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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두문자

무열왕 두문자 : 진 갈 사 중 백

by noksan2023 2023. 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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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기반 무열왕
통일 기반 무열왕

 

무열왕 : 진 갈 사 중 백

 

진 : 

갈 : 문왕 제도 폐지

사 : 정부 설치

중 : 국식 시호 : 태종 무열왕

백 : 제 멸망(660)

 

1. 무열왕

태종무열왕은 삼국시대 신라의 제29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654~661년이다. 이름은 김춘추로 진덕여왕 사후 신하들의 추대로 즉위하여 신라 중대왕실을 열었다. 즉위 전부터 고구려와 당나라 사이를 직접 오가며 탁월한 외교역량을 보여주었고, 김유신과 연합하여 신귀족세력을 형성하여 보다 강화된 왕권 중심의 집권체제를 확립했다. 이후 친당외교를 통해 당나라를 후원세력으로 삼고 고구려와 백제를 공략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삼국통일이라는 대업의 토대를 마련한 후 재위한 지 8년 만에 사망했다. 시호는 무열이고 묘호는 태종이다.

 

 

태종무열왕 김춘추

 

2. 

김춘추 의표(儀表)가 영특하고 어려서부터 제세(濟世)의 뜻을 가지고 있었다. 진덕여왕을 섬겨서 관등이 이찬에 이르렀다. 진덕여왕이 죽었을 때 여러 신하들이 처음에는 왕위계승자로서 상대등 알천을 천거하였다. 그러나 알천이 자신의 늙음과 덕행의 부족함을 들어 사양하고 그 대신 제세의 영걸(英傑)로서 김춘추를 천거하였다. 이에 김춘추가 추대를 받아 즉위하여 신라 중대왕실(中代王室)의 첫 왕이 되니 당시 나이가 52세였다.

그의 즉위에는 오래 전부터 상당히 복잡한 정치적 문제가 있었다. 김춘추는 김유신의 누이인 문희와 정략적인 측면에서 혼인함으로써, 왕위에서 폐위된 진지왕계와 신라에 항복해 새로이 진골귀족에 편입된 금관가야계간의 정치적 · 군사적 결합이 이루어졌다. 즉, 진지왕계인 김용춘 · 김춘추는 김유신계의 군사적 능력이 그들의 배후세력으로 필요하였다. 또한 금관군주 김구해계(金仇亥系)인 김서현 · 김유신은 김춘추계의 정치적 위치가 그들의 출세에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이러한 상호이익에 입각한 양파의 정치적 결탁은 신라 중고왕실(中古王室)의 진골귀족 내에서 새로운 신귀족집단을 형성하게 되어 구귀족집단의 반발을 받았다. 선덕왕대 중반기까지는 적어도 신귀족과 구귀족의 세력균형이 이뤄진 듯하다.

 

진골신분의 왕이 등장하는 시기는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654∼661) 이후부터이다. 그 이전 사회에서 성골과 진골신분의 구분은 애매하다. 신라 중고(中古)시대의 어느 시기에 진골신분이 성립되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다. 골품제가 갖추어지면서 왕족들은 진골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중고시대 말에 왕족 내 혈연집단의 분지화(分枝化)가 일어나자, 진평왕(眞平王, 579∼632)계가 진흥왕의 장자인 동륜(銅輪)을 직계로 내세우면서 진지왕(眞智王, 576∼579)계와 같은 다른 왕족과 구별하기 위해 성골관념을 표방했다는 설이 있다.

 

반면 진골은 성골과 대조되는 신분이기 때문에 성골이 갖추어지는 것과 동시에 진골관념이 형성되었으며, 그것은 진흥왕 장자인 동륜계가 존재하는 시기에 이루어졌다는 설이 있다. 둘 중 어느 학설을 따르더라도 진골과 성골은 진평왕대 이후 선덕여왕(善德女王, 632∼647)대에는 모두 존재한 것이 된다. 성골신분이 강등되어 진골이 되었다면 원인이 있을 터인데, 이 점 역시 확실하지 않다. 혈족집단 내부의 분화과정을 가지고 설명하는 견해에 의하면, 직계 혈연집단에서 멀어져간 방계 혈연집단이 어느 시기에 성골에서 진골로 강등된 것이라고 한다. 신라시대 친족의 범위를 7세대까지 동일집단으로 파악해 8세대부터는 신분이 강등되며, 마침 김춘추(金春秋)가 방계로서 강등된 인물이라 한다. 그렇다면 김춘추는 8세대를 방계로 내려온 셈인데, 이 점 역시 불분명하다.

