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 : 광 영 후 비 아 숙 왜 동 정
광 : 광개토대왕
영 : 영락(연호사용 : 자주적 주체적)
후 : 후연(요동수복) 정벌
비 : 비려(거란 395) 정벌
아 : 백제 아신왕 항복(396) : 한강상류진출
숙 : 숙신(여진) 정벌 398
왜 : 왜구격퇴 400
동 : 동부여
정 : 정벌 410
1. 광개토대왕(391 ~ 413)
광개토왕은 삼국시대 고구려 제19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391년~412년이다. 즉위 초부터 적극적으로 백제를 공략하여 한강 너머까지 진격했다. 백제가 왜와 연합해 고구려의 대방고지와 배후 신라를 치자 병력을 보내 왜구를 궤멸시켰다. 신라에 대해서는 친선관계를 맺고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여 신라로 하여금 복속의 담보물로 인질을 보내게 했다. 후연이 공격하자 반격하여 요동성 일대를 장악했고, 거란·식신·숙신을 정벌하는 등 고구려의 영토와 세력권을 크게 확장했으며, 내정 정비에도 노력했다. 평양에 9개의 절을 창건하여 불교를 장려했다.
2. 영락(연호사용 : 자주적 주체적)
지금까지 확인된 고구려 연호 가운데 가장 오래 된 것으로서, 광개토대왕시대의 중국과 대등한 입장을 과시한 고구려 중심의 천하관(天下觀)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아울러 고구려 왕권의 강화를 뜻하기도 한다. 그런데 영락 연호는 다른 고구려 연호와 마찬가지로 사서에는 보이지 않고 금석문에서만 확인된다. 즉, 만주 집안현(輯安縣)에 있는 광개토왕릉비문과 평안남도 대안시 덕흥리에서 발굴된 고분 벽면에 남아 있는 유주자사(幽州刺史) 진(鎭)의 묵서명(墨書銘)에 보이고 있다.
그런데 광개토왕릉비문과 유주자사 진의 묵서명에 적힌 영락 연호에 의한 기년(紀年)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기재된 광개토왕의 즉위년과 1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광개토왕의 즉위년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392년 임진년이지만, 광개토왕릉비문에 의하면 영락 5년은 을미년이므로, 영락 1년은 391년, 즉 신묘년이 된다. 이 경우 당대의 금석문인 광개토왕릉비문의 기년(紀年)이 옳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3. 후연(요동수복) 정벌
서방으로의 진출을 꾀하기도 했다. 당시 고구려의 서쪽에는 모용씨(慕容氏)의 후연국(後燕國)이 있었다. 후연과는 396년 모용보(慕容寶)가 후연왕으로 즉위하여 대왕을 ‘평주목요동대방이국왕(平州牧遼東帶方二國王)’에 책봉하는가하면 400년에는 후연에 사절을 파견하는 등 한동안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400년 후연왕 모용성(慕容盛)이 소자하(蘇子河) 유역에 위치한 고구려의 남소성과 신성을 침공해 옴으로써 양국관계는 파탄에 이른다.
이에 왕은 후연에 대한 보복전을 감행하여 402년에는 요하를 건너 멀리 평주(平州)의 중심지인 숙군성(宿軍城)을 공격, 평주자사(平州刺史) 모용귀(慕容歸)를 도망치게 했고, 404년에도 후연을 공격하여 상당한 전과를 올렸다. 이러한 과정에서 요동성을 비롯한 요하(遼河) 이동 지역을 차지했으며, 후연왕 모용희(慕容熙)에 의한 405년의 요동성 침입과 406년의 목저성 침입을 격퇴함으로써 요하 이동 지역에 대한 장악을 더욱 확고히 하였다.
대왕이 중국의 산동성에 중심을 둔 남연(南燕)의 왕 모용초(慕容超)에게 천리마 등을 보내며 접근을 꾀한 것도 후연을 견제하기 위한 외교정책의 일환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서방으로의 진출은 408년 후연을 멸망시키고 등장한 북연(北燕)과 우호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일단락된다.
4. 비려(거란 395) 정벌
392년에는 북으로 거란을 정벌하여 남녀 500인을 사로잡고 거란에게 빼앗긴 고구려인 1만 인을 데리고 돌아왔으며, 395년에는 거란의 일부로 추측되는 비려(碑麗)를 친정(직접 전쟁에 참가)하여 염수 방면의 부락 600∼700영(營)을 격파하고 많은 가축을 노획하여 개선했다.
5. 백제 아신왕 항복(396) : 한강상류진출
예성강을 경계로 그 동안 일진일퇴를 거듭해 온 백제에 대해 즉위 초부터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여, 392년 4만 병력을 거느리고 석현성(石峴城: 開豐郡 北面 靑石洞)을 비롯한 10개성을 빼앗았는가 하면, 이어 난공불락의 요새임을 자랑하던 관미성(예성강 하류설, 江華 喬桐島설 등이 있음.)을 불과 20여 일 만에 함락시켰다. 또, 빼앗긴 땅의 탈환을 위해 침공해 온 백제군을 394년에는 수곡성(水谷城: 지금의 新溪)에서, 395년에는 패수(浿水: 지금의 禮成江)에서 각각 격퇴하고 백제와의 접경지대에 7성을 쌓아 방비를 강화하는 한편, 396년에는 한강 너머에까지 진격하여 58성 700촌락을 공파했다. 뿐만 아니라 백제의 아신왕으로부터 많은 전리품과 함께 영원히 노객(老客)이 되겠다는 맹세(항복)를 받고 왕의 동생과 대신들을 인질로 잡아오는 대전과를 올렸다.
