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왕 : 무 미 왕 익 서 사
무 : 무왕(600~641)
미 : 미륵사 창건
왕 : 왕흥사 창건
익 : 익산 천도 실패
서 : 서동요 주인공
사 : 사택지적비
1. 백제 무왕(600~641)
무왕은 삼국시대 백제의 제30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600~641년이며, 제29대 법왕의 아들이자 제31대 의자왕의 아버지이다. 『삼국유사』에 인용된 서동설화의 주인공으로 알려져 있다. 재위 초부터 서진정책에 주력하여 신라의 여러 지역을 함락시켰다. 수·당·왜와 외교관계를 유지했으나 수나라의 고구려 침입 때는 신라의 역습을 우려하여 직접 참여하지 않았다. 사비궁 중수나 왕흥사·미륵사 창건 같은 대규모 역사가 시행될 정도로 왕권이 안정·강화된 시기였다. 신라에 대한 압박은 신라와 당이 결합하는 원인을 제공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2. 미륵사 왕흥사 창건
동아시아의 양대 세력인 고구려와 수나라가 각축전을 벌일 때, 무왕은 어느 한쪽에 가담하기보다는 양쪽의 대결을 이용해 어부지리를 취하려고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강화된 왕권의 표징으로, 또 왕권의 존엄을 과시하려는 목적에서 대규모 역사(役事)를 단행하였다. 630년 사비궁(泗沘宮)을 중수했으며, 634년 왕궁의 남쪽에 인공 호수와 그 안에 인공 섬을 만들었는데, 그 모습이 신선이 산다는 방장선산(方丈仙山)을 방불케 했다고 한다.
같은 해 그 무렵 백제의 중심적인 사원으로서 웅장하고 화려했다는 왕흥사(王興寺)도 완성되었다. 이 절은 600년 법왕이 착공한 뒤에 죽자, 아들인 무왕이 30여 년 만에 완성시킨 것이다. 왕흥사는 절 이름에서 암시하듯이, 왕이 건립을 주도했고 몸소 불공을 드린 곳으로써 왕실의 원찰(願刹) 또는 왕과 특별히 밀착된 사원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역사는 왕권의 안정을 반영하는 것이었으므로 귀족 내부의 분쟁 요인 등이 근본적으로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갈등이 표면화되는 것은 어느 정도 억제되었음을 뜻한다.대왕포라는 지명과 함께, “무왕과 신하들이 그곳에서 흥겹게 어우러져 즐겼다”는 고사는 표면적으로 태평한 백제 지배층의 정황을 잘 보여준다.
무왕은 강화된 왕권에 힘입어 재위 후반기에는 익산 지역을 중시해 이 곳에 별도(別都)를 경영하고, 장차 천도(遷都)할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다. 그리하여 궁성이 될 왕궁평성을 익산에 축조하는 동시에, 흔히 궁성 안에 있어서 내불당(內佛堂)의 성격을 띠는 제석사를 창건하기도 하였다. 또한 2009년 1월 14일에 미륵사지 석탑 해체 중 발견된 금동사리함 명문에 의하면, 정실 왕후 사택씨(沙宅氏) 세력의 보시로 막대한 경비와 시간을 들여 익산에 동방 최대 규모의 미륵사(彌勒寺)를 창건하였음이 밝혀졌다.
