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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두문자

민족주의 사학 두문자 : 신낭가 박혼식 정얼보 문조심 최불암

by noksan2023 2025. 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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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 사학 두문자 : 신낭가 박혼식 정얼보 문조심 최불암

 

 

민족주의 사학자

 

 

채호 : 낭가

:

:

일평 : 조선심

남선 : 불암

 

 

 

1. 신낭가

 

 

신채호의 낭가사상

 

 

낭가사상신채호가 1920년대에 한국고대사연구를 통해 이론적으로 체계화한 전통적인 민족사상이다. 신채호는 일제의 역사 왜곡과 날조에 맞서 한국사를 재정립함으로써 민족의 자강과 독립을 위한 민족정신을 고취하고자 했다.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정신사관이 아니라 단군조선시대의 수두제전, 연맹왕국시대의 영고·동맹·무천·소도, 고구려의 선배제도, 여기서 발전한 신라의 화랑도 등 면면히 이어져 온 우리 고유 민족사상의 구체적인 형태들을 역사 속에서 복원했다. 이렇게 우리 고유의 민족사상 속에서 민족의 저력을 확인하고 이를 자주독립이라는 시대정신의 씨앗으로 삼고자 한 사상이다.

 

당시 민족사학자들은 일제식민정책의 이론적 근거가 되고 있던 일본 관학자들의 식민사관에 정면으로 맞서, 왜곡되고 날조된 한국사를 재정립하여 국가와 민족의 자강과 독립을 위한 민족정신을 고취하고자 하였다. 이들 역사인식의 일반적인 특징인 정신사관은 신채호의 낭가사상을 비롯하여 박은식(朴殷植)의 ‘혼’, 문일평(文一平)의 ‘조선심(朝鮮心)’, 정인보(鄭寅普)의 ‘얼’, 최남선(崔南善)의 ‘조선정신’ 등으로 전개되었다. 이 가운데서도 낭가사상은 여타의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정신사관에 비해 보다 구체적으로 인식, 서술되고 있어 단연 이채롭다. 낭가사상은 민족적이고 근대지향적인 실학사상과 당시 서구의 주된 사상 조류인 민족주의를 수용, 보다 구체적인 역사방법과 이론으로 전통적인 민족사상의 기원 · 전승 · 기능을 구명하였다. 동시에 국권회복을 위한 근대적 자주독립정신을 앙양하여 민족의 진로와 시대정신을 밝히고자 한 데 낭가사상의 특성이 있다.

 

낭가사상 단군조선의 수두제전〔단군제〕에서 연맹왕국시대의 영고 · 동맹 · 무천 · 소도로, 그리고 고구려의 선배제도 및 신라의 화랑제도로 변천해 왔다. 이 사상이 주체적인 전통사상으로서 구체적으로 제도화되어 역사적인 구실과 기능을 하게 된 것은 고구려의 선배제도에서부터였다. 종래 신라 고유의 것으로만 이해되었던 화랑제도는 이러한 고구려의 선배제도를 모방하여 발전된 것이다. 이 같이 성장한 낭가사상은 고려 중기까지 명맥을 유지하다가 묘청(妙淸)의 난이라는 역사적 대사건으로 국풍파(國風派)가 유학파에게 패하여 몰락함으로써 사라지고 말았다.

 

이러한 신채호의 견해는 ‘평양자선인왕검지택(平壤者仙人王儉之宅)’이라는 신라 『선사(仙史)』의 문구에 주목하여 “선인 왕검이라 함은 삼국시대에 수두교도의 일단을 선배라 칭하고, 선배를 이두자로 ‘선인(仙人)’ 또는 ‘선인(先人)’이라 기록한 것이며, ‘선사’ 곧 왕검설교(王儉設敎) 이래 역대 선배의 사적을 기록한 것이니, ……”와 “낭은 곧 신라의 화랑이니, 화랑은 본래 상고(上古) 소도제단의 무사, 곧 그때에 ‘선비’라 칭하던 자인데, 고구려에서는 조의선인(皂衣仙人)이라 하고, 신라에서는 미모를 취하여 화랑이라 하였다.”는 낭가의 개념과 유래 및 발전과정을 구명함에서부터 비롯되었다.

 

 국선(國仙) 화랑은 진흥대왕이 곧 고구려의 ‘선배’제도를 닮아온 자라……선배를 ‘신수두’ 단전(壇前)의 경기회에서 뽑아, 학문에 힘쓰며, 수박(手搏) · 사예(射藝) · 기마 · 턱견이 · 깨금질 · 씨름 등 각종 기예를 하며, 원근 산수에 탐험하며 시가와 음악을 익히며, 공동으로 한 곳에 숙식하며, 평시에는 환난구제와 성곽 · 도로 등의 수축 등을 자임하고, 난시에는 전장에 나가 죽음을 영광으로 알아 공익을 위하여 일신을 희생하는 것이 ‘선배’와 같으니, ……”에서 낭가의 선출과 그 사상으로서의 사회적 기능을 밝혔다. 이어 묘청의 난을 부각시켜 사상사적 측면에서 시고(試考)하여 낭가사상의 쇠퇴과정까지 구명하고자 하였다.

 

신채호는 “역사란 무엇이뇨, 인류사회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부터 발전하여 공간부터 확대하는 심적 활동상태의 기록이다.”라고 역사를 정의하였다. 여기서 핵심인 ‘심적 활동상태’는 한국사에 적용할 때 낭가사상 활동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이론에 의해, 낭가사상과 이에 대한 고대사인식의 대강(大綱)인 고대사의 체계화(상고사의 체계화, 부여 · 고구려 중심의 체계화)와 구강회복론(舊疆恢復論 : 상고사의 영역, 한사군의 반도제외설, 고구려의 수 · 당과의 항쟁 및 나 · 제의 해외경략설)이 서술될 수 있었다. ‘민족 · 국가의 흥망성쇠가 그 사상의 추향 여하에 달린 것’으로 보는 신채호의 사안(史眼)은 근대 한국인의 의식 저변으로 침잠되어버린 낭가사상을 웅건한 한국고대사의 구체적인 역사경험의 구명을 통해 국난의 현실적인 역사현장으로 회상시킴으로써, 비아인 일본으로부터 국권을 회복하자는 데 궁극적인 뜻을 두고 있었다. 결국, 낭가사상은 그의 한국고대사의 인식과 서술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국권회복의 실천적 이념으로까지 발전되었던 것이다.

