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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두문자

백제 성왕 두문자2 : 성 사 남 노 한 진 관

by noksan2023 2023. 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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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왕
성왕

 

성왕 : 성 사 남 노 한 진 관

 

성 : 왕(523~554)

사 : 538 비천도(웅진(공주) > 사비(부여))

남 : 국호 부여

노 : 리사치계(달솔 일본에 불경 불상 전파)

한 : 551 강탈환(백제, 가야, 신라)

진 : 553 흥왕의 배신(나제동맹 파기)

관 : 554 산성 전투에서 전사

 

 

백제 성왕 추모제
백제 성왕 추모제

 

1. 왕(백제의 제2의 전성기)

성왕은 삼국시대 백제의 제26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523~554년이며 무령왕의 아들로 즉위했다. 중앙 관제(5부) 지방의 통치조직(5방 22관부)을 정비하여 정치 운영에서 귀족회의체의 정치적 발언권을 약화시키고 왕권 중심의 국가 운영체계를 확립했다. 사비 천도(538)도 그 일환으로 단행되었고, 중국 양조와 교류하여 백제 문화의 질적 수준을 크게 향상시켰다. 숙원 과제이던 한강 유역 탈환을 위해 신라·가야와 연합하여 한강 하류 6군을 회복했으나 신라 진흥왕에게 빼앗기게 되었다(나제동맹 파기). 이에 다시 신라와 싸우던 중 관산성 전투(554 전사)에서 신라 복병의 기습을 받아 전사했다.

 

 

성왕 : 사비천도(538)
성왕 : 사비천도(538)

 

 

2. 538 비천도(웅진(공주) > 사비(부여))

성왕이 사비로 천도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이전 수도인 웅진이 방어상의 장점은 있으나 너무 협소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영역의 확장과 지배층의 증가로 인해 백제는 보다 넓은 도읍이 필요했다. 그런 의미에서 사비는 백마강과 산맥이 넓게 둘러싸고 있어 방어에 적합했고, 남쪽으로는 평야가 펼쳐져 있어 수도로서 기능하기에도 유리했다. 또한 백마강을 통한 서해로의 진출도 용이한 곳이었다.

 

사비 천도의 또 다른 목적은 왕 중심의 지배질서를 강화였다. 천도 자체가 정치적 중심의 이동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지배질서의 변화는 필연적인 것이었다. 천도에 반대하는 귀족들을 누르고 천도를 실현하기 위해 성왕은 사비를 근거지로 하는 사씨(沙氏) 세력을 이용했다. 천도 후 사씨는 목씨와 함께 상좌평(上佐平)·대좌평(大佐平) 등 요직에 임명되면서 실세로 부각되었다. 반면에 왕족과 진씨(眞氏)·해씨(解氏)·백씨(苩氏) 등 웅진시기의 실세 귀족들은 정치적으로 힘을 잃었고, 대신 다양한 성씨들이 등장해 권력을 분산 점유했다. 이처럼 성왕은 사비천도를 통해 귀족세력을 재편하고 귀족들의 힘을 분산시킴으로써 왕권을 강화하였다. 사비도성은 이러한 왕권의 신장을 상징하는 공간이었다. 사비도성은 왕궁과 배후의 부소산성, 그리고 이를 둘러싼 나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중 핵심이 되는 왕성은 현재 부소산성의 남쪽 기슭에 위치한 관북리 유적으로 보고 있다. 관북리 유적에서는 동서 35m, 남북 18.5m의 대형 건물지가 발견되었는데, 왕성 내 핵심 건물로 추정된다. 사비도성은 왕성을 기준으로 남북을 축으로 중심도로를 만들고, 내부를 바둑판처럼 구획했다. 도로는 중요도에 따라 폭이 달랐으며, 도로 양쪽으로는 배수시설을 만들었다. 왕성의 중심도로 좌우에는 관청 등 각종 건물들이 위치하였다. 왕성 밖은 지배세력과 백성들의 거주지로, 위계에 따라 구역이 구분되었다.

