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왕 : 영 온 수 신 살 담 혜 수
영 : 영왕왕(590~618)
온 : 온달전투(590)
수 : 수 선제공격(요서 598)
신 : 신집 5권 이문집(600)
살 : 살수대첩(612)
담 : 담징(물 벼루 종이 전래)
혜 : 혜자(일본 쇼토쿠태자 스승)
수 : 수 멸망(618)
1. 영양왕(590~618)
영양왕은 삼국시대 고구려 제26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590~618년이며, 평원왕의 장자이다. 고구려의 역사서인 『신집』 5권이 편찬되었고, 승려 혜자와 담징이 일본으로 가서 쇼토쿠태자의 스승이 되는 등 일본에 많은 문화를 전파이다. 한강유역 탈환을 둘러싸고 신라와 공방이 이어졌고 수나라와 접근하던 백제를 공격하기도 했다. 수나라와는 초기에 화전 양면 전술을 취하다가 고구려가 요서를 선제공격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어 총 4차례에 걸친 수의 공격을 받았다. 특히 130만 대군으로 이루어진 2차 공격을 을지문덕 (살수대첩)등의 활약으로 격퇴했다.
2. 온달전투(590)
온달은 고구려 평원왕·영양왕 대의 장수이다. 『삼국사기』에 「온달전」이 있다. 전통적인 고위 귀족 가문 출신은 아니었다고 이해된다. 하위 귀족 또는 신흥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고 보기도 한다. 평원왕의 공주와 혼인하였고, 그의 후원으로 군사적 능력을 함양하고 군인으로 출세하였다. 평원왕 대 후주와의 전쟁에서 전공을 세워 대형(大兄) 관등을 받았다. 영양왕 즉위 이후 남한강 유역을 수복하겠다고 자청하여 출정하였다가 아단성 아래에서 전사하였다.
「온달전」에 따르면, 온달은 집은 매우 가난해 걸식하고 있었는데, 평원왕의 공주와 혼인하면서 집과 토지, 노비와 우마 및 각종 살림살이를 마련하였고, 국마(國馬)를 구입하였다고 한다. 매년 봄 3월 3일에 낙랑언덕에서 열리던 수렵대회에 참석해 두각을 나타냈으며, 마침 후주(後周)주1의 무제(武帝)가 요동을 침범하자 이산(肄山)의 벌판에서 선봉이 되어 전공을 세웠다고 하였다. 이에 평원왕의 사위로 인정받고 대형 관등을 받았다고 한다. 공주의 후원으로 군사적 능력을 함양하고 군인으로 출세한 사실을 반영한다고 해석된다.
그런데 현재 온달이 전공을 세웠다고 한 고구려와 후주의 전쟁은 사실 여부가 분명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후주는 북주(北周)주2로 파악되는데, 북주의 무제주3는 578년 6월 사망하였고, 이때까지 고구려와 북주는 국경을 마주한 적이 없었다. 577년 전반까지 고구려의 서방 변경이었던 요서(遼西) 지역에는 북제(北齊)주4의 세력이 자리하고 있었고, 580년대 전반까지는 북제의 영주자사(營州刺史)였던 고보령(高寶寜)이 돌궐(突厥)주5의 지원을 받으면서 북주와 대립하고 있었다.국제 정세로 보아 북주가 고구려를 직접 공격하였다고 생각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에 『삼국사기』 「온달전」에 보이는 고구려와 후주의 전쟁은 고구려와 고보령 세력의 대립을 가리킨다고 보기도 하고, 고구려가 고보령 세력을 지원하면서 북주와 대립한 것이었다고 보기도 한다.
온달은 영양왕 대까지 활동하였다. 온달은 영양왕이 즉위하자 출정을 자청하였다고 한다. 신라가 빼앗아 간 한강 이북의 영역을 되찾아오겠다고 한 것이다. 온달은 출정에 앞서 계립현(鷄立峴) · 죽령(竹嶺) 서쪽의 땅을 되찾아오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고 한다. 이로 보아 온달이 수복하고자 한 한강 이북의 영역이란 구체적으로 지금의 남한강 유역으로 파악된다. 6세기 중반 신라와 백제 연합군의 북진으로 상실한 영역이었다. 온달은 아단성 아래에서 신라군과 싸우다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현재 온달이 전사하였다고 한 아단성의 위치는 논란이 있다. 서울 광진구의 아차산성으로 보기도 하고, 충청북도 단양의 온달산성으로 보기도 한다. 서울 광진구의 아차산성으로 보는 견해는 6세기 후반~7세기 전반 고구려와 신라가 대체로 지금의 경기도 북부에서 대립하였다는 점을 중시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603년 고구려의 신라 북한산성 공격과 관련된다고 보기도 한다. 단양의 온달산성으로 보는 견해는 「온달전」에서 남한강 유역이 강조되었고, 남한강 상류까지 여러 경로를 통해 남진하였을 수 있다는 점을 중시한다. 온달의 출정과 전사는 한강 유역 수복을 추구하였던 6세기 후반 고구려 사회의 지향이 투영된 것으로 풀이된다.
