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알머리 없다
‘씨알'은 ‘새끼를 까기 위하여 쓰는 알 '또는 ‘곡식의 종자로 쓰는낟알'을 가리킨다.
곧 동물이든 식물이든 ‘씨'가 될 수 있 는 알이 ‘씨알'이다.
그런데 ‘씨알'에 접미사 ‘-머리'가 붙은 '씨알머리'는 ‘남의 혈통'을 속되게 이르는 말로 쓰인다.
“이가라고 고운 털이 박히고 장가의 씨알머리라고 미운털이 박히겠니?”
에 쓰인 ‘씨알머리'가 그러한 것이다. 혈통은 그 집안의 근본, 정신, 줏대 등을 상징한다. 그리하여
“씨알머리 없다."
‘생각이나 줏대가 없다'
라는 비유적 의미를 띨 수 있다. 생각이나 줏대가 없으면 속이 비고 하찮기 그지없다. 그리하여
“씨알머리 없다.”
‘실속이 없고 하찮다'
와 같은 의미가 생겨 난다.
“씨알머리 없는 농담을 주고받을 상대가 있다는게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르겠다는 마음이 일었다.”(이병주,행복 어사전)
와 같이 쓸 수 있다.
"씨알머리가 없다"와 "씨알도 안 먹힌다"
대중교통을 이용하다 보면 황당한 일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중·고교생들이 무리지어 승차해 대화하는 모습을 살펴보면 욕으로 시작해서 욕으로 끝나는 경우를 흔히 보게 됩니다. 입에 담지 못할, 성(性)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상스러운 욕설이 대부분입니다. 상대방에게 모욕을 주려고 하게 되는 욕을, 우리 아이들은 일상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내뱉는 겁니다. 주위도 의식하지 않습니다.
작년 이맘때쯤 중요한 약속이 있어 지하철을 이용한 적이 있습니다. 왁자지껄, 중학생 또래 서너 명이 탔습니다. 하도 시끄럽게 떠들며 서로 욕설들을 해대기에 크게 꾸짖었습니다. 잠잠해 지기에 내 큰 목청이 먹혔나보다 했지요. 한데, 다음 정거장에서 우르르 내리더니 "에이 ×팔! 왕 재수…"하며 달아나는 겁니다. "이런…후레자식들!" 벌떡 일어났지만, 자동문은 이미 닫혀버렸습니다. 그 때 생각을 하면 아직도 얼굴이 화끈거리고 가슴이 벌렁댑니다.
예전에도 다투거나 할 때 욕설을 했습니다. 욕이라야 '후레자식!'이나 '빌어먹을 놈'같은 비속어나 '×같은 놈'처럼 동물에 비유하는 게 고작이었지요. '후레자식'과 같이 남을 비하하는 말 중에 "씨알머리가 없다"는 관용구가 있습니다. 이 말은 '그 태생의 뿌리를 찾지 못할 정도로 혈통이나 종자가 보잘 것 없다'는 뜻입니다. 형편없는 혈통의 집안에서 나서 보고 배운 거 없이 자랐기 때문에, 무례하고 건방지다는 의미로 쓰이는 말이지요.
여기서 '씨알'은 종자로 쓸 곡식의 낟알이나, 닭 따위 조류(鳥類)의 부화용 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씨알'에 붙은 '~머리'는 어떤 말의 뒤에 붙어서 비하의 뜻을 나타내는 데 쓰이지요. 튼실해야할 '씨알'이 부실하면 '씨알머리'로 낮춤말을 듣게 됩니다. 인정머리·주변머리·싹수머리·안달머리·주책머리 따위가 그런 말들에 속합니다. 남의 혈통을 얕잡아서 욕되게 이를 때 '그 사람의 종자'라는 뜻으로 '씨알머리'를 쓰는 이유입니다.
'씨알'과 관련한 또 다른 관용구로 "씨알도 안 먹힌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애초 "씨알이 먹다"라는 긍정적인 어구였답니다. 언행의 앞뒤 조리가 있고 실속이 있다는 뜻으로 쓰였었지요. 예전에 베를 짤 때 가로줄을 씨줄이라 하고 세로줄을 날줄이라고 했습니다. 이때 가리새 사이로 정확하게 한 올씩 씨실을 넣어서 짜 올라가야 한답니다. 씨실이 잘 먹어 들어가야 좋은 베를 짤 수 있다는 데서 나온 말이 "씨가 먹는다"입니다.
