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미륵사지 석탑_2019년 복원 완성

익산의 미륵사는 백제 30대 왕인 무왕(600~641) 대에 지은 사찰이다. 백제 무왕은 「삼국유사」에 기록된 「서동요」 설화에도 등장한다. 이 기록에 따르면 무왕은 왕의 시녀로 알려진 어머니가 서울(사비성) 남쪽의 연못가에 집을 짓고 살던 중 그 연못의 용과 정을 통하여 낳은 아들이라고 한다. 이 이야기는 궁궐 밖에 살던 신분이 낮았던 여성과 용으로 상징되는 당시의 왕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무왕이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때 용으로 상징되는 왕은 백제 위덕왕(554~598)이나 법왕(599~600)으로 추정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무왕은 낮은 신분이었던 탓에 어릴 적 마를 캐며 생계를 유지해 서동(薯童_마를 캐는 아이)이라 불렀다. 어느 날 서동은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인 선화가 무척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듣고 경주로 갔다. 그리고 동네 아이들에게 마를 주며 선화 공주가 밤에 몰래 서동을 만난다는 내용의 노래를 지어 부르게 하였다. 마침내 이 노래는 진평왕의 귀에까지 들어갔고, 왕은 선화 공주를 멀리 귀양 보냈다. 서동은 궁 밖을 나온 공주와 만났고, 마침내 백제로 함께 와 결혼하고 장차 왕이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익산 미륵사도 「삼국유사」에 따르면 무왕이 선화 공주의 요청으로 창건했다고 한다. 그러나 2009년 익산 미륵사지 석탑(서탑)의 해체 과정 중 발견된 금제 사리 봉영기(사리를 모시는 내력을 적은 글)에는 백제 왕후였던 좌평 사택적덕의 딸이 미륵사를 세운 것으로 나온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 준공 당시 무왕의 왕비는 선화 공주가 아니라 사택가문의 딸이라는 사실이 기록으로 확인된 것이다. 이에 서동요 설화의 진실에 관한 논란이 가속화되었다.
익산 미륵사는 창건 당시에 3개의 금당(부처님을 모신 건물)과 3개의 탑(중앙의 목탑과 양쪽에 동서로 석탑)을 세웠다고 전한다. 이는 절터 발굴을 통해서도 확인되었다. 그중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서탑뿐이다. 그러나 일부임에도 불구하고 국내의 석탑 중 가장 규모가 크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탑이고, 고대의 탑 양식의 목탑에서 석탑으로 바뀌는 과정을 보여 주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은 일제 강점기에 무너진 부분을 시멘트로 보수하여 2000년까지 흉물스러운 모습으로 전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2001년부터 시멘트를 걷어내고 해체 및 보수 정비를 시작해 2018년 완료해 일반에 공개하였다. 소실되었던 동탑은 이미 1993년 복원하였다. 하지만 복원 과정에서 탑의 층수가 7층에서 9층으로 수정되는 등 여러 문제점을 드러내 문화재를 복원하는 방법과 관련해 많은 과제를 남겼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 (益山 彌勒寺址 石塔)

익산 미륵사지 석탑은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금마면 미륵사터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의 제30대 무왕 관련 불탑이다. 1962년에 국보로 지정되었다. 미륵사는 백제 무왕 때 미륵삼존을 모시기 위해 창건된 백제 최대의 사찰로, 서원 금당 앞에 있는 이 석탑도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현존 석탑 중 제일 규모가 크고 오래된 탑이며, 목탑의 구조를 석탑으로 재현하였다. 