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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두문자

문무왕 : 문 통 임 안 부 화 의 효

by noksan2023 2023. 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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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
문무왕

 

문무왕 : 문 통 임 안 부 화 의 효

 

문 : 무왕 김범민

통 : 일 완성

임 : 해전(통일 궁궐)

안 : 압지

부 : 석사(676 의상)

화 : 장(대왕암)

의 : 

효 : 원

 

웅 : 진도독부 

계 : 림도독부

안 : 동도호부

소 : 부리주 설치

천 : 성 전투

매 : 소성 전투

기 : 벌포 전투

통 : 삼국

 

 

문무왕 : 삼국통일 완성
문무왕 : 삼국통일 완성

 

1. 무왕(661~681)

문무왕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제30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661~681년이며 태종무열왕의 원자이자 김유신의 누이인 문명왕후의 아들이다. 즉위 전부터 외교활동과 백제와의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즉위 초에는 백제 부흥세력 소탕에 주력했고 666년에는 당과 연합 고구려를 멸망(668)시켰다. 이후 삼국 전체를 자국 영토로 삼으려는 당의 노골적인 대규모 침공을 물리치고 삼국통일을 완수했다. 5소경제와 군사조직인 9서당의 단초를 마련하여 확장된 영역의 통치를 위한 기반을 다졌다. 감포 앞바다의 해중왕릉인 대왕암이 그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2. 삼국 일 완성

법민은 영특하고 총명해 지략(智略)이 많았다.진덕여왕 때 고구려와 백제의 압력에 대항하기 위해 당(唐)나라까지 가서 외교 활동을 하였다. 부왕 태종무열왕 때 파진찬으로서 병부령을 역임했으며 얼마 뒤 태자로 책봉되었다. 660년(태종무열왕 7) 태종무열왕과 당나라의 소정방(蘇定方)이 연합해 백제를 정벌할 때 법민도 종군해 큰 공을 세웠다. 661년 태종무열왕이 삼국을 미처 통일하지 못하고 죽자 법민이 왕위를 계승해 삼국통일의 과업을 완수하였다. 그러므로 문무왕이 재위한 21년 동안은 거의 백제 부흥군, 고구려 그리고 당나라와의 전쟁의 연속이었다.

 

문무왕은 즉위하던 해인 661년에 옹산성과 우술성에 웅거하던 백제 잔적(殘賊)을 공격해 항복을 받고 그 곳에 웅현성(熊峴城)을 축조하였다. 그리고 663년(문무왕 3) 백제의 거열성 · 거물성 · 사평성 · 덕안성(德安城)의 백제 잔적을 정벌하였다. 이 때 각지에서 일어난 백제 부흥군의 중심 인물은 백제의 옛 장군인 복신과 승려인 도침이었다. 이들은 일본에 가 있던 왕자 부여풍을 왕으로 추대하고 주류성에 근거를 두고 웅진성(熊津城)을 공격해 신라와 당나라의 주둔군을 괴롭혔다. 이에 문무왕은 김유신 등 28명의 장군과 함께 당나라에서 파견되어 온 손인사(孫仁師)의 증원병과 연합해 부흥군의 본거지인 주류성을 비롯해 여러 성을 함락하였다. 이어 지수신이 끝까지 항거하던 임존성마저 정복함으로써 백제 부흥 운동을 종식시켰다. 그리고 665년 백제 왕자였으며 당나라의 지원을 받던 웅진도독(熊津都督) 부여융과 화맹을 맺었다.

 

