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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두문자

진흥왕 두문자 : 진 품 화 대 거 흥 황 혜 전 개 태 홍

by noksan2023 2023. 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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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진흥왕 업적
신라 진흥왕

 

진흥왕 : 진 품 화 대 거 흥 황 혜 전 개 태 홍

 

진 : 흥왕(540~576)

품 : 주(최고정치기구)

화 : 랑도 공인

대 : 가야 정복(562)

거 : 칠부의 국사(545)

흥 : 륜사 완공

황 : 룡사 조성

혜 : 국통 량(고구려 출신)

전 : 륜성왕

개 : 

태 : 

홍 : 

 

 

진흥왕 거칠부 국사 편찬 지시
진흥왕 거칠부 국사 편찬 지시


1. 흥왕

진흥왕은 삼국시대 신라의 제24대(재위: 540~576) 왕이다. 재위 기간에 불교를 진흥하는 한편, 화랑도를 창설하고 한강 유역을 차지하여 신라의 삼국 통일 기틀을 마련하였다. 진흥왕은 정복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여 이전보다 3배나 넓은 영토를 개척하였다.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의 성은 김 씨, 이름은 삼맥종(彡麥宗) 또는 심맥부(深麥夫)이다. 아버지는 지증왕의 둘째 아들이자 법흥왕의 동생인 입종갈문왕이다. 입종갈문왕은 사부지갈문왕(徙夫智葛文王)이라 칭하기도 한다. 어머니는 법흥왕의 딸 김 씨 지소부인이고, 비(妃)는 모량부 소속 박영실 각간의 딸 사도부인이다. 『삼국유사』에서는 식도부인(息道夫人)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입종갈문왕이 537년에 죽고, 540년 7월에 법흥왕이 아들 없이 사망하자, 조카이자 외손자인 삼맥종이 왕위에 올랐다.

 

2. 주(왕정의 기밀사무)

일명 조주(祖主, 租主)라고도 한다. 집사부 창부(倉部) 전신으로, 565년(진흥왕 26)에 설치되어 651년(진덕여왕 5)까지 약 1세기간 존속하였다. 그러나 5세기경 이래 이미 존재해 오다가 565년에 이르러 하나의 관청조직으로 확대, 개편되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 장관은 전대등(典大等) 2인으로 되어 있으며, 589년(진평왕 11)에 그 보좌관으로 다시 대사(大舍) 2인이 설치되었다. 품주는 국왕의 가신적(家臣的) 기구에서 출발하여 처음에는 국가의 재정에 관한 일을 맡았으나, 584년에 이르러 공부(貢賦)에 관한 사무를 조부(調府)에 인계한 뒤로는 주로 재정의 지출에 관한 사무를 맡게 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 뒤 왕권의 성장에 따라 점차 왕정의 기밀사무를 관장하는 최고 관청으로까지 발전하여 드디어 집사부로 개편되는 토대를 마련하였다. 품주는 중고시대 귀족연합정권 아래에서의 왕권의 발전을 특징지어 주는 관청으로 주목되고 있다.

 

 

진흥왕 : 화랑도 공인
진흥왕 : 화랑도 공인

 

3. 랑도 공인

진흥왕은 인재를 선발하고 군사력을 키우기 위해 화랑도를 창설(공식기구로 인정)하였다. 화랑도는 진골 출신의 화랑과 그를 따르는 낭도로 구성되었다. 평소에 화랑과 낭도는 명산과 대천을 찾아다니며 도의(道義)를 연마하고, 무예를 익혔으며, 노래와 음악으로 서로 즐기다가 전쟁이 발생하면, 전사 집단으로 전환하여 전투에 참가하였다. 『삼국사기』에는 576년(진흥왕 37)에 여성 중심의 원화제(源花制)를 폐지하고 남성 중심의 화랑도를 창설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로 원화를 화랑으로 개편한 것은 562년(진흥왕 23) 이전이었다.

 

화랑도는 신라시대 화랑을 우두머리로 한 청소년 수련단체이다. 단체정신이 매우 강한 청소년 집단으로서 교육적·군사적·사교단체적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화랑집단은 화랑과 화랑을 따르는 다수의 낭도로 구성되었는데 낭도의 수는 많을 때는 1천 명이 되기도 하였고 화랑은 신라시대를 통틀어 2백여 명이나 되었다. 국난극복을 위한 인재양성이 시급한 시기에 촌락공동체적 성격의 청소년조직 전통과 국가의 필요가 결합하여 반관반민의 성격을 갖는 조직체로 기능했다. 무사도와 풍류가 결합된 수련을 특징으로 했지만 삼국통일 후에는 본래의 성격이 변질되었다.

