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여왕 : 선 인 덕 황 구 첨 분 대 비
선 : 선덕여왕(632~647)
인 : 인평
덕 : 덕만
황9 : 황룡사 9층 목탑(자장의 건의)
첨 : 첨성대
분 : 분황사 모전석탑(벽돌 형식의 석탑)
대 : 대야성 함락(643 백제 의자왕 침략)
비 : 비담 염종의 반란(647)
1. 선덕여왕(632~647)
선덕여왕은 삼국시대 신라의 제27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632~647년이며, 진평왕의 장녀로 진평왕이 아들 없이 죽자 화백회의에서 왕으로 추대했다. 재위 기간 동안 고구려와 백제의 침략이 빈번해지자 당과 연합하여 국가를 보존하려 했고, 백제의 침략으로 낙동강 방면의 거점인 대야성이 함락되자 당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당에 유학 중이던 자장을 귀국시켜 불교사상을 왕권강화책으로 적극 활용했고, 호국 중심 사찰인 황룡사에 왕권의 상징물로 구층목탑을 건립했다. 비담 등 진골 귀족들의 반란 와중에 재위 16년 만에 죽었다.
2. 인평 덕만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덕만(德曼)이다. 진평왕의 장녀이며, 어머니는 마야부인이다. 진평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화백회의에서 그를 왕위에 추대하고, ‘성조황고(聖祖皇姑)’란 호를 올렸다고 한다. 즉, 선덕여왕(善德女王)이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은 ‘성골(聖骨)’이라는 특수한 왕족 의식이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대외적으로는 634년에 인평(仁平)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중고(中古) 왕실의 자주성을 견지하고자 하였다. 다만 즉위 이후 거의 매년 당나라에 조공 사신을 파견함으로써 당나라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기도 하였다. 이것은 고구려와 백제의 신라에 대한 공격이 빈번해짐에 따라 당나라와 연합함으로써 국가를 보존하려는 자구책의 일환으로 나타난 현상이었다.
3. 황룡사 9층 목탑(자장의 건의)
당나라에서 유학하던 자장(慈藏)에게 귀국요청을 하였다. 자장은 귀국 후 선덕여왕과 왕실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아가며 정치권에 깊숙이 개입하여 활발한 정치적 활동을 수행해 나갔다. 자장은 불교사상을 왕권강화책으로 적극 활용함으로써 여왕의 권위와 통치력에 새로운 위상을 정립시켰다. 그 권위의 상징물로 호국 중심 사찰인 황룡사에 645년(선덕여왕 14) 황룡사구층목탑(皇龍寺九層木塔)을 건립하였다. 황룡사구층목탑은 높이 80m에 달하는 거대한 불탑이었다. 또한 자장은 신라가 과거세부터 불교와 인연이 깊은 ‘유연불국토(有緣佛國土)’이며 강원도 오대산을 문수보살(文殊菩薩)의 상주처로 설정해 신라 불국토사상과 호국사상을 일치시켜 불력과 통합된 정치력으로 신라 왕실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다.
황룡사구층목탑의 창건과 중수 등에 관해서는 『삼국유사』탑상편 제4 「황룡사구층탑」조에, 자장(慈藏)이 당나라에 유학하여 태화(太和) 못가를 지날 때 신인(神人)과 나타나 나눈 대화에서 “우리나라 신라는 북으로 말갈에 연하고 남으로 왜인에 접하여 있으며 고구려·백제의 침범이 잦아 걱정이다.”라고 하자, 신인이 “황룡사 호법룡(護法龍)은 곧 나의 장자로서 그 절을 보호하고 있으니 돌아가 그 절에 구층탑을 세우면 근심이 없고 태평할 것이다”라고 한 데서 보인다. 이 내용은 구층탑을 세우게 된 사상적 배경이 불력(佛力)으로 나라를 지킨다는 데 있음을 말하여 주는 것이다. 자장은 당나라 태종(太宗)이 준 경전과 불상·가사 등을 가지고 귀국하여 구층탑 건립의 필요성을 선덕여왕에게 건의하였다.
선덕여왕은 군신의 의견을 물어 백제의 장인(匠人) 아비지(阿非知)를 초청하여 기술지도를 받고, 이간(伊干) 용춘(龍春)으로 하여금 공사감독관이 되어 소장(小匠) 200인을 거느리고 완성하게 하였다. 처음 찰주(刹柱)를 세우던 날 공장(工匠)이 꿈에 본국인 백제가 망하는 형상을 보고 의심하여 일손을 놓자, 갑자기 땅이 진동하고 어둡더니 한 노승과 장사가 금전문(金殿門)에서 나와 그 기둥을 세운 뒤 어디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공장이 후회하고 탑을 완성하였다는 것이다. 찰주기(刹柱記)에 기록된 규모를 보면, 철반(鐵盤) 이상의 높이는 42척, 이하는 183척이라 하였고, 자장이 5대(五臺)에서 받은 사리(舍利) 100립(粒)을 이 탑의 기둥 속과 통도사 계단, 태화사탑에 나누어 봉안하였다는 것이다.
