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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두문자

진흥왕 순수비 두문자 : 단 북 창 마 황

by noksan2023 2023. 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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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왕 순수비
진흥왕 순수비

 

진흥왕 순수비 : 단 북 창 마 황

 

단 : 양 적성비(551 적성지역 회복 + 지역민 위로)

북 : 한산비(555 김정희 고증 한강 하류 진출 국보 3호 추사 김정희 금석과 안록 고증)

창 : 녕비(561 비화가야 점령 + 대가야 정벌의지 밝힘 + 지방관 파견)

마 : 운령비(568 함경도 진출 + 비열홀주 + 고구려와 밀약설 + 최남선 고증)

황 : 초령비(568)

 

 

단양 적성비
단양 적성비


1. 양 적성비(551 적성 회복)

단양 신라 적성비는 신라가 고구려 영토인 적성을 점령한 후 세웠다. 비석에 새겨진 기록과 『삼국사기』의 내용에 비추어 보면 진흥왕 6~11년(545~550) 사이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록에는 민심을 안정시키고 신라의 새 영토를 확인하며, 새로 복속된 고구려인들을 신라 국민으로 흡수하려는 국가의 의지가 드러난다. 진흥왕이 이사부 등 고관 열 명에게 명령을 내려 신라의 국경을 넓히는 사업을 돕고, 목숨까지 바쳐 충성을 다한 적성 사람 야이차에게 상을 내린다는 내용이 담겨 있으며, 이와 같이 충성을 바치는 사람에게는 똑같이 포상하겠다는 국가 정책도 적혀 있다. 비문에 진흥왕이 다녀갔다는 기록이 없고, 비문 첫머리에 교사(敎事)*라는 부분이 있는 것을 보면 진흥왕의 명을 받아 세운 석비(石碑)이지 왕이 직접 순행하며 민정을 살핀 기념으로 세우는 순수비(巡狩碑)는 아니다. 하지만 순수비의 정신을 담은 척경비(拓境碑)**라는 점과 적성(赤城)이라는 글자가 여러 번 등장한다는 사실은 지금의 단양이 당시에는 적성으로 불렸음을 밝혀 주기 때문에 사료로서 가치가 높다.

 

비(碑)는 위가 넓고 두꺼우며, 아래가 좁고 얇다. 윗부분은 잘려나가고 없지만 양 측면이 거의 원형으로 남아있고, 자연석을 이용한 듯 모양이 자유롭다. 전체의 글자수는 440자 정도로 추정되는데, 지금 남아있는 글자는 288자로 거의 판독할 수 있다. 글씨는 각 행마다 가로줄과 세로줄을 잘 맞추고 있으며, 예서(隸書)에서 해서(楷書)로 옮겨가는 과정의 율동적인 필법을 보여주고 있어 서예 연구에도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비문에는 신라의 영토 확장을 돕고 충성을 바친 적성인의 공훈을 표창함과 동시에 장차 신라에 충성을 다하는 사람에게도 똑같은 포상을 내리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를 통해 신라의 형벌 및 행정에 대한 법규인 율령제도 발달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노역체제, 재산 분배에 관한 국법이 진흥왕 초반에 마련된 것과 적성 지방에 국한된 관습을 법으로 일반화하고 있는 사실 등이 그러하다.

비문 첫머리에 언급된 고관 10인의 관등과『삼국사기』의 내용을 견주어 살펴볼 때, 비의 건립은 진흥왕 6∼11년(545∼550) 사이였을 것으로 보인다. 북방 공략의 전략적 요충지인 적성지역에 이 비를 세웠다는 것은 새 영토에 대한 확인과 함께 새로 복속된 고구려인들을 흡수하려는 국가의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비록 순수비(巡狩碑:왕이 직접 순행하며 민정을 살핀 기념으로 세우는 비)는 아니지만, 순수비의 정신을 담고 있는 척경비(拓境碑:영토 편입을 기념하여 세운 비)라는 점에서 큰 가치를 지닌다.