 

4. 가야 정복(562)

562년(진흥왕 23)에 이사부(異斯夫)가 신라군을 이끌고 대가야를 공격하여 멸하였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562년에 가라국과 안라국을 비롯한 임나(가야) 10국이 멸망하였다고 한다. 신라가 562년에 대가야(가락국)와 더불어 가야 소국들을 정복하여 가야 지역을 모두 신라의 영역으로 편제하였음을 반영한다.

 

관산성 전투 시점까지 남아있던 여러 가야 소국들은 유사시 도움을 요청할 백제가 약화되자 신라 앞에 도미노처럼 무너졌다. 555년에는 비화가야가 있던 지금의 창녕군을 장악하고 행정 구역을 설치했으며, 지금의 함안군인 아라가야도 561년 이전 시점에 합병시켜 이곳 파사산에 신라군의 성을 쌓아 왜군에 대비하였다. 마침내 562년에는 신라의 명장 이사부가 군대를 이끌고 가야 지역의 맹주 대가야를 공격했다.(가야멸망전) 선봉이던 화랑 사다함이 항복의 상징인 백기를 가야의 성문에 꽂아 병사들이 당황해 무너지는 활약에 힘입어 대가야를 멸망시켰다. 백제의 위덕왕과 왜 연합군이 대가야를 구원하기 위해 562년 7월 신라의 서쪽 변경을 공격했지만 아직 10년도 채 지나지 않은 관산성 패전의 여파로 백제군의 규모는 과거보다 훨씬 줄어있었다. 사실 백제 입장에서는 후유증이 가시지 않았지만 쓸만한 동맹 가야를 살려두기 위해 상당히 무리했다고 볼 상황이었는데, 일본서기 기록상 왜군 장수가 군사기밀을 백제에 전하려고 이동하던 중 봉인한 서신과 화살을 길에 떨어뜨리는(...) 실수를 하고 그걸 신라가 손에 넣어 신라군이 승리하고 백제+왜군 1,000여 명을 죽이거나 잡았다고 한다. 그리고 《일본서기》에서는 신라군이 거짓항복 혹은 휴전의 뜻으로 백기를 걸었는데 반파국을 돕기 위해 온 왜군 장수가 백기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속아 역습에 당하는 기록이 《일본서기》 <긴메이 덴노 조>에 기록되어 있다. 위의 대가야 멸망전과 비슷하게 백기가 등장하는 일화가 있는 것으로 보아서 같은 상황이 다른 입장에서 기록된 것일 가능성도 있다.

 

5. 칠부의 국사(545)

545년(진흥왕 6)에 진흥왕은 이사부의 건의를 받아들여 거칠부(居柒夫) 등에게 널리 문사(文士)를 모아 『국사(國史)』를 편찬하게 하였다. 『국사』는 현재 전해지지 않으나, 고려시대에 편찬한 『 구삼국사』와 『삼국사기』에 『국사』의 내용이 반영된 것으로 짐작된다. 일반적으로 김 씨 왕실의 정통성을 천명하고, 나아가 유교적 정치이념을 기초로 왕자(王者)의 위엄을 내외에 과시하기 위해 『국사』를 편찬하였다고 이해한다.

 

6. 륜사 완공

『삼국사기』에 의하면, 진흥왕은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한결같은 마음으로 불교를 받들었다고 한다. 말년에는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었으며, 법호를 법운(法雲)이라 하였다. 왕비 역시 진흥왕을 본받아 비구니가 되어 영흥사에 거처하다가 614년(진평왕 36)에 죽었다.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진흥왕은 재위 기간 불교를 진흥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544년(진흥왕 5) 2월에 법흥왕 때부터 천경림에 짓기 시작한 흥륜사(興輪寺)를 완성하였다. 이어 사람들이 출가하여 승려가 되어 불교를 받드는 것을 허락하였다. 549년(진흥왕 8)에 중국 남조의 양나라에 유학하였던 승려 각덕(覺德)이 불사리(佛舍利)를 가지고 귀국하자, 진흥왕은 백관들로 하여금 흥륜사 앞에서 받들어 맞이하게 하였다. 또한, 565년(진흥왕 26)에는 진나라에 유학을 갔던 승려 명관이 진나라 문제(文帝)의 명으로 사신 유사(劉思)와 함께 불교 경론 1,700여 권을 가지고 귀국하였다. 각덕의 귀국과 불교 경론의 전래를 계기로 신라에서 불교 교리가 발전되는 기틀이 마련되었다.

