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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두문자

진덕여왕 두문자 : 진 태 연 집 창 좌 이

by noksan2023 2023. 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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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덕여왕
진덕여왕

 

진덕여왕 : 진 태 연 집 창 좌 이

 

진 : 덕여왕(647~654)

태 : 평송

연 : 나당 합(648)

집 : 사부

창 : 

좌 : 이방부 설치

 

 

진덕여왕 : 7척 키의 풍만하고 아름다운 여왕
진덕여왕 : 7척 키의 풍만하고 아름다운 여왕


1. 덕여왕(647~654)

진덕여왕은 삼국시대 신라의 제28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647~654년이며, 신라시대 3인의 여왕 중 한 사람으로, 선덕여왕의 유언에 따라 즉위했다. 즉위하면서 비담의 난을 진압했고, 고구려와 백제의 침략이 빈번해지자 김유신을 중심으로 방어하는 한편, 김춘추를 당나라에 보내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다. 신라 문제에 소극적이던 당나라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허락받고 긴밀한 외교관계를 구축했다. 의관을 중국식으로 바꿨고 연호도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는 등 한화정책을 폈으며, 집사부 설치, 행정관부의 체계화로 중앙집권적 귀족관료체계를 완성했다.

 

 

치당 태평송
치당 태평송

 

2. 평송

태평송 650년(진덕여왕 4) 신라 진덕여왕이 당나라 고종에게 보낸 한시이다. 당나라의 태평성대를 기리는 내용의 작품으로 사대외교상(事大外交上) 당의 환심을 사기 위해 진덕여왕이 당에 보냈던 시이다. 『당시품회(唐詩品滙)』에서는 이 시를 고고웅혼(高古雄渾:고상하고 예스러우며 웅장하고 막힘이 없음)하다고 평하였다.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당(大唐)이 큰 업을 열었으니 높은 황제의 운이 창성하다. 갑옷 입고 천하를 통일하니 전쟁이 그쳤고 글을 닦아 여러 임금들이 대를 이으셨다. 하늘의 명을 이어 자비를 베풀고 만물을 다스리니 그 아름다운 덕을 본받으리라. 그 인덕(仁德)은 일용(日用)에 부합하고, 세상을 어루만지는 덕은 때맞추어 평화롭게 하셨다. 그 깃발 빛나며, 북소리 크게 울리자 외적들은 천벌을 받았네. 순박한 풍속 나타나는 곳 먼 곳이나 가까운 곳이 모두 상서로운 일 아뢰어 오네. 사계절마다 임금의 덕이 조화되고 해와 달과 별들은 온나라 두루 도네. 당나라 산악의 정기가 주선왕 신보(申甫)를 낳았듯이 황제께서도 산악의 정기로 재상을 낳으시어 충성스럽고 선량한 이에게 정사를 맡기셨네. 삼황오제처럼 한결같은 덕을 이루셨으니 우리 당나라 황실의 국운이 밝고 밝도다(大唐開鴻業 巍巍皇猷昌 止戈戎衣定 修文繼百王 統天崇雨施 理物體含章 深仁諧日月 撫運邁時康 幡旗旣赫赫 鉦鼓旣鎤鎤 外夷違命者 剪覆被天殃 淳風凝幽顯 遐邇競呈祥 四時和玉燭 七曜巡萬方 維嶽降宰輔 維帝任忠良 五三成一德 昭我唐家皇).”

 

이 작품은 가장 이른 시기의 오언으로 된 장편 고시로, 『백운소설』 등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당시 우리 나라 한시의 높은 수준을 알려 주는 것이다. 그러나 외교적인 목적 때문이었다고는 하지만, 지나치게 자신을 낮추고 당을 높인 것은 또한 커다란 결점이 아닐 수 없다.

 

3. 나당 합(648)

즉위하던 해(647)에 선덕여왕 말년에 반란을 일으켰던 비담(毘曇)을 비롯한 30인을 붙잡아 처형하고, 알천을 상대등에 임명함으로써 정치적 안정을 꾀하였다. 그리고 사신을 파견해 당나라와의 외교관계를 지속시켰는데, 이것은 당나라의 힘을 빌려 고구려와 백제를 견제하기 위한 정책이었다. 고구려와 백제는 진덕여왕이 즉위하면서부터 계속적으로 신라를 침공해왔다. 이에 신라는 압독주(押督州: 지금의 경상북도 慶山) 군주(軍主)이던 김유신을 중심으로 백제의 공격을 막는 한편 648년(진덕여왕 2)에는 김춘추(金春秋)를 당나라에 보냈다. 이로써 군사적 지원을 요청하는 청병외교(請兵外交)와 당나라와의 외교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는 숙위외교(宿衛外交)를 전개하였다. 또한 김춘추가 당나라에서 외교활동을 벌인 결과, 신라는 지금까지 신라 문제에 대해 소극적이던 당나라 태종(太宗)으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허락받는 데 성공(나당연합 648)하였다.