무너져서 거의 절반 정도만 남은 탑을 2009년 해체·수리하다가 완전한 형태의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 같이 발견된 탑지에서 왕비가 639년(무왕 40)에 탑을 건립하면서 사리를 봉안했음이 확인되었다.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백제 최대 사찰이었던 미륵사지의 3원(三院) 가운데 서원의 금당 앞에 있는 탑으로 오랜 세월 동안 무너져 거의 절반 정도만 남았다. 현재 남아있는 국내 최대의 석탑이며 동시에 가장 오래된 백제의 석탑이기도 하다. 2009년 1월 해체수리 중에 초층 탑신 내부 심주에서 완전한 형태의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 사리장엄에는 금제사리호, 유리사리병, 청동합 6점, 은제관식 2점, 은제과대장식 2점, 금동덩이(金銅鋌) 3점, 금제 족집게 1점, 유리구슬 외 다수 유물이 있었다. 특히 이 가운데 기해(己亥)년명 탑지를 통해 당시 왕비가 639년(무왕 40)에 탑을 건립하면서 사리를 봉안했음이 확인되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미륵사는 백제 무왕대에 미륵삼존을 모시기 위하여 창건된 사찰로, 규모로는 백제 최대 사찰에 속한다. 석탑 역시 이때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 성덕왕조에 “미륵사에 벼락이 떨어졌다”는 기록이 있고, 『조선불교총보』에 실린 고려시대 초 혜거국사의 비문에 후백제 견훤대인 922년에 “견훤이 미륵사탑의 개탑(開塔)을 계기로 선운사 선불장에 참석하여 설법할 때 하늘에서 꽃이 내렸다”는 기록이 있어 백제 패망 이후에도 여러 차례 탑의 수리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도 문신 소세양(蘇世讓)의 『양곡집(陽谷集)』이나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기록이 나와 있다. 특히 조선후기 영조 때 강후진(康候晋)의 『와유록(臥遊錄)』에 탑의 붕괴에 대하여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조선시대에 이미 상당 부분의 훼손이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1913년 세키노 다다시[關野貞]와 다니이 세이치[谷井濟一]에 의해 탑의 촬영과 실측조사가 실시된 후 1915년 시멘트 모르타르로 보수되었다.
2001년 10월부터 해체 · 보수작업이 이루어졌으며 2009년 초층 탑신 내부 심주에서 사리장엄구를 발견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2017년 12월 석재 조립 공정이 완료되었으며, 2018년 6월 복원된 석탑이 일반에 공개되었다.
탑은 동북쪽을 중심으로 절반가량이 남아 있고 나머지는 유실되었다. 탑의 재질은 화강암으로 기단부와 탑신부가 남아 있으나 많은 부분이 훼손되어 탑신은 동북측으로 6층까지 남아 있다. 기단부는 이중기단으로 되어 있는데, 지대석과 면석, 갑석으로 이루어진 가구식 기단이다. 하층기단의 지대석은 확인할 수 없고 여러 매로 이루어진 면석과 갑석을 놓았다. 동면 좌우측 갑석 모서리에는 앞으로 두 손을 모으고 있는 2구의 신장이 배치되었다. 상층기단은 하층기단에 비해 높은데 여러 매의 판석으로 구성되었고 그 위로 갑석을 덮은 것으로 보이나 현재는 모두 결실된 상태이다.
탑신은 현재 6층까지만 남아 있는데 각 부분을 수매의 돌로 짜 맞추어 마치 목조건축의 결구를 연상시킨다. 초층 탑신은 초석을 놓고 민흘림이 뚜렷한 기둥으로 각 면 3칸을 나누었는데, 목조건축과 같이 그 내부를 벽체처럼 구성하였다. 초석과 초석 사이에는 고막이석과 하인방을 놓았고 기둥과 기둥 상부에는 창방(昌防)과 평방(平枋)을 두었다. 초층 탑신 중앙에는 사방으로 내부로 들어갈 수 있는 출입구를 두었는데, 내부 중앙에는 거대한 사각기둥으로 심주를 두었다. 2층 이상의 탑신부도 구조에 있어 1층과 비슷한 구조를 보이고 있다. 옥개석은 여러 매의 판석으로 결구되었는데, 처마는 비교적 얇은 편이며 모서리에서 살짝 반전한다. 모서리에는 상하로 원공이 있어 풍경을 매달았던 것으로 보인다. 옥개석 아래로는 3단의 층급받침을 두었는데, 5층부터는 4단으로 늘어난다. 옥개석의 상단에는 1층과 2층은 1단, 3층부터는 2단의 받침을 두어 상층 탑신부를 받치고 있다.