 

이상과 같은 낭가사상은 객관적이라는 고증이 강렬한 주관적인 신념을 수반하여 다소 무리하게 입론된 것이 한계이다. 그러나 반면에 그것이 가지는 사학사에 있어서의 의의는 자못 큰 것이다. 즉, 소박한 형태로나마 종교학적 · 민속학적 방법을 채용했고, 한국사의 흐름을 사상사적 측면에서 고찰해 방법론에 있어 역사인식의 단계를 높였고, 화랑도와 그 사상의 기원에 대한 재해석과 더불어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개성을 밝혔다는 점이다. 이에 덧붙여, 낭가사상은 입론의 궁극적인 목표가 시대정신을 반영한 조국의 씩씩한 자주독립에 있었기 때문에 민족사적 의의까지 함께 가지게 되는 것이다. 낭가사상이 비록 외세침략기의 시대적 소산물이라 해도, 발전적인 역사방법론과 선명한 역사이론에 의해 절실하게 서술되었고, 또한 자주적이고 전통적인 구실과 기능을 담당할 수 있는 가능성과 신념을 제시해주었다는 점에서 한국사의 현재와 미래에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신채호는 일제강점기 『조선상고사』, 『조선상고문화사』, 『조선사연구초』 등을 저술한 학자이며, 언론인·독립운동가이다. 1880년(고종 17)에 태어나 1936년에 사망했다. 『황성신문』 기자, 『대한매일신보』 주필로서 항일언론운동을 벌이며 신민회와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했고 1910년 중국으로 망명했다. 항일을 고취하는 글과 역사서를 집필하면서 대한독립청년단 조직,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1922년 이후에는 폭력을 통한 민중 직접혁명을 주장하여 무정부주의자의 길을 걸었다. 1928년 대만에서 체포, 여순 감옥에서 복역 중 순국했다.

 

본관은 고령(高靈). 호는 일편단생(一片丹生) · 단생(丹生) 혹은 단재(丹齋). 필명은 금협산인(錦頰山人) · 무애생(無涯生) · 열혈생(熱血生) · 한놈 · 검심(劍心) · 적심(赤心) · 연시몽인(燕市夢人), 가명은 유맹원(劉孟源). 충청남도 대덕군 산내에서 출생하였고, 충청북도 청원에서 성장하였다. 신숙주의 후예로 아버지는 신광식(申光植)이다.

 

문과에 급제해 정언(正言)을 지낸 할아버지 신성우(申星雨)로부터 한학교육을 받았으며, 10여 세에 『통감(通鑑)』과 사서삼경을 읽고 시문에 뛰어나 신동이라 불렸다. 18세 때에는 할아버지의 소개로 전 학부대신 신기선의 사저에 드나들며 장서를 섭렵해 그의 총애를 받았다. 신기선의 천거로 성균관에 입학, 관장 이종원(李鍾元)의 총애를 받았다. 한편, 당시 이름높은 유학자로서 성균관 교수 이남규(李南珪)의 문하에서 수학하며, 김연성(金演性) · 변영만(卞榮晩) · 이장식(李章植) · 유인식(柳寅植) 등과 교유하였다. 이 무렵 신채호는 독립협회운동에 참여해 소장파로 활약하였다. 22세 때에는 향리 부근인 인차리의 문동학원(文東學院) 강사로서 신규식 등과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25세 때에는 신규식 · 신백우 등과 함께 향리 부근에다 산동학원(山東學院)을 설립, 신교육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26세 되던 1905년 2월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관직에 나아갈 뜻을 버리고 장지연의 초청으로 「황성신문」의 기자가 되어 논설을 쓰며 크게 활약하였다.

 

1905년 11월 『황성신문』이 무기 정간되자, 이듬해 양기탁의 천거로 「대한매일신보」 주필로 초빙되어 당당한 시론(時論)을 써서 민중을 계몽하고 정부를 편달하며 항일언론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우리나라 역사관계 사론(史論)을 써서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10년 망명할 때까지 『대한매일신보』에 「일본의 삼대충노(三大忠奴)」 · 「금일 대한국민의 목적지」 · 「서호문답(西湖問答)」 · 「영웅과 세계」 · 「학생계의 특색」 · 「한국자치제의 약사」 · 「국가를 멸망케 하는 학부」 · 「한일합병론자에게 고함」 · 「이십세기 신국민」 등의 논설을 실었다. 그리고 「독사신론」 · 「수군 제일 위인 이순신전」 · 「동국거걸최도통전(東國巨傑崔都統傳)」 · 「동국고대선교고(東國古代仙敎考)」 등의 역사관계 논문과 시론 「천희당시화」 등을 연재하였다. 또한 『대한협회월보(大韓協會月報)』와 『대한협회회보』에 「대한의 희망」 · 「역사와 애국심과의 관계」 등을 발표하였다. 그 밖에 역술서 「이태리건국삼걸전」과 『을지문덕전(乙支文德傳)』을 국한문판으로 발행하기도 하였고, 「가정잡지」의 발행에도 관여하였다.

 

「독사신론」은 그 뒤 내용의 일부가 가감, 수정되어 최남선이 발행하던, 「소년」 제3년 제8권에 「국사사론(國史私論)」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되었다. 그런데 이 글에서 이미 단군 · 부여 · 고구려 중심의 주체적인 민족주의사관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 무렵 신채호가 집필한 「동국거걸최도통전」과 「이순신전」 · 『을지문덕전』 등은 한말의 민족적인 위기를 타개할 영웅의 출현을 대망하면서 썼던 것으로 영웅사관(英雄史觀)을 일정하게 보여주고 있다.

 

한말 애국계몽운동에 힘쓰던 신채호는 28세 무렵, 양기탁 · 이동녕 · 이회영 · 이동휘 · 안창호 · 전덕기 · 이갑 · 이승훈 등과 더불어 항일비밀결사인 신민회 조직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국채보상운동에도 참여하여 논설을 통해 적극 지원하기도 하였다. 또한, 신채호가 30세 되던 해에는 윤치호 · 안창호 · 최광옥 · 최남선 · 박중화 · 장응진 등과 신민회의 방계조직인 청년학우회를 발기하고 취지서를 집필하였다.

 

1910년 봄에는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학교(五山學校)와 안동현(安東縣)을 거쳐 산둥반도[山東半島]의 칭다오[靑島]에 도착, 신민회 동지들과 함께 청도회의에 참석하고 독립운동을 위해,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윤세복 · 이동휘 · 이갑 등과 광복회(光復會)를 조직하고 부회장으로 활약하였다. 한편, 「해조신문」의 후신 「대동공보」에도 관여한 듯하며, 이 해 12월에 창설된 권업회에서 기관지 「권업신문」을 창간하자 주필로 활약하였다.

 

1913년 북만주 밀산(密山)을 거쳐 상해(上海)로 가서, 동제사에 참여, 활동하는 한편 문일평 · 박은식 · 정인보 · 조소앙 등과 박달학원을 세워 교육에도 힘썼다. 이듬해 윤세용 · 윤세복 형제의 초청을 받아 만주 봉천성(奉天省) 회인현(懷仁縣)에 가서 동창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조선사』를 집필하였다. 그리고 백두산 등산, 광개토대왕릉 답사 등 고구려와 발해의 고적지를 돌아보아 부여 · 고구려 · 발해 중심의 한국고대사를 체계화하는 데 많은 도움을 받기도 하였다. 다시 북경(北京)으로 돌아가 한국사의 새로운 체계화를 구상하면서 중편소설 「꿈하늘」을 집필했는데, 이는 일종의 환상적인 사상소설로서 신채호의 애국적 항일투쟁의식을 그린 것이다.

