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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두문자

의자왕 두문자 : 의 해 당 대 멸 부 주 임

by noksan2023 2023. 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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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31대 의자왕(부여의자)
의자왕

 

의자왕 : 의 해 당 대 멸 부 주 임

 

의 : 자왕(641~660)

해 : 동증자 칭송(소문난 효자)

당 : 고구려와 협력 항성 탈취(642)

대 : 아성 전투(진흥왕 딸과 사위 살해 643)

멸 : 백제 망(660)

부 : 흥운동

주 : 류성 복신 도침

임 : 존성 흑치상지

 

 

의자왕 : 삼천궁녀 낙화암
의자왕 : 삼천궁녀 낙화암

 

1. 자왕(641~660)

의자왕은 삼국시대 백제의 제31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641~660년이며 무왕의 맏아들이다.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들과도 우애가 깊어 해동증자라 불렸다. 대내적으로는 유교를 통해 집권력을 강화하고 대외적으로는 고구려와 연합해 신라를 고립시키고자 했다. 신라의 40여 성을 빼앗고 대야성을 함락시켜 신라를 위기에 빠뜨렸다. 그런데 고구려 공략에 실패한 당이 신라와 나당연합군을 형성하여 백제를 공격했다. 황산벌 전투에서 계백이 5천의 결사대로 분전했으나 대패하고 항복 후 왕자·대신·장병·백성들과 함께 당으로 끌려갔다가 며칠 뒤 사망했다.

 

2. 동증자 칭송(소문난 효자)

태자 때부터 어버이를 효성스럽게 섬기고 형제들과 우애가 깊어 당시 해동증자(海東曾子)로 불렸다. 재위기간 초기에 개혁정치를 펼쳐 국정을 쇄신하고 고구려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해서 영토를 확장하였다. 그러나 말년에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의 침공을 막아내지 못해 멸망함으로써 백제의 마지막 왕이 된 비운의 군주이다.

 

3. 고구려와 협력 항성 탈취(642)

백제 또한 고구려와 연합해 신라의 당항성(黨項城)을 공격하여 신라의 대중국 통교(通交)를 위협하였다. 645년 신라가 고구려를 공격한 당에 협조하자 백제는 이 틈을 타서 신라의 7성을 공격하였다. 이는 실리정책(實利政策)을 취한 의자왕대 대외정책의 일면을 보여준다. 647년 신라에서 김춘추(金春秋)-김유신(金庾信) 연합세력이 비담과 염종을 제압하고 집권하면서 친당정책(親唐政策)을 수립한 것도 신라의 위기와 관련이 있다. 또한 일본 열도에서도 645년 전횡하고 있었던 소아(蘇我)씨 일족을 주살하고 천왕의 친정체제를 강화한 타이카 개신(大化改新)이 발생하였다. 이와 같이 당의 팽창주의에 주변 나라가 소용돌이를 치는 가운데 의자왕은 신라를 궁지로 몰아넣은 실리정책을 취한 것이다.

 

당항성은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 구봉산에 위치한 산성이다. 둘레는 1,200미터이며, 산정식과 포곡식이 결합된 형태이다. 신라가 진흥왕 대에 한강 유역을 장악한 후 축조하였으며, 삼국 시대에 중국으로 진출하기 위한 교통의 요지로 인식되었다.

 

 

의자왕 대야성 탈취
의자왕 대야성 탈취

 

4. 성 전투(진흥왕 딸과 사위 자결 643)

의자왕이 노린 또 다른 측면은 두 나라(고구려 · 백제)가 화해함으로써 신라를 고립시킬 수 있다는 사실이다. 중국 대륙의 외풍을 막아냄과 동시에 경쟁국인 신라를 고립시킴으로써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려 했던 것이다. 의자왕은 642년 7월에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의 40여 성(城)을 빼앗았으며, 8월에는 신라의 수도인 경주로 가는 요충지인 대야성을 함락시킴으로써 신라를 위기에 빠뜨렸다. 신라는 이를 돌파하고자 고구려와 일본에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에 신라는 당에 의존함으로써 국가의 어려운 난관을 돌파하고자 하였다. 