 

4. 사부

 진덕여왕은 왕권안정을 위한 집사부 설치, 율령체제를 운영하는 좌이방부의 신설, 각 행정관부의 체계화 등 개혁을 통해 왕권 중심의 중앙집권적 귀족관료체제를 지향했다. 그렇지만 진덕여왕대 김춘추에 의하여 주도된 내정개혁의 방향은 진덕여왕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김춘추 자신이 훗날 즉위할 경우에 대비한 정치 작업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651년(진덕여왕 5)에 본래의 품주(稟主)를 개편해 집사부를 설치하였다. 왕정(王政)의 기밀사무를 관장하는 일을 하였다. 즉 위로는 왕명을 받들고, 아래로는 행정을 분장하는 여러 관부를 거느렸다. 집사부의 설치는 당시 신라 전제왕권의 필요에 의한 것이었지만, 구체적으로는 당시 왕권을 배경으로 정치의 실권을 쥐고 있던 김춘추(金春秋)와 김유신(金庾信) 일파의 주장에 의한 것인 듯하다. 집사부의 중심은 장관인 중시(中侍 : 진덕여왕 5년 설치, 경덕왕 6년 侍中으로 고침)였는데, 정원은 1인이고, 진골(眞骨) 출신이 임명되었으며, 이찬(伊飡)에서 대아찬(大阿飡)의 관등을 가진 자가 임명되었다. 임기는 3년이 원칙이었던 것 같다.

 

차관직인 전대등(典大等 : 진흥왕 26년 설치, 경덕왕 6년 侍郎으로 고침)은 정원이 2인이고 아찬(阿飡)에서 나마(奈麻)의 관등을 가진 자가 임명되었다. 제3등 관직인 대사(大舍 : 진평왕 11년 설치, 경덕왕 18년 郎中으로 고침)는 정원이 2인이고 나마에서 사지(舍知)의 관등을 가진 자가 임명되었다. 그리고 제4등 관직인 사지(신문왕 5년 설치, 경덕왕 18년 員外郎으로 고쳤다가, 혜공왕 12년 다시 사지라 함)는 정원이 2인이고 대사에서 사지까지의 관등을 가진 자가 임명되었다. 한편 말단 사무 담당자인 사(史 : 경덕왕이 郎으로 고쳤다가, 혜공왕이 다시 사라 함)는 정원이 처음에는 14인이었는데 671년(문무왕 11)에 6인을 더했으며, 대사에서 선저지(先沮知, 일명 造位)의 관등을 가진 자가 임명되었다.

 

5. 이방부 설치

좌이방부에서는 형률(刑律) 관계의 업무를 관장하였다. 651년(진덕여왕 5)에 설치, 692년(효소왕 1)에 왕의 이름 이홍(理洪)을 피휘(避諱)하여 의방부(議方府)로 개칭되었다. 654년(무열왕 1)에 왕명을 받들어 기존의 율령을 참작하여 「이방부격(理方府格)」 60여 조를 수정하기도 하였다. 소속관원으로는 영(令)·경(卿)·좌(佐)·대사(大舍)·사(史)가 있었다. 장관인 영은 651년에 설치되었고 급찬(級飡)에서 잡찬(迊飡)의 지위에 있는 자가 임명되었으며 정원은 2인이었다.

 

최초의 영으로는 천효(天曉)가 652년에 임명되었다. 차관인 경은 진덕여왕 때에 설치, 급찬에서 아찬(阿飡)의 관위에 있는 자가 임명되었으며, 정원은 처음에는 1인이었다가 678년(문무왕 18)에 1인이 증원되어 2인이 되었다. 좌는 진덕여왕 때에 설치되었으며, 나마(奈麻)에서 대나마까지의 관등에 있는 자가 임명되었고 정원은 2인이었다. 설치 당시에는 승(承)이었으나 737년(효성왕 1)에 효성왕의 이름 승경(承慶)을 피하여 좌로 개칭하고, 경덕왕 때에 평사(評事)로 고쳐졌다가 혜공왕 때에 다시 좌로 복칭되었다. 대사는 설치연대가 정확하지 않으나, 759년(경덕왕 18)에 주부(主簿)로 개칭되었다가 혜공왕 때에 대사로 복구되었다. 사지(舍知)에서 나마의 위(位)에 있는 자가 임명되었으며 정원은 2인이었다. 최하위직인 사는 설치연대를 알 수 없다. 처음에는 정원이 15인이었으나 797년(원성왕 13)에 5명이 감축되어 10인이 되었다. →이방부

 

6. 기타

649년 의관을 중국식으로 하는 중조의관제(中朝衣冠制)를 실시하였다. 650년에는 즉위 직후부터 사용하던 독자적 연호인 태화(太和)를 버리고 당나라 고종(高宗)의 연호였던 영휘(永徽)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중국의 관제(官制)와 연호(年號)의 사용은 김춘추의 건의에 따라 이루어진 것으로 당나라의 선진문물을 수용한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당나라에 대한 신라의 정치적 예속도가 강화되었다는 부정적인 면도 무시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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