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소앙 형제 집터_독립운동가3
조소앙 생가 터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부총장 등을 지낸 조소앙과 형제들의 본가가 있던 곳이다. 조소앙의 본명은 용은鏞殷으로 소앙素昻은 호이다. 1887년에 태어난 조소앙은 1904년 황실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유학 중이던 1905년에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동료 유학생들과 우에노 공원에서 매국노들의 행위 규탄 대회를 열었다. 1912년 귀국하여 이듬해 상하이도 망명한 조소앙은 이후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그는 신규식, 박은식, 홍명희 등과 함께 독립운동단체를 만들고, 1917년 7월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조직하자는 「대동단결선언」을 기초하였다. 1918년에 각 지역 독립운동가 39명의 동의와 서명을 얻어 발표한 「대한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사람도 조소앙이었는데, 이 선언서는 일본에 대한 독립군의 혈전을 선포하여 독립전쟁노선을 지향하였다. 이후 조소앙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헌법인 「대한민국임시헌장」과 「임시의정원법」을 기초하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틀을 정립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국무원 비서장. 외무부장. 임시의정원 의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한국독립당의 창당위원장 및 부위원장 등 임정의 핵심 간부로서 활동하였다.
조소앙의 업적 중 널리 알려진 것이 삼균주의이다. 1920년대 이론의 기초를 정립한 삼균주의는 민족 해방 운동의 단결을 도모하고 독립국가의 비전을 제시한 이론으로서 정치, 경제, 교육의 균등을 핵심으로 삼는다. 즉 고르게 정치에 참여하고, 고르게 잘 살고, 고르게 교육을 받아 개인 뿐 아니라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 간에 균등한 생활을 이루자는 사상이다. 삼균주의는 1930년대 한국독립당의 이념으로 채택되었고, 1941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한민국 건국 강령에 삼균주의가 반영됨으로써 독립 후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한 사상으로 주목받았다.
1. 조소앙의 일본 유학
조소앙은16세가 되던 1902년 서울로 올라와 성균 관에 입학하여 대한제국 관료의 길을 모색하였다. 구본신참의 관점에서 신학문을 배울 필요성을 느낀 조소앙은 1904년 2월 한일의정서가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분개하는 한편, 성균관을 퇴학하고 황실 특파 일본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으로 건너갔다.
조소앙은 일본 유학시절 「동유략초」라는 일기를 남겼다. 1904년10월 황실 특화 유학생 50명의 일원으로 인천항을 출발할 때부터 1912년 5월끼지 약8년 동안 날짜별로 쓴 일기를 통해 조소앙의 일본 유학 생활을 알 수 있다. 1904년10월 인천항을 출발해 도쿄에 도착 한조소앙은 동경부립 제일중학교에 입학하였는데, 한국 유학생만으로 구성한 반에서 일본인과 별도로 실업 위주의 교육을 받았다. 그러던 차에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조소앙은 1905년 11월 24일 일기에 ‘오늘 같은 수치는 처음 느꼈다. 오백 년 사직이 하루 아침에 무너지는 듯하다. 2,000만 국민이 일시에 노예가 되지 않았는가. 가슴이 터져나가는 것 같다'라며 식민지 조국 청년의 아픔을 털어 놓았다. 특히 한국 유학생들에게 고등교육은 무리라는 동경부립중학교 교장의 인터뷰 기사가 신문에 실리자 크게 반발 한 한국 유학생들은 12월 5일 동맹휴교를 단행하였고, 조소앙을 비롯한 37명 전원이 기숙사를 퇴사했다. 조소앙은 이 문제로 퇴학당해 메이지대학 진학이 늦어져 다른 유힉생들보다 귀국이 늦어지면서 1910년 ‘한일합병조약'의 강제 체결을 일본에서 지켜봐야만 했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를 겪은 조소앙은 대한제국의 통치권을 일본에 양여하는 ‘한일합병조약'에 반대하는 ‘한일 합방 성토문'을 작성하고 비상 대회를 소집하려다 발각되어 심한 고초를 겪었다. 우여곡절 끝에 1908년 메이지대학에 입학한 조소앙은 재학 중 한국 유학생 단체인 대한흥학회의 편찬부장 총무 등 간부로 활동하면서 일제의 국권 피탈에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제의 감시 아래 매우 불안한 상태에서 조소앙은 병을 얻기도 했는데, 그는 ‘나라가 망하니 몸도 병든 상황이 되었다'고 한탄하였다.
2. 대동단결선언과 대한독립선언서
조소앙은 일본 유학 중 동서양의 다양한 지식과 사상을 학습하였다. 동시에 국권 피탈이라는 민족적 수난을 경험해야만 했다. 1912년 대학을 졸업한 조소앙은 이듬해 베이징을 거쳐 상하이로 망명하였다. 그는 상하이에서 신규식, 박은식 등이 만든 동제사에 가입하고 박달 학원 교사로 활동했다.
