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증왕 : 한 우 우 동 순 금
한 : 한화정책
우 : 우산국정벌 512 이사부
우 : 우경 장려(농업생산력)
동 : 509 동시전 설치
순 : 순장
금 : 금지(노동력 확보)
1. 지증왕(500~514)
지증왕은 삼국시대 신라의 제22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500~514년이며, 재종형인 소지마립간이 후계자 없이 죽자 64세에 왕위에 올랐다. 우경을 시행하여 농업생산력을 높였고 순장을 금지했다. 503년에는 그동안 사라·사로·신라 등으로 사용되던 국명을 신라로 확정했고, 왕호를 방언인 마립간에서 중국식인 왕으로 바꾸어 비로소 고대국가로 정비된 신라국의 왕이 되었다. 전국에 주·군·현을 설치하고. 512년에는 우산국을 복속시켰으며 남쪽에 소경을 설치해 직접적인 지배력을 행사했다. 왕위에 오른 지 15년 만인 78세에 사망했다.
2. 한화정책
503년에는 그 동안 사라(斯羅) · 사로(斯盧) · 신라(新羅) 등으로 사용되던 국명을 신라로 확정했으며, 왕호를 방언인 마립간에서 중국식인 왕으로 바꾸었다. 이로써 지증왕은 비로소 고대국가로 정비된 신라국의 왕이 되었다. 이때 제정된 신라라는 국명은 "왕의 덕업이 나날이 새로워지고, 사방의 영역을 두루 망라한다(新者德業日新 羅者綱羅四方之義)."는 뜻에서 취했다고 한다. 이러한 국명 및 왕호의 한화정책(漢化政策)은 단순한 명칭상의 변경이 아니고 신라가 고대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왕권과 지배조직을 강화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요청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중국의 고도한 정치조직과 문물에 대한 인식과 그것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나타난 것이다.
또한 505년에는 친히 국내의 주(州) · 군(郡) · 현(縣)을 정했는데, 지방제도로 주군제도(州郡制度)를 실시한 것은 고구려 · 백제 · 가야 등의 삼국과의 전쟁에서 얻어진 점령지의 통치와 영토확장을 위한 수단이었다.
즉 중앙집권적인 통치체제의 수립을 위해 새로 신라의 영역 내로 편입된 점령지를 행정적 차원에서 일원적으로 파악함으로써 효과적인 지방통치를 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같은 해에 실직주(悉直州 : 지금의 강원도 삼척)를 설치하고, 이사부(異斯夫)를 신라 최초의 군주(軍主)로 삼은 것도 이러한 지방통치의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3. 우산국정벌 512 이사부
군사적으로는 동북 방면에 파리성(波里城) · 미실성(彌實城) · 진덕성(珍德城) · 골화성(骨火城) 등 12개 성을 축조해 대외적인 방비를 튼튼히 하고, 512년에는 이사부로 하여금 우산국(于山國 : 지금의 울릉도)을 복속시키게 하였다. 그리고 남쪽 방면으로는 신라가 아직 무력으로 완전히 정복하지 못한 아시촌(阿尸村 : 지금의 경상남도 함안?)에 소경(小京)을 설치해 그 곳 주민을 행정적으로 회유함으로써 신라의 직할영토로 편입시키기 위한 사전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지증왕 13년(512) 여름 6월, 우산국(于山國)이 항복해 와 해마다 토산물을 공물로 바치기로 하였다. 우산국은 명주(溟州)의 정동쪽 바다에 있는 섬이며, 혹 울릉도(鬱陵島)라고 부르기도 한다. 땅은 사방 100리인데,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항복하지 않았다. 이찬(伊湌) 이사부(異斯夫)가 하슬라주(何瑟羅州) 군주(軍主)가 되어 이르기를, “우산국 사람들은 어리석고 사나워 힘으로 복속시키기는 어렵지만 꾀로써 복속시킬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이에 나무 사자를 많이 만들어 전선(戰船)에 나누어 싣고 그 나라의 해안에 이르러 거짓으로 말하기를, “너희가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이 사나운 짐승을 풀어 밟아 죽이겠다.”라고 하니, (그)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며 곧 항복하였다. <삼국사기> 권 4 신라본기