그러던 것이 세월이 흐르면서 본래의 뜻과는 판이하게 부정적인 의미로 변하여, 지금은 '씨가 안 먹힌다'는 표현을 더 많이 쓰고 있습니다. 누군가와 대화를 할 때 그 사람이 들은 체도 않고, 꿈쩍도 안 하는 상태 따위를 말하지요. 여기서는 '씨'에 강조의 뜻인 '알'을 붙여 그 뜻을 강하게 한 말이 '씨알'입니다. 이렇게 하여 "씨알이 안 먹는다" "씨알도 안 먹힌다"와 같은 부정적인 의미의 관용구가 생겨난 것이랍니다.
"씨알머리가 없다"는 싹수가 없고 건방지다, 실속이 없고 하찮다, 생각이나 줏대가 없다는 의미이며, "씨알도 안 먹힌다"는 설득과 이해가 안 되는 꽉 막힌 상태를 일컫는 말입니다.
씨알
일제와 독재에 맞선 사상가로 잘 알려진 함석헌 선생. 그는 씨알사상의 주창가로도 유명하다. 그는 ‘씨알’을 순수한 사람됨을 지향하는 민중을 가리키는 순우리말로 썼다.
씨알의 사전적 뜻은
새끼를 까기 위하여 쓰는 알
곡식의 종자로 쓰는 낟알
광물의 잔 알갱이
생선 한 마리 한 마리의 크기’이다.
우리말 중에 ‘씨알이 먹다’는 표현이 있는데 이는 말이나 행동이 조리에 맞고 실속이 있다는 뜻이다. “제법 씨알 먹은 소리도 조용조용히 말할 줄 안다.”
‘씨알머리’란 표현도 있는데 이는 남의 혈통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다. 염상섭의 ‘동서’를 보면 “원규란 놈도 믿을 수 없어. 그 씨알머리라 제 아버지 편만 들고…”란 표현이 나온다.
또한 ‘씨알머리가 박히다’라고 하면 말이나 행동이 조리에 맞고 실속이 있음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고, ‘씨알머리가 없다’고 하면 실속이 없거나 하찮다, 생각이나 줏대가 없다는 말이 된다.
함석헌 선생은 이외에도 ‘물낯’이나 ‘들 사람 얼’ 같은 순우리말을 일상생활에서 자주 쓰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물낯’은 수면(水面)을 가리키는 우리말이고, ‘들 사람 얼’은 씩씩한 사람의 기개나 정신을 가리키는 말이다.
‘띠앗머리’와 ‘씨알머리’
‘띠앗머리’는 ‘띠앗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다.
‘띠앗’은 ‘형제나 자매 사이에 서로 사랑하고 위하는 마음’이고,
‘띠알머리’는 ‘띠앗머리의 비표준어’이다.
예문으로는
“우리집은 형제가 둘뿐이라 유난히 띠앗이 좋은 편이다”
“한집안끼리 띠앗머리가 이렇게 사나워서야…”
와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한편 ‘씨알머리’는 ‘남의 혈통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다. 보통은 ‘씨알머리 없다’로 많이 쓰이는데, 그 뜻은 속된 말로 ‘(사람이) 생각이나 줏대가 없다’ ‘(말이나 행동이) 실속이 없거나 하찮다’는 것이다.
또한 ‘씨알’은 ‘곡식 따위의 종자로서의 낟알’로 함석헌이 ‘백성(국민)’ 대신 많이 쓰던 말이다.
‘씨알은 무엇인가?’ 함석헌 다시 읽는다
근대가 열린 뒤 서양의 철학과 사상이 물밀듯 쏟아져들어왔고, 식민지배와 근대화·산업화를 거치는 동안 우리는 줄곧 남의 말글을 빌려서 철학을 했다. 이에 따라 ‘나는 누구인가’ 또는 ‘우리는 무엇인가’ 등 자기 주체에 대한 본연적인 탐구에는 항상 걸림돌이 있었다. ‘씨알’이라는 개념을 통해 새롭게 자기 주체를 인식하려는 철학을 펼친 함석헌(사진·1901~1989)의 존재는, 그래서 독보적이라고 평가받는다. 2001년 서울에서 열린 세계철학자대회에서 함석헌이 20세기 한국을 대표하는 사상가로 전 세계에 소개됐던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사단법인 함석헌기념사업회는 오는 10일부터 서울 마포구 서교동 기념사업회 건물에서 ‘제1기 바보새 씨알학당’을 연다. 매주 금요일마다 함석헌의 대표 저작인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함께 읽고, 해설과 토론을 벌이는 대중 강좌다. 12주 동안 펼쳐지며,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 김조년 한남대 교수, <함석헌 평전>의 지은이 김성수 박사, 이치석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등이 번갈아 강사로 나선다.