 

북한산비 : 김정희 고증
북한산비 : 김정희 고증

 

2. 한산비(555 김정희 금석과 안록 고증)

북한산비는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서울 북한산(일명 三角山) 남쪽 승가사(僧伽寺) 서남방에 위치한 비봉(碑峰) 꼭대기에 있었으나,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이 비 부근에 승가사가 있고 조선 태조 때의 국사였던 무학(無學)의 탑비가 있어 종래 ‘무학의 비’ 또는 ‘도선(道詵)의 비’로 알려져 왔으나, 1816년(순조 16) 7월에 김정희(金正喜)가 김경연(金敬淵)과 함께 이 비석을 조사하고, 다시 이듬해 6월 조인영(趙寅永)과 같이 비문을 조사하여 68자를 심정(審定), 비로소 진흥왕순수비임을 확인하게 되었다(금석과 안록). 비가 세워진 연대는 분명히 알 수 없으나 561년(진흥왕 22) 창녕비(昌寧碑)가 건립된 뒤부터 568년(진흥왕 29) 황초령비(黃草嶺碑)와 마운령비(摩雲嶺碑)가 건립되기까지의 기간 중 어느 한 시기일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고, 한편 568년 이후일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 비는 윗부분이 일부 마멸되어 현재 남아 있는 비신은 높이가 154㎝, 너비가 69㎝이다. 비문은 모두 12행이며 행마다 해서체로 32자가 새겨져 있다.

 

진흥왕은 553년(진흥왕 14) 백제로부터 한강 하류지방을 빼앗아 이곳에 신주(新州)를 설치했으며, 555년(진흥왕 16) 10월에는 몸소 북한산에 순행하여 강역을 획정한 일이 있는데, 그것을 기념해 순수비를 세웠을 것으로도 보인다. 북한산비에는 일척간(一尺干: 伊飡의 별칭)의 고위관등을 가지고 있던 내부지(內夫智)의 이름이 새겨져 있으며 또한 남천군주(南川軍主)의 직명도 나타나 있어, 신라시대의 인물 및 관직제도 연구에 참고가 된다. →진흥왕순수비

 

 

창녕비
창녕비

 

3.  녕비(561 비화가야 점령 + 대가야 정벌의지 밝힘 + 지방관 파견)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는 진흥왕이 창녕 지역을 신라의 영역으로 편입하면서 세운 비이다. 1914년에 발견되어 1924년에 현재의 자리로 옮겼으며, 최초로 발견된 자리에는 표지석을 세워 두었다. 단단한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높이는 가장 높은 부분이 약 3m이고, 가장 낮은 부분이 1.15m이다. 비석의 왼쪽 윗부분이 오른쪽 윗부분보다 낮으므로 두 행마다 한 자씩 줄여 새겼다. 비문은 27행으로 한 행의 글자 수는 일정하지 않으며 전체 643자 가운데 현재 400자 정도가 판독된 상태이다. 비문의 첫머리에 ‘신사년(辛巳年) 2월 1일 세웠다’는 내용이 있어 진흥왕 22년(561)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앞부분은 심하게 닳아 있어 판독이 어렵지만 뒷부분은 비교적 선명하게 남아 있다. 진흥왕 대에 세워진 북한산비, 황초령비, 마운령비는 첫머리에 모두 ‘순수관경(巡狩管境)’이라는 표현이 있어 순수비라고 부르지만, 이 비석은 이러한 표현이 없어 ‘척경비’라고 부른다. 신라 6부의 명칭과 중앙 및 지방의 중요 관직 명칭, 지방 유력자의 직명 등이 기록되어 있어 6세기 신라의 정치, 사회, 제도, 군사적 실상을 밝히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빛벌가야(지금의 창녕군)를 신라 영토로 편입한 진흥왕이 이곳을 순시하면서 민심을 살핀 후 그 기념으로 세운 비이다. 당시 창녕군은 신라가 서쪽으로 진출하는데 있어 마치 부챗살의 꼭지와 같은 중요한 길목이었는데, 진흥왕 16년(555) 신라에 병합되었고, 565년에는 대야주(지금의 합천군)와 합쳐져 비사벌군(比斯伐郡) 또는 비자화군(比自化郡)으로 불리게 되었다.