 

신라 중대에 왜 진골신분의 왕이 등장했는지는 중요하면서도 잘 해결되기 어려운 문제이다. 그러므로 실제 진골신분이 어떤 정치·사회적 위치에 있었는지를 밝히는 작업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들은 골품제에 의거해 장관직·장군직을 독점하고, 국가로부터 식읍(食邑) 또는 녹읍(祿邑)을 받으며, 통일전쟁의 군공에 따라 막대한 보상과 전리품을 분배받았다. 신라통일기 진골귀족들은 거대한 재력을 지녀 사병을 양성하였다. 그들의 호사한 생활을 반영하는 상징적 존재가 금입택(金入宅: 통일신라시대 금을 입혀서 만든 귀족들의 저택)이다. 사원 역시 그들의 원당(願堂)으로 변하고 있었다. 진골귀족은 사원을 경영해 합리적으로 재산을 도피시키고 있었다.

진골신분은 제5관등 대아찬(大阿飡) 이상의 최고관등으로 오를 수 있으며, 6두품에 비해 기물이나 복색에 대한 제한도 적은 편이었다.

 

이러한 진골귀족이 비대화되어짐에 따라 중대 전제왕권의 개혁조치는 실패로 기울고 있었고 한층 미약해진 왕권은 이들을 견제할 수 없게 되었다. 국가권력에 의한 통제가 유명무실해지자, 진골귀족들 사이에 왕위계승을 위한 쟁탈전이 일어나게 되었다. 신라 하대(下代)는 이렇게 하여 시작되었다. 신라 하대로 오면서 수적으로 증가일로에 있던 진골귀족은 일부가 6두품으로 강등되기도 하였다. 태종무열왕의 후손인 범청(範淸)은 진골이었는데, 아들 낭혜(朗慧: 속명 無染)는 강등되어 6두품이 되었다. 낭혜가 왜 진골에서 6두품으로 떨어지게 되었는지는 중요한 문제이지만, 아직 분명한 정설이 없는 편이다. 역시 7세대 동일집단의 규모로 보아, 태종무열왕의 8대손인 낭혜가 진골에서 6두품으로 강등되었다고 한다. 낭혜 역시 태종무열왕으로부터 8대 동안 방계로만 내려왔는지는 의문이다. 한편 범청이 김헌창(金憲昌)의 난에 가담했으므로, 난이 진압된 후 낭혜가 6두품으로 강등되었다고 한다. 진골귀족 내부에서 왕위를 둘러싼 권력쟁탈전이 치열했는데, 여기서 패한 자는 중앙에 있지 못하고 지방의 연고지로 퇴거했으며, 이때 그들의 신분이 강등될 소지를 가졌다.

 

3. 문왕 제도 폐지

갈문왕(葛文王)은 삼국시대, 신라에서 왕의 근친에게 사용하던 왕호이다. 상고기에는 상당한 정치적 실권과 위상을 가지고 국정 운영에서 주도적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보이지만,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역할과 위상이 축소되었고, 결국 신라 중대 이후 사라졌다.(무열왕 때 폐지)

 

마립간 시기에 김씨 왕실 중 눌지계와 복호계가 각각 ‘탁부’의 매금왕과 ‘사탁부’의 갈문왕 자리를 차지하면서 국정 운영을 주도하였다. 탁부와 사탁부가 다른 부를 압도하는 양상이 나타나면서 6부의 연합체적 성격은 점차 약화되었다. 이 시기에 갈문왕 신라 왕의 정치적 파트너라는 성격은 유지하였지만, 다른 부 혹은 다른 성씨 왕실의 유력자는 아니게 된 것이다. 그렇기에 이 시기에 지증왕과 같이 왕위 계승도 가능해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독자성이 강한 6부 연합체적 단계에 비해, 그 정치적 실권과 영향력은 점차 약화되어 갔을 것이다.

중고기에 들어서 6부 체제가 해체되고 국왕을 중심으로 한 중앙지배체제가 구축되면서, 갈문왕의 정치적 위상이 하락하고 역할도 점차 축소되었다. 대신 법흥왕 대에 신설된 상대등(上大等)이 귀족회의의 수장으로서 왕을 보좌하면서 국정을 이끌어간 것으로 여겨진다. 갈문왕은 왕에 버금가는 최고 지위의 소유자로는 인식되었지만 정치적 실권에서는 점차 멀어져 갔다. 그러한 추세는 중대 이후 유교적 왕자관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으면서 더욱 굳어진 듯하다.

