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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두문자

가야 정벌 두문자 : 금 법 대 진

by noksan2023 2023. 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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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 특징
가야 특징

 

가야 정벌 : 금 법 대 진

 

금 : 관가야

법 : 흥왕 정벌(532)

대 : 가야

진 : 흥왕 정벌(562)

 

 

가야 연맹
가야 연맹

 

1. 관가야

금관가야는 서기 전후부터 서기 532년까지 존속하던 전기 가야의 대표적인 나라인 김해의 가락국을 일반적으로 부르던 호칭이다. 김해의 가야 세력을 가리키는 ‘금관가야’라는 명칭은 고려시대에 비롯된 조어이고 가야시대에는 ‘대가락(大駕洛)’이나, ‘가락(駕洛)’으로 불리었다. 현재 ‘금관가야’라는 호칭이 널리 통용되고 있는데, 특히 고고학계에서는 변한 소국 단계의 '구야국'에서 한층 더 발전한 소국연맹 단계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현재 일반인들이 김해의 가락국을 지칭할 때, 일반적으로 금관가야라고 한다. 그러나 이 명칭 그대로가 사서에서 확인되는 용례는 아니다. 『삼국유사』 5가야조에는 "5가야에 금관(金官)이 들지 않음이 당연하다" 하였고, 「본조사략」에 금관을 기록한 것은 잘못이라 전하고 있다. 금관가야는 여기에서 조합되기 시작하던 용어라고 볼 수 있다.

 

5가야조의 말미에는 태조 천복(天福)주1 5년(940년)에 5가야의 이름을 고쳤는데 그 가운데 하나를 '금관'으로 하였다고 하였으니, 금관가야는 고려에서 비롯된 조어였고, 그와 관련된 용어를 일연선사가 『삼국유사』에 채록주2한 것이다. 금관가야는 지금의 가락국에 대한 명칭으로 가장 일반화된 것이기는 하나, 가야시대의 명칭은 아니다. 가야시대에 가락국 사람들 스스로가 인식하였을 명칭은 「가락국기」에 전하는 바와 같이, 수로왕이 나라를 세우고 스스로 불렀다는 '대가락(大駕洛)'이나, 「김유신비문」에 전하는 '가락구촌(駕洛九村)'의 '가락'과 같은 것에서 찾아야 한다. 김해의 가야국은 '가락국'으로 부르는 것이 타당하다. 하지만, '금관가야'라는 명칭은 일반인뿐만 아니라 학계에서도 널리 통용되고 있다. 문헌사학계보다 고고학계에서 '금관가야'라는 용어를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즉, 김해의 가야 정치체의 국명으로 널리 통용되고 있다.

 

고고학계에서는 소국연맹 단계에 들어간 사회를 가야로 보고, 그것을 기준으로 하여 그 이전을 '구야국', 이후를 '금관가야'로 명명하는 경우가 많다. 그 시기는 김해 지역의 경우, 3세기 후반대로 보고 있다. 가야의 연맹왕국 단계는 변한의 소국 단계보다 한층 더 강력해진 국가권력으로 나타나는데, 그러한 고고학적 증거가 대형 분묘(김해는 초대형 목곽묘주3), 순장, 토기 양식의 출현 등이다. 김해 가야 세력이 소국 규모를 벗어나 연맹왕국의 맹주주4로서의 시작을 알리는 대표적인 증거가 초대형 목곽묘인 대성동 29호분의 등장이다. 김해지역에서 금관가야의 성립은 변한 속의 병렬적 소국 단계인 '구야국'이 아니라 주변 소국을 정치적으로 통제하려는 종속적인 지배 단계인 새로운 연맹왕국 단계로의 진입과 관련된다. 김해 가야 세력의 전성기에는 지금의 부산 및 창원 등의 동부지역을 통제한 것으로 보고 있는데 토기 양식이나 묘제주5에서 김해 세력을 중심으로 일정한 동질성이 보이기 때문이다.

