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령왕 : 무 담 양 박
무 : 무령왕(501 ~ 523)
담 : 22담로에 왕족 파견
양 : 양나라와 교류(양직공도)
박 : 일본에 박사 파견(단양이 고안무 : 왜에 유교 경전 전래)
대 : 대가야 압박(대사진 탈취 : 대가야 VS 신라 결혼동맹)
1. 무령왕(501~523)
무령왕은 삼국시대 백제의 제25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501∼523년이며, 위사좌평 백가가 보낸 자객에 의해 동성왕이 시해되자(백가의 난) 그를 이어 즉위했다. 북방정책에 몰두하여 고구려·말갈 등의 침략을 무찌르고 대비책을 강화했으며, 중국 남조의 양과 관계를 강화하는 외교정책을 폈다. 지배귀족들의 전횡을 막고자 좌평제를 폐지하고 22부사제로 행정체제를 바꾸었고, 백성들의 진휼에 힘쓰는 한편 수리시설 정비·확충과 호적체계 정비로 안정적 국가 운영의 토대를 마련했다. 한강 유역을 고구려에 빼앗긴 후 혼란에 빠진 백제를 안정시킨 왕으로 평가된다.
이름은 사마(斯摩, 斯麻) 또는 융(隆)이다. 동성왕의 둘째 아들, 또는 개로왕의 동생인 혼지의 아들로서 동성왕의 배다른 형이라고도 한다. 이처럼 그의 계보에 대해서는 이설(異說)이 있으나, 1971년 공주 송산리의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지석에 따르면 그는 462년에 출생하였다. 키는 8척이고 용모가 아름다웠으며, 성품은 인자하고 관대하였다고 한다.
2. 22담로에 왕족 파견
동성왕은 신진 세력을 등용해 친정체제를 구축해 나갔지만, 말년에 측근정치로 변질되면서 시해를 당했다. 이런 과정을 지켜본 무령왕은 동성왕을 반면교사로 삼아 신구 귀족의 세력균형을 꾀하였다. 백가의 난을 평정한 해명(解明)과 무령왕 후반기에 보이는 인우(因友)·사오(沙烏) 등은 구귀족과 신귀족의 대표 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신진귀족의 중앙 진출은 동성왕대부터 본격화되었는데, 무령왕대에 이르러 그 수가 더욱 증가했다. 이에 무령왕은 좌평직을 개편하여 상좌평·중좌평·하좌평·대좌평 등으로 분화하였다. 이로써 같은 좌평이라고 하더라도 그 안에서 서열이 다시 정해졌다. 무령왕은 늘어난 귀족세력을 통제하기 위해 국왕 중심의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고 즉위 초부터 왕족을 대외전쟁과 지방통치에 적극 활용하였다. 무령왕대에는 22개의 담로가 있어 지방통치를 담당했는데, 담로의 책임자로 “자제종족(子弟宗族)” 즉, 왕족들을 파견한 것이다. 왕족의 지방 파견으로 지방 토착세력은 중앙의 통치질서 안으로 편입되었다. 이로써 무령왕의 왕권은 한층 강화되었다. 한편 웅진 천도의 혼란 속에서 극심한 자연재해가 발생하면서 일반 백성들의 혼란은 가중되고 있었다. 자연재해는 동성왕과 무령왕대에 가장 심각했는데, 가뭄과 홍수가 계속되고 이로 인해 도적과 전염병도 창궐했다. 무령왕은 백성들의 유망을 막기 위한 근본적인 대책으로 유망민을 강제로 정착시키는 조치를 취했다. 제방을 축조해 자연재해에 대비하고, 유민들에게 농사를 짓도록 한 것이다. 이 같은 귀농정책으로 조세수취와 노동력의 기반이 확대되었고, 사회적 혼란도 점차 진정되었다.