1917년에 조소앙은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국제사회당 대회에 참가하여 주권 불멸론, 민권 민유론을 담은 발제로 한국의 독립 문제를 국제기구에서 논의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같은 해 조소앙, 신규식, 신채호, 박은식, 박용만 등 14명과 함께 중국 상하이에서 빌표한 '대동단결선언'에서 조소앙은 독립국가의 지향점을 뚜렷이 제시하였다.
조소앙이 기초한 「대한독립선언서」는 1919년 2월 1일, 중국 동북부 지린성(吉林省)에서 만주와 러시아 지역의 항일 독립운동지도자 39명이 제1차 세계 대전 종전에 맞춰 조국의 독립을 요구하며 발표한 것이다. 이 선언서는 일본에 대한 독립운동의 방법을제시하였다.
음력으로 1918년 무오년에 선포되었다 하여 「무오독립선언서」라고도 불리는「대한독립선언서」는 이후 2.8독립 선언과 3.1 만세 선언서의 기폭제가 되었다. 국내를 뒤덮었던 3.1운동은 앞서 「대동단결선언」에서 제시한 민주공화정 이념을 확고히 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 3.1운동 이전만 하더라도 독립 후 정치체제에 대한 고민이 없거나 왕국이나 제국을 되살리려는 생각을 지닌 사람도 상당수 있었다. 그러나 3.1운동에서 뿜어져 나온 민중들의 열기는 대단한 것이었고, 독립운동가들은 이만한 역량이면 충분히 민주주의 정치를 함께 할 수 있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그동안 지식인의 시각으로 다분히 무식한 민중들을 불쌍히 여기던 민족운동가들은 독립 민세 운동을 오랫동안 치열하게 벌이는 민중들의 모습을 보고 많은 감명을 받았던 것이다. 갈수록 커지는 학생, 노동자, 농민들의 시위 열기에 힘입어 이들이 민주공화국을 이끌기에 충분하며, 마땅히 그렇게 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합의에 도달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것은 이렇듯 3.1운동의 영향 때문이다.
3. 조소앙의 삼균주의와 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강령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핵심 간부로 활동하던 조소앙은 1920년대 말에 좌우 대립의 해소를 위해 독립운동의 방략과 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기본 정책으로 삼균주의의 기본 구상을 마련하였다. 해방 이후 조소앙의 연설들은삼균주의의 핵심 내용을 잘 보여준다.
"저는 여러분께 맹세합니대 우리 민족 독립을 성공하리다. 0口1마다 대학을 졸업히꺼1 하오리다. 어른마다 투표하야 정치적 권리를 갖게 하오리대 사람마다 우유 한 명씩 먹고, 집 한 채씩 가 지고 살게 하오리다"
- 서울운동장에서 열린 3.1절 기념식에서 조소앙의 연설(1946년 3월 1일)-
독립당이 표시하는 바의 주의는 과연 어떤 것인가. 그것은 개인과 개인,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가 균등한 생활을 하게 하는 주의이다. 개인과 개인이 균등하게 하는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정치의 균등화요, 경제의 균등화요, 교육의 균등화이다. 보통 선거제룰 실시하여 정권에의 참여를 고르게 하고, 국유제를 실시하여 경제 조건을 고르게 하며, 국비國費에 의한 의무교육제를 실시하여 교육 기회를 고르게 함으로써 국내에서의 개인과 개인 사이의 균등 생활을 실현하는 것이나 민족과 민족이 균등되게 하는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민족 자결'을 자기 민족과 또 다른 민족에게도 적용시킴으로써 소수 민족과 약소 민족이 압박받고 통치받는 지위로 떨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다. 국가와 국가가 균등되게 하는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식민 정책과 자본 제국주의를 무너뜨리고 전쟁 행위를 금지시킴으로써 모든 국가가 서로 침략하지 않고 국제 생활에 있어서 전혀 평등한 지위를 가지고 나아가 세계가 한가족이 되게 하는 것이 삼균주의의 궁극적인 목적이다.
-조소앙 선생 문집-
조소앙의 삼균주의는 1931년 한국독립당의 당 이념으로 채택된데 이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이념이 되었다. 또한 한국국민당 민족혁명당 등 좌.우익 정당에서 인정을 받아 정강과 책으로 채택되었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한민국임시정부건국강령」에 반영되었다.