비는 목마산성 기슭에 있던 것을 1924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비각안에 모셔 둔 것으로, 자연석의 앞면을 평평하게 다듬어 비문을 새기고, 그 둘레에 선으로 윤곽을 돌려놓은 모습이다. 다른 순수비와 달리 ‘순수관경(巡狩管境)’이라는 제목이 보이지 않아 척경비(영토 편입을 기념하여 세운 비)라 일컫고 있으나, 임금을 수행한 신하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순수비에 속한다 할 수 있다.

비문은 심하게 닳아 있어 판독하기가 힘든 상태이나, 후반부는 명확히 읽어낼 수 있을 만큼 선명하다. 다른 순수비의 내용을 참고할 때 대략 진흥왕이 빛벌가야를 점령하여 영토를 확장한 사실과 왕의 통치이념, 포부 등이 실려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후반부에 당시 왕을 수행하던 신하들의 명단이 직관, 직위, 소속의 순서대로 나열되어 있어 당시 지방행정조직, 신분제 및 사회조직을 파악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비를 세운 시기는 대가야가 멸망하기 1년 전인 신라 진흥왕 22년(561)으로, 이 지역을 가야진출의 발판으로 삼고자 한 왕의 정치적인 의도가 엿보인다. 또한 진흥왕 당시의 사실을 기록해 놓아『삼국사기』의 내용을 보완해줌으로써, 이 시대의 역사적 사실을 밝히고 이해하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황초롱비
황초롱비

 

 

4. 운령비 초령비 

위 부분과 왼쪽 아래 부분이 일부 마멸되었는데(광복 후 마멸된 부분이 발견되었다고 함), 현재 남아 있는 비는 높이 92.4㎝, 너비 45㎝, 두께 20㎝이다. 비문은 모두 12행이고 행마다 35자가 해서체(楷書體)로 새겨져 있다. 내용은 같은 시기에 세워진 마운령비와 거의 일치하는데, 유교적인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지향하려는 의지가 잘 나타나 있다. 그 밖에 역수(曆數)의 관념을 비롯해 건호(建號) · 짐(朕) · 순수(巡狩) 등의 용어를 사용한 것에서 제왕(帝王)으로서의 자부심이 나타나 있다. 또한 진흥왕의 변경 지역 순수에 수행된 신료(臣僚)들의 이름과 관등 · 관직은 신라의 정치 제도와 인물 연구에 많은 참고가 되고 있다.

 

이 비는 현재의 함경남도 함주군 하기천면 진흥리에서 발견되었는데, 1852년(철종 3)에 당시 함경도관찰사 윤정현(尹定鉉)이 비를 보호하기 위해 황초령 정상의 원 위치에서 고개 남쪽인 중령진(中嶺鎭) 부근, 즉 하기천면 진흥리로 옮겨 비각(碑閣)을 세운 것이다. 현재는 북한의 함흥역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학자들은 이 비와 마운령비가 실제로 신라의 동북 경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 적이 있다. 즉, 신라 때의 동북 경계를 안변의 남대천(南大川) 유역으로 보고, 어쩌면 황초령비는 그 부근인 철령쯤에 세웠을 터인데 고려 예종 때 윤관(尹瓘)이 함흥평야의 여진족을 정복한 뒤 9성(城)을 쌓을 때 그 점령을 역사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철령에 있던 비석을 함흥평야의 북쪽 경계 요충지에 해당하는 황초령으로 옮겼다고 주장하였다.

 

또 고려 고종 때의 승려인 천인(天因)이 지은 「고석정기(孤石亭記)」에 진흥왕의 한 비석이 철원 남쪽 30리쯤 되는 고석정 부근에 있다고 한 기록을 들어, 황초령비는 바로 고석정에 있던 비석을 조선 초기에 옮겨 놓은 것이라고도 주장하였다. 이처럼 황초령비와 마운령비는 위치 문제를 둘러싸고 많은 논란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처음부터 황초령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은 듯하다. 고구려와의 밀약설을 알 수 있는 자료로 알려져 있다.

 

 

마운령비
마운령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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