3. 수 선제공격(요서공격 598)
대외관계에 있어서 영양왕의 위치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다원적인 축에 의해서 유지되어온 6세기 무렵의 동아시아 국제질서가 589년 수나라의 중국통일로 재편성되어가는 와중에서, 고구려와 수나라의 충돌은 불가피하였기 때문이다. 왕은 즉위와 더불어 수나라 문제(文帝)로부터 상개부의동삼사(上開府儀同三司)에 봉해졌고, 또한 부왕이 가지고 있던 요동군공(遼東郡公)이라는 작위를 계승하였다. 한편, 조공을 통해 수나라와의 외교적 관계 모색을 시도하였다. 반면에 국경수비를 강화하고 말갈족 · 거란족들을 조종하여 자기편에 넣고 돌궐족과의 제휴도 모색하였다. 이와 같이 화전양면에 대비하면서 노력하면서 왕은 598년에 말갈의 군사를 이끌고 요서(遼西)를 선제공격하였다.
4. 신집 5권 이문진(600)
600년에 태학박사 이문진(李文眞)을 시켜 종래의 <유기(留記)> 100권을 정리하여 <신집(新集)> 5권이라는 역사서를 내게 한 것이 주목된다. 백제와 신라의 경우에도 역사서를 편찬한 왕들은 왕조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군주들임을 생각할 때, 영양왕대의 역사서편찬은 부왕인 평원왕 이래의 국가의 안정을 위한 모든 노력의 결실을 계승, 발전시킨 국력의 바탕에서 가능했던 것이라 생각된다.
5. 살수대첩(612)
수나라는 국력을 총집결해 4차례에 걸쳐 고구려를 침공해왔다. 제1차 침입은 598년에 있었다. 앞서 요서 지역에 대한 고구려의 선제 공격에 대한 반발로 수나라의 30만 군사가 쳐들어온 것이다. 그러나 기근 · 질병 · 장마 등으로 인해 스스로 퇴각하였다.
제2차 침입은 612년에 있었다. 양제(煬帝)가 국력을 경주하여 130만 대군으로 수륙 양면의 공격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고구려는 요도성(遼東城)에서 지구전을 펴 수군의 침략예봉을 꺾고, 또 대동강에서는 침략군의 수군을 대파하였다. 수나라는 별동대를 구성해 평양성 가까이 진격했으나 군량의 부족으로 후퇴하던 중 명장 을지문덕(乙支文德)에 의해 살수(薩水)에서 참패를 당해 총퇴각하였다.
제3차 침입도 613년에 있었으나 요동성 · 신성 등에서 고구려군이 선전하였고, 또한 수에서 양현감(楊玄感)의 반란이 일어나 철수하게 되었다. 제4차 침입은 614년에 있었다. 이때는 수나라의 내부적 혼란과 평화교섭을 원했던 고구려의 이해가 맞물려 철군이 이루어졌다. 고구려와의 연이은 전쟁으로 큰 피해를 입은 수나라는 곧 멸망하였으나, 고구려도 커다란 타격을 받았다.
612년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에서 전개된 주요 전투의 하나이다. 고구려 측의 지휘관은 을지문덕(乙支文德)이었고, 수나라 측의 지휘관은 우중문(于仲文)과 우문술(宇文述) 등이었다. 612년 7월 살수(薩水)에서 전투하였는데, 살수는 지금의 청천강이다. 612년 수나라의 양제(煬帝)는 113만의 대규모 군대를 동원해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육군은 40개의 부대로 편성하였는데, 각 부대를 군(軍)이라고 하였다. 우중문과 우문술 등은 40개의 군 중에서 9군을 지휘하였다. 9군의 병력 수는 30만 5천 명이었다. 우중문과 우문술의 9군은 노하진(潞河鎭)과 회원진(懷遠鎭)에서 출진하였다. 노하진과 회원진은 랴오허강〔遼河江〕 서쪽에 설치된 수나라의 군사 거점이었다. 처음 그들의 집결지는 압록강 서쪽이었다. 출발할 때 인마(人馬) 모두 100일치의 식량을 지급받았다고 한다. 별도의 군수 보급 없이 압록강 서쪽까지 빠른 속도로 행군하도록 한 것이다. 압록강 서쪽에 먼저 집결해서 강을 건널 수 있는 여건을 만들고, 이후 양제가 이끄는 수나라 주력부대가 도착하면 합류해 남쪽으로 나아갈 계획이었다고 보인다.