 

7. 룡사 조성

553년(진흥왕 12)에 월성(月城) 동쪽에 황룡사(皇龍寺)를 건립하기 시작하여 566년(진흥왕 27)에 완공하였다. 574년(진흥왕 35)에는 황룡사에 장육존상(丈六尊像)을 주조하여 안치하였다. 신라인들은 장육존상을 황룡사구층탑, 천사옥대와 함께 신라삼보(新羅三寶)로 받들었다. 또한, 566년에 경주 포석정 근처에 기원사(祇園寺)와 실제사(實際寺)도 준공되었다.

 

8. 국통 량(고구려 출신)

551년에 고구려에서 망명한 법사 혜량(惠亮)을 승통(僧統)으로 임명하고 승정기구(僧政機構)를 정비하였다. 566년 황룡사를 준공할 때 최초로 백좌강회〔백고좌법회〕)를 열었는데, 혜량이 주관하였다고 알려졌다.

 

혜량은 연개소문의 도교 장려 정책에 불만을 품고 신라로 귀순하여 신라 불교 최초의 승통(僧統)이 되었다. 고구려에 있을 때 국력을 정탐하러 온 신라 장수 거칠부(居柒夫)를 만난 적이 있다. 그때 혜량은 강당에서 불경을 설하였는데, 거칠부를 은밀히 불러 다른 사람의 눈에 띄지 않도록 신라로 귀환(歸還)시켰다. 그 뒤 신라는 백제의 연합군과 함께 고구려를 정벌하여 국경의 열 군데 군(郡)을 함락시켰다. 거칠부가 죽령(竹嶺)을 넘어 고구려로 진군할 때 혜량을 보고, 전날 목숨을 구해준 은혜에 보답하고자, 그를 진흥왕에게 천거하였다. 551년(진흥왕 12)에 망명한 그는 승통이 되어 백고좌법회(百高座法會)와 팔관회(八關會)를 최초로 개최하였고, 불교의 여러 사무를 통괄하였다.

 

9. 륜성왕

신라 초기 교단의 형성과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으며, 새로운 불교의식의 정착을 도모하였다. 고구려에서 귀화한 그가 신라의 승통이 되었다는 것은 그의 위대성을 말함과 동시에 신라불교의 연륜이 일천하였다는 반증이 되기도 한다. 진흥왕은 스스로 전륜성왕(轉輪聖王)을 자처하고, 두 아들의 이름을 전륜성왕의 이름을 빌려 동륜, 사륜(舍輪: 철륜)이라 지었다. 진흥왕은 즉위 이후에 대규모 영토를 확장하면서 자신의 정복 활동을 정당화하고, 동시에 백성들을 무력이 아니라 정법, 즉 불법(佛法)으로 다스리는 이상적인 제왕인 전륜성왕이라 자처한 것으로 짐작된다.

 

10.   제 : 연호 사용

진흥왕이 왕위에 올랐을 때의 나이가 『 삼국사기』에는 7살, 『삼국유사』에는 15살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진흥왕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태후 지소부인이 섭정(攝政)하였다. 551년(진흥왕 12) 정월에 연호를 건원(建元)에서 개국(開國)으로 바꾸었는데, 이때부터 진흥왕이 전면에 나서 정국 운영을 주도한 것으로 이해한다.

 

572년 정월에 연호를 태창(太昌)에서 홍제(鴻濟)로 바꾸었다. 551년 개국으로 연호를 바꾼 이래 정복 활동을 전개하여 영토를 크게 확장하고, 나라의 위세가 높아졌다. 이에 진흥왕은 568년에 연호를 태창으로 바꾸었다가 영토 확장 과정에서 고통을 당한 백성들을 위로하고, 전륜성왕으로서 불법의 힘으로 그들을 널리 구제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572년 정월에 연호를 홍제로 바꾼 것으로 짐작된다. 572년(진흥왕 33년) 10월 20일에 전쟁에서 죽은 사졸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팔관연회를 베풀었는데, 이 행사 역시 이 같은 정책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진흥왕의 영토확장
진흥왕의 영토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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