6. 숙신(여진) 정벌 398
398년에는 소규모 군대를 파견하여 식신(息愼), 즉 숙신(肅愼)을 정벌하여 조공관계를 맺었다. 숙신은 당나라주3 때의 『진서(晋書)』에 언급된 것처럼 흑룡강(黑龍江) 중 · 하류의 주민이 아니었다. 즉, 고조선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 중원(中原) 북쪽 경계를 비롯해 산둥반도 및 남만주 주민을 총칭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숙신의 후손으로 꼽고 있는 종족으로서는 한(漢)대의 읍루, 후위(後魏)대의 물길(勿吉)과 수 · 당대의 말갈, 발해 멸망 후의 여진이다. 따라서 숙신은 일반적으로 여진족의 선조로 인정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연구는 대체로 그들의 종족 계통과 기원, 분포지역, 읍루 및 예맥 · 고조선과의 관계에 집중되어 있는데 고아시아족 기원설과 순퉁구스, 몽고족, 동이(東夷)의 은인(殷人) 기원설 등이 제기되었다.
7. 왜구격퇴 400
백제는 이에 굴복하지 않고 세력 만회를 위해 왜(倭)를 내세워 399년에는 고구려와 연결되어 있는 신라를 공격했고 404년에는 고구려가 장악하고 있는 대방고지(故地)를 침공해 왔다. 이에 대해 고구려는 병력 5만을 파견하여 왜구를 신라에서 몰아내고 가야지역까지 추격했으며, 대방고지에 침입한 왜구도 궤멸시켰다. 나아가 407년에는 백제를 공격하여 막대한 전리품을 노획하고 6성을 쳐부수어 백제를 응징했다(광개토왕릉비에는 407년 작전의 대상을 기록한 부분이 마멸되어 있어 이를 후연(後燕)주1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백제로 보는 것이 옳을 것으로 보인다.). 또, 신라에 대해서는 친선관계를 맺고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여 신라로 하여금 복속의 담보물로 인질을 보내게 했으며, 400년에는 왜구의 침입으로 위기에 처한 신라를 구원함으로써 영향력을 더욱 강화하였다.
8. 동부여 정벌
410년에는 동부여(豆滿江 하류 방면의 琿春說과 함남 남부와 강원 북부에 걸치는 永興灣 방면설이 있음.)를 친정하여 굴복시킴으로써 북쪽과 동쪽으로 영역 내지 세력권을 확장하였다. 동부여의 중심지 추정은 다소 차이는 있으나, 조선 후기의 실학자 정약용(丁若鏞)이 함경도 일대에 있었던 동예(東濊)와 같은 것으로 비정함에 따라 ‘동부여 동예설’이 유력한 설로서 인식돼왔다. 그러나 근자에는『삼국사기』에 비해 신빙성이 높은 「광개토대왕릉비」의 건국설화를 중시해 고구려 시조의 ‘북부여 출자설(北夫餘出自說)’이 힘을 얻으며 동부여 동예설이 부인되기도 한다. 비문이 전하는 북부여 출자설은 고구려 중기까지도 고구려 왕실의 공식적인 건국설화였던 만큼 신빙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삼국사기』초기기사 등이 전하는 동부여의 실체는 후대 전승과정에서의 착오이거나,「광개토대왕릉비」보다는 후대에 어떤 사유로 생성된 설화가 고구려 후기에 있었던『신집(新集)』의 편찬과정에 삽입되면서 오는 혼란이 아닌가 하는 추론이 제기되고 있다. 특히 건국세력 출자설화의 변화는 6세기 후반 이래 왕권을 억압하며 등장한 귀족연립정권(貴族聯立政權)의 성립, 즉 연개소문(淵蓋蘇文) 집안의 정권 장악과 관련해 나타난 것이 아닐까 하는 추정이 가해졌다. 그러나 계루부(桂婁部) 왕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상황에서 건국설화의 변화와 같은 조치가 있을 수 있었는지는 숙고해 보아야 한다.
그런데「광개토대왕릉비」를 통해서 적어도 5세기 초에 실재하는 동부여가 확인된다. 이때의 동부여는『삼국지(三國志)』동이전(東夷傳)에 보이는 북옥저(北沃沮) 지역으로 비정되고 있는데 대체로 두만강 유역에 해당된다. 이것은『삼국지』관구검전(毌丘儉傳)에서 동천왕(東川王)이 위(魏)에게 쫓겨 피난했던 매구루(買溝婁)가 동옥저전(東沃沮傳)에서는 치구루(置溝婁)로 표기되었고, 이것이 바로 두만강 유역의 책성(柵城)이며「광개토대왕릉비」에서 전하는 동부여의 미구루(味仇婁)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3세기경 동부여는 두만강 유역에 있었다고 본다. 또한 3세기 전반까지 부여국은 지금의 길림시(吉林市) 지역을 중심으로 존재하다가 3세기 말모용외(慕容廆)의 침공을 받아 지배층을 위시한 주민 다수가 두만강 하류 북옥저 지역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그들은 이듬해 다시 길림 지역을 회복해 귀환했는데, 일부가 남아 북옥저 지역에 계속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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