 당나라와 연합해 고구려를 정벌하는 데에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즉위하던 해 당나라가 소정방으로 하여금 고구려를 침공하게 하는 한편, 김유신을 비롯한 김인문 · 진주 등의 장군을 이끌고 당군의 고구려 공격에 호응하였다. 대동강을 통해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던 소정방의 당군이 연개소문의 굳센 항전으로 고전하자, 662년 김유신을 비롯한 9명의 장군으로 하여금 당군에게 군량까지 보급하게 했으나 소정방은 물러가고 말았다. 문무왕은 666년 다시 고구려를 정벌하고자 한림 삼광을 당나라에 보내 군사를 청해 667년 이세적이 이끄는 당군과 연합해 평양성을 공격하려 했으나 미수에 그치고, 668년부터 본격적으로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당군이 신성 부여성 등 여러 성을 차례로 공격해 쳐부수고 압록강을 건너 평양성을 포위, 공격하자 문무왕도 6월 김유신 · 김인문 · 김흠순 등이 이끄는 신라군을 당나라 진영에 파견해 당군과 함께 평양성을 공격하였다. 이리하여 9월 보장왕으로부터 항복을 받았다. 문무왕은 고구려 멸망에 공을 세운 여러 장사(將士)에게 논공행상을 하고, 11월 백제와 고구려의 평정을 선조 묘에 고하였다. 당나라는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점령지의 지배를 위해 평양의 안동도호부를 중심으로 9도독부, 42주, 100현을 두고 통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행정적 조처는 고구려 유민(遺民)의 항쟁으로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였다. 고구려의 부흥 운동 중에서도 특히 수림성(水臨城) 사람으로 대형인 검모잠의 활동이 가장 두드러졌는데, 그는 보장왕의 서자인 안승을 왕으로 맞이해 부흥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670년 안승은 검모잠을 죽인 다음 4,000호를 이끌고 신라로 망명하였다. 문무왕은 그를 금마저(金馬渚)에 머무르게 하고, 고구려왕(高句麗王)에 봉하였다. 이로써 고구려의 부흥 운동도 점차 세력이 약화되어 좌절하고 말았다.

 

3. 해전

임해전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의 안압지 서쪽에 있었던 궁궐건물이다. 임해전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서 『삼국사기』 효소왕 6년(697)조는 “임해전에서 군신(群臣)에게 연회를 베풀었다.”고 하였다. 『동경잡기』에 의하면, “안압지 서쪽에 임해전이 있는데 언제 창건되었는지 알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이 기록을 토대로 할 때 안압지와 임해전이 비슷한 시기에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즉, 안압지는 674년(문무왕 14)에 축조되었으므로, 적어도 그 전후한 시기에 임해전도 건립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안압지, 곧 월지(月池)가 있던 궁성은 태자가 거처하던 동궁(東宮)이 된다. 673년에 문무왕의 아우인 김인문(金仁問)이 임해군공(臨海郡公)의 작호를 지녔던 점을 생각할 때, 임해전은 곧 김인문의 처소이거나 본디 그와 관련된 건물이 아닌가 짐작된다. 왜냐 하면, 임해전이라는 동궁의 궁전 이름이 ‘임해군공’의 ‘임해’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임해전 역시 안압지가 축조된 674년을 전후한 어느 시기에 세워진 것이 분명하다.

 

임해전은 백제 의자왕 때 세워진 망해정(望海亭, 혹은 望海樓)에서 착상을 얻어 건립되었다고 한다. 그 성격은 임해전 앞에 있던 안압지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안압지에는 무산(巫山) 12봉(峯)을 본떠서 돌을 쌓아 산을 만들었다고 한다. 실제로 발굴결과 안압지에는 세 섬이 확인되었는데, 이는 곧 삼신산(三神山)을 상징한다. 삼신산은 신선이 살고 있다고 전하는 중국 바다의 봉래산(蓬萊山)·방장산(方丈山)·영주산(瀛州山)의 3산으로, 안압지가 단순한 못이 아니라 바다로 상징되었다는 증거가 된다. 이와 같이 안압지를 끼고 있는 임해전은 나라에 경사스런 일이 있을 때나 귀한 손님들이 왔을 때 군신들의 연회 및 귀빈의 접대장소로 이용되었다. 769년(혜공왕 5) 3월 이곳에서 왕이 베푼 연회가 있었고, 860년(헌안왕 4) 3월에는 경문왕(응렴)이 화랑으로 활동할 때 헌안왕이 이곳에서 베푼 잔치에 참석했다가 사위로 택해지기도 하였다. 

 

또, 881년(헌강왕 7) 3월에는 왕이 여러 신하들을 모아 향연을 베풀고서 흥에 겨워 직접 거문고를 탔고, 신하들은 노래를 부르며 즐겁게 놀았다고 한다. 신라가 망하기 직전인 931년(경순왕 5) 2월에는 경주를 방문한 고려태조를 이곳에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기도 하였다. 한편, 임해전은 867년(경문왕 7) 1월에 중수되었다. 이는 경문왕이 자신의 왕위에 도전하는 세력들의 반란을 진압한 뒤,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과시하기 위한 왕권강화책의 일환으로 행해진 것이라 하겠다. 1970년대 중반에 발굴조사된 유적은 이 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4. 압지

