은 왕족 부여씨(扶餘氏)나 해씨(解氏) · 진씨(眞氏) 등 부여족 계통 구귀족들의 지배권력은 남부에 토착하고 있던 사택씨(沙宅氏) · 연씨(燕氏) 등 마한계(馬韓系) 세력의 도전을 받게 되었다. 또한, 개로왕 때의 왕권강화 및 왕족 위주의 집권체제에 억눌렸던 구귀족들의 반발로, 부여족 계통 구귀족들 내부에 갈등이 심화되었다. 천도 후에도 계속 실권을 장악하려는 왕족들과 진씨 · 해씨 · 목씨(木氏)세력 등 귀족세력들 그리고 새로운 왕도 부근에 세력기반을 갖고 있었던 유력한 재지세력(在地勢力)들이 가세함으로써 정국의 주도권을 놓고 새로운 양상이 전개되었다. 신 · 구 귀족세력들은 이해관계 여하에 따라 합종연횡(合縱連橫) 모습을 보이면서 왕권과 정국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치열한 권력투쟁을 벌였다.
참담한 패전으로 왕실의 권위가 떨어졌으며, 난립된 귀족 파벌들을 조정해야 하는 상황에서 성품이 우유부단하였다고 하는 그는 정치적 판단을 내리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웅진천도에 협조한 정치세력으로 해구(解仇)로 대표되는 해씨 세력이 있다. 해구는 문주의 왕위 즉위부터 일정한 역할을 해온 것으로 추정된다. 해구가 병관좌평에 임명되면서 군사력을 배경으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자 이를 견제하려는 세력과의 불가피한 마찰이 야기되었다. 그 과정에서 해구는 문주왕의 측근세력인 목협만치와 권력 다툼을 벌려 이들을 중앙정계에서 축출한 것으로 보인다. 문주왕은 병관좌평 해구의 권력 독점에 불안을 느꼈다. 그리하여 궁실을 중수하고, 태자를 책봉하며, 일본에 있던 개로왕의 동생 곤지를 불러들여 내신좌평에 임명하는 등 여러 가지 대책을 세워 왕권을 강화해 나가고자 하였다. 이러한 대책은 왕위계승 상의 분쟁을 미연에 방지하고, 곤지와 권력이 비대해진 해구를 동시에 견제하여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는 정치적 의도로 판단된다. 문주왕과 곤지 그리고 해구 사이의 삼각 구도 속에서 치열한 권력다툼이 일어나 결국 두 달 뒤 내신좌평 곤지가 사망하였고, 이후 문주왕은 실권을 장악한 해구를 더 이상 견제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문주왕은 재위 3년만에 당시 정권을 장악한 병관좌평 해구(解仇)의 자객에 의하여 피살되었다.
7. 동성왕(479~501)
동성왕은 삼국시대 백제의 제24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479년∼501년이다. 제22대 문주왕의 동생인 곤지의 아들로, 진씨 세력에 의해 옹립되었다. 신진세력들을 중앙귀족으로 등용하여, 한성에서 남하해온 귀족을 견제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고 웅진 천도 초기의 정치적 불안을 종식시켰다. 중국 남제와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신라와 혼인동맹을 맺어 고구려에 대항했다. 신진세력의 지나친 성장을 경계하여 견제책을 쓰다가 신진 백가세력에게 암살당했다. 동성왕의 왕실 지배기반 확보는 이후 무령왕·성왕대의 정치적 안정과 문화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
8. 소지마립간과 결혼 동맹(493)
웅진천도 이후 백제는 고구려 수군에 의해 서해의 해상교통로를 차단당했다. 동성왕은 집권 초기부터 남제와의 외교에 각별한 관심을 보이며 국제적 고립을 타개하기 위해 동성왕 2년 남제에 사신을 파견, 대 중국 외교관계를 재개하였다. 문주왕 2년 고구려의 저지로 대송외교(對宋外交)에 실패한 이후 약 5년만에 재개되는 중국에 대한 외교였다. 이는 남제와의 관계를 통해 적대세력인 고구려와 북위를 견제함은 물론 신라와의 외교관계에서의 주도권 장악과 가야 · 왜에 대한 정치외교적 우위를 유지하는 것을 원했기 때문이다. 동성왕대 남제와의 교섭은 백제가 고구려에 대한 정책을 효과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기반 확립에 커다란 뒷받침이 되었다.
동성왕은 신라와의 외교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고구려의 군사적 압력에 대처하기 위해 신라와 혼인동맹을 맺어 신라의 이찬 비지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였다. 그리하여 신라가 살수원(薩水原)에서 고구려와 싸울 때 원병을 파견했고, 고구려에게 치양성(雉壤城)을 공격받았을 때는 신라에 원병을 요청하는 등 공동전선을 형성해 고구려에 대항하였다. 백제와 신라 동맹군의 승리는 양국으로 하려금 고구려의 공세에 대응하는 결혼동맹)의 필요성과 유효성을 절감하게 하였다. 이로 인해 백제와 신라 사이의 신뢰는 매우 돈독해졌다.
9. 탐라복속(498)
동성왕은 궁실을 중수해 수도의 면모를 갖추었으며, 우두성(牛頭城) · 사현성 · 이산성(耳山城) 등을 축조해 수도의 방어망을 정비하였다. 그리고 사정성 · 가림성(加林城) 등을 쌓고 중앙 관리를 파견함으로써 지방에 대한 중앙의 통제력을 강화하였다. 이 밖에 탐라(耽羅)가 공납을 바치지 않자 이를 응징하기 위해 무진주(武珍州)까지 출정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궁궐 동쪽에 임류각을 세우고 진귀한 짐승을 길렀으며, 이것을 비판하는 신하의 간언을 물리치는 전제군주적인 풍모를 보이기도 하였다.
탐라의 대외관계는 제일 먼저 지리적으로 가장 가까운 백제와 밀접해 476년(문주왕 2) 4월에 사신을 파견해 방물(方物, 토산물)을 바치고 그 사신은 좌평(佐平)의 관등을 받았다. 498년(동성왕 20) 8월에는 공부(貢賦)를 바치지 않다가 백제 동성왕이 친히 정벌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사신을 보내어 사과하고 공부를 바칠 것을 약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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