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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두문자

진평왕 두문자 : 평 복 위 조 예 승 영 걸 광 오

by noksan2023 2023. 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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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26대 진평왕
신라 26대 진평왕

 

진평왕 : 평 복 위 조 예 승 영 걸 광 오

 

평 : 진왕(579~632)

복 : 연호 사용 건

위 : 화부(인사)

조 : 부(공납)

예 : 부(의례)

승 : 부(육상교통)

영 : 객부(사신접대)

걸 : 수나라 사표(608 고구려 공격 요구)

광 : 원법사

오 : 세속

진 : 종설(왕이 진실로 부처다)

남 : 산신성비(촌주 노동력 동원)

임 : 신서기석(화랑 맹세 유학발달 증거)

 

 

진평왕의 가계도
진평왕의 가계도

 

1. 진왕(579~632)

진평왕은 삼국시대 신라의 제26대(재위: 579~632) 왕이다. 진흥왕의 영토 확장을 토대로 관제 정비 등 지배체제 구축과 정비에 힘썼다. 특히, 초기에는 군사·재정·관리·인사 관련 관서를 주로 정비하였고, 후기에는 관원을 확대하는 데 주력하였다. 중국 수나라와 조공을 통한 외교관계를 수립(걸사표)하여 중국 문물과 제도를 신라에 반영하는 계기를 마련하였고, 석가불 신앙을 내세우면서 입당 구법승을 적극적으로 파견하여 불교사상을 통해서도 왕실의 권위를 강화하려고 하였다. 고구려·백제와 치열한 영역 다툼을 벌이기도 하였다.

 

진평왕(眞平王)의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백정(白淨)이다. 중국에서는 김진평(金眞平)이라고 불렀다. 아버지는 진흥왕의 태자인 동륜이며, 어머니는 입종갈문왕의 딸인 만호부인이다. 왕비는 김씨로서 복승갈문왕의 딸인 마야부인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얼굴이 기이하고 몸이 매우 컸으며, 의지가 깊고 식견이 명철하였다. 작은 아버지인 진지왕이 화백회의에 의해 폐위되자 국인(國人)의 추대로 즉위하였다.

 

2. 연호 사용 건

584년에 건복(建福)이라고 개원하여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대외적으로 자주성을 천명하였다. 한편, 581년에 건국하여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의 분열기를 극복하고 589년에 통일 왕조로 등장한 중국 수나라와 조공을 통한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3. 화부    객부 설치

진흥왕이 주도한 영토 확장을 뒤이어 왕권의 위상을 강조하는 데 힘썼다. 특히, 관제(官制) 정비에 진력하였다. 즉위하던 해(579) 8월에 이찬 노리부 상대등(上大等)에 임명해 일체의 국정을 맡겼다. 580년(진평왕 2)에는 지증왕의 증손인 이찬 후직(后稷) 병부령에 임명해 군사권을 장악하게 하였다. 진평왕은 이 두 사람의 도움을 받으면서 관제의 정비와 적극적인 외교정책을 실시함으로써 독자적인 왕권을 수립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581년에 관리의 인사를 담당하는 위화부(位和府)를 설치하였으며, 583년에는 선박을 관리하는 선부서(船府署)를 설치하고, 대감과 제감을 각각 1인씩 두었다. 584년에는 국가의 공부(貢賦 세금)를 관장하는 조부(조調府)를 설치하고 조부령(調府令) 1인을 두었다. 같은 해에 또 거승(車乘 육상교통)을 관장하는 승부(乘府)를 설치하고 승부령 1인을 두었다. 586년에는 문교와 의례를 담당하는 예부(禮部)를 설치하고 예부령 2인을 두었다. 591년에는 외국 사신을 접대하는 영객부령(領客府令) 2인을 두었다.

 

여기서 진평왕 대 초기인 580년대에 위화부 · 조부 · 예부와 같이 중앙 관부 중에서도 핵심적인 관부가 설치된 사실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 시기는 신라의 관제 발달사상 발전기로서 새로운 행정 관부의 창설뿐만 아니라 각 관청 간의 분업 체제가 확립되었다. 또한, 소속 관원 수를 규정함으로써 조직화 경향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어서 진흥왕 대의 정복국가 체제에서 관부정치 체제로의 질적인 전환이 이루어진 시기였다. 진평왕 대 말기인 622년 2월 궁정 관부를 총괄하는 내성사신(內省私臣)을 설치하였고, 진지왕의 아들 김용춘을 처음으로 임명하였다. 이 밖에도 623년 정월 병부에 대감 2인을 두었으며, 624년 정월 시위부에 대감 6인, 상사서와 대도서에 대정 1인을 각각 설치하였다.

