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한국사 두문자

고구려 보장왕 두문자 : 보 안 연 멸 부 고 검 안

by noksan2023 2023. 8. 11.
반응형

 

고구려 멸망(668)
고구려 멸망(668)

 

보장왕 : 보 안 연 멸 부 고 검 안

 

보 : 장왕(642~668)

안 : 당의 침입 시성 전투(645 양만춘)

연 : 개소문 도교 수입 불교 탄압 보덕 열반종 도현 일본세기

멸 : 고구려 망(668)

부 : 흥운동

고 : 연무

검 : 모잠

안 : 

 

 

연개소문 사후 내부 분열로 고구려 멸망
연개소문 사후 내부 분열로 고구려 멸망


1. 장왕(642~668)

보장왕은 삼국시대 고구려의 제28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642~668년이고 고구려의 마지막 왕이다. 영류왕을 죽이고 권력을 장악한 연개소문에 의해 왕으로 옹립되나 그의 그늘에 가려 왕으로서 실권을 갖지 못했다. 도교 진흥책도 연개소문의 의지에 따른 것이었다. 초기에는 당의 침략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지만 연개소문이 죽고 그 아들 형제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면서 결국 나당연합군에 의해 평양성이 함락당했다. 당나라로 잡혀갔다가 요동도독으로 고구려 유민들과 돌아왔으나 고구려 부흥운동을 도모하다 발각되어 유배된 뒤 682년경에 사망했다.

 

 

양만춘 장군의 안시성 전투
양만춘 장군의 안시성 전투

 

2. 시성 전투(645)

보장왕의 재위 기간 중 국제 관계는, 즉위 초에는 당나라와 표면상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해 사절을 교환하고 당나라로부터 책봉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당 태종의 팽창 정책으로 양국간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또 신라와의 관계에서는 적대 관계가 계속되어 자주 신라를 공격했고, 나아가 백제와의 관계를 긴밀히 하고 바다 건너 왜와 관계를 재개해 신라를 더욱 궁지로 몰아넣었다. 이에 신라는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나기 위해 더욱 당나라와 밀착했고, 당나라는 신라를 두둔하면서 고구려에 대해 신라 침공을 중지할 것을 여러 차례 요구하였다.

 

그러나 고구려가 이를 단호히 거절함으로써 마침내 당나라와의 관계도 파국에 이르렀다. 당 태종은 치밀한 사전 준비 끝에 연개소문의 영류왕 시해를 성토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645년 대규모 군대를 동원해 수륙 양면으로 고구려를 침공했고, 자신이 진두 지휘까지 하였다. 그러나 당나라는 안시성싸움에서 참패하고, 이후 작전을 바꾸어 대규모 군대를 동원해 정면 대결을 벌이는 대신 소규모 군대로 고구려 각지를 수시로 침공해 고구려를 피폐하게 만들기로 하고, 647년과 648년에도 고구려를 침략해 왔다.

 

3. 개소문

연개소문은 삼국시대 고구려 제28대 보장왕의 즉위와 관련된 장수이다. 출생일은 미상이며 665년(보장왕 24)에 사망했다. 동부 대인이던 아버지의 직을 계승했으나 귀족세력들이 영류왕과 함께 자신을 제거하려 하자 정변을 일으켜 왕을 시해하고 보장왕을 세워 국정의 실권을 장악했다. 당의 도사들을 맞아들여 도교를 육성했다. 당시의 국제정세는 당의 대외팽창 정책으로 긴박한 형세였는데 강경 일변도의 대외정책을 구사했다. 화평을 청한 신라의 요청을 거부했고 당과의 전쟁도 불사했다. 연개소문이 살아 있는 동안 당은 고구려를 공격하지 못했다.

 

연개소문은 성품이 호방하고 의표가 웅위했다고 한다. 동부 대인(大人)이었던 아버지가 죽은 뒤, 연개소문이 그 직을 계승하였다. 유력 귀족들이 그의 세력과 무단적인 기질을 두려워하여 이를 반대했으나 귀족들에게 호소해 간신히 승인을 받았다. 뒤에 그는 천리장성(비사성~부여성)을 쌓을 때 최고 감독자가 되었다. 그의 세력이 커지자 이를 두려워한 여러 대신들과 영류왕이 그의 제거를 모의하였다. 이를 눈치챈 그는 642년 평양성 남쪽 성 밖에서 부병(部兵)의 열병식을 구실로 귀족들을 부른 뒤, 정변을 일으켜 이들을 모두 죽이고 왕궁에 돌입해 왕을 시해하고 보장왕을 세웠다.