 

1918년경부터 북경의 보타암(普陀庵)에 우거하면서 국사연구를 계속하는 한편, 『북경일보(北京日報)』 등에 논설을 기고하기도 하였다. 1919년 북경에서 대한독립청년단을 조직, 단장이 되었다. 그 해 4월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참여, 임시의정원 의원이 되었으며, 한성정부에서는 평정관(評定官)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그 해 7월 전원위원회(全院委員會) 위원장 겸 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으나, 이승만의 노선에 반대하여 이를 사임하였다. 한편 임시정부기관지 「독립신문」에 맞서 「신대한」을 창간, 주필이 되어 적극적인 독립노선을 주창하였다. 특히, 이승만 · 정한경 등의 위임통치청원은 그 뒤에도 계속해서 신채호 등에 의해 반민족적인 행위로 규탄받았다.

 

1922년 의열단장(義烈團長) 김원봉의 초청을 받아 상해에 가서, 이듬해 초에 조선혁명선언으로 불리는 의열단선언을 집필, 발표하였다. 이 선언에서 신채호는 폭력에 의한 민중 직접 혁명을 주장하였다. 이 선언은 일제의 침략과 압제를 경험하면서 성장한 민중세력을 일제의 이족통치(異族統治)로부터 뿐만 아니라, 당시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약탈적 · 불평등적인 제국주의 체제를 타파하는 주인공으로 부각시켰다는 의미에서 신채호의 민족주의 이념의 폭과 질의 강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신채호는 1922년 1월 초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서 창조파의 맹장으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개조파(改造派)와의 대립으로 5월 회의가 결렬되자, 북경으로 돌아와 석등암(石燈庵)에 우거하면서 한국고대사연구에 전념하였다. 이 무렵 북경대학 도서관에 출입하면서 이석증(李石曾) · 이대교(李大釗)와 교유하게 되었다.

 

1924년경부터 신채호가 쓴 평론과 논문들이 「동아일보」 · 「조선일보」 등에 발표되었다. 신채호의 연보에 의하면, 1925년에 민족독립운동의 방편으로 대만인 임병문(林炳文)의 소개로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에 가입하였다고 되어있다. 그런데 1928년에 발표된 「용과 용의 대격전」 · 「꿈하늘」 등의 사상소설에서는 자유 · 평등 · 폭력 · 혁명을 예찬하는 무정부주의의 논리가 강하게 나타난다고 한다. 1928년 4월 무정부주의동방연맹대회에 참석해 활동하는 등 점점 행동 투쟁에 나섰던 신채호는, 5월 대만에서 외국위체위조사건(外國爲替僞造事件)의 연루자로 체포되어 대련(大連)으로 이송, 1930년 5월 대련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여순감옥(旅順監獄)으로 이감, 복역하던 중 뇌일혈로 순국하였다.

 

신채호는 한말의 애국계몽운동과 일제 하 국권회복운동에 헌신하면서, 그러한 운동 못지않게 한국사연구를 통한 민족운동에 앞장섰다. 한말 『대한매일신보』에 사론을 싣기도 하였고, 『소년』에 「국사사론」을 연재했으며, 최영 · 이순신 · 을지문덕 등 국난을 극복한 민족영웅에 관한 전기도 썼다. 이 무렵 신채호는 역사의 주체를 영웅으로 보는 영웅중심사관을 가지고 있었다. 1910년 해외에 망명한 신채호는 본격적으로 국사연구에 노력해, 1920년대에 이르러 「조선상고사」 · 「조선상고문화사」 · 「조선사연구초」 등 주저(主著)들을 집필하였다. 그리고 1930년대에 『동아일보』 · 『조선일보』에 연재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저서들에 보이는 신채호의 역사학은, 첫째 사학의 이념이나 방법론에서 중세의 사학을 극복하고 근대적인 사학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둘째 당시 일본 관학자(官學者)들의 조선사 연구 자세에서 보이는 식민주의적 사학을 극복하는, 민족주의적 사학으로서의 성격이 강하게 나타난다. 셋째 조선혁명선언 이후 역사의 주체를 민중에게서 발견하려는 민중중심사관이 뚜렷이 나타나며, 넷째 역사를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의 기록으로서 파악하는 한편, 역사 연구에 있어서 실증(實證)을 강조하게 되었다. ‘아’와 ‘비아’의 투쟁으로서의 역사학의 인식은 변증법적 역사발전에 대한 인식으로 보인다.

 

신채호는 앞에서 열거한 한국고대사관계의 논문과 저서를 남겼는데, 그러한 논술들은 민족주의 이념에 입각해 독자적인 경지를 내보인 것으로, 과거의 유교주의에 입각한 관학적 역사학과 재야(在野)에서 면면히 이어온 비유교적인 사학을 종합한 데서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한 의미에서 신채호의 사학은 한국사학사의 여러 흐름들을 종합한 것이다. 신채호의 한국사 기술은 거의 고대사에 국한되고 있는 바, 그 특징은 다음 몇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단군 · 부여 · 고구려 중심으로 상고사를 체계화했고, 둘째 상고사의 무대를 한반도 · 만주 중심의 종래의 학설에서 벗어나 중국 동북지역과 요서지방(遼西地方)에까지 확대하고 있다. 셋째 종래 한반도내에 존재했다는 한사군(漢四郡)을 반도 밖에 존재했거나 혹은 전혀 실존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으며, 넷째 상고시대의 조선족과 삼국시대의 백제가 중국의 산둥반도 등에 진출했다는 것이며, 다섯째 삼한의 이동설 및 ‘전후 삼한설’을 주장했고, 여섯째 부여와 고구려 중심의 역사인식에 따라 신라의 삼국통일을 부정적으로 과소평가하는 것 등이라 하겠다.

 

이러한 신채호의 역사학은 우리나라의 근대사학 및 민족주의사학의 출발로서 평가되기도 하나, 민족주의 사상의 역사 연구에의 지나친 투영이 신채호의 역사이론 및 한국 고대사 인식을 교조적(敎條的) · 독단적으로 이끌어갔다는 점을 배제할 수 없다고 주장되기도 한다.

 

 

2. 박혼식

 

 

박은식의 혼사상

 

 

 

박은식은 일제강점기 『안중근전』, 『한국통사』, 『대동민족사』 등을 저술한 학자이자 언론인, 독립운동가이다. 1859년(철종 10)에 태어나 1925년에 사망했다. 젊어서 성리학 연구에 몰두해 성리학자로서 명성이 높았으나 독립협회의 영향을 받고 개화사상가로 변신했다. 국권회복의 실력을 양성하기 위해 개화사상과 신학문에 힘쓸 것을 주장했고, 황성신문 등 언론을 통해 애국계몽운동을 펼치는 데 주력했다. 한국인의 혼을 되살리기 위해 『한국통사』를 저술했고, 임시정부가 혼란에 빠지자 수습했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성칠(聖七), 호는 겸곡(謙谷) · 백암(白巖). 황해도 황주 출생. 농촌 서당 훈장 박용호(朴用浩)의 아들이다. 국권을 잃은 후 중국에 망명해 독립운동에 종사할 때에는 박기정(朴箕貞)이라는 별명을 쓰기도 했고, 태백광노(太白狂奴) 또는 무치생(無恥生)의 별호를 쓰기도 하였다.