미륵사지는 거의 20여년에 걸쳐 발굴되었다. 그 결과 사찰구조가 3탑 3금당의 구조로 이루어졌으며 탑의 층수도 9층이었음이 밝혀졌다. 최근에는 신라의 황룡사 구층목탑건립이 신라의 삼국통일 의지를 상징해 주듯이, 미륵사의 구층탑 건립도 이와 연결될 수 있으며 미륵사의 3원 건립도 백제를 중심으로 한 삼국의 공존과 세력균형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기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미륵사 창건설화에 의하면, “무왕과 왕비(후궁으로서 선화공주)가 사자사로 가는 도중 연못 속에서 솟아오른 미륵삼존상(彌勒三尊像)을 만나 이를 모시기 위하여 미륵사를 창건하였다”라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미륵이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백제 어느 지역의 연못에서 솟아 나왔다는 점이다. 백제는 미륵불국토(彌勒佛國土)를 이룰 수 있었던 인연이 깊은 땅이었는데, 이를 실현시켜 준 인물로서 무왕이 추앙되었다. 미륵불국토의 실현은 오랜 전쟁으로 지친 백제민들에게 앞으로의 전생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미륵불국토의 실현을 위해서 희생된 자신이 다시 미륵에 의해서 구제받을 수 있다는 신념을 심어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3. 익산천도 실패
무왕은 익산 천도를 통한 귀족세력의 재편성을 기도했다. 비록 익산 천도는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관산성 패배 이후 동요된 백제 왕권이 무왕 때 와서 급속히 회복되었다. 그리하여 아들인 의자왕이 즉위 초기에 정치적 개혁을 통해 전제 왕권을 구축할 수 있도록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이처럼 무왕 때의 백제는 정복 전쟁의 승리와 더불어 사비궁의 중수나 왕흥사 · 미륵사의 창건 같은 대규모 역사가 시행될 정도로 전제 왕권이 강화되고, 대외적인 발전이 이루어졌다. 사비시대 정치사에서 한 획을 긋는 위치에 있는 무왕은 흔히들 삼국유사에 인용된 서동설화 속의 무강왕(武康王)과 관련짓고 있다. 그런데 서동설화는 여러 시대의 전승들이 복합, 형성된 것일 가능성이 커서 단순한 일원적 해석은 위험하다. 예컨대 동성왕과 관련된 혼인 설화와 무왕 대의 미륵사 창건 연기설화 외에 무령왕이 즉위 전 익산 지역의 담로장(擔魯長)으로서 이 지역을 다스린 데서 생겨난 이야기가 주된 줄거리라는 견해도 있기 때문이다.
무왕의 능은 익산시 팔봉면 신왕리에 있는 쌍릉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유력하다. 고려시대에 이미 도굴된 적이 있는 쌍릉은 1916년에 조사되었는데, 그에 따르면 사비시대 능산리 고분의 묘제와 일치함이 밝혀졌다. 무왕의 능을 통해 그가 익산 태생이며 그의 성장기반이었던 점,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익산을 중시했던 점을 고려해 볼 수 있다.
4. 서동요 주인공
서동요는 4구체이다. 향찰(鄕札)로 표기된 민요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 노래는 『삼국유사』 기이(紀異) 제2 무왕(武王) 조에 수록되어 있는 서동설화(薯童說話)에 끼어 전한다. 이 설화에 의하면, 이 노래는 백제 무왕이 소년시절에 서동으로서 신라 서울에 들어가 선화공주를 얻으려고 지어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서동설화를 여러모로 분석·검토한 결과 그 설화의 역사적 주인공은 무왕이 아니라 백제 동성왕이라는 주장이 나왔는가 하면, 또한 동성왕도 아니고 신라의 원효(元曉)라는 주장까지 나왔다. 최근에는 이 서동설화를 익산미륵사연기전설(益山彌勒寺緣起傳說)로 취급하면서 그 역사적 주인공은 백제의 무령왕이지만, 그 설화상의 민담적 주인공은 서동(薯童)이라는 주장도 나왔다.
사실 이 설화는 서동과 선화공주의 애정담을 핵심으로 하는 민담의 형태를 지니고 있으므로, 그 허구적 주인공 서동이 백제 동성왕이나 무령왕, 혹은 신라 원효 등이 지닌 소년시절의 모습이나 이름일 수는 없다. 따라서 이들 역사적 인물 중 어느 누구도 이 노래의 작자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서동’은 서여(薯蕷, 마)를 비롯한 산약과 산나물을 캐어 생활을 이어가던 소년의 무리를 지칭하던 보통명사로서 초동(樵童)·목동(牧童) 등과 같은 종류의 집합명칭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서동요」는 서동들에 얽힌 이야기, 그 속에 들어 있는 하나의 노래로 전승된 것이라 하겠다. 즉, 「서동요」는 서동들의 노래로서 구체적인 작자를 찾을 수 없는 공동으로 제작되어 전승된 민요적 성격을 띠고 있다.