 

대야성 지역은 삼한시대는 변한에 속하여 다라국(多羅國)ㆍ초팔혜국(草八兮國)ㆍ산반계국(散半溪國) 등의 부족국가가 있었으나 1, 2세기경 대가야국에 병합되었다. 562년(진흥왕 23) 장군 이사부(異斯夫)에 의하여 신라에 복속되었으며, 이때 대야성에 도독부를 두었고 대량주(大良州)로 고쳤다. 

 

이 지역은 삼국시대 백제와의 접경지대인 신라 서부지역의 요새지로서 642년(선덕여왕 11) 백제 의자왕이 장군 윤충(允忠)을 보내어 대야성을 쳐서 함락시키니 이때 성주 김품석(金品釋)은 부인과 함께 자결하였다. 큰 타격을 입은 신라는 김춘추(金春秋)를 고구려에 보내어 구원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통일신라 이후 이곳의 군사적 중요성이 없어지자 757년(경덕왕 16) 고을을 강등시켜 강양군(江陽郡)으로 하였다. 920년 후백제의 견훤(甄萱)에게 함락되었으며, 1018년(현종 9) 합주(陜州)로 승격되었다. 1413년(태종 13) 지금의 이름인 합천으로 고쳐져 뒤에 군이 되었다. 신라 초기 대가야국에 속하였을 때 국내에서 가장 큰 고을이었으므로 대야성이라 한 것이다.

 

5. 백제 망(660)

당의 백제 정벌은 이미 659년에 준비 단계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659년부터 『삼국사기』 백제본기(百濟本紀)가 백제 멸망 관련기사로 일관한 것은 이를 대변해준다. 당이 659년 파견된 일본 사신 사카이베노무라지이하시키[坂合部連石布]를 억류한 것도 이미 당에서 전쟁을 준비하였던 사실을 확인해준다.

 

이러한 준비 과정을 거쳐 660년 당의 소정방(蘇定方)이 이끈 13만 대군이 황해를 횡단하여 기벌포에 상륙하였다. 계백의 5천 결사대는 김유신이 이끈 5만의 신라군을 황산벌(黃山伐)주3에서 저지하려 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그 결과 두 나라의 군대가 합류하여 7월 12일 사비성을 포위하였다. 의자왕은 7월 13일 견고한 웅진성(熊津城)으로 도망하여 재기를 노렸으나 둘째 아들 부여태와 손자 부여문사와의 사이에 알력이 생겨 사비성이 맥없이 무너졌다. 이에 의자왕은 태자 및 웅진방령(熊津方領)의 군대를 거느리고 항복함으로써 백제는 멸망하였다.

 

6. 흥운동 류성 복신 도침 존성 흑치상지

최근에 발견된 예식진 묘지명(墓誌銘)에 주목하여, “사태가 위급해지자 웅진방령 예식(禰植)이 의자왕을 사로잡아 투항하였다”는 새로운 견해도 제시되었다. 이와 같이 급작스러운 의자왕 정권의 붕괴는 전쟁이 사비도성을 중심으로 한 일부 지역에만 국한된 관계로 지방세력이 온존하여 백제부흥운동(百濟復興運動)이 거세게 일어날 수 있는 배경이 되었다.

 

8월 2일 의자왕은 나당연합군 측과 굴욕적인 항복식을 거행하였다. 이후 9월 3일에 태자 부여효, 왕자 부여태 부여융 부여연 및 대신 · 장사(將士) 88명, 백성 12,807명과 함께 소정방에 의해 당나라로 끌려갔다. 660년 백제가 멸망할 당시 의자왕은 60대 중반이 넘은 상당히 연로한 나이였다. 그해 11월 1일 낙양(洛陽)에 도착하여 당 고종(高宗)을 만나 사면을 받았지만 지친 여정과 나라를 빼앗겼다는 허망감에 사로잡힌 나머지 며칠 뒤에 병사하였다.

