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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두문자

삼국통일 과정 두문자 : 웅 계 안 소 천 매 기 통

by noksan2023 2023. 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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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통일과정
삼국통일과정

 

삼국통일 : 웅 계 안 소 천 매 기 통

웅 : 진도독부 

계 : 림도독부

안 : 동도호부

소 : 부리주 설치

천 : 성 전투

매 : 소성 전투

기 : 벌포 전투

통 : 삼국

 

 

삼국통일 과정
삼국통일 과정

 

1. 진도독부

백제를 멸망시킨 당은 백제 고토를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사비도성에는 백제도호부를 설치하여 낭장 유인원을 주둔시켰고, 지방에는 백제 지방통치의 거점에 5도독부를 설치하고 그 밑에 주현을 두어 통치하려고 하였다. 웅진도독부는 백제 북방의 요충지인 공주에 설치하였고 왕문도를 도독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나머지 도독부의 도독과 주현의 관리들은 백제인들을 발탁하여 지배하려고 했다. 그러나 백제 전역에서 일어난 유민들의 거센 저항과 부흥운동의 전개로 당의 백제 고토 통치계획은 도상 계획에 그치게 되었다.

 

실제 당군이 지배한 곳은 사비도성에 설치한 백제도호부와 북방성에 설치한 웅진도독부뿐이었다. 그나마 661년에는 백제 유민들의 기세에 물려 백제도호부가 폐지되었고, 이후 664년 3월 백제부흥운동군을 완전히 진압할 때까지 웅진도독부만이 기능을 하였다. 당은 백제부흥운동을 진압한 후에 백제 고토를 웅진도독부 단일 도독부 체제로 확정하고, 그 아래에 7주 51현을 설치하여 기미지배를 하였다. 그러나 백제 고토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신라와 갈등이 심화되자 당은 백제 태자였던 부여융 웅진도독으로 삼고, 백제인들을 지방의 자사와 현령 등으로 삼아 백제 고토에 대한 직접 지배를 획책했다.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당과 신라는 점령지 지배권 문제로 전쟁을 하게되었고, 신라는 672년에 백제 사비도성지역을 차지하여 소부리주를 설치(나당 전쟁 시발점)하였다. 그리고 백제 고토의 다른 지역들도 대부분 신라의 영향권에 들게 되었다. 이로써 실질적으로 웅진도독부의 기능은 정지되었으나, 웅진도독부가 요동의 옛 고구려 건안고성으로 교치되는 676년 2월까지 명목상으로나마 백제 고토에 존재하였다. 676년 2월 웅진도독부의 건안고성 교치는 당이 백제 고토 지배를 완전히 포기한 것이고, 백제 고토는 신라의 직접지배영역이 되었다.

 

2. 림도독부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멸망시킨 뒤, 663년(문무왕 3) 당나라는 신라에 계림대도독부를 설치하고 문무왕을 계림주대도독(鷄林州大都督)으로 임명하는 등, 노골적으로 신라를 그들의 예속하에 두려고 하였다. 그리고 당나라는 백제의 고지(故地)에는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고구려의 고지에는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여 우리 영토를 손아귀에 넣어 지배하고자 하였다. 신라는 이에 맞서 고구려·백제의 유민과 함께 당과의 전쟁을 전개하여, 마침내 676년에 당군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삼국을 통일하였다.

 

3. 동도호부

안동도호부는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 고구려의 옛 땅에 설치한 최고 군정기관(軍政機關)이다. . 당나라는 태종·고종 연간에 국력이 융성해져 그 영역이 사방으로 확대됨에 따라 변경지대에 도호부를 두었다. 안동도호부는 안북(安北)·선우(單于)·안서(安西)·안남(安南)·북정(北庭) 도호부와 함께 6개의 도호부를 구성하였다.