 

10세부터 17세까지 아버지의 서당에서 정통파 성리학과 과거시험 공부를 하였다. 과거공부에 회의를 느껴 고향을 떠나 당시 황해도 일대에서 이름나 있던 안태훈(安泰勳: 安重根의 아버지)과 교우하면서 문장을 겨루어 황해도의 양 신동이라는 평을 듣기도 하였다. 이후 전국을 답사하던 중 1880년(고종 17)에 경기도 광주 두릉(斗陵)에 사는 정약용의 제자인 신기영(申耆永)과 정관섭(丁觀燮)을 찾아가서 정약용이 저술한 정법상(政法上)의 학문을 섭렵하면서 실사구시의 학풍을 가지게 되었다.

 

1882년에 상경해 서울에 머무는 동안 7월의 임오군란을 목격하고 시무책을 지어 국왕에 제출하였다. 받아들여지지 않자 매우 실망해 낙향, 태천(泰川)의 큰 학자 박문일의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1885년 어머니의 간절한 요구에 따라 향시에 응시해서 특선으로 뽑혔다. 그 뒤 1888년부터 1894년 갑오개혁이 일어날 때까지 6년간 능참봉을 한 것이 관직생활의 전부였다. 이 시기에 박은식의 성리학은 높은 경지에 도달해 서북지방에서는 물론이요 중앙에서도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이름높은 성리학자로서 자신의 학문을 정립한 후인 1898년에 독립협회의 사상과 운동의 영향을 받고 성리학과 위정척사사상에서 개화사상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1898년에 독립협회에 가입해 회원이 되었다. 그 해 11월의 지식인들이 중심이 된 만민공동회에서는 문교부장급 간부로 활동하였다.

 

1898년 9월 남궁억 · 유근 · 나수연 등이 「황성신문」을 창간한 후에는 장지연과 함께 주필(논설기자)이 되었다. 독립협회가 강제해산 당한 후에는 1900년부터 경학원(經學院) 강사와 한성사범학교의 교수를 역임하였다. 이 때 교육진흥책을 논구하는 「겸곡문고」 「학규신론」를 저술하였다.

 

1904년 7월 양기탁과 베델(Bethell, E. T., 裵說) 등에 의해 「대한매일신보」가 창간되자, 양기탁의 추천으로 이 신문의 주필을 지냈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자, 장지연은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논설을 써서 일제를 비판하였다. 이에 일제는 『황성신문(皇城新聞)』을 정간시켰다.1906년에 복간되었으나 장지연이 복귀하지 못하자, 『황성신문(皇城新聞)』을 지키기 위해 1910년 8월까지 이 신문의 주필로서 활동하였다.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에는 주로 객원으로서 논설만 기고하였다.

 

1906년 이후의 박은식의 애국계몽운동은 광범위한 부문에서 정력적으로 전개되었다. 박은식은 이 시기부터는 완전히 변법적 개화사상가가 되었다. 위정척사사상과 유림을 신랄히 비판하면서 국권 회복의 실력을 양성하기 위해서 개화사상과 신학문에 힘쓸 것을 계몽하였다.

 

1906년 3월 창립된 대한자강회에 가입해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기관지 『대한자강회월보(大韓自强會月報)』에 많은 애국계몽 논설들을 발표하였다. 1906년 10월에는 자신이 앞장서서 서우학회를 조직하였다. 기관지인 『서우(西友)』의 주필을 맡아서 국민을 계몽하는 데 진력하였다. 1906년 12월에 창간호를 낸 후 1908년 1월까지 모두 4책을 낸 『서우(西友)』를 모두 직접 편집하고 지도하였다.

 

1907년 4월 양기탁 · 안창호 · 전덕기 · 이동녕 · 이동휘 · 이회영 · 이갑 · 유동열 등을 비롯한 다수의 애국계몽운동가들에 의해 국권 회복을 위한 비밀결사로서 신민회가 창립되자, 이에 가입해 원로회원으로서 교육과 출판 부문에서 활동하였다. 신민회의 방침에 따라 서우학회와 한북흥학회가 통합해 1908년 1월 서북학회가 창립되었다. 박은식은 실질적으로 이 학회를 지도하고, 기관지 『서북학회월보(西北學會月報)』의 주필로 적극 활동하였다.

 

또한 서북학회의 산하 교육기관으로서 서울에 서북협성학교를 설립하는 데 주도적 구실을 수행하였다. 처음에는 이종호를 교장으로 추천했다. 그러나 이종호가 동지들과 함께 독립군기지의 창설을 목적으로 국외로 망명하자, 이 학교의 교장이 되어 신교육 구국운동을 정력적으로 전개하였다. 이어 서북학회 담당지역에 서북협성학교의 지교(支校) 설립을 추진해 1908년 5월부터 1909년 말까지 사이에 63개 지교를 설립하였다. 이 무렵 일제는 신기선 등의 대동학회를 내세워 유림계를 친일화하려는 정치 공작을 전개하였다. 이에 대항해 장지연 · 이범규(李範圭) · 원영의(元泳儀) · 조완구 등과 함께 대동교(大同敎)를 창립하였다.

 

박은식은 대동사상(大同思想)과 양명학(陽明學)에 입각해 유교를 개혁해서 유림계와 유교문화를 국권회복운동에 서게 하려고 노력하였다. 이 때 유교 개혁운동의 일환으로 저술된 것이 『왕양명실기(王陽明實記)』이다.

1905∼1910년 사이에는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와 『황성신문(皇城新聞)』을 비롯해 다수의 신문과 잡지들에 실로 많은 논설을 썼다. 이로써 국권 회복의 실력 배양을 위한 신교육 구국사상 · 실업 구국사상 · 사회관습 개혁사상 · 애국사상 · 대동사상 등을 설파해 애국계몽운동을 고취함으로써 한말 최고의 애국계몽사상가로서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박은식의 애국계몽사상의 또 하나의 특징은 애국계몽운동을 의병운동과 연계지을 것을 강조했다는 점이다. 박은식은 이것을 일제의 검열 하에서 연무제진(聯武齊進)이라고 표현했는데, 무장운동(의병운동)과 연계해 함께 나란히 전진한다는 의미이다. 박은식의 이러한 사상과 활동은 애국계몽운동기(1905∼1910)에 활동한 사상가들 중에서 전국민에게 애국사상을 배양하는 데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최고의 애국계몽사상사로 후학들에 의해 평가되고 있다.