안압지는 《삼국사기》 문무왕 14년 2월조에 의하면 “궁 안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고 진기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고 하여 삼국통일을 전후로 조성하기 시작하여 674년(문무왕 14)에 완성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안압지라는 명칭이 기록에 나타나기는 《동국여지승람》·《동경잡기 東京雜記》 등에서부터이므로 당시의 못 이름이나 동궁의 위치 등에 의문이 남아 있다. 《동국여지승람》에서는 안압지라는 이름을 기록하고, “문무왕이 궁궐 안에 못을 파고 돌을 쌓아 산을 만들었으니 무산십이봉(巫山十二峰)을 본떴으며…….” 라고 하여 그 조성이 신선사상과 연관되어 있음을 시사해주고 있다.

 

1975년 3월부터 1986년 12월까지 연못과 주변 건물지의 발굴조사가 있었는데, 이 때 석축호안(石築護岸)으로 둘러싸인 연못과 3개의 섬, 그리고 연못 서쪽의 호안변에서 5개의 건물지와 서쪽·남쪽으로 연결되는 건물지들이 밝혀졌다. 석축호안의 남안은 거의 직선을 이루고 서안은 가공된 장대석축의 기단형 방형지(方形址)가 그 일부를 못 쪽으로 돌출시켜 5개의 건물지를 이루었으며, 동·북안은 굴곡이 심한 곡선을 이루고 있었다.

동남쪽 모서리에서는 수로(水路)와 입수구(入水溝)의 시설이, 북쪽 호안에서는 출수구(出水溝)의 시설이 확인되었다. 호안석축의 길이는 1,005m로 전체면적은 1만5658㎡, 제일 큰 섬은 1,094㎡, 중간 섬은 596㎡, 제일 작은 섬은 62㎡이다.또한, 연못 안팎에서 출토된 완형 유물만도 1만5023점에 달한다. 가장 많이 출토된 와전류(瓦塼類) 중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형태의 특수기와와 “調露二年漢只伐君若小舍……三月三日作……(조로2년한지벌군약소사······3월3일작)”이라는 기년명(紀年銘)이 있는 보상화문전(寶相華文塼)이 발견되어 문헌의 기록과 일치함을 확인하였을 뿐만 아니라, 신라 와전류 문양편년(文樣編年)에 결정적인 자료를 제공해주었다. 토기류로는 신라시대의 생활용구들이 출토되었으며, 금동불상을 비롯한 금동제품과 당시 건축양식의 단편이나마 살필 수 있는 목조건물의 부재 및 장신구·주사위·목선(木船)·양물(陽物)·목간(木簡) 등도 출토되어 주목된다.

 

《삼국사기》에는 임해전(臨海殿)에 대한 마지막 기록으로 신라의 국운이 이미 기울어진 때인 931년(경순왕 5)에 왕이 고려태조를 맞아 연회를 베풀었다고 하였는데, 출토유물의 시대로 미루어 보아도 10세기경까지는 왕실의 비호를 받으면서 존속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통일신라시대의 원지(苑池)의 원형을 보여 주는 귀중한 유적이다.

 

5. 석사(676 의상)

부석사 676년(문무왕 16) 2월에 의상(義湘)이 왕명으로 창건한 뒤 화엄종(華嚴宗)의 중심 사찰로 삼았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이 절의 창건설화가 수록되어 있다. 당나라로 불교를 배우기 위하여 신라를 떠난 의상은 상선(商船)을 타고 등주(登州) 해안에 도착하였는데, 그곳에서 어느 신도의 집에 며칠을 머무르게 되었다. 그 집의 딸 선묘(善妙)는 의상을 사모하여 결혼을 청하였으나, 의상은 오히려 선묘를 감화시켜 보리심(菩提心)을 발하게 하였다. 선묘는 그때 “영원히 스님의 제자가 되어 스님의 공부와 교화와 불사(佛事)를 성취하는 데 도움이 되어드리겠다.”는 원을 세웠다. 의상은 종남산(終南山)에 있는 지엄(智儼)을 찾아가서 화엄학을 공부하였다. 그 뒤 귀국하는 길에 의상은 다시 선묘의 집을 찾아 그 동안 베풀어준 편의에 감사를 표하고 뱃길이 바빠 곧바로 배에 올랐다. 선묘는 의상에게 전하고자 준비해 두었던 법복(法服)과 집기(什器) 등을 넣은 상자를 전하기도 전에 의상이 떠나버렸으므로, 급히 상자를 가지고 선창으로 달려갔으나 배는 이미 떠나가고 있었다. 선묘는 의상에게 공양하려는 지극한 정성으로 저만큼 떠나가는 배를 향해 기물상자를 던져 의상에게 전하고는, 다시 서원(誓願)을 세워 몸을 바다에 던져 의상이 탄 배를 보호하는 용이 되었다. 용으로 변한 선묘는 의상이 신라에 도착한 뒤에도 줄곧 옹호하고 다녔다. 의상이 화엄의 대교(大敎)를 펼 수 있는 땅을 찾아 봉황산에 이르렀으나 도둑의 무리 500명이 그 땅에 살고 있었다. 용은 커다란 바위로 변하여 공중에 떠서 도둑의 무리를 위협함으로써 그들을 모두 몰아내고 절을 창건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의상은 용이 바위로 변하여서 절을 지을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해서 절 이름을 부석사로 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부석사의 무량수전(無量壽殿) 뒤에는 부석(浮石)이라는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가 선묘용이 변화했던 바위라고 전한다.