또 아슬라주(阿瑟羅州)의 동쪽 바다 가운데 순풍으로 이틀 정도 (걸리는 거리에) 우릉도(于陵島) 【지금은 우릉(羽陵)이라고도 한다】 가 있었다. 둘레가 2만 6730보였는데 섬사람[島夷]들은 바닷물이 깊다는 것을 믿고 건방지게 신하로서의 도리를 지키지 않았다. 왕은 이찬(伊喰) 박이종(朴伊宗)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그들을 토벌케 하였다. 박이종은 나무 사자를 만들어 큰 배 위에 싣고 그들을 위협하며 말하기를, “항복하지 않으면 이 짐승을 풀겠다.”라고 하자, 섬사람들이 두려워 항복하였다. (왕은) 박이종에게 상을 내려 주(州)의 장관으로 삼았다. <삼국유사> 권 1 기이 편
4. 우경 장려(농업생산력)
음력 3월에 주주(州主)와 군주(郡主)에게 각각 명하여 농사를 권장케 하였고, 처음으로 소를 부려 논밭갈이를 하였다. 김부식 (1145). 〈본기 권 4 지증 마립간〉. 《삼국사기》. 三年 春二月 下令禁殉葬 前國王薨 則殉以男女各五人 至是禁焉 親祀神宮 三月 分命州郡主勸農 始用牛耕(3년(502) 봄 2월에 영(令)을 내려 순장(殉葬)을 금하였다. 전에는 국왕이 죽으면 남녀 각 다섯 명씩을 순장했는데, 이때 이르러 금한 것이다. 왕이 몸소 신궁(神宮)에 제사 지냈다. 3월에 주주(州主)와 군주(郡主)에게 각각 명하여 농사를 권장케 하였고, 처음으로 소를 부려 논밭갈이를 하였다.
지증왕은 502년(지증왕 3) 지방관을 통해 전국에 농사짓기를 권장하는 한편 소의 힘을 사용하는 농업 기술, 곧 우경(牛耕)을 전국에 보급하였다. 이는 철제 농기구의 광범위한 보급과 함께 농업 생산력을 비약적으로 늘릴 수 있는 농업 기술의 발전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농업의 발전을 통해 확보한 국가 경제력을 바탕으로 신라는 국가를 발전시켜 나갔으며, 제도의 정비도 시행하였다.
5. 509 동시전 설치
509년에는 시사(市肆, 혹은 시전)를 관리 감독하는 관청인 동시전(東市典)을 설치하였다. 이리하여 무역과 상인들의 거래를 단속, 통제하였다. 아울러 같은 해 11월에 얼음을 보관하고 관리하는 업무와 선박을 이용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509년(지증왕 10) 1월에는 동시전(東市典)을 설치하여 왕경의 시장 관련 업무를 보게 했고, 그해 3월에는 함정을 설치하여 맹수를 잡도록 하였다. 514년에는 최초의 소경(小京)인 아시촌소경(阿尸村小京, 지금의 경남 함안군으로 추정)을 설치하여 영역 안의 통치가 효율적으로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6. 순장금지
502년, 신라 지증왕이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이제부터 온 나라에 순장을 금지하겠노라! 만약에 순장을 치르는 자는 엄벌에 처할 것이다!" 지증왕이 순장을 금지한 배경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불교를 전파하기 위한 종교적인 이유, 다른 하나는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경제적 이유이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은 뒤 그가 살던 모습으로 그다음 세계에 가는 것이 아니라, 아예 새롭게 다시 태어난다고 믿었다. 이에 따라 죽은 뒤 세계에 대한 생각이 달라져 순장을 금지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추정한다.
순장을 하면 일할 수 있는 사람이 줄고 농업 생산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금지했을 거라는 이야기도 많다. 다만 지증왕 때는 불교를 공식적인 국가 종교로 인정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보다 많은 노동력을 확보하려는 목적이 순장을 금지한 실질적인 이유일 거라고 보고 있다. 불교가 신라에 전파된 건 5세기 안팎이지만, 국교(國敎)로 인정한 건 그다음 왕인 법흥왕 때(527년)이다.
순장은 삼국시대 후기쯤 완전히 사라졌다. 이후 신라 사람들은 산 사람 대신 사람처럼 생긴 인형을 무덤에 넣어주었다. 흙으로 빚어 만든 10~20㎝ 크기의 토용(土俑)이다. 이처럼 무덤 안에 시체와 함께 넣는 물건을 '껴묻거리(부장품·副葬品)'라 한다. 통일신라 시대 무덤인 경주 용강동 고분에서는 남성 토용 15점, 여성 토용 13점, 토제(土製) 말 3점, 청동제 12 지신상(像) 등이 출토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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