탑을 9층으로 한 것은 이웃나라의 시달림을 막기 위함으로 제1층은 일본, 제2층은 중화, 제3층은 오월(吳越), 제4층은 탁라(托羅), 제5층은 응유(鷹遊), 제6층은 말갈(靺鞨), 제7층은 단국(丹國), 제8층은 여적(女狄), 제9층은 예맥(濊貊)을 제압하는 것이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황룡사구층목탑은 선덕여왕 12년(643)에 착수하여 645년에 완성되었고, 그 높이는 상륜부 42척(약 15m), 탑신부 183척(약 65m), 전체 225척(약 80m)의 대탑이었다.
창건 후 탑의 중수내용을 살펴보면, 성덕왕 17년(718)에 낙뢰가 있어 720년에 중수하였으며, 경문왕 8년(868)에 탑이 진동하여 수리하였다. 경문왕 12년에는 탑을 헐고 다시 세웠는데, 이 내용은 경문왕 때 만들어 넣은 사리외함의 찰주본기에 “신라 문성대왕 때 이르러 이 대탑이 동북으로 기울어지므로 염려하여 재목을 모은 지 30여 년이 지나도 고치지 못하였는데, 경문왕 11년에 이르러 옛 것을 헐고 새롭게 만들도록 하였다. 철반 위에 무구정경(無垢淨經)에 따라 소석탑 99기를 안치하였으며, 그 소탑마다 사리 1과와 다라니 4종을 넣고 다시 경전과 사리 1구를 함께 봉안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경애왕 4년(927) 탑이 북쪽으로 기울어졌고, 고려 광종 5년(954)에 재앙을 입어 현종 3년(1012)에 경주의 조유궁(朝遊宮)을 헐어 그 재료로 탑을 수리하였으며, 현종 13년에 네 번째로 중수하였고, 정종 2년(1036)에 낙뢰로 파손된 것을 문종 18년(1064)에 다섯 번째로 중수하였다. 이후 낙뢰로 파손된 것을 여섯 번째로 중수하였으나, 고종 25년(1238) 몽고병의 침입으로 황룡사 가람 전체가 불타 버렸을 때 함께 소실되었다.
4. 첨성대
신라의 첨성대는 경주에 실물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삼국유사≫·≪고려사≫지리지·≪세종실록≫지리지·≪신증동국여지승람≫·≪증보문헌비고≫ 등에 기재되어 있다. 선덕여왕 때에 축조된 것으로 상방하원(上方下圓:위는 네모지고 아래는 둥근 모양)이며, 높이는 19척5촌, 위의 원둘레가 21척 6촌, 아래의 원둘레가 35척 7촌이며, 중간 이상이 위로 뚫려서 사람이 그 속으로 오르내리며 별을 관측하였다는 기록이 현존 실물과 일치한다.
이 첨성대는 ≪삼국유사≫에 의하면, 점성대(占星臺)라고도 불렀음을 알 수 있는데, 얼마 뒤에 일본에서 점성대를 쌓았다는 ≪일본서기≫의 기록이 이 사실을 확실하게 해주고 있다. 경주의 첨성대는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5. 분황사 모전석탑(벽돌 형식)
분황사 모전석탑은 높이 9.3m.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돌을 벽돌[塼] 모양으로 다듬어 쌓은 모전석탑(模塼石塔)으로서, 634년(선덕여왕 3) 분황사의 창건과 동시에 건립되었다고 생각되나 뒤에 몇 차례 보수되어 어느 정도까지 원형이 남아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기단(基壇)은 한 변 약 13m, 높이 약 1.06m의 막돌로 쌓은 토축(土築) 단층기단인데, 밑에는 상당히 큰 돌을 사용하였고 탑신(塔身) 밑이 약 36㎝ 높아져 경사를 이루었다. 기단 위에는 네 모퉁이에 화강암으로 조각한 사자 한 마리씩을 배치하였는데, 두 마리는 수컷, 두 마리는 암컷이다.