 

창건 후 의상은 이 절에서 40일 동안의 법회를 열고 화엄의 일승십지(一乘十地)에 대하여 설법함으로써 이 땅에 화엄종을 정식으로 펼치게 되었다. 특히, 의상의 존호를 부석존자(浮石尊者)라고 칭하고 의상의 화엄종을 부석종(浮石宗)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모두 이 절과의 연관에서 생겨났다. 의상 이후의 신라 고승들 가운데 혜철(惠哲)이 이 절에서 출가하여 『화엄경』을 배우고 뒤에 동리산파(桐裏山派)를 세웠고, 무염(無染) 또한 이 절에서 석징(釋澄)으로부터 『화엄경』을 배웠으며, 절중(折中)도 이 절에서 장경(藏經)을 열람하여 깊은 뜻을 깨우쳤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이 절을 선달사(善達寺) 또는 흥교사(興敎寺)라고 하였는데, 선달이란 선돌의 음역으로서 부석(浮石)의 향음(鄕音)이 아닐까 하는 견해도 있다.

 

또, 고려 정종 때의 결응(決凝)은 이 절에 머무르면서 대장경을 인사(印寫)하고, 절을 크게 중창한 뒤 1053년(문종 7)에 이 절에서 입적하였다. 1372년(공민왕 21)에는 원응국사(圓應國師)가 이 절의 주지로 임명되어 퇴락한 당우를 보수하고 많은 건물들을 다시 세웠다. 그 뒤 조선시대의 역사는 자세히 전하지 않으나 1580년(선조 13)에 사명당(泗溟堂)이 중건하였으며, 1746년(영조 22)에 화재로 인하여 추승당(秋僧堂)·만월당(滿月堂)·서별실(西別室)·만세루(萬歲樓)·범종각 등이 소실된 것을 그 뒤에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1962년 국보로 지정된 부석사 무량수전과 부석사 조사당을 비롯하여, 조선시대 후기의 건물인 범종루(梵鐘樓)·원각전(圓覺殿)·안양루(安養樓)·선묘각(善妙閣)·응진전(應眞殿)·자인당(慈忍堂)·좌우요사(左右寮舍)·취현암(醉玄庵) 성보전시관 등이 있다. 이들 가운데 범종루와 안양루는 대표적인 누각이고, 원각전·응진전·자인당은 법당이며, 선묘각은 부석사의 창건연기와 인연이 있는 선묘의 영정을 봉안하여둔 곳이다. 범종루는 사찰의 중문(中門)에 해당하며, 본전을 향하는 입구 쪽에서는 팔작지붕을 하고 반대방향은 맞배지붕이므로 일반 사찰건축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특이성을 보이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4칸의 2층 누각으로서, 누각에는 ‘鳳凰山浮石寺(봉황산부석사)’라는 편액이 있을 뿐 범종은 없다. 안양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집으로서, 누각 안에는 부석사의 현판기문을 모아두었는데, 그 안에는 사명당이 쓴 「안양루중창기」가 있다. 또, 취현암은 원래 조사당 옆에 있었던 부석사의 선원(禪院)이었으나, 일제강점기에 이전되어 현재는 주지실과 종무소(宗務所)로 사용되고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1962년 국보로 지정된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석등 영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 영주 부석사 조사당벽화, 1963년 보물로 지정된 영주 부석사 삼층석탑과 영주 부석사 당간지주, 1982년 보물로 지정된 영주 부석사 고려목판, 1979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영주 부석사 원융국사비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원융국사비는 절의 동쪽 500m 지점에 위치하며 1054년에 건립한 것이다. 