 

금관가야의 성장 배경은 철 생산과 교역의 거점 역할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3세기 후엽에 편찬된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에서도 확인되듯이 김해의 위치가 중국의 사신이 왜국주6으로 향할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지정학적 거점이라는 점에서도 뒷받침된다. 금관가야의 왕성은 김해 봉황토성으로 추정되고 , 금관가야의 왕묘역은 대성동 고분군이다. 대성동 고분군의 묘제 변천은 기원전후~서기 2세기 대의 목관묘, 서기 2세기 후반~5세기 초의 목곽묘, 5세기~6세기 초의 수혈식 석곽묘주7의 순으로 전개된다. 금관가야가 쇠퇴하게 된 데에는 서기 400년에 고구려의 5만 군대가 김해 지역까지 진출한 고구려 남정(南征) 사건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5세기 이후에 아라가야나 대가야에서는 고총고분군이 축조되었으나 대성동고분군에서는 그러한 양상이 미약하다는 점에서도 뒷받침된다. 금관가야는 고구려 남정 사건 이후에 국력이 약화된 상태에서 532년 신라에 투항하였다.

 

2. 흥왕 정벌(532)

법흥왕은 이와 같이 대내적으로 체제를 정비해 왕권을 강화하는 한편, 대외적으로는 영역 확장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522년(법흥왕 9)에 백제의 적극적인 진출에 반발한 대가야가 법흥왕에게 사신을 보내 결혼을 요청했는데, 왕은 이 제의를 받아들여 이찬 비조부의 누이동생을 보내 동맹을 맺었다. 그 뒤 법흥왕은 적극적인 남진 정책을 추진해 524년(법흥왕 11)에는 남쪽의 국경 지방을 순수(巡狩)하고 영토를 개척하였다. 이때 본가야의 왕이 와서 법흥왕과 회견했는데, 아마도 투항 조건을 타진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 본가야는 532년(법흥왕 19)에 금관국의 임금 김구해가 세 아들과 함께 신라에 항복해 옴으로써 정식으로 합병되었다.

 

본가야의 투항은 신라로 하여금 낙동강과 남해안의 교통상의 요지인 김해를 발판으로 가야의 여러 나라를 정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이 밖에 대아찬 이등을 사벌주군주(沙伐州軍主)로 임명해 서북 방면의 점령지를 관리하게 하였다. 왕권 강화와 영역 확장 등에 힘입어 국력이 신장된 신라는 536년(법흥왕 23)에 비로소 독자적 연호인 건원을 사용하였다. 이로써 법흥왕 이후 신라 중고(中古) 왕실의 거의 모든 왕들은 자기의 독자적인 연호를 가지게 되었다.

 

3. 가야

대가야의 위치는 지금의 경상북도 고령군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가락국기(駕洛國記)』에는 금관가야(金官加耶)를 대가야(大加耶)라고 하였다. 이는 가야연맹 전기에는 금관가야가 맹주국이었기 때문이며, 금관가야를 본가야(本加耶)라고 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그런데『삼국사기(三國史記)』지리지에는, 고령군은 본디 대가야국으로 존속 기간이 시조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부터 도설지왕(道說智王)까지 16세(世) 520년인데, 신라 진흥왕(眞興王) 쳐서 멸망시키고 그 땅을 대가야군(大加耶郡)으로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아마 금관가야의 세력이 약해진 뒤, 또는 금관가야가 멸망한 뒤 고령을 중심으로 한 가야국이 대신 맹주국이 되어 대가야라고 불렸기 때문인 듯하다. 『삼국사기』신라본기에는 562년(진흥왕 23) 가야가 배반했기 때문에 이사부(異斯夫)에게 명해 사다함(斯多含)과 함께 쳐서 멸망시켰다고 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가야는 고령의 대가야임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이 때 금관가야는 이미 멸망하고 없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는 이 밖에도 가야에 대한 기사가 여러 곳에 등장하는데, 그것이 어느 가야를 말하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또 대가야도 위와 같이 금관가야를 가리키는 경우와 고령가야를 가리키는 경우가 있어 혼란이 있고, 맹주국을 뜻하는 ‘임나(任那)’라는 용어도 금관가야를 말하는 것인지 고령가야를 말하는 것인지 혼란이 있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도 금관가야와 고령가야를 모두 ‘가라(加羅)’라고 불렀는데, 때로는 금관가야를 ‘남가라(南加羅)’라고 하여 고령가야와 구별하고 있다.『삼국사기』신라본기 진흥왕 23년조의 기사에 해당되는『일본서기』긴메이(欽明紀) 23년(562)조에 “신라가 임나관가(任那官家)를 쳐서 멸망시켰다”라 하고, 그 주(注)에 가라 10국의 이름을 열거했는데 그중에 가라국(加羅國)이 있다. 이 가라국은 고령가야를 가리킨 것이다. 그러나『일본서기』에서 ‘임나’라는 용어는 여러 가야를 통틀어 부르는 데 썼으므로 우리 나라의 경우와는 다르다. 우리 나라에서는 특정한 맹주국, 즉 대가야를 임나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이처럼 문헌에 따라 가야·가라 또는 대가야라는 용어를 달리 사용해『가락국기』에 나오는 가야의 멸망 연대에 대해서도 혼란이 있었다. 즉, 구형왕(仇衡王)이 신라에 항복한 해를 보정 2년(562)이라 하고, 그 아래에 「개황록(開皇錄)」을 들어 양(梁)나라의 중대통(中大通) 4년(532)에 신라에 항복했다는 기사를 실었다. 전자는 고령가야가 멸망한 연대이고, 후자는 금관가야가 항복한 해이므로 이런 혼란이 있었던 것이다.

