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대 중국 상하이 독립운동 : 동 혁 청
동 : 동제사
혁 : 신한혁명당
청 : 신한청년당
1. 동제사
동제사라 함은 1912년 중국 상해에서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를 말한다. 별칭은 재상해한인공제회(在上海韓人共濟會)이다.
1911년 중국으로 망명한 신규식은 손문(孫文)의 동맹회에 가입, 신해혁명주1에 참가해 중국 측 요인들과 긴밀한 사이가 되었다. 그러나 청국 정부와 중국주재 일본영사가 그를 체포하려 하자 상해의 프랑스인 거주지로 도피하였다. 당시 상해에는 한국에서 망명한 독립운동가와 일본에서 건너온 한국인 유학생들이 많았다. 신규식은 이들을 규합, 이듬 해 7월 이 단체를 조직했는데, 표면적으로는 상해 거류 한인의 상조기관처럼 활동했으나 실제 목적은 독립운동이었다.
이사장에 신규식, 총재에 박은식이 선출되었다. 그 밖의 중견 간부는 김규식 · 신채호 · 홍명희 · 조소앙 · 문일평 · 박찬익 · 조성환 · 신건식 · 김용호(金容鎬) · 신철(申澈) · 민제호 · 김갑 · 정환범 · 김용준(金容俊) · 민충식 · 이찬영(李贊永) · 김영무(金永武) · 이광 · 신석우 · 한진산(韓震山) · 김승(金昇) · 김덕(金德) · 변영만 · 윤보선 · 민병호(閔丙鎬) 등이었다.
회원은 300여 명에 달하였고, 구미 각지에 사무실을 만들어 활동하였다. 그 뒤 중국의 혁명 지도자들과 보다 깊은 관계를 유지코자 신아동제사를 조직, 중국 국민당과 사회 저명인사 중 송교인(宋敎仁) · 진기미(陳其美) · 호한민(胡漢民) · 당소의(唐紹儀) · 진과부(陳果夫) 등을 가입시켜 독립운동에 중국인의 지지를 받고자 노력하였다. 1913년 12월에는 독립운동을 담당할 청년들을 교육하기 위해 박달학원을 설립하였다.
1917년 8월에 잠시 조선사회당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당시 스톡홀름에서 국제사회주의자대회(이칭: 만국사회당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이 있자, 사회주의세력이 주도하는 국제회의에 능동적으로 참여해 한국의 독립을 촉구할 목적으로 신규식 등이 발의해 ‘조선사회당’이란 명칭을 쓴 것이다. 1918년 말 조직된 신한청년단에 동제사 소장파라 할 여원형, 선우혁, 서병호, 조동호 등이 참여하였다. 동제사와 신한청년단은 긴밀한 협력관계를 갖고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2. 신한혁명당
신한혁명당이라 함은 1915년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조직되었던 독립 운동 단체를 말한다. 1915년 3월 북경에 있던 성낙형(成樂馨) · 유동열등 독립 운동가들이 상해로 가서 박은식 · 신규식등 동제사 간부와 이상설 · 이춘일(李春日) · 유홍렬 등을 만나 신한혁명당의 조직을 협의하였다.
그들은 제1차 세계대전이 독일의 승리로 끝날 것이고, 종전 뒤 독일은 연합국의 일원인 일본을 공격할 것이며, 이때 일본과 원한이 깊은 중국은 독일과 함께 일본을 공격할 것이라고 향후의 세계정세를 전망하였다. 그리고 바로 그 시기를 조선이 독립할 기회로 보았다. 그런데 독일 · 중국과 긴밀한 연락을 위해서는 독일 · 중국이 제정(帝政)체제이므로 공화정치를 표방해서는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우선 제정체제를 표방하고 고종을 내세울 필요가 있다(복벽주의)는 데 의견을 모았다.
동제사 간부들이나 유동열 등이 이미 공화주의자로 변신하고 있었음에도 이처럼 제정체제를 표방한 것은 일종의 임시 방편책이었다. 그런데 명문 양반 가문 출신인 성낙형이 이를 주장한 것을 보면, 그는 신한혁명당 결성에 주도적 구실을 한 것으로 보인다.
본부는 북경에 두고, 지부는 중국의 상하이 · 한커우(漢口) · 펑톈(奉天) · 창춘(長春) · 안둥현(安東縣) · 옌지부(延吉府), 국내의 서울 · 원산 · 평양 · 회령 · 나남 등지에 두었다. 고종을 당수로 추대하고 본부장에 이상설이 추대되었고, 외교부장은 성낙형, 교통부장은 유동열, 재정부장은 이춘일, 상하이지부장은 신규식, 감독은 박은식, 창춘지부장은 이동휘 등이 각각 맡았다.