이번 강좌는 좀 더 많은 대중들에게 함석헌 사상을 알리고 현재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기념사업회 부설 씨알사상연구원은 지난 4월 반년간 학술지인 <함석헌 연구> 창간호를 펴낸 바 있다. 또 비슷한 시기에 47명의 학자들이 발기인으로 참여한 ‘함석헌학회’가 창립되기도 했다. 이런 움직임들은 한국을 대표하는 사상가로 항상 함석헌이 꼽히는데도, 정작 학술적으로나 대중적으로 ‘함석헌 읽기’는 그리 충분치 못하다는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풀이 된다.
역사철학자·종교사상가·문필가·시인·시민사회 운동가 등 한평생 다양한 면모를 지녔던 함석헌은 생전에 강단이나 연구실에서 자신의 사상을 갈고 닦지 않았다. 제도권 학문의 틀을 뛰어넘어, 어려운 논문이 아니라 쉬운 강연과 글, 또 스스로의 삶의 모습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이문영 고려대 명예교수는 함석헌에 대해 “당신의 사상을 글로 쓰기 전에 먼저 성명서를 쓴 사람”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또 기독교, 유·불·도, 인도철학 등 다양한 사상들을 아우른 그의 사상은 간단히 파악되기 어렵다. 때문에 그 동안 제도권 학계에서는 그의 사상을 ‘학문’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강했다.
한글로 씌어진 최초의 통사(通史)이기도 한 <뜻으로 본 한국역사>는 함석헌 사상의 대강을 드러내는, 말하자면 입문서에 해당하는 함석헌의 대표 저작이다. 함석헌은 역사를, 단순히 지나간 사실들의 기록이 아니라 지금의 주체가 자신과의 살아있는 관련성을 바탕으로 사실이 가지는 ‘뜻’을 풀이하는 것으로 본다. 이런 역사인식은 주체의 철저한 자기 인식의 과정이기도 하다. “누구의 나와도 통할 수 있는 참나”, 곧 보편적인 주체로서 ‘나는 누구인가’를 밝히려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함석헌 사상의 핵심인 씨알사상과 고난사관을 읽을 수 있다. 그는 역사란 곧 고난의 역사이며, 그 역사를 짊어가는 주체는 바로 씨알(민중)이라고 봤다. 때문에 그는 “‘세계와 내가 하나’라는 것을 깨달은 씨알들이 서로 손을 잡아야 평화를 이룰 수 있다”며 개별 주체의 내적 혁명을 강조했다. 이와 함께 진화를 이어가려는 생명사상, 자유와 사랑을 진리로 삼는 비폭력 평화주의, 세계평화정신 등을 설파했다.
그렇다면 함석헌을 다시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씨알사상연구원장인 김경재 교수는 아예 이 문제를 ‘바보새 씨알학당’ 첫 강의의 주제로 삼았다. 그는 “씨알사상은 함석헌 개인의 사상이라기보다, 전형적인 ‘한국적 사상’으로서 드러난 것”이라고 본다. 한국인은 도대체 누구인가를 묻는, 자기정체성 탐구의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단순한 민족주의 사상이 아니라 “개성적이면서도 세계적 보편성을 동시에 품은 세계사상”이기 때문에 더욱 그 의미가 크다고 평가한다.
함석헌의 ‘사도 바울’로 구실하겠다고 한 김상봉 전남대 교수(철학)는 지금 함석헌을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로 ‘최초의 한글 철학자’로서의 의미와 시대적 요구 두 가지를 든다. 이마누엘 칸트가 독일에서 독일어로 주체적 철학을 세웠다면, 한반도에는 한글로 된 사상을 이룬 함석헌이 있었다는 것이다. 곧 한문과 서양 언어 등을 통해 외부로부터 주입된 사유에 사로잡힌 우리나라 학문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을 함석헌이 제시해준다고 한다.
시대적 요구는 더욱 절실하다. 자본주의와 물신숭배, 근대국가, 형식적 민주주의 등 ‘서구적 근대’가 한계에 부딪힌 지금, 사회적 혁명과 개별 주체의 내적 혁명을 함께 말하는 함석헌 사상은 실천적인 비전을 제시한다. 김상봉 교수는 “그 동안 양반·귀족·시민 등을 내세운 동서고금의 모든 철학은 ‘강자의 철학’이었지만, 함석헌의 씨알사상은 민중을 주체로 삼은 ‘약자의 철학’”이라고 말한다. 강자의 철학을 극복할 수 있는 사상으로서, 또 고난을 극복하고 뜻을 이루고자 하는 실천적 사상으로서 의미가 깊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대의 단절 때문에 세상을 뜬 지 20년이나 된 함석헌을 오늘날 젊은 세대들이 친밀하게 여기지 못하고 있는 것 또한 현실이다. 기념사업회가 이번에 대중 강좌를 기획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문대골 함석헌기념사업회 이사장은 “함석헌의 사상을 젊은 세대들에게 어떻게 계승시킬 것이냐가 앞으로의 가장 큰 고민”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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