612년 전쟁에서 고구려와 수나라의 군대가 본격적으로 충돌한 것은 3월부터였다. 랴오허강을 사이에 두고 고구려는 수나라 군대의 도하를 저지하며 방어에 나섰던 것이다. 수나라 군대가 도하에 성공한 것은 4월 중순이었다. 이때부터 요동성을 비롯한 요동 지역 고구려의 여러 성은 수성전(守城戰)을 전개하였다. 우중문과 우문술 등의 9군도 4월 중순 이후 랴오허강을 건넜다고 파악된다. 우중문이 이끈 부대의 경우 오골성(烏骨城), 즉 지금의 랴오닝성〔遼寧省〕 봉황산성(鳳凰山城)을 경유하였다고 한다. 9군의 이동경로는 약간의 차이가 있었을 수 있는데, 대체로 랴오허강을 건너 압록강 하구 방면으로 이동하였고, 서안에 집결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6월 중순까지 랴오닝성을 비롯한 고구려의 성은 건재하였다. 전쟁이 장기화된 것이다. 이에 따라 우중문과 우문술 등의 9군은 식량 부족에 직면하였다. 9군은 처음 노하진과 회원진에서 출발할 때 100일치의 식량뿐만 아니라 무기와 각종 군수물자를 보급받았는데, 병사마다 3섬 이상의 무게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동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식량을 버리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장수와 병졸 모두 장막 아래에 구덩이를 파고 묻어 중간 지점에 이르렀을 때 이미 식량이 떨어질 지경이었다. 이때 우중문과 우문술 등의 9군을 상대한 것이 고구려의 을지문덕이었다.
을지문덕은 압록강을 건너 우중문과 우문술 등의 군영으로 갔다. 거짓으로 항복하면서 그들의 실상을 살펴본 것이다. 다시 압록강을 건너 돌아온 을지문덕은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우중문은 기병을 선발해 을지문덕을 추격하였는데, 을지문덕은 싸울 때마다 거짓으로 패배했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시를 보냈다고 한다. “신묘한 계책은 천문을 꿰뚫었고, 기묘한 계책은 지리를 통달해 알았네. 싸워 이긴 공이 이미 높으니, 만족할 줄 알면 멈추길 바라노라[神䇿究天文, 妙筭窮地理. 戰勝功旣髙. 知足願云止].” 우중문은 편지를 보내 회유하였지만 을지문덕은 거절하였다. 을지문덕은 압록강 동쪽에 설치한 울타리를 불태우고 도망쳤다. 우중문과 우문술 등의 9군을 유인하고자 한 것이다. 우문술은 양식이 부족하므로 회군하고자 하였지만, 우중문은 추격해 전공을 세우고자 하였다고 한다. 둘 중에 양제에게 보다 큰 권한을 위임받은 우중문의 견해가 채택되었다. 우중문과 우문술 등의 9군은 압록강을 건너 평양 방면으로 진격하였다. 평양성에서 30리 떨어진 지점까지 왔다. 산에 의지해서 군영을 설치하였다고 한다.
우중문 등은 내호아(來護兒)의 수군(水軍)과 합류할 계획이었다고 보인다.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내호아는 대규모의 선단을 이끌고 동래(東萊), 즉 지금의 중국 산둥성〔山東省〕 지역에서 바다를 건너 대동강 입구까지 왔다. 그리고 평양성에서 60리 떨어진 포구에서 주둔하였다. 내호아 수군의 주된 역할은 식량 운송이었다. 우중문 등은 내호아의 부대로부터 식량을 보급받으면 평양성 공격에 나설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 내호아의 부대는 포구에서 고립된 처지였다. 고구려군의 거짓 패배에 자신감을 얻어 자신의 부대만으로 평양성 공격에 나섰다가 대패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우중문과 우문술 등의 9군은 내호아의 수군(水軍)에 합류할 수 없었다. 식량 부족에 따른 압박은 가중되었다.