3원 가람으로 구성된 미륵사는 중원에 목탑을 동 · 서원에 각각 석탑을 건립하였는데, 목탑과 동원의 석탑은 완전히 결실된 후 동원 석탑만 복원되었다. 서원의 석탑은 일부 결실부분이 많지만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석탑 가운데 최대 규모이며 가장 오래된 탑이다. 특히 탑 전체의 부재를 마치 목재처럼 다듬어 하나하나씩 결구했는데, 이를 통해 목탑의 구조를 완벽히 석탑으로 구현했다. 한편 미륵사지 발굴결과 동탑과 서탑의 남측에서 길이 820㎝, 동서 길이 603㎝의 ‘H’자형 석렬구조가 발견되었다. 이 시설은 적심시설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석재를 올리기 위한 임시구조로 『화성성역의궤』에 나타난 녹로(轆轤)와 유사한 거중기 시설이었음이 밝혀져 탑 건립과정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 석탑은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탑이며 동시에 가장 큰 규모의 탑이다. 양식상 목탑에서 석탑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충실히 보여주는 한국 석탑의 시원(始原)으로 평가 받는 기념비적인 석탑이다. 특히 석탑 내부 심초석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를 통해 백제시대의 사리봉안 방식이나 탑 건립에 따른 의식, 발원자와 발원 동기 등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와 의의는 매우 크다.
미륵사지

미륵사지석탑 기원
미륵사지내에 있는 이 석탑은 미륵사지 서원(西院)에 자리하고 있으며, 국내에 남아 전하는 석탑으로는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탑이다. 현재 남아있는 층수는 6층이며[현재 보수정비 중], 이 탑의 층수에 대해서 한때는 7층 설이 주장되기도 하였으나 동탑지 주변발굴에서 노반(露盤)이 발견되어 9층이었음이 밝혀졌다. 이 석탑은 목조탑파의 양식을 그대로 따른 것으로 한국 석탑의 기원이 되는 것이다.
미륵사지석탑 구조
구조를 보면 화강암을 사용하여 조성된 이 탑은 방형(方形)의 이중(二重) 기단석(基壇) 위에 사방 세 칸의 탑을 쌓았다. 초층에는 민흘림형식을 갖춘 네모꼴의 돌기둥을 설치하고, 기둥머리위에는 평방(平枋)과 창방(昌枋)을 올려놓았으며, 각 중앙칸에는 출입구를 만들어 十자모양의 내부로 통하는 통로를 두었고, 탑 내 중앙의 교차되는 중심에는 바른 네모꼴 모양의 찰주(擦柱)가 있다. 특히 초층(初層)에서 주목되는 것은 네모꼴 기둥의 가공한 기법이 민흘림 양식이며, 우주(隅柱)의 경우 귀솟음 기법을 사용한 것이 매우 특이하다. 또 이 탑의 특징은 목조건물에서 공포(拱包)를 가설하였을 것이나, 이 탑에서는 목재와 같이 기교 있게 공포(拱包)를 조각할 수 없으므로 공포양식을 모방한 3단의 층급받침으로 지붕돌을 받치도록 하였다. 지붕돌은 얇고 넓은데 네 모퉁이가 가볍게 치켜들고 있어서 신라 석탑양식에서는 볼 수 없는 백제 특유의 양식을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2층 이상은 탑신(塔身)이 얕아지고 각 부분의 가구 수법을 약화 시켰으며, 지붕돌은 폭만 줄여 1층과 같은 수법을 보이고 있다. 5층 이상의 층급받침은 정단에서 4단으로 증가되었다. 그리고 각 기둥과 면석, 창방과 층급받침 등을 모두 별개석 으로 엇물림 쌓기를 하고 있다.
미륵사지석탑 복원
이 탑은 붕괴 직전에 있는 폐탑으로 남아있는 것을 1915년 일본인들이 보수(?)하여 비교적 탑의 동쪽 부분은 온전하게 남아있으나, 서쪽부분을 시멘트로 덮어 버려 조형미를 잃고 있었다. 1992년 문화재관리국에서 동탑지에서 발견된 탑 부재를 치밀하게 조사하여 동탑을 9층으로 복원 하였다.이 석탑은 본래 9층이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17세기 이전에 붕괴되었으며 1915년 일본인들이 무너진 부위에 콘크리트로 보강하였고 최근까지 절반이상 무너진 상태로 존속되어 왔다. 그러나 미륵사지석탑은 우리나라 석탑 중 가장 큰 규모이고, 현존 최고 양식으로 알려져 있으며 1층 내부에 있는 十자형 통로와 심주, 천장 구조 등은 고대 석탑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
충격! 미륵사지 석탑 복원 부실 논란…결국 균열이 생겼다.