 

4. 수나라 사표(608 고구려 공격 요구)

진평왕 대에는 중국에서 발달한 고도의 불교문화를 수용하기 위한 고승들의 구법행(求法行)과 귀국행(歸國行)이 빈번하게 있었다. 고승들의 귀국은 대체로 외교사절의 귀국 행차와 같이 이뤄지고 있어서 불교 수용에 대한 국가의 적극적 지원을 짐작하게 한다. 진평왕 7년(585)에 남조(南朝)의 진(陳)나라로 구법을 위해 떠났던 고승 지명은 602년에 수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던 상군과 함께 귀국하여 왕의 존경을 받아 대덕(大德)이 되었다. 589년에 진나라로 구법행을 떠났던 원광은 600년에 조빙사(朝聘使)인 나마 제문(諸文)과 대사 횡천과 함께 귀국하였다. 또한 596년에 수나라로 구법행을 떠났던 고승 담육은 605년 수나라에 파견되었던 입조사(入朝使) 혜문과 함께 귀국하였다.

 

국가의 지원을 받았던 고승들은 종교적인 불사(佛事)뿐만 아니라 세속적인 국가사(國家事)에도 참여함으로써 이 시기의 불교는 호국불교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드러냈다. 진평왕 대에는 진흥왕 대의 고구려 · 백제 지역에 대한 영역 확장 결과, 양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양국의 빈번한 침입을 받았다. 602년에는 백제가 아막성으로 공격해 왔고, 603년에는 고구려가 북한산성으로 침입해 왔다. 이에 진평왕은 양국의 침입을 방어하는 한편, 608년에 수나라의 군사와 고구려를 정벌하기 위해 원광(圓光)에게 「 걸사표(乞師表)」를 짓게 하여, 611년에 이를 수나라에 보냈다. 그 결과, 다음 해에 수나라 양제(煬帝)의 고구려 정벌이 있게 되었다.

 

 

화랑의 다짐 : 원광법사의 세속오계
화랑의 다짐 : 원광법사의 세속오계

 

 

5. 원법사 세속

원광법사 13세에 출가하였고, 30세에 경주 안강의 삼기산(三岐山)에 금곡사(金谷寺)를 창건하고 수도하였다. 34세에 주술을 좋아하는 한 승려의 죽음을 보고 발심하여 589년(진평왕 11)진나라에 갔다. 중국의 금릉(金陵) 장엄사(莊嚴寺)를 비롯한 여러 강석에 다니면서 『성실론』, 『열반경』 등을 공부한 뒤, 오(吳)나라의 호구산(虎丘山)에 들어가 선정에 힘썼다. 『아함경』을 연구하면서 그곳에서 여생을 마치고자 하였으나, 많은 수행자들이 찾아와서 강의를 청하였고, 『성실론』과 『반야경』을 설하면서부터 이름이 알려졌다.

 

이 때 남북조로 갈라져 있던 중국은 수나라에 의하여 통일되었는데, 진나라의 수도인 양도(揚都)에서 전쟁포로로 붙잡혔다가 풀려나 장안의 흥선사(興善寺)로 갔다. 그곳에서는 『섭대승론』에 대한 연구가 크게 일어나고 있었는데, 원광은 거기에서 섭론종(攝論宗)의 논서들을 연구하였다. 이때 그는 이미 중국 불교계에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었다. 신라에서 귀국을 요청하자, 600년에 귀국하여 삼기산에 머물면서 대승경전을 강의하였다. 그 뒤 가실사(加悉寺)에 머물렀는데, 이 때 귀산(貴山)과 추항(箒項)이 찾아와서 계명(誡銘)을 구하자, 화랑의 실천 덕목으로 「세속오계」를 주었다.

 

608년(진평 30) 왕의 요청으로 수나라 원정군을 청하는 「걸사표(乞師表)」를 지어 수나라 양제(煬帝)에게 보내자, 양제는 직접 30만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를 정벌하러 왔다. 613년 수나라의 사신 왕세의(王世儀)가 왔을 때 황룡사(皇龍寺)에서 인왕백고좌(仁王百高座) 법회가 개최되었는데, 이때 최상석에서 법회를 주관하였다.

또한, 주술이 커다란 힘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인식되었던 당시, 주술을 불교의 수계와 참회의 법으로 대치시킴으로써 불교의 토착화를 꾀하였다. 가서사(嘉栖寺)에서 점찰법회를 정기적으로 베풀 기금을 마련하였으며, 임금의 병을 수계 · 멸참(滅懺)으로 치료하기도 했다. 입적한 나이에 대해서는 99세와 84세의 두 가지 설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84세설을 채택하고 있다.

 

경주 금곡사지 원광법사 부도탑
경주 금곡사지 원광법사 부도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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