 

이후 그의 아들인 부여융은 웅진도독(熊津都督)이 되어 재기를 도모하였지만 백제의 고토(故土)를 신라에게 상실하여 당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최근에 증손녀인 부여태비(扶餘太妃) 묘지명이 발견되어, 의자왕의 후손들이 중국에서 백제 유민의 명맥을 이어갔음을 알 수 있다.

 

백제가 멸망한 이후 복신(福信)·흑치상지(黑齒常之)·도침(道琛)을 중심으로 한 인물들은 661년 1월 일본에 가 있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扶餘豊)을 옹립하고, 백제부흥운동을 꾀하였다. 사비성이 함락되자, 달솔(達率) 흑치상지는 부장 10여 인과 함께 임존성(任存城: 지금의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을 거점으로 하여 10일 만에 3만의 병력을 규합, 소정방이 보낸 당군을 격퇴하면서 2백여 성을 회복하였다.

 

한편, 의자왕과 종형제간이 되는 부여 복신은 승려 도침과 함께 주류성(周留城)에 웅거해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백강(白江)과 사비성 중간지점에 있는 주류성은 소정방이 직접 사비성을 공격한 까닭에 백제병력이 온전하게 남아 있었다. 백제부흥군이 사비성으로 쳐들어가서 사비성 남쪽으로 진격해 목책을 설치하고 나당연합군을 괴롭히자, 남아 있던 백제군이 이와 합세해 20여 성이 복신에게 호응하였다. 이렇게 사비성이 외부와 연락이 끊기고 고립상태에 빠지자, 신라태종무열왕은 직접 사비성으로 군사를 이끌고 향하였다. 그리고 당나라 고종(高宗)으로부터 웅진도독에 임명된 왕문도(王文度)는 백제부흥군 토벌의 사명을 띠고 보은에 있는 삼년산성(三年山城)에서 나당연합군과 합류하였다.

 

그러나 왕문도가 급사하자, 태종무열왕은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이례성(尒禮城: 지금의 충청남도 논산군 노성면)을 공격해 탈환하자, 백제부흥군에 호응했던 20여 성이 모두 신라군에게 함락되고 말았다. 백제부흥운동이 패하자 복신은 임존성으로 퇴각, 흑치상지와 합류해 사비성 공격을 다시 계획하였다. 복신은 661년 4월에 일본에 사신을 보내 왕자 풍의 귀국을 독촉하였다. 그러나 앞서 3월에 왕문도의 후임으로 유인궤(劉仁軌)가 백제에 온다는 불리한 소식이 전해졌다. 복신은 먼저 유인궤의 군대와 사비성의 유인원(劉仁願) 군사가 서로 합세하는 것을 막기 위해 임존성으로부터 남하해 주류성으로 진출하고 백강 하류연안에 목책을 세우는 한편, 사비성 공격을 재차 시작하였다. 이때 유인궤는 신라군과 합세해 사비성을 근거로 한 후 주류성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백제부흥군은 잘 싸워 나당연합군을 크게 쳐부수자, 신라군은 본국으로 철수하고 유인궤는 주류성 공격을 중지하고 사비성으로 돌아갔다.

 

복신은 부흥군의 본거지인 임존성으로 돌아와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이 해 6월태종무열왕이 죽고 문무왕(文武王, 661∼681)이 즉위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또한 나당연합군이 고구려정벌에 나서자 좋은 기회로 판단, 금강 동쪽의 여러 성을 점령하고 사비성과 웅진성 방면의 당군이 신라와 연결하는 것을 막았다.이에 당군은 신라에 대해 웅진도의 개통을 요구했고, 고구려로 향하던 신라군은 방향을 백제쪽으로 돌려 옹산성(甕山城)을 공격하였다. 이때 지금의 대전 부근에 있는 옹산성을 비롯해 사정성(沙井城)·정현성(貞峴城) 등 대부분의 성들이 백제부흥군의 손에 들어감으로써 웅진성과 사비성에 있는 나당연합군의 보급로가 끊기게 되었다. 보급로가 끊김으로써 아사지경에 빠진 나당연합군은 옹산성을 먼저 탈환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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