경상북도 고령 지산동(池山洞)에 굉장히 큰 가야시대의 무덤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 그 중 발굴된 여러 무덤에서 놀라운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무덤으로 보아 고령가야가 가야의 맹주국, 즉 대가야였던 것이 입증된다. 고령 지산동고분군의 유물 문화는 그 지역 일대에 일원적으로 확산된다는 특징을 지닌다. 합천 옥전·번계제고분군, 산청 중촌리고분군, 함양 산백리·백천리 고분군, 남원 월산리 고분군, 장수 삼고리 고분군 등에서 출토된 5세기 후반 이후의 유물들의 유사성은 그러한 상황을 반영한다. 6세기 전반에는 고령계 유물 문화의 전파가 더욱 심화되어 진주 수정봉·옥봉고분군, 고성 율대리고분군, 함안 도항리고분군에까지 고령계 토기가 확산되었다. 그러면서도 고령 지산동고분군의 유물은 다른 지역들에 비해 질과 양의 측면에서 우월성을 유지하고 있어 해당시기에 고령을 중심으로 한 연맹체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왜와의 교역 역시 고령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5세기 후반의 일본열도 각 지역의 유력한 수장묘(首長墓)들에 대가야 계통의 위세품(威勢品)으로 보이는 마구(馬具), 장신구들이 주류를 나타내고 있고, 고령 양식의 토기들도 일본 큐슈 및 세토나이해 연변 각지에 널리 분포되었다. 또한 왜계(倭系) 물품이 고령·합천 등 가야 북부 지역에 들어오고 있어 왜와의 무역과 교류의 중심 역시 김해서 고령으로 옮겨진 정치적 변화가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4. 흥왕 정벌(562)

562년(진흥왕 23)에 이사부(異斯夫)가 신라군을 이끌고 대가야를 공격하여 멸하였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562년에 가라국과 안라국을 비롯한 임나(가야) 10국이 멸망하였다고 한다. 신라가 562년에 대가야(가락국)와 더불어 가야 소국들을 정복하여 가야 지역을 모두 신라의 영역으로 편제하였음을 반영한다. 

 

신라는 556년(진흥왕 17) 7월에 비열홀주(북한의 강원도 안변군 안변읍)를 설치하였는데, 이는 신라가 동북으로 비열홀까지 진출하였음을 말해 준다. 이후부터 568년(진흥왕 29) 사이에 신라는 북한의 함경남도 영광군 황초령과 이원군 마운령까지 북진(北進)하였다. 진흥왕이 신료들을 대동하고 두 곳을 순행하였는데, 이를 기념하기 위해 568년에 「황초령신라진흥왕순수비」와 「마운령신라진흥왕순수비」를 세웠다. 진흥왕이 정복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한 결과, 신라는 이전보다 3배나 더 넓은 영토를 개척하였다.

 

가야 연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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