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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두문자

지청천_독립운동가를 찾아서

by noksan2023 2025. 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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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청천

 

 

지청천 생가터

 

 

 

지청천 생가터는

한국광복군의 총사령관이었던 지청천 장군이 태어난 곳이다. 지청천(池靑夭)은 1888년 서울 삼청동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석규錫奎이며 아명은 수봉壽鳳이다. 배재학당을 중퇴히고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陸軍武官學校를 다니다 폐교되자 일본으로 유학하여 1914년 일본 육사를 26기로 졸업하고 일본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1920년 4월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활동하다가 서로군정서의 병력을 이끌고 북만주로 이동 듬해 연해주에서 한인 무장 세력이 연합해 세운 대한의용군 총사령부 대한독립군단의 간부로 활약하였다. 1921년 5월 자유시(현재 스보보드니)로 이동해 고려혁명군 조직에 참여했다가 자유시참변 후 이르쿠츠크로 가 고려혁명군관학교高麗革命軍官學校 교장에 취임하였다.

 

1922년 만주로 돌아와 이듬해 상하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 군무위원으로 임되었으며, 1925년 정의부正義部 군사위원장 겸 사령관에 취임하였다. 1928년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의 3부 통합운동에 참여하여 혁신의회 군사위원에 선임되었으며, 1930년 홍진洪震 등과 함께 한족총연힙회를 모체로 한국독립당韓獨立黨을 조직하고 군사위원장이 되었다. 이후 한국독립군 총사령관에 취임해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며 1933년 대전자령 전투를 지휘해 승리로 이끈 후 중국 관내로 이동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한인특별반의 책임자로 활약 하였다 1935년 김원봉 등과 함께 민족혁명당을 창당했다가 1937년 탈퇴해 조선혁명당을 재조직하고, 김구와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해 1940년 9월 한국광복군총사령에취임하였다. 광복 후 환국하여 1947년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을 조직히고 단장에 취임하였으며, 이듬해 제헌 국회의원에 선출되었고, 1950년 선거에서 재선되었다 1957년에 굵직하고 파란만장했던 민족주의자의 삶을 마감하고 영면하였다.

 

1. 일제의 군사교육을 이용하여 독립 전쟁에 투신

 

서구 열강과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이 노골화해 나라의 운명이 매우 위태로운 시기에 서울에서 태어난 지청천은 신학문을 배워야 한다는 집안 분위기 속에서 교동소학교에 편입 했다. 이후 배재학당에 진학하여 산술, 과학 등 신학문을 익히면서 황성기독청년회에서도 활동했다. 히자만 그는 외세의 침탈을 막기 위한 활로가 국력을 키우는데 있음을 인식하고 1907년 대힌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이미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신시킨 일제가 후속 조처로 무관힉교마저 폐교시키자 그는 근대적 군사 지식을 쌓아 독립 전쟁에 투신하겠다는 일념으로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갔다. 당시 지청천을 비롯한 한국인 유학생들은

 

"이왕 군사교육을 받으러 온 것이니 배울 것은 다 배우고 임관해 일본군의 내부사정까지 파악한 후 중위가 되는 날 일제히 군복을 벗어 던지고 조국 광복을 위해 총궐기 하기로 맹세했다"

 

고 한다. 1914년 5월 일본 육사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한 지청천은 일본군 제10시단에 배속되어, 제1차 세계 대전 중 연합국에 속해 던 일본이 중국 산둥 반도의 독일 조차지를 공격해서 점령한 이른바 ‘칭다오 전투'를 겪었다.

 

1919년 3 .1운동 직후 독립 전쟁에 참여할 길을 모색하던 지청천은 6개월 동안 휴가를 얻어 국내로 돌아왔다.  지청천은 이미 결심한 대로 일본 육사 선배인 김광서와 함께 1920년 4월 하순 남만주로 망명하였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대적 과제를 외면하지 않고 역사적 사명을 다하기 위해 험난한 민족 해방운동 전선에 뛰어들었다.

 

 

 

육군무관학교 터

 

 

2. 신흥무관학교 교관과 대한독립군단 조직

 

망명 후 지청천은 일본군 사관학교에서 배운 지식과 탈출할 때 지니고 나온 군사용 지도를 바탕으로 만주 유하현 삼원보에 있던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활약하였다. 곧이어 교성대장敎成隊長으로 선임되어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이 때 지청천은 경천 김광서, 동천 신팔균과 더불어 ‘만주 삼천'으로 불리었다. 만주에서는 ‘나르는 홍범보', ‘뛰는 김좌진', ‘만주 삼천'이면 산천 초목도 두려워 떤다는 말이 떠돌 정도로 지청천은 뛰어난 독립군 지도자로 부각되었다.

 

1920년 10월 일본군이 서북간도 독립군기지를 침략해 경신참변을 일으켜 신흥무관학교가 폐교되자 지청천은 100여 명의 재학생과 서로군정서 병력을 이끌고 백두산 근처로 이동했다. 그리고 북만주 미산密山으로 이동한 뒤 북로군정서, 대한독립군, 대한국민회, 의군부 혈성단 등 독립운동 단체들과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였다.

