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류왕 : 류 당 천 연 도 보 도
류 : 영류왕(618~642)
당 : 당나라 건국(618 이연)
천 : 천리장성 축조(비사성~부여성)
연 : 연개소문(대막리지 쿠데타)
도 : 도교수용
보 : 보덕(백제 : 열반종)
도 : 도현(일본 : 일본세기)
1. 영류왕
영류왕은 삼국시대 고구려 제27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618∼642년이며 영양왕의 이복동생으로 왕위에 올랐다. 재위 초에는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입은 피해를 복구하느라 새로 건국된 당과 평화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당에서 도교를 수입하여 진흥시킴으로써 불교에 기반을 둔 귀족세력을 약화시켰다. 신라와는 고토 회복을 위한 공방전을 이어갔다. 당나라가 국내 혼란을 수습하고 동돌궐을 격파하면서 양국 간 긴장이 고조되자 천리장성을 수축해 당의 공격에 대비했다. 대당 강경론자이던 연개소문을 제거하려다가 역공을 당해 비참한 죽음을 당했다.
2. 당나라 건국(618 이연)
수나라의 뒤를 이은 중국의 통일 왕조로, 618년에 수의 당국공인 이연이 건국해 907년 애종 때 후량의 주전충에게 멸망하기까지 20대 289년간 유지되었던 왕조이다. 이칭으로는 당조(唐朝), 이당(李唐)이 있다. 전조인 수가 단명한 탓인지 국성이 바뀌었다는 점을 제외하고 수나라의 정치체제, 제도, 문화, 집권세력 등을 그대로 계승한 모습을 보인다. 수도는 장안이었으며 고대, 중세 중국 제2의 도시인 낙양이 부수도로 기능했다. 장안은 인구가 100만 명이라 식량 부족 문제가 있었다고 한다. 전통 중국 문물을 발전시킨 왕조이자 동시에 대외 활동을 활발하게 추진했고, 이민족의 문화와 그들의 자치를 인정하는 등 다민족적이고 국제적인 요소가 가장 짙었던 왕조로 평가받는다. 북쪽으로는 회흘(위구르), 토번(티베트), 남방의 베트남과 교류했다.
한국사에서는 백제의 맹공과 고구려의 협공으로 인해 위기에 빠졌던 신라의 삼국통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일본이 백제 멸망 이후 견당사를 보내 중국의 문물을 수입하여 국가 체제를 정비하는 등, 동아시아 여러 나라에 상당히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반도는 위치상 중국에 많은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지만, 당나라는 그중에서도 한반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고, 향후 1,000년 이상 지속되는 동아시아의 중국 중심 세계관을 완성한 나라였다. 후기에는 안록산의 난 이후 이민족들과 중국 민중의 불만이 폭발했고, 당나라 중앙정부 자체의 동요는 물론 사회 및 경제적으로도 불안이 가중되어 쇠락의 길을 밟았다.
3. 천리장성 축조(비사성~부여성)
당나라가 국내의 혼란을 수습하고, 나아가서 630년 동돌궐을 격파하고, 640년 고창국(高昌國)을 복속시키면서 양국 간에는 점차 긴장이 고조되어 갔다. 640년에는 태자인 환권을 당나라에 파견하고, 당나라의 국학(國學)에 고구려인의 입학을 요청하는 등 겉으로는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듯하였다. 그러나 당나라는 사절을 파견하여 고구려가 수군(隋軍) 격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경관(京觀)을 파괴한다든지(631), 고구려의 내정과 지리를 정탐하기까지 해(641), 양국의 긴장관계는 점차 고조되어 나갔다.
또한 고구려도 당나라와의 대결이 불가피함을 인식하고, 631년부터 천리장성(千里長城)을 수축하기 시작해 그 뒤 16년간에 걸쳐 완성을 보게 되었다. 당나라와 이 같이 형식적 우호관계를 맺고 있던 고구려는 남으로 잃었던 고토를 회복하기 위해 신라와 사투를 계속하였다. 629년 낭비성을 빼앗기는가 하면, 638년 신라의 칠중성을 공격하는 등 긴장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4. 연개소문(대막리지 쿠데타)
대외관계가 긴장된 가운데, 영류왕은 당시 천리장성의 수축을 감독하고 있던 연개소문(淵蓋蘇文)을 제거하려다가, 642년 오히려 그의 정변(쿠데타)에 의해 몸이 토막 나는 비참한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영류왕과 연개소문 간의 알력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그러나 왕권을 강화하려던 왕의 의도에 연개소문이 장애가 되었던 듯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특히 대당(對唐) 외교정책 등의 이견도 있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즉 대당온건론을 중시하였던 영류왕이 대당강경론자였던 연개소문과 마찰이 있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연개소문은 삼국시대 고구려 제28대 보장왕의 즉위와 관련된 장수이다. 출생일은 미상이며 665년(보장왕 24)에 사망했다. 동부 대인이던 아버지의 직을 계승했으나 귀족세력들이 영류왕과 함께 자신을 제거하려 하자 정변을 일으켜 왕을 시해하고 보장왕을 세워 국정의 실권을 장악했다. 당의 도사들을 맞아들여 도교를 육성했다. 당시의 국제정세는 당의 대외팽창 정책으로 긴박한 형세였는데 강경 일변도의 대외정책을 구사했다. 화평을 청한 신라의 요청을 거부했고 당과의 전쟁도 불사했다. 연개소문이 살아 있는 동안 당은 고구려를 공격하지 못했다.