 

일제는 1910년 8월 한국을 완전히 식민지로 병탄한 직후 『황성신문(皇城新聞)』 · 『서북학회월보(西北學會月報)』를 비롯한 모든 신문과 잡지와 언론기관들을 폐쇄하였다. 박은식이 저술한 모든 저서들도 ‘금서(禁書)’로 처리되어 발행과 독서가 금지되었다.

 

박은식은 이러한 무단탄압으로 한국 민족의 ‘국혼(國魂)’이 들어 있는 역사책들이 모두 압수, 소각되어 국민과 다음 세대들이 한국 민족의 역사를 잃어버려 한국인의 긍지와 민족성마저 상실하지 않을까 매우 우려하였다.

“국체(國體)는 비록 망했지만 국혼이 소멸당하지 않으면 부활이 가능한데, 지금 국혼인 역사마저 불태워 소멸하니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고 탄식하였다. 박은식은 마침내 1911년 4월 독립운동과 국혼이 담긴 역사서를 쓰기 위해 망명을 결행하였다.

 

압록강을 건너 국경을 탈출해서 만주의 환인현(桓仁縣) 흥도천(興道川)에 있는 동지 윤세복(尹世復)의 집에 1년간 머물면서 저술에 집중하였다. 그리고 독실한 대종교(大倧敎) 신도인 윤세복의 영향으로 대종교 신도가 되었다.  당시 저술한 책들은 『동명성왕실기(東明聖王實記)』 · 「발해태조건국지」 · 「몽배금태조」 · 「명림답부전」 · 「천개소문전」 · 「대동고대사론」 등이다.

 

1912년 상하이로 가서 신규식 등과 함께 동제사를 조직하고, 동포들의 자녀 교육을 위해 박달학원을 설립하였다. 1914년에는 홍콩으로 가서 중국인 친우들의 요청으로 중국어잡지 『향강(香江)』의 주간이 되었다. 이 시기에 캉유웨이[康有爲] · 량치차오[梁啓超] · 탕사오이[唐紹儀] · 징메이주[景梅九] 등을 비롯한 다수의 중국혁명동지회 계통 인물들과 친교를 맺었다. 『향강』을 통해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전제정치를 비판하다가 폐간당하자 다시 상하이로 돌아왔다. 상하이에서 「안중근전」을 저술하고, 망명 후 꾸준히 집필하던 「한국통사」를 완성해 중국인 출판사에서 1915년에 간행하였다. 『한국통사(韓國痛史)』는 3편 114장으로 구성된 대작이다.

1864년부터 1911년까지의 한국근대사를 일반근대사, 일제침략사, 독립운동사의 세측면에서 일제 침략을 중심으로 하나의 체계로 서술하였다.

 

박은식은 『한국통사(韓國痛史)』에서 일제침략사를 중심으로 근대사를 서술함으로써

 

① 대외적으로 일본제국주의 침략의 잔학성과 간교성을 폭로, 규탄하고,

② 대내적으로 국민들에게 ‘통(痛)’을 가르쳐 주어 민족적 통분의 격발에 기초한 독립운동의 정신적 원동력을 공급하며,

③ ‘국혼’과 ‘국백(國魄)’을 나누어 일제에게 빼앗긴 것은 ‘국백’뿐이요 ‘국혼’은 남아 있으니 ‘국혼’을 잘 유지, 강화해 완전한 독립을 쟁취하도록 교육하고,

④ 자손만대에 일제에게 침략당한 아픈 역사의 교훈을 새기고 반성을 촉구하려고 하였다.

 

『한국통사(韓國痛史)』는 간행 직후 중국 · 연해주 · 미주의 한국인 동포들뿐만 아니라 국내에도 비밀리에 대량 보급되어 민족적 자부심을 높여주고 독립투쟁정신을 크게 고취하였다. 일제는 이에 매우 당황해 1916년에 조선반도사편찬위원회 : 1925년에 조선사편수회로 개칭를 설치하였다. 처음에는 『조선반도사』를 준비하다가 계획을 수정해 「조선사」 37책을 편찬하여 식민주의사관에 의한 한국 역사의 왜곡을 시도하였다.

 

편찬 동기를 박은식의 『한국통사(韓國痛史)』와 같은 독립을 추구하는 역사서의 해독을 소멸시키는데 있다고 밝혔다. 여기서도 박은식의 『한국통사(韓國痛史)』의 영향이 얼마나 컸는가를 미루어 알 수 있다. 박은식은 상하이에서 「이순신전(李舜臣傳)」을 저술하였다. 이 시기에 캉유웨이의 위탁을 받아 중국 신문인 『국시일보(國是日報)』의 주간이 되었다가, 이 신문이 얼마 뒤 정간되어 사임하였다. 상하이에서 이상설 · 신규식 · 유동열 등 동지들과 함께 신한혁명당을 조직해 그 취지서를 쓰고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이어 다시 상하이에서 신규식 등과 함께 대동보국단(大同輔國團)을 조직해 단장으로 추대되기도 하였다.

 

1918년 연해주 한국인동포들의 간곡한 요청으로 송왕령(宋王嶺)으로 가서 『한족공보(韓族公報)』의 주간으로 일하였다. 그러나 이 신문은 재정난으로 곧 발행이 중단되었다. 이후 한국인촌의 여러 학교를 순회하면서 한국 역사를 강연해 독립사상을 고취하였다. 또 『발해사(渤海史)』와 『금사(金史)』를 한글로 역술하고, 「이준전(李儁傳)」을 저술하였다.

 

박은식은 1919년 3 1 운동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맞이하였다. 이 때가 61세의 고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동지들과 함께 대한국민노인동맹단(大韓國民老人同盟團)을 조직해 취지서를 쓰고 지도자로서 활동하였다. 대한국민노인동맹단은 강우규를 국내에 파견해 일제총독 사이토[齋藤實]에 대한 폭탄투척의거를 일으켰다. 1919년 8월 상하이로 가서 대한민국임시정부 및 연해주 대한국민의회와 서울의 한성정부의 통합에 의한 9월의 통합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을 지원하였다. 이때에도 전면에는 나서지 않고 원로로서 뒤에서 지원하였다.

 

동시에 상하이에서 「한국독립운동지혈사」의 집필을 시작해 1920년 12월 간행하였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는 1884년 갑신정변부터 1920년 독립군 항일무장투쟁까지의 한국 민족의 독립투쟁사를 3 · 1운동을 중심으로 서술해 한국근대사 체계에 또 하나의 고전을 만든 역작이었다. 이 책에서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죄상을 낱낱이 비판하고, 3 · 1운동이 갑신정변 이래의 민족독립운동이 민족 내부에 축적되어 봉기한 것임을 설명하였다.

 

그러면서 역사의 대세와 국내 정세는 일본 제국주의가 반드시 패망하도록 변화하고 있으며, 3 · 1운동을 전환점으로 한국 민족의 불굴의 독립운동이 반드시 독립을 쟁취하도록 전개되고 있다는 최후의 승리에 대한 낙관적 견해를 표명하였다.