 

소련의 연해주로 옮겨간 대한독립군단은 그곳의 항일 부대와 힙쳐 대한의용군 총사령부를 결성하고 군사 훈련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1921년 6월 독립군의 분열과 소련 적군의 배신으로 인한 '자유시참변'으로 많은 동지들을 잃고 체포되었디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강력한 항의로 풀려났다. 이후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고려한 소련의 정책 변화로 독립군 활동이 어려워지자 지청천은 1922년 말 무장투쟁이 가능한 만주로돌아왔다.

 

3.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사위원과 정의부 군사위원장으로 활약

 

1919년에 수립되어 외교 독립론을 위주로 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지도하고 전개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조직과 활동이 침체에 삐지자 민족해방운동의 통일적 방안을 마련하기 위한 국민대표회의가 1923년 1월 상하이에서 열렸다. 그러나 국민대표회의는 임시 정부의 개선을 주장한 개조파와 무장투쟁 위주의 새로운 조직 건설을 내세운 창조파의 갈등으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에 지청천은 신속 김규식과 국민위원회를 결성하고 그 산하의 군사위원에 선임되어 활약하였다. 창조파에 속했던 지청천은 무장 항쟁을 지휘할 수 있는 통일적 기관을 새로 구성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의 창조론은 실천적이며 효율적인 항일 투쟁을 중시한 것이었지만 결국 국민대표회의는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만주로 돌아온 지청천은 여러 독립운동 단체를 통합하여 정의부를 조직히고 사령관 및 사위원장으로 취임하였다. 국내에까지 대원을 파견하여 일제의 각종 기관을 파괴히고 일제 관헌을 처단하였으며 무기를 노획하는 등 활발히 활약하는 한편 독립운동의 정신적 바탕을 마련하기 위하여 고려혁명당을 창당하고 그 위원에 선출되기도 하였다.

 

1928년 2월에는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의 3부 통합운동을 추진하였으며, 북만주에 통합 조직으로 결성된 혁신의회의 군사위원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3부 통합운동이 단체 본위와 개인 본의 통합론으로 분리되어 실패하게 되자 그는 전민족유일당조직협의회에 참가하였다.

 

4. 한국독립군의 조직과 대전자령 전투

 

1930년을 전후하여 만주의 민족주의 운동세력은 크게 남만주 국민부의 조선혁명당 산하 조선혁명군과, 북만주 혁신의회의 한국독립당 산하 한국독립군으로 양립되었는데 1930년 김좌진이 암살당한 후 지청천은 한족자치연합회를 모체로 한국독립당을 창당하고 한국독립군을 조직하여 총사령에 취임하였다.

 

지청천은 일제의 만주침략이 중일전쟁으로 확대되자 세계대전으로 확산될 것으로 예견하여 이때가 항일무장투쟁의 성과를 높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판단하였다. 그가 이끈 한국독립군은 초기 전투에서 승리한 경우도 있었으나, 전체적으로 볼 때 숫자와 무기에서 우세한 일본군에 밀리고 있었다. 하지만 강한 투쟁 의지로 무장하고 때로는 중국항일군연합전선을 펴면서 많은 전투를 벌여 상당한 전과를 거두었다. 특히, 1933년 6월 대전자령 전투에서는 일제의 간도 파견군을 매복 공격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이 대전자령 전투는 1920년의 청산리 대첩 못지않은 대승리였으므로 우리 민족에게 독립의 희망을 주고 항일의식을 고취시키기에 충분한승리였다.

 

이 당시 민족해방운동전선에서는 운동방법론을 둘러싸고 무장투쟁론외교독립론, 실력양성론 등으로 나뉘어 있었다. 외교독립론이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한 1920년대 중반 이후 무장투쟁론의 비중은 더욱 커졌다. 열악한 조건 속에서 온갖 고난을 무릅쓰고 독립 전쟁에 앞장 섰던 지청천의 무장투쟁은 가장 치열한 민족해방운동이었다.

 

5. 중국 본토에서의 독립 투쟁

일제에 의한 만주지배가 강화되고 한 중연합군의 내분 등으로 한국독립군은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 지청천은 독립군을 이끌고 무장 항일의 최전선인 만주를 떠나 중국 관내로 옮겨갔다. 1933년 10월 그는 임시정부의 명령으로 허난성에서 중국군관학교 낙양분교에 한인 특별반을 창설하고 총책임차로 취임하여 교성대장에 이범석, 교관에 오광선, 조경한 등을 명하고 한인애국 청년 90여명을 모집하여 군사훈련을 시켰다. 하지만 한인특별반은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정책 변경으로 1기생을 배출하고 문을 닫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독립전쟁을 지향하던 지청천은 의열투쟁에 치중하던 김구와 군관학교 입교생 문제를 두고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1934년에 접어들면서 중국 관내 민족해방운동정당 단체들의 통일 운동이 본격화되자 만주에서 이동한 한국독립당과 한국혁명당이 통합된 신한독립당의 군사위원장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지청천은 1935년 7월 김원봉 김규식 등과 합작하여 통일전선 정당으로 출범한 민족혁명당의 중앙 집행위원과 군사부 부장에 선임되었다. 군사부의 주된 활동은 화북 지역과 만주 등지에서 반만反滿  항일의 군사 활동을 전개하고, 조선 청년의 군사 훈련을 실시하는 것이었다. 민족혁명당의 군사 활동을 지휘하게 된 지청천은 서기부 부장으로서 당무를 총괄하던 김원봉과 더불어 양대 세력을 이루었다.