 

한편 관북리 유적에서는 대형 목곽수조가 확인되었는데, 여기에 물을 저장했다가 상수도관을 통해 물이 흘러가는 구조이다. 수도관은 수키와 2매를 맞붙여 원통형으로 만든 것이었다. 그 외에도 많은 건물지와 저장시설, 공방시설 등이 확인되었고, 특히 연못에서는 각종 기와와 토기, 목간, 짚신 등이 출토되어 당시 생활상을 알려주고 있다.

 

3.  국호 부여

성왕의 왕위계승은 혈통적 정통성에 기반한 것이었기에, 앞선 시기의 정치적 안정을 유산으로 물려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안정을 바탕으로 538년(성왕 16)에 사비 천도를 단행하고,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로 바꾸었다.

 

 

성왕 일본에 불교 전파(노리사치계)
성왕 일본에 불교 전파(노리사치계)


4. 리사치계(달솔 일본에 불경 불상 전파)

노리사치계는 삼국시대 백제의 달솔로서 일본에 불교를 전수한 귀족이다. 노리사치계는 일본에 불교를 전수하였다. 백제 서부(西部)의 희씨(姬氏)로서 관계는 달솔(達率)이었다. 552년(성왕 30) 10월 성왕의 명에 의하여 석가모니불의 금상 1구, 번개(幡蓋) 약간, 경론(經論) 약간 권을 일본에 전하였다. 이들을 올리는 글에 불교의 예배공덕을 찬양하여, “이 법은 모든 법 가운데에서도 가장 뛰어난 것이다. 깨치기 어렵고, 들어가기 어렵다. 주공(周公)·공자(孔子)도 오히려 능히 알지 못하였도다. 이 법은 능히 헤아릴 수 없고, 가도 없으며, 복덕과보(福德果報)를 낳고 곧 위 없는 보리(菩提)를 이룬다. 그리고 이것은 천축(天竺)으로부터 이곳 삼한에 이르기까지 가르침에 의해서 받들어 모시고 존경하지 않는 곳이 없다. 이 때문에 일본에 전하여 주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일왕이 듣고 매우 기뻐하여 “내가 일찍이 이와같이 미묘한 법을 들어보지 못하였노라.” 하고 소가대신(蘇我大臣) 이나매(稻目宿禰)의 주장을 받아 들여 일본에 불교가 전래하게 되었다.

 

5. 551 강탈환(백제, 가야, 신라)

성왕은 숙원의 과제라고 할 수 있는 고구려에 빼앗긴 한강 유역 탈환 작업에 나섰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551년에 백제군을 주축으로 해 신라군과 가야군으로 이루어진 연합군을 일으켰다. 이 연합군은 북진해 백제군이 먼저 고구려의 남평양(南平壤)을 공격, 격파함으로써 기선을 제압해 고구려군을 패주시켰다. 그 결과 백제는 한강 하류의 6군을 회복했고 신라는 한강 상류의 10군을 차지하게 되었다.

 

 

성왕 VS 진흥왕 배신
성왕 VS 진흥왕 배신

 

 

6. 553 흥왕의 배신(나제동맹 파기)

553년(성왕 31) 신라군이 한강 하류의 백제 지역을 급습해 이곳에 신주(新州)를 설치하면서 백제는 한강 유역을 다시 상실하고 말았다. 성왕은 아들과 함께 신라의 배신에 대한 복수를 단행했다. 554년(성왕 32), 태자 여창(餘昌, 위덕왕)을 선발대로 삼아 국경지대인 관산성(충북 옥천)을 공격하고 그곳에서 전쟁을 대비하도록 한 것이다.