 

1923년 국민대표회의 실패 후 임시정부가 극도로 약화되고 독립운동계 전체가 극도의 혼란과 분열에 빠졌다. 우선 사태를 수습하고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의 간행을 지속하기 위해 1924년에 독립신문사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뒤이어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이 1924년 6월 ‘이승만대통령유고안(李承晩大統領有故案)’을 통과시킨 다음 임시정부의 거듭되는 혼란을 수습해 줄 원로로서 박은식을 임시정부 국무총리 겸 대통령대리로 추대하였다. 박은식은 사태의 중대성에 비추어 수락하였다.

 

임시의정원은 1925년 3월 21일 결단을 내려 수년 동안 독립운동가들을 혼란시켜 온 위임통치청원과 기타 실정의 책임을 물어서 ‘임시대통령 이승만 탄핵안’을 통과시켜 이 문제를 일단락지었다. 뒤이어 1925년 3월 23일, 박은식은 임시의정원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며, 이튿날인 3월 24일 임시의정원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제2대 대통령 취임을 선언하였다.

 

박은식은 임시정부 대통령으로서 사태를 수습하기 위한 기본 방책의 하나로 1925년 3월 30일 헌법개정안을 임시의정원에 제출하였다. 개헌의 초점은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국무령제(國務領制)를 실시해 국무령을 중심으로 한 내각책임제로 바꾸는 것이었다. 박은식은 신헌법에 의거해서 서로군정서 총재였던 이상룡을 국무령으로 추천하였다. 이상룡이 선출되자 스스로 대통령을 사임하였다. 박은식이 대통령을 사임하고 은퇴했을 때에는 인후염과 기관지염으로 병색이 완연히 나타나고 있었다.

 

박은식은 임종이 가까워오자 동포들에게 독립쟁취의 최후 목적 달성을 위해 반드시 단결하라는 간곡한 유촉을 남기고, 장엄한 애국적 일생을 마쳤다. 저서로는 앞에서 언급한 이외에 『대동민족사(大東民族史)』 · 『단조(檀祖)』가 있다.

 

 

3. 정얼보

 

 

정인보

 

 

 

정인보는 해방 이후 『조선사연구』, 『양명학연론』 등을 저술한 학자. 한학자, 교육자, 역사가이다.  본관은 동래(東萊). 유명(幼名)은 정경시(鄭景施). 자는 경업(經業), 호는 담원(薝園)·미소산인(薇蘇山人). 아호는 위당(爲堂). 서울 출신. 조선 명종대의 대제학 정유길(鄭惟吉)의 후손으로, 철종대의 영상 정원용(鄭元容)의 증손인 장례원부경(掌禮院副卿)·호조참판을 역임한 정은조(鄭誾朝)의 아들이다.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한문을 배웠고, 13세 때부터 이건방(李建芳)을 사사하였다. 정인보의 문명은 이미 10대 때부터 널리 알려졌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국가의 주권이 손상받고 이에 대한 국권회복투쟁이 활발히 전개되며 세상이 시끄러워지던 한말, 관계의 뜻을 버리고 부모와 더불어 진천(鎭川)·목천(木川) 등지에 은거하며 학문에 전념하였다.

 

1910년 일제가 무력으로 한반도를 강점하여 조선조가 종언을 고하자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 국제 정세를 살폈다. 얼마 후 귀국하였다가 1912년 다시 상해로 건너가 신채호(申采浩)·박은식(朴殷植)·신규식(申圭植)·김규식(金奎植) 등과 함께 동제사(同濟社)를 조직, 교포의 정치적·문화적 계몽활동을 주도하며 광복운동에 종사하였다. 그러나 부인 성씨(成氏)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노모의 비애를 위로하고자 귀국하였다. 귀국 후 국내에서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펴다 여러 차례 일본 경찰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서울로 이사한 뒤 연희전문학교·협성학교(協成學校)·불교중앙학림(佛敎中央學林) 등에서 한학과 역사학을 강의하였다.

 

후배들을 가르쳐 민족의 역량을 키우는 교수 생활에 힘쓰는 한편, 『동아일보』·『시대일보』의 논설위원으로 민족의 정기를 고무하는 논설을 펴며 민족계몽운동을 주도하였다. 1926년 순종이 죽었을 때는 유릉지문(裕陵誌文) 찬술의 일을 맡아보았다. 다음 해 불교전문학교·이화여자전문학교에도 출강하였다.

 

1931년에는 민족문화의 유산인 고전을 민족사회에 알리고자 다수의 고전을 소개하는 「조선고전해제」를 『동아일보』에 연재하였다. 1935년 조선 후기 실학 집대성자인 정약용(丁若鏞) 사후 100주년을 맞아 조선 후기의 실학을 소개하기 위한 학문행사를 주도, 실학연구를 주도하였다. 실학이라는 역사적 용어는 이때부터 사용되었다.

 

한편, 이 무렵부터 조선 양명학에 관심을 가지고 일련의 양명학자들의 학문을 추적하였고, 1933년 66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양명학연론(陽明學演論)」을 연재해 많은 호응을 얻었다. 양명학이나 실학에 대한 학문적 관심으로 볼 때, 단순한 한학자가 아니라 성리학과 더불어 유학의 또 다른 유파(流派)나 성리학 내에 자생적으로 일어선 새로운 실(實)의 유학풍을 밝혀, 조선 유학의 폭넓은 이해를 시도해 보고자 하는 진취적 학풍을 가진 학문활동으로 이해된다.

 

1936년 연희전문학교 교수가 되어 한문학·국사학·국문학 등 국학 전반에 걸친 강좌를 담당하였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뒤 국학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거세지자 1943년 가솔을 이끌고 전라북도 익산군 황화면 중기리 산중에 은거하였다. 광복이 되자 곧 서울로 상경, 일제의 포악한 민족말살정책으로 가려졌던 국학을 일으켜 세우고 교육에 힘을 쏟아 민족사를 모르는 국민에게 바른 국사를 알리고자 1946년 9월 『조선사연구(朝鮮史硏究)』를 간행하였다.

 

정인보의 역사의식은 신채호의 민족주의 사학의 전통을 잇는 것이기는 하나 독립투쟁의 방도로서 민족사 연구를 지향하던 신채호의 민족사학과 달리, 엄밀한 사료적 추적에 의한 사실 인식과 그에 대한 민족사적 의미의 부각을 의도하는 신민족주의 사학의 입장에 서는 것이었다.

 

1947년 국학의 최고학부를 표방하고 설립된 국학대학(國學大學) 학장에 취임, 일제의 광폭한 식민정책으로 일시 단절된 듯하던 국학을 일으켜 세우고, 발전시키려는 새로운 각오로 다시금 육영사업에 투신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이 수립되자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李承晩)의 간곡한 청으로 신생 조국의 관기(官紀)와 사정(司正)의 중책을 지닌 감찰위원장이 되었다.