현재 탑신부는 3층까지 남아 있으며 회흑색의 안산암(安山岩)을 작은 벽돌모양으로 잘라서 쌓았는데 위의 폭이 아래폭보다 약간 좁다. 탑신 4면에는 입구가 뚫려져 있는 감실(龕室)을 개설하고, 입구 좌우에 거의 원각(圓刻)에 가까운 인왕상(仁王像)을 배치하였으며 두 짝의 돌문을 달아 여닫게 하였다. 인왕상은 모두 8구로서 조각의 형태는 인간화가 꽤 많이 진전되었으나 얼굴이나 신체 등에서 형태가 불균형한 면을 보이는 등 추상화된 면이 남아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인왕의 역강한 힘을 느끼게 하는 조각으로서 7세기 조각양식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지금 감실 안에는 머리가 없는 불상을 안치하고 있으나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초층탑신 4면에 감실을 개설한 예는 미륵사지석탑(국보, 1962년 지정)에서 초층탑신 4면에 통로를 개설하고 그 중심에 찰주(擦柱 : 탑의 중심 기둥)를 세운 점과 서로 통하며, 이러한 형식은 목탑에서 초층탑신 내부가 공간이 되고 4면에 내부로 통하는 문을 개설하는 형식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층과 3층탑신은 초층에 비하여 높이가 현저하게 줄어서 장중한 감을 준다. 옥개석(屋蓋石)은 벽돌 1장의 두께로 처마를 삼고 아래위에 탑신을 향하여 감축되는 받침과 낙수면(落水面) 층단이 있다. 받침은 초층부터 6단, 6단, 5단이며, 낙수면 층단은 초층과 2층이 10단이고, 3층상면은 층단으로 방추형을 만들었으며, 그 정상에는 화강석으로 된 앙화(仰花)만이 남아 있다. 『동경잡기(東京雜記)』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왜병에 의하여 허물어지고 그 뒤 분황사의 중이 개축하려다가 또 허물어뜨렸다고 하나 그 실상은 알 수 없다. 1915년에는 일본인들이 해체수리하였는데 현재의 상태는 이때의 현상대로 복원한 것이다.
이때 제2층과 제3층 사이에서 석함(石函) 속에 장치되었던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가 발견되었다. 각종 옥류(玉類)와 패류(貝類), 금·은제의 바늘, 침통(針筒)·가위 등과 함께 숭녕통보(崇寧通寶)·상평오수(常平五銖) 등 옛 화폐가 발견되어 고려 숙종 내지 예종 연간에 탑이 조성되었음을 말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지금 분황사 경내에는 이 탑을 수리할 때 남은 석재가 따로 보관되어 있어 지금의 모습이 창건 당시의 형태가 아님을 알 수 있으며, 『동경잡기』에는 ‘분황사9층탑(芬皇寺九層塔)’이라고 되어 있으나 그대로 믿을 근거가 못 된다.
6. 대야성 함락(643 백제 의자왕 침략)
신라는 642년부터 본격적으로 고구려와 백제의 침공을 받았다. 그 해에 신라는 백제 의자왕의 침공을 받아 서쪽 변경에 있는 40여 성을 빼앗겼으며, 신라의 한강 방면 거점인 당항성도 고구려 · 백제의 침공을 받았다. 또한 백제 장군 윤충의 침공으로 낙동강 방면의 거점인 대야성이 함락당하였다.
백제 장군 윤충은 642년(의자왕 2) 8월에 군사 1만 명을 이끌고 신라의 대야성(大耶城 :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을 공격하였다. 이 때 성안은 불만 세력이 팽배하여, 성안의 인심이 흉흉함을 알게 되었다. 이 틈을 이용해서 아찬(阿飡) 서천(西川)이 김춘추(金春秋)의 사위인 성주 품석(品釋) 에게 항복을 권유하였다. 품석은 죽죽(竹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처자와 함께 성문을 열고 나와 항복을 하자 성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그는 품석과 그 처자들의 머리를 베어 사비성(泗沘城 : 지금의 충청남도 부여)으로 보내고 사로잡은 주민 1,000명은 백제의 서쪽 주현으로 옮겨 거주시켰다. 이 대야성의 전공으로 윤충은 말 20 필과 곡식 1,000석을 하사 받았다.
642년 8월 의자왕은 장군 윤충(允忠)에게 군사 1만 인을 주어 신라의 대야성을 공격하게 하였다. 대야성 도독(都督)은 김춘추의 사위인 김품석(金品釋)이었다. 김품석은 재지세력인 사지(舍知) 검일(黔日)의 아내를 빼앗음으로써 대야성 지방의 상당한 재지세력들이 이탈하였다. 검일은 이 일을 원망하다가 백제군과 내통해 창고에 불을 질렀다. 백제 군사가 대야성을 공격해 왔을 때 재지세력인 죽죽(竹竹)과 용석(龍石)은 백제군에 대항하여 끝까지 싸우다 전사하였으나 김품석은 싸우지도 않고 보좌관인 아찬(阿飡) 서천(西川)의 주장에 따라 항복하여 가족과 함께 죽임을 당하였다. 그리고 대야성의 남녀 1천여 인은 사로잡혀서 백제의 서쪽지방으로 천사(遷徙)되었다.