일제가 중일전쟁에서 태평양전쟁으로 침략을 확대하자 독립운동가들은 이를 하방을 위한 절호의 기회로 여겼다. 일제가 연힙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하는 날, 우리 민족이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임시정부는 연합국의 일원으로 항일전에 적극 참여하면서, 독립운동을 하나로 통일하여 항일투쟁의 역량을 강화하려는 노력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광복이 다가올 즈음에는 국외의 독립운동 세력들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통일 전선을 형성해 가고 있었다. 그것은 광복 후 건설할 새 나라에 대한 구상이 임시정부와각 독립 운동 단체 사이에 공통적인 지향점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대한민국임시 정부는 1941년 11월 일제의 패망을 대비하여 조소앙의 삼균주의에 바탕을 둔 「대한민국건국강령」을 발표하였다. 대한민국건국강령은 삼균주의를 이론적 틀로 삼아 '새로운 민주주의의 확립과 사회 계급의 타파, 경제적 균등주의의 실현을 주창하였다. 이는 사회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던 독립운동 세력들이 내세운 새로운 국가건설의 목표와도부합되었다.
4.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보여준 조소앙 일가
프랑스어로 노블리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란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뜻하는 말이다. 당시 국권피탈이라는 어려움 속에서 국민을 통합하고 역량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사회지도층의 솔선하는 자세가 필요했다. 하지만 일제가 내려준 귀족 작위나 기득권 보장을 거부한 양반들은 80명 중 6명에 불과했다. 일제강점기 누구보다 독립운동에 앞장선 사람들이 있었으니 이회영, 안중근 그리고 조소앙 일가가 대표적이다. 조소앙은 세조 때 생육신 중 하나인 조여의 16대손으로 조부는 정삼품 통정대부였고 조소앙 자신도 15살에 성균관에 입학하고 황실 유학생으로 파견된 엘리트였다. 능력과 의지를 독립운동에 쏟은 조소앙 외에도 그의 집안에서 여섯 형제를 비롯한 11명의 독립유공자가 배출되었는데 이는 안중근 가문과 함께 최대 기록이다.
조소앙의 형 조용하는 대한제국 시절 독일주재 참사관, 죽산군수 등 관료의 길을 걷다 합병 직후 하와이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하와이에서 대조선독립단 단장 등을 역임한 조용하는 한인협회 결성을 주도했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 재정지원 활동을 펼쳤다. 독일 주재 시절 각종 서적을 구해 조소앙에게 보내어 삼균주의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동생 조용주는 1913년 상하이로 망명하여 조소앙과 함께 아세아민족반일대동단을 결성했다. 1915년 국내로 들어와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을 조직하여 조소앙의 유럽 외교 활동과 임시정부 재정 지원 활동을 펼쳤으며 1937년 하얼빈에서 서거하였다. 조용한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려다 일제 경찰에게 붙잡혀 옥고를 치렀으며 여동생 조경순(1898-1948)도 중국으로 건너가 한국독립당 한국혁명여성동맹에서 활동했다.
조소앙의 막내 동생 조시원은 1920년 상하이로 망명하여 중국한인청년동맹 화랑청년회 등에서 활동했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의원 선전위원, 한국독립당 조직부장, 한국광복군 법무처장 등을 역임했다. 조시원의 아내도 1923년 상하이로 망명하여 남편 조시원과 함께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조소앙의 두 아들도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광복군에 참여하여 독립운 동의 대를 이었다.
5. 역사에서 잊혀졌던 조소앙
1945년 조소앙은 광복 후 귀국하여 임시정부의 정통성 고수를 주장하며 국가 건설 운동에 전력하였다. 그토록 기다리던 광복은 되었으나 곧바로 독립국가를 건설할 수는 없었다. 냉전의 흐름 속에서 완전한 독립국가 건설이 어려워지자 소망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며 1948년 4월 김구 김규식 등과 함께 남북협상에 참가하는 등 통일정부 수립에 힘을 쏟았다. 남북협상이 실패로 끝나자 조소앙은 그해 12월 사회당을 결성하여 삼균주의의 정책적 실현을 위해 노력하였고,1950년 2대 총선에서는 서울 성북구에 출마하여 전국 최고 득표를 기록하며 당선되었다.
하지만 6 25전쟁 때 강제 납북되면서 조소앙과 삼균주의는 잊혀졌다. 반공을 강조한 남한에서 균등을 내세운 삼균주의는 공산주의와 비슷한 사상으로 치부되었다. 민족독립과 통일에 헌신한 조소앙 역시 북으로 갔다는 이유만으로 잊혀졌다. 북한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납치당한 뒤 북한에서 납북 인사들과 함께 평화통일운동과 북한체제 반대 운동을 벌이던 조소앙은 1958년 사망하였다. 남한정부는 조소앙이 사망힌 지 30년이 지난 1989년에야 조소앙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했고, 이듬해 북한 도 그에게 조국통일상을 안겼다 사후 근 40년이 지난 복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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