 

668년 고구려가 멸망된 직후, 당은 평양 안동도호부를 두었다. 초대 도호로 임명된 당장(唐將) 설인귀(薛仁貴)는 2만인의 군사를 거느리고 진주하면서 고구려 땅을 9도독부(都督部)·42주(州)·100현(縣)으로 나누어 다스릴 방침이었다. 이 때 당은 고구려의 유민들을 회유할 목적으로 그 유력자 중에서 도독·자사(刺史)·현령(縣令)을 삼아 고구려인의 자치에 맡길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행정구역 자체가 어디까지나 계획에 지나지 않았으며 전면적으로 실시되지 못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당이 안동도호부를 설치할 무렵, 검모잠(劒牟岑)을 비롯한 고구려의 유민들이 각지에서 일어나 당에 대항하였다.

 

한편, 신라가 이들을 배후에서 조종하면서 당과 전면적인 전쟁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에 위협을 느낀 당은 670년에는 도호부의 치소(治所)를 신성(新城 : 만주 撫順 서쪽)으로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뒤, 신라와의 전투에서 잇달아 참패한 당은 676년 2월에 한반도를 포기한 채 도호부의 출정본부를 요동성(遼東城 : 만주 遼陽)으로 옮겼다. 이 때 부치(府治)를 신성에서 요동성으로 옮겼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이듬해 2월에는 고구려의 마지막 왕이었던 보장왕에게 요동도독(遼東都督)의 직책을 주고 조선군왕(朝鮮郡王)에 봉하여 요동으로 보내 자치를 허락하게 됨에 따라 도호부를 다시 신성으로 옮겼다. 그 뒤, 697년에 당의 요동지배의 일대 근거지였던 영주(營州)가 거란인들의 공격을 받아 함락되자 당의 안동도호부 유지가 어렵게 되었다. 더욱이 고구려유민들이 주축이 되어 발해를 건국함에 따라 그 직접적인 위협을 받게 되었다.

 

이에 당은 보장왕의 아들 고덕무(高德武)로 하여금 만주지방의 고구려유민들을 다스리게 하는 통치방침을 채택해 일단 도호부를 폐지하고, 699년에 안동도독부를 두어 고덕무를 안동도독에 임명, 부임하도록 하였다.

그 뒤, 704∼705년경에 다시 도호부로 복구되었다. 도호부는 부치를 714년에 평주(平州)로, 743년에는 요서군 옛성으로 옮겼다. 그 임무는 설치 당시의 고구려유민에 대한 감시로부터 말갈족 견제로 변경되었으며, 차차 도호부 자체의 실권을 평로절도사(平盧節度使)에게 빼앗기게 되었다. 도호부는 안록산(安祿山)의 난을 계기로 758년경 폐지되었다.

 

4. 부리주 설치

백제 멸망 후 수도였던 부여에 설치한 주(州)이다. 660년(무열왕 7)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이 백제의 도성인 사비(泗沘 : 지금의 충청남도 부여)를 함락한 후, 당나라에서는 백제의 옛 땅에 웅진도독부를 위시해 모두 5개의 도독부를 설치하고 군정(軍政)을 실시하려 하였다. 그러나 옛 백제 지역의 대부분에서 부흥 운동이 일어남에 따라 제대로 통치하지 못하였다. 백제 땅에 머물러 있던 당나라 군사는 백제 유민의 부흥 운동에 밀려 고립되었고, 신라의 도움으로 겨우 웅진도독부만 명맥을 유지하였다.

 

그러다가 고구려까지 멸망시킨 당나라와 신라는 급기야 옛 백제 영토의 귀속 문제로 심각하게 대립하게 되었다. 670년(문무왕 10) 당나라 군사가 머물러 있던 웅진도독부와 신라 간의 화친이 깨지고, 신라는 힘으로 옛 백제의 영토를 점령하기 시작하였다. 그 해에 신라의 품일 · 문충 등이 백제의 63성을 빼앗아 그 곳 사람들을 신라의 영토로 옮겼다. 또 천존 · 죽지 등이 12성을 빼앗고, 군관 · 문영 등이 12성을 빼앗는 등 모두 87성을 차지하였다.