연개소문은 성품이 호방하고 의표가 웅위했다고 한다. 동부 대인(大人)이었던 아버지가 죽은 뒤, 연개소문이 그 직을 계승하였다. 유력 귀족들이 그의 세력과 무단적인 기질을 두려워하여 이를 반대했으나 귀족들에게 호소해 간신히 승인을 받았다. 뒤에 그는 천리장성(비사성~부여성)을 쌓을 때 최고 감독자가 되었다. 그의 세력이 커지자 이를 두려워한 여러 대신들과 영류왕이 그의 제거를 모의하였다. 이를 눈치챈 그는 642년 평양성 남쪽 성 밖에서 부병(部兵)의 열병식을 구실로 귀족들을 부른 뒤, 정변을 일으켜 이들을 모두 죽이고 왕궁에 돌입해 왕을 시해하고 보장왕을 세웠다.
스스로는 막리지가 되어 대권을 장악한 뒤, 반대파에 대한 탄압과 제거를 감행하였다. 안시성의 성주도 연개소문의 반대파였다. 이에 연개소문이 안시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안시성의 공방전은 승패가 나지 않아 양자 간의 타협으로 일단락되었다. 결국 연개소문은 안시성주의 지위를 계속 인정했고, 그 대신 안시성주는 새로운 집권자인 연개소문에게 승복하였다. 안시성주와의 타협이 보여주듯이, 연개소문의 집권은 고구려 하대의 귀족 연립정권 체제를 근본적으로 타파했던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고구려 하대에는 실권자인 대대로를 5부(部) 귀족들이 선임하였다. 3년에 한 번씩 선임했고 연임도 가능하였다.
그런데 대대로 선임 때에 귀족간에 의견일치를 보지 못할 경우 여의치 않으면 각기 무력을 동원하였다. 이때 왕은 이를 통제할 힘이 없어 방임하는 형편이었다. 중앙에서의 정변은 때로 지방으로 확산되었다. 연개소문의 집권과정에 보이는 유혈사태와 잇따른 안시성주와의 분쟁은 그러한 사정의 단면이었다. 그러나 그의 계속적 집권과 지위의 세습됨으로 보아, 연 씨 일가의 세력은 크게 강화되었다. 집권 후 그는 종교정책에도 깊은 관심을 보여,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숙달(叔達) 등 8명의 도사를 맞아들이고 도교(道敎)를 육성하기도 하였다.
연개소문이 집권할 무렵 고구려는 대외적으로 긴박한 정세에 처해 있었다. 수나라와의 20여 년에 걸친 전쟁이 수나라의 멸망으로 종결된 뒤, 한때 중국세력과 평화로운 관계가 지속되었다. 622년(영류왕 5)에는 수나라와의 전쟁 때 발생한 양측의 포로와 유민의 상호교환협정이 체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수나라 말기의 혼란과 분열을 통일하고 당나라 세력이 강화되어 감에 따라, 양국관계는 긴박해졌다. 서쪽으로 고창국(高昌國)주1을 멸하고, 북으로 돌궐(突厥)주2을 격파, 복속시킨 뒤,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를 구축하려는 당의 팽창정책은 자연 동북아시아 방면으로 그 압력을 가중시켰다. 고구려는 이에 대한 대책에 부심하면서 부여성에서 발해만 입구에 이르는 서부국경에 천리장성을 쌓았다. 한편 남쪽에서는 백제와 신라 간의 충돌이 빈번했고, 신라가 당나라와 동맹을 맺음에 따라 한강유역을 둘러싼 6세기 후반 이래의 삼국 간의 분쟁은 더 격화되었다.