선화공주(善化公主)라고도 표기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로 절세미인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미모의 공주라는 소문을 들은 백제의 서동이 신라의 수도로 몰래 들어와서는 아이들에게 마[薯蕷]를 나누어주어 환심을 사는 한편, 선화공주가 자신과 은밀히 접촉하고 있다는 내용의 동요를 지어 아이들에게 부르게 하였다. 선화공주는 부왕의 노여움을 사서 왕궁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는데, 귀양 가는 길목에 대기하고 있던 서동을 알게 되어 그를 따라갔다. 그리고 서동이 묻어 놓은 막대한 황금을 꺼내 보이자 이를 신라 왕궁에 보내 부왕의 노여움을 풀고, 또한 자신들의 결합을 정식으로 승인받으려고 하였다. 이에 공주 부부가 용화산(龍華山) 사자사(獅子寺)의 지명법사(知命法師)를 찾아가 금의 수송을 의논했더니, 법사가 신력을 써서 하룻밤 사이에 금을 신라 왕궁으로 운반하였다. 이로써 서동은 진평왕의 환심을 사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본국 사람들의 인심을 얻게 되어 마침내 백제의 왕위에 오르게 되었는데 그가 무왕이라고 한다.
무왕 부부는 뒤에 사자사로 가던 중 용화산 밑 큰 못가에 나타난 미륵삼존(彌勒三尊)의 영험에 따라 이곳에 미륵사(彌勒寺)를 지었는데, 진평왕이 온갖 종류의 장인을 보내 도와주었다고 한다. 이처럼 이 설화는 전라북도 익산 미륵사의 창건 연기(緣起)가 되어 있는데, 한편으로는 이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도 있다. 즉, 이병도(李丙燾)는 진평왕과 무왕 때의 신라·백제 두 나라의 관계는 원수 사이였으므로 이 같은 혼인이 성립될 수 없었다고 하며, 이는 어쩌면 493년(동성왕 15)에 백제 동성왕과 신라 왕족 비지(比智)의 딸이 통혼한 사실을 가지고 만들어진 설화일 수도 있다고 추측한다. 만약 그렇다면 선화공주는 이벌찬(伊伐飡) 비지의 딸이 되는 셈이다.
한편, 일본 학자 세키노(關野貞)는 미륵사의 창건을 7세기 후반으로 내려보는 입장에서, 삼국통일 직후에 신라가 고구려 부흥 운동군의 중심인물이었던 고구려의 왕족 안승(安勝)을 회유해 신라 쪽으로 끌어들이는 한편, 이곳에 보덕국(報德國)을 만들어 그를 국왕으로 삼고 문무왕의 여동생을 그의 아내로 삼았던 사실을 주목하였다. 그러나 미륵사의 창건을 7세기 초, 즉 무왕 때로 보는 견해가 유력해져 이 설화가 가지는 역사성이 뜻밖에 높은 듯한 느낌을 준다.
5. 사택지적비
사택 지적은 대좌평(大佐平)의 직에까지 올랐다. 백제 후기의 대성팔족(大姓八族)의 하나였던 사택 씨(砂宅氏 또는 沙宅氏:沙氏로 약칭되기도 함.) 출신으로서 나지성(奈祗城)을 세력기반으로 하였다. ≪일본서기≫ 고교쿠기(皇極紀) 원년(642) 7월조에 대좌평 지적(智積)이 나오고 있다. 학계에서는 대좌평 지적을 사택지적과 동일인으로 보고 있다. ≪일본서기≫와 사택지적비문(砂宅智積碑文)을 종합해 보면 사택지적은 642년(의자왕 2) 도왜(渡倭)하였다가, 백제로 돌아온 뒤, 654년 노재상(老宰相)으로 관직에서 물러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의 퇴관은 642년 의자왕이 왕권중심의 지배체제를 확립하기 위하여 내좌평(內佐平) 기미(岐味) 등 고명지인(高明之人) 40여 명을 섬으로 추방한 정변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즉, 강화된 왕권의 대귀족(對貴族) 통제력에 말미암은 것이다. 사택지적비는 그가 만년에 지난날의 영광과 세월의 덧없음을 한탄하면서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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