 

671년에는 석성(石城)싸움에서 당나라 군사 5,300명을 베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 때 신라는 백제의 옛 도성이던 사비를 중심으로 하는 소부리주를 설치해, 여기에 도독(都督)으로 아찬(阿飡)인 진왕을 임명함으로써 신라의 영토에 편입시켰다. 이러한 신라의 태도에 대응해, 당나라는 백제의 부흥 운동군을 사주해 신라와 대항하게 했으나, 672년의 고성성(固省城)싸움과 가림성(加林城 : 지금의 충청남도 임천)싸움을 거쳐 신라의 군대가 백제의 전 영토에 다시 주둔하게 되어 어쩔 수 없이 물러났으며, 웅진도독부는 랴오둥(遼東) 지방으로 옮겨졌다.

 

당은 신라의 소부리주 설치에 대해 항의하고, 김인문을 문무왕을 대신해 신라 왕으로 삼는 등의 책동을 하였다. 그러나 결국 676년 소부리주 기벌포(伎伐浦 : 지금의 충청남도 장항)해전에서 사찬 시득이 이끄는 신라군이 설인귀(薛仁貴)가 이끄는 당나라 군사를 22차의 전투 끝에 물리침으로써 백제의 옛 땅이 모두 신라의 영토가 되었다. 소부리주는 671년에 설치되어 686년(신문왕 5)에 웅천주가 되면서 군으로 되었다.

 

5. 성전투

나당전쟁이 절정에 달하였던 675년 9월 당나라 설인귀(薛仁貴) 수군을 거느리고 천성을 공격함으로써 싸움은 시작되었다. 이 때 설인귀는 신라인으로 당나라에 유학중이던 풍훈(風訓)을 향도로 삼아 천성을 침공하였다.

 

이에 신라 장군 문훈(文訓)의 군대는 당병을 맞아 싸워서 1,400명을 죽이고, 전함 40척을 빼앗았으며, 말 1,000마리를 얻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 싸움에서 패퇴한 설인귀의 수군은 다음해 11월 다시 기벌포(伎伐浦)에 나타났으나 신라의 막강한 수군에 의하여 전멸됨으로써 신라는 대당전쟁을 승리로 끝맺게 되었다.

 

천성의 지리적 위치에 대해서는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보이는 천산(泉山)ㆍ백수산(白水山)이 모두 같은 곳으로 상정되며 지금의 황해도 재령 부근으로 보는 설과 예성강(禮成江) 입구에 있었다는 설이 있다.

 

6. 소성 전투

고구려가 패망한 뒤, 곧바로 고구려의 각지에서 고구려 부흥군이 크게 일어났는데, 그 중의 일파가 검모잠 · 안승 · 고연무가 거느린 항당(抗唐)세력이었다. 이들은 669년경 한때 평양을 탈환한 일도 있었으나, 차츰 당나라 군대에게 밀려 신라 역내로 들어왔다. 670년 3월 신라의 설오유가 고구려 유민인 고연무(高延武)와 함께 각각 군사 1만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넘어 당나라 군사와 싸운 것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나당전쟁이 전개되었다. 다시 당나라는 한병(漢兵)을 거느린 고간(高侃)과 말갈병을 거느린 이근행(李謹行)을 보내어 평양 · 황해도 방면에서 북상하는 신라군을 저지하게 하였다.

 

670년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된 나당전쟁은 673년 무렵 임진강을 경계로 고착상태에 빠진다. 이를 타계하기 위해 당은 675년 유인궤(劉仁軌)를 계림대총관(鷄林大摠管)으로 삼아 대규모 원정군을 편성하였다. 신라는 당군의 침입을 대비하여 9군(九軍)을 동원하였지만, 675년 2월 유인궤에 의해 칠중성이 함락되었다. 신라는 칠중성 전투에서 패배하여 문무왕이 당에 사죄사(謝罪使)를 보낼 정도였다. 칠중성 전투 후 이근행이 안동진무대사(安東鎭撫大使)가 되어 기병 7만을 포함한 최정예 20만 대군이 매소성 부근에 주둔하였다. 당시 이근행이 이끌던 병력은 당 · 말갈 · 거란의 혼성군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근행의 병력은 『삼국사기』에는 20만명이라 했지만 중국측 사서를 참작하면 4만명으로 추정된다. 20만이라는 당군의 규모가 과장되었다고 하더라도 당나라가 병력을 증가시켜 한반도에서 신라와 고구려부흥군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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