 

그러나 1년 후 정부의 간섭으로 의지를 펼 수 없다고 판단, 미련없이 자리를 사임하였다. 이후 한때나마 학문과 교육을 떠났던 심정을 달래고자 남산동에 은거하며 오로지 국학연구에 몰두하였다. 1950년 6·25가 일어났던 그 해 7월 31일 서울에서 공산군에 의해 납북되었다. 시문·사장(詞章)의 대가로 광복 후 전조선문필가협회의 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하였으며, 서예에 있어서도 일가를 이루었고, 인각(印刻)에도 능하였다.

 

30여 년을 두고 대학 강단에서 국고(國故)·절의(節義)·실학·양명학과 역사학으로 후학들을 지도하였고, 국혼(國魂)·경세(警世)·효민(曉民)의 학덕이 높았던 학자이며 교육자였다. 저서로는 『조선사연구』와 『양명학연론』이 있고, 시문과 국학 논고의 글은 『담원시조집(薝園時調集)』·『담원문록(薝園文錄)』·『담원국학산고(薝園國學散藁)』에 수록되어 있다.

 

 

4. 문조심

 

 

문일평의 조선심

 

 

 

문일평은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사학자 겸 언론인이자 교육자, 독립운동가이다. 『조선일보』 편집고문 등으로 활약하였으며, 한국사 연구에도 노력을 기울여 많은 논문을 발표하였다. 일제에 의해 국학 연구의 기초가 흔들리던 시기에 역사 연구를 통해 언외(言外)의 의미를 강조하였다.

 

문일평(文一平)은 1888년 5월 15일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나 1939년 4월 3일 사망하였다. 유년 시절부터 한학을 수학하였다. 1905년 일본 도쿄로 유학하여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을 중퇴하고 태극학회 일어 강습소인 태극학교에 입학하여 일본어를 공부하였다. 1906년 신학기에 도쿄 세이소쿠〔正則〕학교에 입학하였고, 1907년 9월 메이지학원 중학부 보통과 3학년에 편입하여 1910년에 졸업하였다. 1911년 봄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고등예과에 입학하였다.

 

1906년 말부터 1908년까지 태극학회의 기관지 『태극학보』에 「자유론」 등을 발표하였다. 1909년 2월 메이지학원 보통과 4학년 시절 교내 연설회에서 ‘청년과 신세계’라는 주제로 연설하였다. 1910년 2학기 평안북도 의주 양실학교를 거쳐 서울 경신학교로 전근하였고, 신민회 회원으로서 상동청년회에서 주관하는 토요강습소에서 대중 강연 활동을 하였다. 와세다대학 유학 시절 안재홍 · 김성수 · 장덕수 · 윤홍섭(尹弘燮) 등과 교유하였다.

 

1912년 유학생친목회 기관지 『학계보』 창간호의 편집인 겸 발행인을 겸직하였고, 같은 해 7월 고등예과 수료 후 정치학과에 입학하였으나, 1913년 1월 중국 상하이에 도착하여 프랑스 조계(租界)주1에서 생활하였다. 1913년 신규식의 주선으로 중국 상하이 『대공화일보(大共和日報)』사에 취직하여 논설을 쓰고 독립운동 단체인 동제사에 가입하였다. 동제사에서는 청년 유학생과 독립운동가 육성을 위해 상하이 프랑스 조계 내에 박달학원이 설립되자 박은식 · 신채호 · 홍명희 · 조소앙 등과 함께 지도교수로 활동하였다.

 

1914년 4월 중국에서 귀국하였고, 1918년 박승빈 · 오세창 · 최남선 등과 함께 계명구락부를 조직하여 민족 계몽운동에 힘쓰고자 하였다. 1919년 3 1 운동에 참여하여 3월 12일 종로 보신각주2에서 이른바 독립선언사의 일종인 「애원서(哀願書)」를 낭독하였다가 체포되어 같은 해 경성지방법원에서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11월 6일 징역 8월 형을 선고받았으며, 1920년 3월 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형기를 마치고 출소하였다.

 

1920년 8월에는 조선노동대회에 참여하여 교육부장에 선출되었으며, 한성도서주식회사 출판부 촉탁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9월에는 「서울」 제6호에 「일본인이 저술한 이충무전」을 발표하였다. 1921년 6월 계명구락부에서 발행하는 『신민공론』의 동인으로 활동하였고, 1922년부터 1923년까지 중동학교 교사로 재직하였다. 1923년 1월 잡지 「동명」에 「조선 과거의 혁명운동」을 발표하였고, 이듬해 잡지 「개벽」 1월호에 「갑자 이후 육십 년간의 조선」을 발표하였다. 1925년 2월에는 화요회 명의로 「전조선민중운동대회 개최 취지문」을 작성하였다.

 

1924년부터 송도고등보통학교 역사 담당 교사로 근무하다가 1925년 8월 세 번째 일본 유학을 가서 도쿄제국대학 문학부 사학과 동양사부 청강생으로 입학하여 역사 서술에 대한 관심을 고조하였다. 이듬해인 1926년 7월 일본에서 귀국하였다. 1927년 1월 신간회 발기인 중 1명으로 참여하였고, 같은 해 2월 신간회 경성본부에 피선되어 활동하였다. 1927년 8월 조선물산장려회의 이사로 선임되었고, 그 기관지 『자활』의 주필로 활동하였다. 또한, 중외일보사 논설부 기자 및 경성여자상업학교 교사를 겸직하였다.

 

1928년 5월 잡지 「별건곤」에 「조선심 차진 조선문학」을 발표하여 ‘조선심(朝鮮心)’을 주장하였고, 같은 해 말 조선일보사에 입사하였다. 1920년대 말부터 1931년 조선일보사를 사직할 때까지 「조선일보」뿐만 아니라 잡지 「신민, 신생, 문예공론」 등에 조선 문화와 한글, 조선사에 관한 여러 글을 발표하였다.

 

1931년 배재고등보통학교 교사를 거쳐 중앙고등보통학교 조선사 담당 교사로 전근하여 학생 · 청년의 역사 교육에 힘썼다. 1933년 4월 『조선일보』의 편집고문으로 취임하면서부터 『조선일보』 등 언론을 통한 역사 대중화에 한층 더 힘을 기울였다. 1934년 5월에는 조선 문화의 학술적 연구를 위해 진단학회의 발기인으로서 참여하였고, 같은 해 9월에는 『조선일보』 사설 「정다산의 위적 – 99년기에 제하야」를 발표하여 정약용의 업적과 ‘조선학’에 대한 정의를 구체화하기도 하였다. 다음 해 1935년 7월 16일 다산 정약용 서거 백 주년 기념회를 개최하고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이후 1936년부터 1938년까지 『조선일보』 지면을 통하여 한글과 조선사에 관한 글들을 활발하게 발표하였다. 1937년 7월 16일에는 조선방송협회 라디오 방송 교양 프로그램에서 ‘경성 부근의 탐승에 취하여’라는 주제로 강연하기도 하였다. 1938년 12월 16일에는 신조선사에서 「여유당전서」 완간 출판기념회를 개최하자 발기인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1939년 4월 3일 자택에서 급성 단독(丹毒)주3으로 사망하여 4월 7일 경기도 양주군 망우리 묘소에 안장되었다.