신라는 대야성 전투의 패배로 서부 국경지역을 대부분 상실하였고, 대백제 방어선도 압량(押梁: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 지방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대야성의 함락으로 선덕여왕(善德女王)의 정치능력에 대한 문제가 다시 논란이 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대야성의 책임자는 선덕여왕의 세력기반인 김춘추의 사위였으므로 반대파들의 정치공세가 적지 않았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선덕여왕의 정치는 대신(大臣)으로 불리는 소수 귀족들에 의해 구성된 회의체를 통해 운영되고 있었다. 대신들의 합의에 의해 국가의 중대사는 결정되었다. 진평왕(眞平王) 사후 남자로서 적절한 왕위계승자가 없는 상황에서 여주(女主)인 선덕여왕의 즉위를 지지하는 세력과 반대하는 세력이 대립·갈등하였고, 결국 그들 간의 정치적인 타협에서 나온 정치운영 형태였다. 여왕지지파와 여왕반대파는 균형을 이루어 서로 대립하고 견제하였는데, 대야성의 함락으로 여왕지지파는 수세에 몰리게 되었던 것이다.
수세에 처한 신라는 이러한 위기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두 방면으로 대응하여 나갔다. 먼저 김춘추(金春秋)를 고구려에 파견해 외교적 도움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오히려 연개소문(淵蓋蘇文)에게 영토할양을 강요당하며 원병요청에 실패하였다. 다음으로 적극적인 대응책으로서 새로이 압량주(押梁州: 경산)를 설치하고 군주(軍主)에 김유신(金庾信)을 임명해 흐트러진 전열을 재정비하였다. 백제의 가혜성(加兮城)을 비롯한 7성을 함락시키는 등 상실된 대야성 지역은 김유신에 의해 점차 탈환되어 가고 있었다. 특히 압량주 도독(都督)을 역임한 지역과 새로 백제로부터 빼앗은 지역은 김유신의 군사적인 기반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신라는 당면한 직접적인 위기는 일단 벗어날 수 있었으며, 김유신의 대백제 군사활동의 성공은 여주지지파들의 정치적인 위상을 강화시켜 주는데 큰 몫을 하였다.
648년(진덕여왕 2) 김유신은 백제군을 대야성 밖으로 유인해 격파하고, 백제 장군 8인을 사로잡고 1천 인을 죽이거나 사로잡는 대전과를 올렸다. 그리고 사로잡은 8인을 대야성 전투 때 죽은 김품석 부부의 유해와 교환하는 한편, 백제의 경내를 공격해 혁혁한 전과를 세웠다. 이 공으로 김유신은 이찬(伊飡)의 벼슬을 받고 더하여 상주행 군대총관(上州行軍大摠管)이 되었다. 그리고 김춘추는 고구려와 왜(倭)에 대한 외교노력은 실패했지만 입당(入唐)한 뒤 적극적인 외교활동을 이어 나갔다. 그가 당나라에 들어간 목적은 단순히 외교에 머문 것이 아니라 국왕 중심의 지배체제를 지향하는 내정개혁을 추진하기 위한 당제(唐制)의 적극수용[漢化政策]이라는 정치적인 목적도 가지고 있었다. 김춘추는 당나라가 대고구려 원정을 포기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있었다는 것을 간파하고, 백제 공략을 위해 당을 끌어들이는 원병 요구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20만 구원군을 얻는 데 성공하였다.
7. 비담 염종의 반란(647)
비담의 난은 신라 선덕여왕 재위 마지막 해에 상대등 비담이 일으킨 반란이다. 비담은 645년(선덕여왕 14)에 귀족회의의 의장인 상대등에 올라 귀족 세력을 대표하던 인물이다. 1년가량 뒤에 비담은 염종 등과 함께 ‘여왕은 잘 다스리지 못한다’는 명분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선덕여왕을 옹위하던 김유신·김춘추 편의 군사와 대치하였으나 결국 패하였다. 이로써 선덕여왕에서 진덕여왕으로 이어지는 성골 왕권을 견제하려던 귀족 세력은 후퇴하고 김유신·김춘추 등 율령국가를 지향하는 세력이 승리해 장차 무열왕계의 전제 왕조가 성립되는 기틀이 마련되었다.
'한국사 두문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열왕 두문자 : 진 갈 사 중 백 (0) | 2023.08.12 |
---|---|
진덕여왕 두문자 : 진 태 연 집 창 좌 이 (0) | 2023.08.12 |
진평왕 두문자 : 평 복 위 조 예 승 영 걸 광 오 (0) | 2023.08.12 |
삼국통일 과정 두문자 : 웅 계 안 소 천 매 기 통 (0) | 2023.08.12 |
의자왕 두문자 : 의 해 당 대 멸 부 주 임 (0) | 2023.08.1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