그 외에 삼층석탑 두기와 동쪽 언덕에는 1기의 고려 말 부도를 포함한 10여 기의 부도가 있다. 이 밖에도 이 절에는 석룡(石龍)을 비롯하여 대석단(大石壇)·선묘정(善妙井)·녹유전(綠釉塼)·선비화(禪扉花)·석조(石槽)·맷돌 등이 있다. 석룡은 절의 창건과 관련된 것으로 현재 무량수전 밑에 묻혀 있는데, 머리 부분은 아미타불상 바로 밑에서부터 시작되며, 꼬리 부분은 석등 아래에 묻혀 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 이 절을 개수할 때 이 거대한 석룡의 일부가 묻혀 있는 것이 발견되었으며, 자연적인 용의 비늘 모습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선묘정은 절의 동쪽에 있는데, 가뭄이 있을 때는 기우제를 드렸다고 한다. 대석단은 신라시대에 축조한 것으로 절의 입구에 있다. 거대한 축석(築石)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크고 작은 면석(面石)을 섞어 쌓은 것이 특징이다. 이 석단은 3단으로서 극락세계의 구품연화대(九品蓮花臺)를 상징한다는 설이 있으나 명확한 근거는 없다. 무량수전 앞에 안양루를 오르는 석단이 2단으로 조성되었으므로, 대석단과 합하여 상·중·하의 셋으로 보는 가람 경영방법의 하나로 볼 수도 있다. 녹유전은 가로와 세로가 14㎝의 정방형 기와로서 두께는 7㎝이며, 벽돌 표면에 0.3㎜ 정도의 녹유를 발라 광택을 내게 한 신라시대의 유품이다. 이것은 『아미타경』에 극락세계의 땅이 유리로 되어 있다고 한 것에 입각하여 무량수전의 바닥에 깔았던 것이다. 선비화는 의상이 사용했던 지팡이를 꽂아 놓았더니 살아난 것이라 하는데, 『택리지(擇里志)』에 의하면 의상이 죽을 때 “내가 여기를 떠난 뒤 이 지팡이에서 반드시 가지와 잎이 날 것이다. 이 나무가 말라죽지 않으면 내가 죽지 않으리라.” 하였다는 기록이 전한다.

 

 

문무대왕 수중릉
문무대왕 수중릉

 

6. 장(대왕암)

경주 문무대왕릉(慶州 文武大王陵)은 경상북도 경주시 문무대왕면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제30대 문무왕의 능이다. 문무왕의 유언에 따라 동해에 장례를 지냈다. 그의 유언은 불교 법식에 따라 화장한 뒤 동해에 묻으면, 이 되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화장한 유골을 동해의 입구에 있는 큰 바위 위에 장사 지냈다. 사방으로 마련된 수로와 아울러 안쪽의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바위를 인위적으로 파낸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기록에 나타난 것처럼 문무왕의 수중릉일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문무대왕릉은 해변에서 가까운 바다 가운데 있는 그다지 크지 않은 자연 바위이다. 남쪽으로 보다 작은 바위가 이어져 있으며, 둘레에는 썰물일 때만 보이는 작은 바위들이 간격을 두고 배치되어 있어 마치 호석주1처럼 보인다. 대왕암에 올라보면 마치 동서남북 사방으로 바닷물이 들어오고 나가는 수로(水路)를 마련한 것처럼 되어 있다. 특히, 동쪽으로 나 있는 수로는 파도를 따라 들어오는 바닷물이 외부에 부딪쳐 수로를 따라 들어오고 나감으로써 큰 파도가 쳐도 안쪽의 공간에는 바다 수면이 항상 잔잔하게 유지되게 되어 있다. 이 안쪽의 공간은 비교적 넓은 수면이 차지하고 있고, 그 가운데는 남북으로 길게 놓인 넓적하고도 큰 돌이 놓여 있다. 수면은 이 돌을 약간 덮을 정도로 유지되고 있다.