 

1937년에 이르러 노선과 당권을 둘러싼 두 세력의 대립은 격화되었고, 그해 4월 지청천 계열은 따로 조선혁명당을 결성하였다 조선혁명당의 중심인물은 대부분 만주에서 활약한 무장 독립군 간부 출신이었는데. 군사부장 지청천이 당의 실질적 지도자였다. 조선혁명당김구 중심의 한국국민당, 조소앙 중심의 한국독립당에 비해 다소 진보적 이념을 내세웠지만, 본질적인 차이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민족해방운동전선에서 통일전선의 요구가 더욱 커지자 3당은 그해 7월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하여 우파 민족주의 세력의 연합을 이루었다. 나아가 3당은 한국독립당으로 통합하여 임시정부의 중심 정당이 되었다.

 

6. 한국광복군의 조직

 

1930년대 후반부터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무장독립노선을 지향하면서 군사 조직을 마련하기 위한 구체적 방안을 모색하였다. 1939년 10월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장에 선임된 지청천은 부대를 조직할 형편이 안 될 경우 총사령부라도 먼저 구성할 것을 강조하였다. 마침내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40년 9월 17일

 

"우리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우리의 전투력을 강화할 시기가 왔다"

 

면서 충칭重慶 가릉빈관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정규군인 한국광복군총사령부 성립전례식을 거행하였다. 이때 지청천은 총사령으로 임명되었으며 참모장에는 이범석이 임명되었다.

 

한국광복군은 애초 전투 부대를 갖고 출발한 것은 아니었으나 점차 대원을 확보하고 조직을 정비하면서 군대 조직을 갖추어 나갔으며 김원봉의 조선의용대가 힙류함으로써 3개 지대로 편성되었다. 하지만 광복군에 직접 합류한 인원이 적었고,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하던 장제스의 중국 국민당이 ‘한국광복군 행동준승 9개항'을 강요하여 광복군 활동을 후방 작전 위주로 제한하였다. 이 때문에 일본군을 직접 상대한 독립전쟁을 전개하지 못함으로써 무장 독립군으로서 광복군의 활동은 상당히 한계가 있었다. 또한 광복군 대원들 중 일부가 미국 oss의 특수훈련을 받고 시도한 '국내진공작전'도 일본이 예상보다 빨리 항복함으로써 시도조차 못하고  실패하고 말았다.

 

광복군이 민족 해방을 쟁취할 수 있는 주력군의 역할을 담당하여 장차 국군 창건의 기틀이 되기를 바랐던 지청천의 뜻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다. 하지만 독립군 양성에 누구보다 앞장섰고 독립전쟁을 위해 끝까지 진력했던 그는 광복군 총사령의 대명사로 실천적 독립운동가의 표상으로 남아 있다.

 

7. 광복 이후의 활동

 

광복 후 지청천은 일본군에 동원되었던 학도병과 징병자들을 중심으로 광복군 확대를 꾀했다. 하지만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그는 국내 청년운동에 관심을 기울였다. 지청천은 1947년 4월 22일 귀국하여 청년운동이 조국 통일의 유일한 길이며 청년 단체의 통합은 자격이 있는 자신의 지휘 아래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해 8월 그가 조직한 대동청년단은 단순한 정치단체가 아니라 무력적이고 결집력이 한 청년 단체였다. 우익 청년단체의 약 70% 정도를 흡수한 대동청년단은 우익 진영의 물리력 강화는 물론 지청천의 굳건한 정치 기반이 되었고, 앞서 귀국한 이범석이 1946년 10월에 든 조선민족청년단과는 같은 우익 청년 단체로서 경쟁하고 대립하는 관계가 되었다.

 

지청천 세력이 커지자 김구 이승만 등 세 사람의 괸계도 미묘해졌다. 처음에는 지청천이 김구와 이승만에 대한 동시 지지 입장을 취하면서 자신의 세력을 강화하았으나, 나중에는 이승만이 주장한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적극 지지하고 나섰다.

 

대동청년단은 5 .10총선거에 참가하여 13명의 국회의원을 배출하였고 단장인 지청천은 서울 성동구에서 출마하여 전국 최다 득표로 당선되면서 강력한 정치 세력으로 부상하였다. 김구 등 임시정부 계열을 비롯한 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단정 수립에 반대했던 것에 비해 그는 매우 현실적인 정치가로 변모하였다. 이후 지청천은 국회와 정당 정부의 주요 요직을 역임하였다.

 

 

지청천 집터 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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