스스로는 막리지가 되어 대권을 장악한 뒤, 반대파에 대한 탄압과 제거를 감행하였다. 안시성의 성주(양만춘)도 연개소문의 반대파였다. 이에 연개소문이 안시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안시성의 공방전은 승패가 나지 않아 양자간의 타협으로 일단락되었다. 결국 연개소문은 안시성주의 지위를 계속 인정했고, 그 대신 안시성주는 새로운 집권자인 연개소문에게 승복하였다. 안시성주와의 타협이 보여주듯이, 연개소문의 집권은 고구려 하대의 귀족 연립정권 체제를 근본적으로 타파했던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고구려 하대에는 실권자인 대대로 막리지를 5부(部) 귀족들이 선임하였다. 3년에 한번씩 선임했고 연임도 가능하였다.

 

국제적인 긴박한 상황 속에서 연개소문은 강경일변도의 대외정책을 채택하였다. 이것은 격렬한 정변을 통해 집권한 그의 대내적인 정치적 처지와 관계가 있다. 그는 대외적인 위기상황은 정권의 안정화와 집권력의 강화를 도모하는 데 오히려 유리하다고 파악하였다. 그는 신라의 김춘추(金春秋)주3가 제안한 양국의 화평을 거부했고, 신라와의 관계를 개선하라는 당나라의 압력을 거부하고 사신을 가두어버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대외정책은 당에 대해 단호한 대결자세를 굳힘으로써 항쟁의식을 고취시켰다. 또한 말갈족과 같은 휘하의 복속민들의 이탈을 방지하고 전쟁대비에 박차를 가한다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했다. 이러한 의지는 645년 당태종의 침공 이후 계속된 당군과 신라군의 침공에 대한 고구려의 강력한 저항에서 구현되었다.

 

당시 고구려와 당나라의 사이는 전시대의 수나라와의 관계에서처럼 전쟁이 불가피하였다. 즉 5세기 이래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를 규정지었던 다원적인 세력 균형상태가 중국대륙에서 강력한 통일제국이 출현함에 따라 깨어졌다. 중국 중심의 일원적인 세계질서를 구축하려 함에 따라 수 · 당제국과 동북아시아에서 독자적인 세력권을 구축하고 있던 고구려 사이에는 전쟁이 불가피했던 것이다. 다만 당나라 초기에는 중국의 내부사정과 당나라와 돌궐과의 관계로 때문에 고구려와 당나라 사이에 잠정적인 평화가 유지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의 당나라에 대한 강경정책은 영양왕이 요서(遼西) 지방을 선제공격해 수나라와 싸움의 계기가 되었던 것과 같은 배경에서 나온다. 그는 수양제의 침공에 대비해 고구려가 돌궐과의 연결을 도모했듯이, 당태종이 침공해 오자 당시 몽고고원에서 돌궐 대신 흥성했던 설연타(薛延陀)주4의 세력과 연결해 당의 후방을 견제하려 하였다. 나아가 지금의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공화국의 사마르칸트 지역에 있던 강국(康國)에 사신을 보내어 동맹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그 때 파견된 고구려 사신의 모습이 사마르칸트시 교외에서 발굴된 아프라시앞 궁전 벽화에서 발견되었다.

 

4. 고구려 멸망(668)

 

고구려 부흥운동
고구려 부흥운동


5. 부흥운동

고구려부흥운동(高句麗復興運動)은 668년 평양성 함락 이후 고구려 부흥을 위한 유민의 제반 활동이다. 668년 9월 평양성이 함락되었지만, 당나라에 불만을 품고 저항한 유민도 나타났다. 검모잠과 안승은 한성을 중심으로 왕국의 재건을 추구하였다. 두만강과 송화강 유역 그리고 요동 지역의 고구려 주요 거점에서도 부흥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중에서 한성의 고구려부흥운동 세력은 673년 말까지 신라의 지원을 받으며 당나라에 저항하였다. 그러나 임진강 유역에서 대패하며 재기하지 못하였다. 각지의 부흥운동 역시 성공하지 못하였다.

 

668년 9월 평양성이 함락되었지만, 일부 지역은 신라와 당나라에 투항하지 않고 저항을 지속하였다. 당나라에 투항하였지만, 당나라의 관인(官人)을 중심으로 한 안동도호부의 지배 정책에 불만을 품고 저항한 유민도 나타났다. 669년 5월 당나라가 2만 8천 이상의 민호를 사민하였는데, 이반자(離叛者)가 많았기 때문이었다고 하였다. 고구려 유민의 저항이 한층 거세진 것이다. 유민의 저항은 고구려 각지에서 나타났는데, 왕국의 재건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넓은 의미에서 유민의 저항과 부흥을 위한 제반 활동을 부흥운동이라고 한다.