 

따라서 문무왕의 유골을 이 돌 밑에 어떤 장치를 해서 보관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수중 발굴 조사가 실시되지 않아 이 널돌처럼 생긴 돌 밑에 어떠한 시설이 마련되어 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사방으로 마련된 수로와 아울러 안쪽의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바위를 인위적으로 파낸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기록에 나타난 것처럼 문무왕의 수중릉일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더구나 바위의 안쪽에 마련된 공간에 사방으로 수로가 마련되어 있는 것은 부처의 사리(舍利)를 보관한 탑의 형식에 비유되고 있다. 즉, 내부로 들어갈 수 있도록 사방에 문이 마련되어 있는 인도의 산치탑의 경우나 백제 무왕 때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익산 미륵사지 석탑 하부의 사방에 통로를 마련한 것과 같은 불탑의 형식이 적용되어 사방에 수로를 마련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왕릉이 내려다보이는 서북쪽 산 능선 아래에는 아들 신문왕이 창건한 감은사 터가 자리하고 있다.

 

7. 의

의상은 삼국시대 화엄종의 개조이자 화엄십찰의 건립자인 승려이다. 625년(진평왕 47)에 태어나 702년(성덕왕 1)에 사망했다. 19세 때 경주 황복사로 출가했다. 661년(문무왕 1) 당에 유학하여 중국 화엄종의 제2조로서 화엄학의 기초를 다진 지엄에게서 8년간 화엄을 공부했다. 신라로 돌아온 해에 낙산사의 관음굴에서 관세음보살에게 기도를 드렸는데, 이때의 발원문인 『백화도량발원문』은 그의 관음신앙을 알게 해주는 261자의 간결한 명문이다. 부석사를 비롯한 화엄십찰을 전국에 세웠고 화엄경을 강론하며 3000명의 제자를 길러냈다.

 

 676년(문무왕 16) 부석사(浮石寺)를 세우기까지 화엄사상을 펼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서 전국을 편력하였다. 그가 건립한 사찰은 부석사를 비롯하여 중악팔공산 미리사(美里寺), 남악지리산 화엄사(華嚴寺), 강주가야산 해인사(海印寺), 웅주 가야현보원사(普願寺), 계룡산 갑사(甲寺), 삭주화산사(華山寺), 금정산 범어사(梵魚寺), 비슬산 옥천사(玉泉寺), 전주모악산 국신사(國神寺) 등 화엄십찰(華嚴十刹)이다. 이밖에도 불영사(佛影寺), 삼막사(三幕寺), 초암사(草庵寺), 홍련암(紅蓮庵) 등을 창건한 것으로 전한다. 그에게는 3,000명의 제자가 있었는데, 오진(悟眞), 지통(智通), 표훈(表訓), 진정(眞定), 진장(眞藏), 도융(道融), 양원(良圓), 상원(相源), 능인(能仁), 의적(義寂) 등 10명이 아성(亞聖)으로 불렸으며, 범체(梵體)나 도신(道身) 등도 뛰어난 제자들이다.

 

그는 황복사에서 『화엄일승법계도』를 가르쳤고, 부석사에서 40일간의 법회를 열고 일승십지(一乘十地)에 대하여 문답하였으며, 소백산 추동(錐洞)에서 『화엄경』을 90일 간 강의하였다. 지통의 『추동기(錐洞記)』, 도신의 『도신장(道身章)』 등은 그의 강의를 기록한 문헌들이고, 표훈의 『오관석(五觀釋)』과 진정의 『삼문석(三門釋)』은 그로부터 『화엄일승법계도』를 배우고 지은 것이다. 그는 강의와 수행에 전력했으며 의정(義淨)의 세예법(洗穢法)을 실행하여 수건을 쓰지 않았고 의복·병(甁)·발우, 세 가지만 지녔다. 문무왕이 장전(莊田)과 노복(奴僕)을 베풀자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문무왕이 성곽을 쌓으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왕의 정교(政敎)를 밝히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글을 올려 역사(役事)를 중지시켰다.

 

저술로는 『십문간법관(十門看法觀)』 1권, 『입법계품초기(入法界品鈔記)』 1권, 『소아미타의기(小阿彌陀義記)』 1권, 『화엄일승법계도』 1권, 『백화도량발원문』 1권 및 최근 발견된 『일승발원문(一乘發願文)』 등이 있다.