 

진흥왕은 553년 백제가 점거한 한강 유역을 점령해 백제에게 원한을 샀다. 이 부분이 신라가 나제동맹을 배신하고 백제를 기습공격해 힘으로 빼앗았다는 쪽으로 주로 알려졌다. 다만 신라군이 백제군을 직접 힘으로 뒷치기한 게 아니라 모종의 이유로 백제가 한강 하류를 포기하고 그걸 신라가 잘 먹겠습니다! 하고 낼름 차지한 것에 가깝다는 해석도 꽤 많이 제기되는데, 《일본서기》에는

 

'是歲 百濟棄漢城與平壤 新羅因此入居漢城(이 해 백제가 한성과 평양을 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신라가 한성에 들어가 살았으니)'

 

라고 해서 신라가 직접적으로 빼앗은 것이 아니라고 기록되었다. 《삼국사기》에는 한자의 미묘한 의미 차이지만,

 

'取百濟東北鄙(백제의 동북 지역을 취했다)'

 

즉 《삼국사기》에서 공격해 빼앗는 다른 부분과 달리, 공격해 빼앗은 게 아니라 '가진' 것이라고 써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성왕 본기>, <진흥왕 본기>의 다른 부분에서 백제나 신라가 뭔가 공격해서 빼앗을 때는 '공취', '침' 자를 썼다. '가지다'와 '공격하다', '침범하다'는 같은 상황에 쓰일 여지는 있지만, 분명히 차이가 있는 표현으로 볼 수도 있다.

아무튼 성왕은 신라에 바로 보복이나 항의를 하지 않고 오히려 553년에 딸 소비 부여씨를 진흥왕에게 시집보내는 모순된 행동을 보인다. 일단은 성왕이 진흥왕의 장인어른이 된 것이다. 그러나 성왕은 이미 553년 시점엔 신라와의 일대 결전을 뒤에서 준비하고 있었고, 딸은 신라의 방심을 사기 위한 시간벌이였다. 같은 553년 《일본서기》에서는 정월에 백제가 사신을 일본에 보내 군병을 요청하고, 일본은 6월에 왜장 우치노오미(有至臣)가 이끄는 왜군 및 전쟁물자를 백제에 보냈으며, 554년 초에도 일본이 구원군, 군마, 배를 백제에 보내주고, 백제는 역박사, 의박사, 음악가, 승려 등 선진문물을 일본에 답례로 보내주는 등 은밀히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 기록되어있다. 《일본서기》는 일본 측 사서이므로 백제가 일본에 원군을 요청하고 일본이 원군과 무기를 보내주는 것 위주로 기록되어 있지만, 가야에도 비슷하게 지원군을 약속받고 백제 내부에서도 이 시기 전쟁 준비를 했을 것으로 보인다. 진흥왕과 신라 측이 이 전쟁 준비를 미리 눈치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완전히 안심하지는 않았는지, 관산성 전투 직전에 명활산성을 수리하는 등 대비 태세를 갖추었다.

 

 

성왕 태자 창을 응원하러 가다 피살
성왕 태자 창을 응원하러 가다 피살

 

7. 554 산성 전투에서 전사

554년 1월 혹은 7월, 백제가 수만의 백제군 본군에 가야군, 왜군까지 동원해 신라에게 대대적으로 전쟁을 일으키는데 이것이 바로 역사상 유명한 관산성 전투였다. 백제에서 신라 수도로 가는 최단거리는 가야 방향이지만, 성왕은 신라가 새로 얻은 북방 영토와 기존 영토 사이 허리를 끊기 위해 지금의 충청북도 옥천군인 관산성 방면으로 쳐들어왔다.