 

6. 연무 모잠 

우선 검모잠(劍牟岑) 세력이 주목된다. 그는 수림성(水臨城) 출신의 대형이었는데, 유민을 모아 궁모성(窮牟城)에서 패강(浿江)의 남쪽까지 왔다. 패강 남쪽에서 당나라의 관인과 승려 법안(法安) 등을 죽이고 신라로 향하였는데, 서해 사야도(史也島)에서 안승을 만나 한성(漢城) 안으로 맞아하였고 군주로 추대하였다. 이때 한성은 지금의 황해도 재령으로 국내성(國內城)과 함께 고구려 후기의 별도(別都) 중 하나였다. 검모잠과 안승은 고구려의 옛 중심지에서 왕국의 재건을 도모하였던 것이다. 안승은 보장왕의 아들 또는 외손(外孫)이었다고 하고, 혹은 연정토의 아들이었다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연정토의 아들이자 보장왕의 외손으로 본다. 고구려 왕실의 일원이었다고 할 수 있다.

 

검모잠과 안승은 670년 6월 소형 다식 등을 신라에 사신을 보내 지원을 요청하였다. 670년 8월 신라는 안승을 고구려 왕으로 책봉하였다. 신라의 지원을 받아 고구려부흥운동을 전개하게 된 것이다. 이 무렵 신라와 당나라는 적대 관계로 변화하고 있었다. 670년 3월 신라의 사찬 설오유는 고구려의 태대형 고연무와 함께 정병 1만 명을 이끌고 압록강을 넘었고, 4월에 오골성(烏骨城) 즉, 지금의 요령성 봉황산성(鳳凰山城) 부근에서 말갈 및 당나라의 군대와 전투하였다. 흔히 이 전투로 나당전쟁이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고연무는 신라와 구분되는 고구려의 정병 1만을 지휘하였다는 점에서 전투가 있기 전부터 부흥을 도모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고연무 안승의 보덕국에서 대장군으로 활동하였다. 이에 한성에서 검모잠과 안승, 그리고 고연무가 함께 부흥운동을 전개하였던 것으로 보기도 한다. 한성의 고구려부흥운동 세력은 평양을 비롯한 한반도 서북부 지역까지 활동 영역을 확장하기도 하였다. 한성 이외의 지역에서도 부흥운동이 전개되었다. 668년 당의 검교동책주도독부(檢校東冊州都督府) 장사였던 양현기(楊玄基)는 반수령(反首領) 고정문(高定問)을 주살하였다고 한다. 동책주도독부는 두만강 유역의 책성(柵城)에 설치된 안동도호부 예하의 기미부(羈縻府)였다. 고정문은 두만강 유역에서 고구려부흥운동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고구려의 책성 욕살을 역임하다가 당에 투항하였던 이타인(李他仁)은 평양성 함락 이후 부여로 진격해 전공을 세웠다고 한다. 부여는 송화강 유역의 부여성(扶餘城) 지역을 가리킨다. 송화강 유역에서 역시 부흥운동이 전개되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671년 7월 당나라군은 안시성에서 고구려 반병(叛兵)을 격파하였다고 하였다. 안시성을 비롯해 요동 지역의 일부 성에서 부흥운동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벌노성(伐奴城)에서는 고구려가 이끈 말갈의 군대를 맞아 방어에 성공하였다고 하였다. 현재 벌노성의 위치는 분명하지 않지만, 요동 일대였을 가능성이 높다. 검모잠 등의 거병에 당나라는 670년 4월 고간(高侃)과 이근행(李謹行) 등을 파견하였다. 당나라군은 안시성을 비롯한 각지의 부흥운동 세력을 제압하고 신라 방면으로 남하하였다. 당나라군의 파견과 남진에 고구려부흥운동 세력 내부에서는 분열이 발생하였다. 안승이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망명하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성을 중심으로 한 부흥운동은 적어도 673년 말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당나라의 공세에 고구려부흥운동 세력은 점차 남쪽으로 후퇴하였다. 672년 7월에는 평양을 내주었고, 672년 8월에 한시성(韓始城)과 마읍성(馬邑城)을 빼앗겼다. 이어 신라군의 지원을 받아 백수성(白水城)에서 당나라군을 격퇴하였는데, 그들을 추격하다가 석문(石門)에서 대패하였다. 주요 전투의 지명은 분명하지 않지만, 대체로 평양 남쪽의 황해도 일원에서 전투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673년 고구려부흥군은 우잠성(牛岑城)을 비롯해 황해도 일대의 주요 거점을 상실하였다. 그리고 신라군과 함께 임진강 유역에서 전투하였지만 대패하였다. 이로써 고구려부흥군은 재기할 수 없었고, 연이어 신라로 달아났다고 하였다. 대략 4년 동안 고구려 각지와 한성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부흥운동이 모두 실패한 것이다.

 

신라로 망명한 안승과 유민은 금마저(金馬渚)에 설치된 보덕국(報德國)에서 왕국의 형태를 유지하며 활동하였지만, 684년 11월 반란을 도모하다가 진압되어 결국 해체되었다. 677년 요동주도독(遼東州都督)에 임명된 보장왕은 말갈을 포섭해 부흥을 도모하였지만, 681년 일이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이후 고구려 부흥을 재개한 것은 대조영(大祚榮)등 발해의 건국 세력이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