국제적인 긴박한 상황 속에서 연개소문은 강경일변도의 대외정책을 채택하였다. 이것은 격렬한 정변을 통해 집권한 그의 대내적인 정치적 처지와 관계가 있다. 그는 대외적인 위기상황은 정권의 안정화와 집권력의 강화를 도모하는 데 오히려 유리하다고 파악하였다. 그는 신라의 김춘추(金春秋)주3가 제안한 양국의 화평을 거부했고, 신라와의 관계를 개선하라는 당나라의 압력을 거부하고 사신을 가두어버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대외정책은 당에 대해 단호한 대결자세를 굳힘으로써 항쟁의식을 고취시켰다. 또한 말갈족과 같은 휘하의 복속민들의 이탈을 방지하고 전쟁대비에 박차를 가한다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했다. 이러한 의지는 645년 당태종의 침공 이후 계속된 당군과 신라군의 침공에 대한 고구려의 강력한 저항에서 구현되었다.
당시 고구려와 당나라의 사이는 전시대의 수나라와의 관계에서처럼 전쟁이 불가피하였다. 즉 5세기 이래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를 규정지었던 다원적인 세력 균형상태가 중국대륙에서 강력한 통일제국이 출현함에 따라 깨어졌다. 중국 중심의 일원적인 세계질서를 구축하려 함에 따라 수 · 당제국과 동북아시아에서 독자적인 세력권을 구축하고 있던 고구려 사이에는 전쟁이 불가피했던 것이다. 다만 당나라 초기에는 중국의 내부사정과 당나라와 돌궐과의 관계로 때문에 고구려와 당나라 사이에 잠정적인 평화가 유지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의 당나라에 대한 강경정책은 영양왕이 요서(遼西) 지방을 선제공격해 수나라와 싸움의 계기가 되었던 것과 같은 배경에서 나온다. 그는 수양제의 침공에 대비해 고구려가 돌궐과의 연결을 도모했듯이, 당태종이 침공해 오자 당시 몽고고원에서 돌궐 대신 흥성했던 설연타(薛延陀)주4의 세력과 연결해 당의 후방을 견제하려 하였다. 나아가 지금의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공화국의 사마르칸트 지역에 있던 강국(康國)에 사신을 보내어 동맹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그때 파견된 고구려 사신의 모습이 사마르칸트시 교외에서 발굴된 아프라시앞 궁전 벽화에서 발견되었다. 이러한 정책은 당시 국제정세에 대한 폭넓은 인식 위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를 수행함에 있어 탄력성을 결여한 경직성을 보였다. 당과의 대결을 앞두고 신라와의 관계를 악화시킴으로써 남북으로부터의 협공 가능성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고, 그것은 고구려에 치명적인 요인이 되었다. 나아가 당나라와의 전쟁에서도 경험이 풍부한 노장(老將)들의 주장과 달리 전통적인 성곽 중심의 방어전을 버리고, 평원에서의 대회전(大會戰)을 기도함에 따라 대패를 당하기도 하였다. 이는 상대와 자신의 실력에 대한 냉정한 평가와 그에 따른 대책을 제대로 세우지 못한 경직된 면모를 보여준다.
구체적으로 안시성 부근 평원에서 고연수 · 고혜진이 이끈 고구려 중앙군이 안시성의 세력과 연결해 장기적 저항책을 구축하지 않고, 당군과의 정면 회전을 기도했던 것은 연개소문의 집권과정에서 파생했던 문제와 결코 무관하지 않다. 젊은 장수를 기용해 한꺼번에 당군을 격파함으로써 새로운 집권세력의 위엄을 과시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의 강경한 지도노선은 고구려의 존망이 걸린 전쟁상황에서 강력한 통합력과 저항력의 구심점이 되 힘을 발휘하였다. 660년 백제가 멸망한 뒤, 당군의 계속된 침공과 신라군의 협공 속에서 주된 방어선이 수도인 평양성으로까지 밀린 상황에서도 그는 고구려국의 최고 집권자로서 저항을 주도하였다. 665년 그가 죽자, 그의 맏아들 남생이 그의 직을 계승했고 남건 · 남산 등이 권력을 나누어가졌다. 곧이어 터진 형제간의 분쟁으로 남생이 당나라에 항복하고,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는 신라로 투항하는 등 내분이 일어남으로써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 의해 고구려는 멸망(668)하고 만다.
5. 도교수용
영류왕(榮留王)의 즉위년(618)에 중국에서는 수(隋)나라를 이어 당(唐) 나라가 건국되었다. 고구려로서는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입은 피해를 복구함과 동시에, 새로 등장하는 당나라와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당나라도 국내의 완전한 통일작업과 민심의 수습, 그리고 돌궐(突厥)의 위협에서 벗어나기까지는 고구려와 평화적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이에 양국은 외교사절을 자주 교환하고, 고구려와 수나라의 전쟁 시 사로잡힌 포로들을 622년에 교환하는 등 현실적인 우호관계를 유지해나갔다. 이러한 우호적 관계 속에서 624년 당나라로부터 공식적 외교관계를 통해 도교(道敎)가 들어왔고, 다음해에는 사람을 당나라에 보내 불교와 도교를 배워오게 하였다. 영류왕의 즉위 후 고구려에서 불교는 크게 위축되었다. 이는 영류왕이 즉위 이후 영양왕과 긴밀한 관계에 있던 귀족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기존 귀족세력과 연결된 불교세력을 약화시키는 수단으로 도교를 들여와 후원했기 때문이다.