이러한 때 을지문덕은 다시 사신을 파견해 거짓으로 항복하였다. 회군한다면 영양왕을 모시고 가서 수 양제에게 조회하고 알연하겠다고 한 것이다. 우중문과 우문술 측에 회군할 명분을 제공한 것이다. 우중문과 우문술 등의 9군은 결국 회군을 결정하였다. 그러자 고구려군은 곧 그들을 추격하였다. 9군의 지휘관 중의 하나였던 설세웅(薛世雄)은 평양성에서 퇴각하면서 백석산(白石山)까지 왔는데, 고구려군에게 겹겹이 포위되었고 사면에서 화살 공격을 받았다고 하였다. 간신히 탈출하였지만 잃은 병력이 많았다고 한다. 고구려군이 결정적인 타격을 가한 전투는 살수에서 전개되었다. 우중문과 우문술 등은 7월 24일 살수에 도착하였다고 한다. 고구려군은 그들이 살수를 반 정도 건넜을 때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뒤에서부터 후군(後軍)을 공격하였다. 수나라 장군 신세웅(辛世雄)을 전사시켰다. 수나라의 여러 부대를 모두 무너뜨리고 마비시켰다. 수나라 여러 부대의 장수와 사졸은 달아나 도망치기 급급하였다. 만 하루 만에 압록강까지 도망쳤다고 하였다. 살아서 랴오닝성에 귀환한 자가 불과 2천7백 명이었다고 한다. 고구려의 대승이었다. 우중문과 우문술 등의 9군이 퇴각하자 포구에 고립되어 있던 내호아의 부대 역시 퇴각하였다. 수 양제 역시 9군의 패배를 보고받고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살수전투의 큰 승리로 612년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이 종결된 것이다. 살수대첩은 612년 고구려와 수나라 전쟁의 결정적 전투였다.
6. 담징
『일본서기』에 의하면 610년(영양왕 21) 담징은 백제를 거쳐 일본에 건너가 채색과 종이·먹·연자방아[碾磴] 등의 제작 방법을 전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일본 승 법정(法定)과 함께 나라(奈良)에 있는 호류사(法隆寺)에 기거하면서, 오경(五經)과 불법(佛法) 등을 강론하고 금당(金堂)의 벽화를 그렸다고 전한다. 그러나 석가·아미타·미륵·약사 등으로 구성된 사불정토도(四佛淨土圖)인 이 금당벽화는 1949년 1월 수리 중에 화재를 당하여 소실되었고, 현재는 모사화(模寫畫)가 일부 남아 있을 뿐이다. 일본 학계에서는 이것이 한 사람의 수법이 아닐 뿐 아니라 요철법(凹凸法)·채색법·인물의 묘사법 등이 서역화풍에 토대를 두고 당풍(唐風)으로 변형된 특징을 반영하고 있다 하여 담징의 작품으로 인정하지 않고, 7세기 후반경의 하쿠호시대(白鳳時代)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7. 혜자
595년(영양왕 6) 혜자는 일본으로 건너가 요메이왕(用明王)의 맏아들 쇼토쿠태자(聖德太子)의 스승이 되었다고 한다. 같은 해 백제의 혜총(惠聰)도 일본에 건너왔는데, 두 승려는 호코사(法興寺)에 머무르면서 20여 년 동안 태자를 가르쳤다고 전해진다. 특히, 삼론학(三論學) 등 불교의 이론뿐 아니라, 『법화경』·『유마경(維摩經)』·『승만경(勝鬘經)』 등을 가르침으로써 쇼토쿠태자가 폭넓은 불교관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 구실을 하였다고 한다. 또한, 수의술(獸醫術)에도 능통하여 그 방면에 많은 영향을 일본에 끼쳤다. 약 20여 년 동안 일본에 머무르다가, 615년(영양왕 26) 고구려로 되돌아왔다.
8. 수 멸망(618)
당시 수나라의 민심은 연이은 대규모 원정실패와 그에 따른 인명이나 물자손실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매우 높았다. 심지어 양제가 직접 고구려를 공격하는 도중에 군량보급을 담당하던 예부상서 양현감이 대규모로 반란을 일으켰고, 양제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고구려에서 철군할 수밖에 없었던 적도 있다. 거기에는 훗날 당 태종이 되는 이세민도 끼어 있었다. 문제가 경제력을 키워놨고 수나라의 인구가 5,000만 명을 웃도는 수준이라 이 정도 선에서 그친 것이지, 수나라가 아닌 다른 나라가 이 정도의 피해를 입었으면 반란 정도가 아니라 나라가 그 즉시 망해버린다. 수양제는 강도로 피난을 갔지만 결국 618년, 우문화급의 반란군이 양제를 교살하여 처형했다. 이후 당국공 이연에게 옹립되어 양제의 뒤를 이은 공제가 당고조 이연에게 선양하면서, 남북조를 통일한 첫 왕조로 위세를 떨쳤던 수나라는 건국 이래 고작 40년도 버티지 못하고 허무하게 멸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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