 

4. 사정부 설치

사정부는 백관(百官)을 감찰하는 업무를 관장하였다. 659년(태종무열왕 6)에 설치되었다. 백관을 감찰하는 기능을 가진 관서는 544년(진흥왕 5) 경(卿)이 설치되면서부터 있어 왔지만 그것이 사정부로 격상된 것은 659년이었다. 이는 이 시대에 감찰업무의 중요성이 커진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사정부는 경덕왕대에 숙정대(肅正臺)로 개칭되었다가 혜공왕대에 다시 사정부로 복구되었다. 관원으로는 영(令)·경(卿)·좌(佐)·대사(大舍)·사(史)가 있었다. 장관인 영은 659년에 설치되었으며, 대아찬에서 각간의 관등에 있는 자가 임명되었다. 정원은 1인이다.

 

차관인 경은 554년에 설치되어 사정부가 설치되기까지 사정담당의 최고관직이었다. 정원은 1인이었다가 675년(문무왕 15) 2인이 되었다. 좌는 처음에는 승(承)이라 하였으나 737년(효성왕 1) 왕의 이름 승경(承慶)을 피하여 좌로 개칭되었다. 그뒤 경덕왕 때 평사(評事)로 개칭되었다가 혜공왕대에 좌로 복구되었다. 나마(奈麻)에서 대나마(大奈麻)의 관등에 있는 자가 임명되었으며 정원은 2인이었다. 대사는 설치연대가 미상이며 759년(경덕왕 18) 주부(主簿)로 개칭되었다가 혜공왕대에 복구되었다. 사지(舍知)에서 나마의 관등에 있는 자가 임명되었으며 정원은 2인이었다. 사는 설치연대가 미상이며 정원은 처음에는 10인이었으나 675년 15인으로 증원되었다.

 

5. 국식 시호 : 태종 무열왕

묘호로는 종(宗)과 조(祖)의 두 가지를 썼다. 신라시대는 오직 무열왕이 태종이란 묘호를 가졌고, 고려시대는  태조만이 조자(祖字)의 묘호를 가졌으며, 그밖의 모든 왕은 종자의 묘호를 가졌다. 조선조에 있어서는 태조외 세조 선조 인조 영조 정조 순조 등 조자 묘호가 많다. 조나 종을 쓰는 데는 꼭 일정한 원칙이 있었던 것은 아니나, 대체로 조는 나라를 처음 일으킨 왕이나 국통(國統), 즉 나라의 정통이 중단되었던 것을 다시 일으킨 왕에게 쓰고, 종은 왕위를 정통으로 계승한 왕에게 붙였다. 이와 같이 조가 창업이나 중흥의 공업(功業)을 남긴 왕에게 붙인다는 원칙 때문에, 은연중 종보다 조가 격이 더 높다는 관념을 낳게 하였다. 조선조에 있어서 조의 묘호가 많은 까닭도 이러한 관념에 기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6. 제멸망(660)

659년에는 백제가 자주 신라의 변경지방을 침범하므로 당나라의 군사를 청해 660년부터 본격적인 백제정벌을 추진하였다. 3월에 소정방을 비롯한 수륙(水陸) 13만명이 백제를 공격하여, 5월에 왕은 태자 법민과 유신 · 진주(眞珠) · 천존(天存) 등과 더불어 친히 정병(精兵) 5만명을 이끌고 당군의 백제공격을 응원하였다. 7월에는 김유신이 황산벌전투에서 계백(階伯)이 이끄는 5,000명의 백제군을 격파하고 당군과 연합해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을 함락시켰다. 이어서 웅진성(熊津城)으로 피난했던 의자왕과 왕자 부여 융(扶餘隆)의 항복을 받음으로써 마침내 백제를 멸망시킬 수 있었다. 이는 신라의 숙원이던 백제를 병합함으로써 반도통일(半島統一)의 계기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진다.

 

사비성 함락 후, 9월에 당나라는 유인원(劉仁願)의 1만명과 김인태의 7,000명의 군대로 하여금 머물러 지키게 하였다. 10월에 태종무열왕은 친히 백제지역에서 아직 정복되지 않은 이례성(尒禮城 : 지금의 충청남도 論山) 등 20여 성의 항복을 받았다. 11월에 백제로부터 귀환해 백제정벌에서 전사한 자들과 전공을 세운 자들에게 상을 차등있게 내려주었다. 그리고 항복해온 백제의 관료들에게도 능력에 따라 신라의 관등을 주어 관직에 보임하는 회유책을 쓰기도 하였다. 신라가 백제를 정벌하는 동안 고구려는 660년에 신라의 칠중성을 공격해왔다. 661년에는 고구려 장군 뇌음신이 말갈군과 연합해 술천성을 공격하고 다시 북한산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성주인 대사(大舍) 동타천이 효과적으로 방어했으므로 대나마로 관등을 높여주었다. 이 해에 압독주를 대야(大耶 : 지금의 경상남도 陜川)로 다시 옮기고 아찬 종정을 도독에 임명함으로써 정복된 백제지역의 관리에 적극성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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