 

 

5. 최불암

 

 

최남선

 

 

 

최남선은 일제강점기 『심춘순례』, 『백두산근참기』, 『금강예찬』 등을 저술한 문인이다. 언론인이자 사학자,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890년(고종 27)에 태어나 1957년에 사망했다. 일본 유학 후 『소년』 등 잡지를 발행하고 저술을 통해 신문화운동을 벌였다. 조선어사전 편찬을 기획했고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작성했다. 조선의 문화와 역사를 연구하는 계명구락부에 참여했고 조선사편수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1935년부터 한국과 일본의 문화 뿌리가 같다는 ‘문화동원론’을 주장하며 일본 신도 보급, 학병지원 권유 등 친일활동에 적극 나섰다.

 

1890년 서울 출생으로, 본관은 동주(東州), 아명은 창흥(昌興), 자는 공육(公六)이다. 호는 육당(六堂) · 한샘 · 남악주인(南嶽主人) · 곡교인(曲橋人) · 육당학인(六堂學人) · 축한생(逐閑生) · 대몽(大夢) · 백운향도(白雲香徒)이다. 관상감(觀象監)에서 근무하며 한약방을 경영했던 아버지 최헌규(崔獻圭)와 어머니 진주(晉州) 강씨(姜氏)의 3남 3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1902년 경성학당에서 수학한 후 1904년 대한제국 황실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 도쿄부립제일중학교[東京府立第一中學校]에 입학하였으나 곧 중퇴하였다. 1906년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고등사범부 역사지리과에 입학하였으며, 같은 해 7월부터 대한유학생회에서 발간하는 『대한유학생회보』의 편집인으로 활동하였다.

1907년 6월 와세다대 정치학과 주관의 모의(模擬) 국회가 조선국왕이 일본에 알현하러 오는 가상의 상황을 토의 안건으로 삼자 이에 반발하는 한국인 유학생의 총대(總代)를 맡았고, 이로 인해 학교에서 퇴학당했다.

1906년 겨울 귀국 후 신문관을 설립하고 1908년 11월 잡지 「소년」을 출판하였다.

 

1910년 3월 안창호가 설립한 청년학우회의 평사원 겸 변론과장을 지냈고, 같은 해 10월 조선광문회를 설립해 조선의 고서(古書)를 발간하고, 조선어 사전을 편찬하고자 하였다. 한일강제병합 이후에도 1912년 「붉은 저고리」, 1913년 「아이들보이」, 1914년 「청춘」 등의 잡지를 발행하였다. 1919년 3 · 1운동 때에는 「독립선언서」를 작성해 일제에 체포되어 2년 8개월간 복역하기도 하였다.

 

1921년 10월 출옥하였고, 1922년 동명사(東明社)를 창립해 주간지 「동명」을 발행하였다. 1924년 「시대일보」를 창간하였고, 1925년 조선의 문화와 역사를 연구하는 계명구락부에 참여하였다. 1922년 『동명』에 「조선역사통속강화개제(朝鮮歷史通俗講話開題)」를 연재하였고, 1926년 「불함문화론」과 근대 최초의 창작 시조집 「백팔번뇌」를 간행하였다. 같은 해 옛 백제 지역을 방문한 「심춘순례」, 1927년 「백두산근참기」, 1928년 『금강예찬(金剛禮讚)』을 발표하였다.

 

1928년 10월 조선사편수회 촉탁이 되었고, 같은 해 12월부터 조선사편수회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3년 12월 조선총독부 보물고적명승천연기념물보존회 위원, 1935년 2월 조선총독부 임시역사교과용도서조사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1935년부터 한국과 일본 사이의 ‘문화동원론(文化同源論)’을 주장하면서 일본 신도(神道) 보급에 참여하였다. 같은 해 4월 조선계회(朝鮮禊會)의 고문을 맡았고, 1936년 심전개발 정책의 일환으로 출판된 강연집에 「조선의 고유신앙[朝鮮の固有信仰]」을 발표하였다. 1936년 6월부터 1938년 3월까지 3년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냈고, 1937년 2월 9일부터 11일까지 3회에 걸쳐 『매일신보』에 「조선 문화의 당면과제[朝鮮文化の當面課題]」를 게재하였다. 1937년 2월 조선총독부 박물관건설위원회 위원을 맡았으며, 중일전쟁 발발 후 1938년 4월 만주로 건너가 「만몽일보」의 고문이 되었다. 1939년 5월 만주 건국대학(建國大學) 교수로 취임하였으며, 건국대학 연구원의 민족연구반과 역사연구반에 소속되었다. 1937년 11월 『재만조선인통신』 제39호의 「만주가 우리에게 있다」, 『삼천리』 1938년 10월호의 「건국대학과 조선청년」, 1939년 7월호의 「전쟁과 교육」, 1941년 6월호의 「동방고민족의 신성(神聖) 관념」등 일본의 전쟁수행을 지지하는 글을 기고하기도 하였다. 1941년 8월 흥아보국단 준비위원을 맡았고, 같은 해 12월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이 되었다.

 

『매일신보』를 통해 1943년 11월 5일자 「보람있게 죽자」, 11월 20일자 「나가자 청년학도야」, 11월 25일자 「오직 감력할 뿐」, 1944년 1월 1일자 「아시아의 해방」, 1945년 3월 7일자 「승리엔 젊은이의 힘」 등을 기고하였으며, 시국 선전용 대중잡지였던 『신시대』를 통해 1943년 3월 제3권 3호 「만주건국의 역사적 유래」, 1944년 2월 제4권 2호 「성전의 설문(說文)」 등의 글을 발표하였다. 1943년 11월 일본의 조선인 유학생에 학병 지원을 권유하는 ‘선배 격려단’에 참여하였으며, 같은 달 일본의 조선인 가정 방문과 간담회, 강연회 등을 개최하였다. 11월 14일과 20일에는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 강당에서 열린 반도출신출정학도궐기대회에서 학병 지원 관련 연설을 하기도 하였다.

 

이밖에 잡지 『방송지우(放送之友)』에 1944년 3월 제2권 제3호 「도의(道義)는 이긴다」, 같은 해 4월 제2권 제4호 「신세계 건설의 도화선」, 1945년 1월 제3권 제1호 「특공대의 정신으로 성은(聖恩)에 보답합시다」 등의 글을 발표하였다. 광복 후 1949년 2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곧 보석으로 풀려났고, 같은 해 5월 공판을 받았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해군전사편찬위원회에서 일하였고, 휴전 후 서울시사편찬위원회 고문을 맡으며, 언론을 통해 기고활동을 지속하였다. 1957년 10월 10일 사망하였다.

 

최남선의 일제시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제2조 제4 · 9 · 11 · 13 · 20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Ⅳ-17: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690~730)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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