고구려는 관산성 전투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신라를 간접 지원하기 위해 약간의 군대를 따로 백제 웅천성 공격으로 보냈다. 여기서 백제군은 태자 부여창이 직접 본군을 이끌어 고구려군을 격퇴하고(백합야 전투) 신라 전선에도 초기에 각간 우덕(于德)과 이찬 탐지(耽知)가 이끄는 군대를 격파하며 몇 번의 승리를 거두고 관산성을 압박, 554년 12월 9일 관산성을 함락해 불태웠다. 한편 《삼국유사》의 기록에서는 9월에 백제군이 신라의 진성(珎城)을 공격해 남녀 39,000명과 군마 8,000필을 빼앗았다고 하는데, 관산성 전투가 한 곳에서만 벌어진 것이 아니라면 진성 전투는 9월에, 관산성 함락은 12월에 벌어졌다고 봄이 타당할 것이다.

백제군을 이끄는 태자 부여창은 신라 영역으로 더 진격해 들어가려 했고, 이에 백제의 늙은 대신이 반대했지만 부여창은 공격을 강행해 신라 땅 안쪽의 구타모라(久陀牟羅)라는 곳까지 들어가 보루를 쌓았다. 그러던 와중 성왕은 전장에서 분투하는 태자 부여창을 위로하기 위해 소규모 호위부대만을 이끌고 따로 이동 중이었는데, 마침 신라에서는 신주(지금의 경기도 지역)를 지키던 김무력 휘하의 신라군이 북쪽에서 내려와, 소규모 부대와 함께 이동 중이던 성왕을 구천(狗川) 혹은 고리산(古利山)이란 장소에서 기습공격해 붙잡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도도가 성왕을 처형해, 신라는 백제군에 머리 없는 성왕의 시신을 보냈다. 국왕을 잃은 백제군은 사기가 크게 떨어졌고, 신라군은 곧이은 전투에서 백제, 가야, 왜 연합군을 도리어 크게 격파해 29,600명을 베었다. 전근대의 전투 특성상 죽는 사람보다 와해되어 패주하는 병력이 더 많다는 점을 고려하면 29,600명이 죽었다는 기록상 실질적인 병력 손실은 더 컸을 수도 있으며, 백제가 향후 수십년간은 거의 신라를 견제하지 못할 정도의 대승이었다. 관산성 전투의 승리 이후 한반도 중부 한강 유역은 확고하게 신라의 영토가 되었다.

여기서 《일본서기》의 분주에 따르면 성왕의 목을 자른 후 머리 없는 시신만 백제에 예를 갖춰 보내고, 머리는 신라 궁궐의 계단 아래에 묻어버렸다는 기록도 있다. 이 역시 유명한 일화지만 사실 <일본서기>의 해당 부분에서도 성왕의 시신이, 본문에는 참수한 후 구덩이에 묻었다고만 돼있고, 머리를 계단 아래에 묻었다는 것은 '다른 책에는 이렇게도 써 있다' 정도로 언급하고 있어, 궁궐 계단에 목을 묻어 그 위 땅을 사람들이 밟고 다니게 했다는 건 당대 백제나 일본에 퍼져 있던 자극적인 카더라 소문일 가능성이 높다. 고대사회에서는 보통 적국의 임금이라도 왕은 왕이라 고귀한 신분으로서 대우를 해 주는 게 동서고금의 보편적 현상이었다. 신라의 장군인 도도는 성왕의 목을 베기 전에 성왕에게 절을 하며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었고, 당장 성왕의 딸 소비 부여씨가 진흥왕에게 시집갔던 것과 같이 백제 부여씨 왕가와 신라 김씨 왕가는 서로 대등한 관계를 맺었던 것이 관산성 전투 기준으로 바로 얼마 전 일이었다. 다른 나라도 다 그렇겠지만 신라는 특히 골품제로 잘 알려져있듯 아무 가문하고나 혼인을 하지 않았으며 혈통 보존을 위해서라면 근친혼도 마다하지 않았던 나라다. 즉 진흥왕의 혼인동맹은 성왕 일가를 성골이나 진골에 준하는 격으로 간주한 것이다. 결국 성왕을 지나치게 깎아내리는 것은 '동급'인 신라 왕도 저렇게 될 수 있다는 선례를 남겨서 왕권을 세우는 데 있어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올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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