6. 보덕
고구려 고승 보덕의 백제 망명(백제 : 열반종 창시)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기존 귀족세력과 연결된 불교세력에 대한 견제는 보장왕 즉위 이후까지 지속되고 있었다. 한편 영류왕의 도교 수입 및 진흥은 노자(老子)를 자신들의 조상으로 모시고 있던 당나라와의 우호적인 대외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한 방편이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이 경우 영류왕대의 온건한 대외정책 추진을 대외강경파였던 영양왕대의 신흥 귀족세력들에 대한 견제의 일환으로 보기도 한다.
열반종의 개조. 자는 지법(智法). 평안도 용강현(龍岡縣) 출생. 항상 평양성에서 살았는데 산방(山方)의 노승이 강경(講經)하기를 간절히 청하므로 사양하다가 『열반경(涅槃經)』 40여 권을 강하였다. 그 뒤 대보산(大寶山) 암혈 밑에서 선관(禪觀)을 닦았는데, 신인(神人)이 와서 그곳에 거주하기를 청하고 땅 속에 팔면칠급(八面七級)의 석탑이 있음을 가르쳐 주었다. 이에 그곳에 정사(精舍)를 세워 영탑사(靈塔寺)라 하고 그곳에 머물렀다.
그 뒤 반룡산(盤龍山) 연복사(延福寺)에 있을 때 보장왕이 도교를 존중하고 불교를 숭상하지 않으니 국운이 위태롭게 될 것을 걱정하여 여러 차례 왕에게 간하였다. 왕이 이를 듣지 않자 650년(보장왕 9) 방장(方丈)을 날려 하룻밤 사이에 백제의 완산주(完山州 : 지금의 전주) 고대산(孤大山)으로 옮겨가 경복사(景福寺)를 짓고 살았다.
그의 제자 무상(無上)은 금동사(金洞寺)를, 적멸(寂滅)과 의융(義融)은 진구사(珍丘寺)를, 지수(智藪)는 대승사(大乘寺)를, 일승(一乘)은 심정(心正)·대원 등과 함께 대원사(大原寺)를, 수정(水浮)은 유마사(維摩寺)를, 사대(四大)는 계육(契育)과 함께 중대사(中臺寺)를, 개원(開原)은 개원사(開原寺)를, 명덕(明德)은 연구사(燕口寺)를 각각 창건하였다.
7. 도현(일본세기)
도현(道顯)은 7세기 후반에 일본에서 활동하였던 고구려의 승려이다. 에도시대의 불교사서인 『본조고승전(本朝高僧傳)』에 의하면, 도현은 일본의 군신(君臣)이 불교를 숭상한다는 말을 듣고 조공선을 타고 일본에 건너왔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천지왕(天智王)의 명에 따라 다이안지[大安寺]에 머물면서 『일본세기(日本世記)』 약간 권을 찬술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다이안지는 본래 이름이 백제대사(百濟大寺)이며, 8세기 전반에 국가가 조영 및 경영 비용을 부담하였던 사찰이다. 따라서 도현이 일본에 건너가 머문 곳은 다이안지가 아니라 백제대사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백제 멸망 전에 일본으로 가서 당시 국제 사정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후지와라 노가마타리[藤原鎌足, 614~669]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정치, 군사고문의 역할을 하였다.
도현은 불교뿐만 아니라 유교에 밝은 학승이었다. 특히 그가 저술한 『일본세기』에는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의 영향을 받은 내용이 보이는데, 도현이 유학과 한학에도 조예가 깊었음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일본세기』 는 『일본서기(日本書紀)』의 「제명기(齊明紀)」와 「천지기(天智紀)」에 분주(分註)로 네 군데 인용되었다. 그 내용은 백제 멸망 원인과 신라 김춘추(金春秋)를 비판하는 내용, 복신(福信)이 왜에 글을 보내 백제 왕자 풍장(豊璋)의 귀국을 요청한 것, 고구려의 멸망과정, 후지와라 노가마타리의 사망 관련 기사 등이다. 이러한 기록은 중국이나 한국 측 자료에서는 볼 수 없는 내용이다. 따라서 『일본세기』의 사료적 가치가 작지 않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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