 

8. 원

원효는 『대혜도경종요』, 『금강반야경소』, 『화엄경소』 등을 저술한 삼국시대 신라의 승려이다. 617년(진평왕 39)에 태어나 686년(신문왕 6)에 사망했다. 타고난 총명함으로 폭넓게 독학하여 한국불교사에 길이 남는 최대의 학자이자 사상가가 되었다. 의상과 함께 당나라 유학을 시도하다가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포기했다. 요석공주와의 사이에 설총을 낳았고 이후 거침없는 삶을 살았다. 많은 저술을 남긴 학승으로서만이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 부처의 가르침을 설파한 민중교화승으로도 중요하며, 종파주의적 풍조를 혁파하는 화쟁사상을 주장했다.

 

(1) 일심사상

원효의 일심사상은 그의 저서 ≪금강삼매경론≫·≪대승기신론소≫ 등 그의 모든 저술에서 철저하게 천명되고 있다. 인간의 심식(心識)을 깊이 통찰하여 본각(本覺)으로 돌아가는 것, 즉 귀일심원(歸一心源:일심의 원천으로 돌아가는 것)을 궁극의 목표로 설정하고 육바라밀(六波羅蜜)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만법귀일(萬法歸一)·만행귀진(萬行歸眞)을 굳게 믿고 사상과 생활을 이끌어갔다. 그리고 일심이야말로 만물의 주추(主樞)이며, 일심의 세계를 불국토(佛國土) 극락으로 보았고, 이것을 대승·불성(佛性)·열반이라고 불렀다.

 

(2) 화쟁사상

원효는 어느 한 종파에 치우치지 않고 ≪화엄경≫·≪반야경≫·≪열반경≫·≪해심밀경 海深密經≫·≪아미타경≫ 등 대승불교 경전 전체를 섭렵하고 통효(通曉)한 사람이다. 그리하여 전체 불교를 하나의 진리에 귀납하고 종합 정리하여 자기 분열이 없는 보다 높은 입장에서 불교의 사상체계를 세웠다. 이러한 그의 조화사상을 화쟁사상이라고 한다. ≪십문화쟁론 十門和諍論≫은 바로 이러한 화쟁사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그의 핵심적인 저술이다. 그는 여러 이설(異說)을 십문으로 모아 정리하고 회통함으로써 일승불교(一乘佛敎)의 건설을 위한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였다. 그의 이와 같은 통불교적 귀일사상은 한국불교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화쟁의 논리는 다음과 같이 전개된다. “쟁론(諍論)은 집착에서 생긴다. 어떤 이견(異見)의 논쟁이 생겼을 때, 가령 유견(有見)은 공견(空見)과 다르고 공집(空執)은 유집(有執)과 다르다고 주장할 때 논쟁은 더욱 짙어진다. 그렇다고 하여 이들을 같다고만 하면 자기 속에서 서로 쟁(諍)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異)도 아니요 동(同)도 아니라고 설한다.” 또 “불도(佛道)는 광탕(廣蕩)하여 무애무방(無㝵無方)하다. 그러므로 해당하지 않음이 없으며, 일체의 타의(他義)가 모두 불의(佛義)이다. 백가(百家)의 설이 옳지 않음이 없고 팔만법문(八萬法門)이 모두 이치에 맞는 것이다. 그런데 견문이 적은 사람은 좁은 소견으로 자기의 견해에 찬동하는 자는 옳고 견해를 달리하는 자는 그르다 하니, 이것은 마치 갈대구멍으로 하늘을 본 사람이 그 갈대구멍으로 하늘을 보지 않은 사람들을 보고 모두 하늘을 보지 못한 자라 함과 같다.”라고 하였다. 원효는 이처럼 철저한 논리의 근거를 가지고 화쟁을 주장하였다.

 

(3) 무애사상

원효의 무애사상은 그의 사생활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그는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철저한 자유인이었다. “일체에 걸림이 없는 사람은 단번에 생사를 벗어난다(一切無㝵人 一道出生死).”라고 한 그의 말을 보더라도 그의 무애사상은 짐작된다. 그는 부처와 중생을 둘로 보지 않았으며, 오히려 “무릇 중생의 마음은 원융하여 걸림이 없는 것이니, 태연하기가 허공과 같고 잠잠하기가 오히려 바다와 같으므로 평등하여 차별상(差別相)이 없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철저한 자유가 중생심(衆生心)에 내재되어 있다고 보았고, 스스로도 철저한 자유인이 될 수 있었으며, 그 어느 종파에도 치우치지 않고 보다 높은 차원에서 일승과 일심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 밖에도 원효는 여래장사상 등 불교의 모든 사상에 대하여서도 독자적인 사상체계를 확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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