국내 최고·최대 규모의 문화재 보수 복원 프로젝트였던 전북 익산 미륵사지 석탑이, 20년간의 복원 작업 끝에 애초의 원형과 다른 모양으로 완성됐다. 감사원 감사 결과에 따르면, 상·하부 형태는 원형과 달라졌고 층별로 구조가 불일치해 균형성과 미적 가치가 손상된 상태다. 감사원은 이 복원 사업을 주관한 문화재연구소가 원형 보존을 위한 사전 검토와 설계 변경에 따른 구조적 안정성 검토를 소홀히 했다고 지적했다.
결국 이러한 우려가 취재 결과 석탑에 크랙 현상이 발생하면서 긴급한 대책이 필요한 상황이다.
감사원은 “문화재연구소가 석탑 복원 과정에서 일관성 없이 구조를 변경했고, 이를 통해 석탑 상·하부의 층별 형태가 원형과 다르게 만들어졌다”며 복원 절차상의 문제를 드러냈다. 또 원래 대칭 구조로 설계돼야 할 이 석탑이 비대칭 구조로 재구성되면서 균형을 잃고 특정 부분에 하중이 집중돼 크랙이 발생하는 등 구조적 문제가 나타났다고 밝혔다.
익산 미륵사지 석탑은 높이 9층으로 설계된 대칭형 탑으로, 건축학자들 사이에서는 동탑과 같이 대칭성을 유지하는 것이 예술적·미적 측면에서 타당하다는 의견이 다수였다. 그러나 복원된 석탑은 비대칭 구조로 2층까지만 재구성된 상태로, 이에 따라 하중이 한쪽으로 쏠리며 수평과 수직 균형이 깨져 향후 구조 안전성에 문제가 발생할 우려가 제기된다. 일부 전문가들은 채움석 대신 황토를 사용한 점도 복원 결과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며, 황토로 인한 수분 침투와 변형 가능성을 지적했다.
미륵사지 석탑의 보수는 원래 전라북도청이 주관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협약서를 통해 문화재연구소로 권한이 갑작스럽게 이양된 정황이 드러나며 사업 과정에 대한 의혹도 불거졌다. 한 관계자는 “복원 사업의 갑작스러운 주체 변경에 대한 명확한 설명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에 문화재연구소는 보수 방식에 대해 당시 설계와 연구를 통해 적합한 선택을 했다고 해명하면서도 사업 주체 변경 경위에 대한 의혹에 대해서는 별도의 해명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석탑에 발생한 균열에 대한 사후 관리 역시 논란이다. 감사원 조사 결과 균열 발생 원인이 시공 과정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되며, 특히 비대칭 구조로 인해 특정 측면에서 심각한 균열이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일부 균열 부위는 하얀색 약품 처리를 통해 시각적으로 감추려 한 정황도 확인됐으며, 이에 대한 사후 처리 계획과 책임 소재에 대한 설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특히 비대칭 구조에 따른 하중 불균형이 석탑의 균열 원인 중 하나로 보인다며, 이에 따른 장기적인 구조 안전성 문제에 대한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경고하고 있다.
문화재연구소는 향후 균열 부위에 대한 보수 방안을 검토하고, 균형성과 안정성을 유지하기 위한 추가 조치를 취하겠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전문가와 시민 단체들은 복원 과정을 포함한 사업 추진 전반에 대한 검토와 관리 감독 체계의 강화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내세우고 있다.
20년이라는 오랜 기간과 노력을 들여 추진된 미륵사지 석탑 복원 사업이 원형 보존이라는 목적에서 벗어나 부실하게 진행됐다는 감사 결과는 문화재 보수 과정의 허술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다. 향후 해당 사업과 유사한 문화재 복원 과정에서 철저한 구조 검토와 안정성 점검이 이루어져야 하며, 복원 과정의 투명성을 확보해 부실 복원 논란을 방지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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