3. 양나라와 교류(양직공도)
무령왕은 고구려전에서 우위를 확보하고, 남북으로 영역을 확대하면서 자신감을 가졌다. 이 자신감은 521년(무령왕 21) 양에 보낸 표문에 극명히 드러난다. 백제가 여러 차례 고구려를 격파하여 마침내 다시 강국이 되었다고 선언한 것이다. 이에 대해 양은 무령왕을 사지절 도독백제제군사 영동대장군(使指節 都督百濟諸軍事 寧東大將軍)으로 책봉함으로써 무령왕과 백제의 국제적 지위를 공인해 주었다. 이로써 무령왕은 웅진천도 후의 혼란을 극복하고, 대내외적으로 예전의 위상을 되찾을 수 있었다.
고구려 · 말갈의 침입에 착실히 대처하는 한편, 중국 남조의 양(梁)과도 외교 관계를 강화해 512년과 521년 두 차례에 걸쳐 사신을 보냈다. 521년 양으로부터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영동대장군(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寧東大將軍)’의 작호를 받았다.
4. 박사파견(단양이 고안무 : 왜 유교경전 전래)
512년 상차리(上哆唎) · 하차리(下哆唎) · 사타(娑陀) · 모루(牟婁) 등 네 현을 합병했다고 하는데, 이는 섬진강 유역의 어느 곳이거나 가야 지역으로 짐작된다. 513년과 516년에는 오경박사 단양이, 고안무와를 각기 왜국에 보내 문화를 전파하였다.
오경박사 고안무는 중국계 인물로 백제에 귀화하였다고 추정된다. 백제는 근초고왕 때부터 일본과의 문화교류가 시작되어, 박사를 비롯한 전문기술자들이 일본의 요청으로 빈번하게 내왕하여 일본 고대문화의 발전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장인(匠人) · 역박사(易博士) · 역박사(曆博士) · 의박사(醫博士) · 채약사(採藥士) · 악인(樂人) 등이 그들이다. 고안무는 오경박사로서, 백제에서 먼저 파견되었던 오경박사 단양이(段楊爾)와 교대하기 위하여, 516년(무령왕 16) 일본에 건너가 문화전파에 공헌하였다.
5. 무령왕릉
무령왕릉은 1971년 송산리 고분군의 배수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 덕분에 도굴의 피해 없이 완전한 형태로 조사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무령왕릉 발굴조사에서 가장 큰 성과는 무덤의 주인공이 밝혀졌다는 점이다. 내부에서 발견된 지석을 통해 무령왕은 523년 5월에 사망해 525년 8월 무덤에 안치되었고, 왕비는 526년 11월에 사망하여 529년 2월에 안치되었음이 밝혀졌다. 이로써 왕릉의 묘제와 출토유물에 절대 편년이 가능해졌고, 무령왕릉은 이후 다른 유적과 유물의 연대 추정에 기준이 되었다. 그리고 현재까지 무덤의 주인공이 확인된 유일한 고대 왕릉으로서 그 가치를 더하고 있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유물은 총 4,600여 점에 이른다. 무덤 입구인 널길에서 석수(石獸)와 청자육이호(靑瓷六耳壺), 오수전(五銖錢) 등이 지석과 함께 발견되었다. 관 안에서도 목침과 족좌(足座)를 비롯, 동경(銅鏡)과 관 장식, 귀고리, 팔찌, 신발 장식 등 다양한 장신구가 확인되었다. 이 유물들은 백제의 문화와 기술이 응축된 것으로, 화려하고 세련된 아름다음의 절정을 보여준다.
무령왕릉은 당시 백제 문화의 국제성을 드러내고 있기도 하다. 벽돌무덤이라는 형식 자체가 당시 중국 남조에서 유행하던 묘제였다. 무덤을 수호하는 진묘수(鎭墓獸) 역할을 했던 석수와 중국제 청자육이호와 청자등잔의 존재도 백제와 남조의 활발한 교류를 보여준다. 그리고 일본산 금송(金松)으로 만든 목관을 통해 왜와의 밀접한 관계 역시 짐작할 수 있다. 최근에는 무령왕릉 출토 유리구슬에 사용된 납이 태국에서 생산되었음이 밝혀졌다. 또한 왕비 관장식의 꽃무늬와 인도 산치탑 난간 무늬와의 유사성이 지적되기도 했다. 이처럼 백제는 동아시아를 넘어 동남아시아·인도와 교류하는 국제성을 띠고 있었고, 더불어 선진 문화를 수용하여 백제화하는 주체성도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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