이들은 두 가지 활동 방침을 세웠다. 하나는 전쟁이 일어날 경우 중국을 지원하기 위해 안펑선(安奉線) 철도를 파괴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고종으로부터 위임을 받아 중국 정부와 중한의방조약(中韓誼邦條約)이라는 밀약을 맺는 것이었다. 그런데 첫 번째 구상은 중국의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일본의 21개조 요구를 모두 수락함으로써 무산되고 말았다. 두 번째 구상도 성낙형이 1915년 7월 서울에 들어와 변석붕(邊錫鵬) 등 수 명과 함께 고종의 밀명을 받을 방법을 협의하던 중 일본 경찰에 붙잡힘으로써 이 또한 수포로 돌아갔다.
두 가지 구상이 모두 무산된 이후 활동은 별다른 성과 없이 중단되고 말았다. 이처럼 활동이 쉽게 중단되었던 것은 국제 정세에 대한 그들의 분석이 중국의 일본에 대한 굴복으로 빗나가 버린 데에 가장 큰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당시 동제사의 간부인 신규식 등은 중국 국민당(國民黨)과 긴밀한 관계를 계속 가지는 등 공화주의 노선을 밟고 있었기 때문에, 제정을 표방하는 신한혁명당의 활동에는 소극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3. 신한 청년당
신한청년당이라 함은 1918년 중국 상해(上海)에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를 말한다. 당시 발기인으로 국내에서 망명해 온 김규식(金奎植)·여운형(呂運亨)·김철(金澈)·서병호(徐丙浩)·선우혁(鮮于爀)·조동호(趙東祜)·문일평(文一平)·정인보(鄭寅普)·신규식(申圭植)·신채호(申采浩)·조용은(趙鎔殷)·장덕수(張德秀) 등이 참여하였다.
마침 1918년 12월 15일경 미국 대통령 윌슨(Wilson,T.W)이 중국 정부를 위해 파견한 특사 클레인(Clain)이 상해에 왔다. 그는 “개막이 임박한 파리강화회의는 특히 약소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니, 대표를 파견하여 주장함이 좋을 것이다.”고 연설하였다.
이에 여운형·조동호·장덕수 등은 이 기회에 한국의 독립을 달성해야 한다는 의지로 장문의 글을 작성하였다. 그리고 강화회의에 전달해 달라는 주문과 함께 한국 대표도 참석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했으나 즉각 회답은 받지 못하였다.
신한청년단은 우선 자체의 조직을 강화하고 독립활동을 용이하게 주도하기 위해 부서와 인선을 정하였다. 이사장으로 서병호를 추대하고 이사로는 여운형·김구(金九)·이광수(李光洙)·안정근(安定根)·조동호·한원창(韓元昌)·한진교(韓鎭敎)·선우혁·김순애(金淳愛) 등이 선임되었다. 재무부·교제부·토론부·체육부·출판부·서무부 등 6개 부서에 회원은 150여 명이었다.
신한청년단은 외교에 능한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한국 대표로 파견하고, 여운형을 노령으로, 장덕수를 일본으로, 선우혁·김철·서병호 등을 국내로 파견, 이들과 긴밀하게 연락을 취하면서 세계정세 변화에 따른 대책을 협의하였다.
김규식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뒤 파리위원부를 설치, 독립운동에 심혈을 기울였다. 장덕수는 일본에서 2·8독립선언을 촉진시켰고, 국내로 들어온 선우혁은 관서 지방의 기독교인과 손을 잡은 뒤 3·1운동을 일으키도록 분위기를 조성해 주었다. 이로 인해 상해는 독립운동의 본부격이 되어 2·8독립선언에 참석했던 이광수와 최근우(崔謹愚)가 달려왔고, 여운형과 동생 운홍(運弘)도 노령과 미국으로부터 도착하였다.
국내에 파견되었던 선우혁·김철·서병호와 현순(玄楯)·최창식(崔昌植) 등도 모였다. 그 밖에 이봉수(李鳳洙)·강대현(姜大鉉)·안승원(安承源)·김구·김병조(金秉祚)·조상섭·이원익(李元益) 등이 국내에서 달려왔다.
만주와 노령에서는 이동녕(李東寧)·이시영(李始榮)·조완구(趙琬九) 등 30여 명이 모여 독립 문제가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신한청년단의 단강(團綱)은 대한독립·사회개조·세계 대동(世界大同)이었고, 『신한청년보(新韓靑年報)』를 기관지로 발간·배포하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뒤 30여 명의 신한청년단 핵심 단원들은 1919년 4월 초 1,000여 명의 동포를 배경으로 프랑스 조계의 바오창로(寶昌路) 329호에 독립임시사무소를 설치하였다. 이것이 뒷날(4월 11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모체가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이후인 1920년 4월 이후에는 민간사업을 경영하였으나 대부분의 인사들이 임시정부의 중요 인물로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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