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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두문자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_김정호 금석과안록

by noksan2023 2025. 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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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진흥왕 순수비_김정호 금석과안록

 

 

 

북한산 순수비

 

 

 

지금도 오르기 힘든 서울 북한산의 비봉 정상에는 비석 하나가 우뚝 솟아 있다. 바로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이다. 순수비는 왕이 새롭게 개척한 영토를 직접 돌아 보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다. 진흥왕은 서울 북한산과 함경도 마운령, 황초령에도 순수비를 남겼다.

 

비석의 글자 대부분은 오랜 세월 비바람을 맞아 형체를 알아볼 수 없다. 하지만 남아 있는 글자를 통해 한강 유역으로 영토를 넓혔던 진흥왕의 업적을 찬양하는 내용임을 추측할 수 있다. 또한 해당 지역의 백성을 위로하고 상을 내린 내용이 있어 새롭게 얻은 영토를 안정시키려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왕의 업적을 찬양하는 비석을 왜 사람들이 오가기도 힘든 높은 산에 세웠을까? 삼국은 물론 삼국이 형성되기 이전부터 한반도에는 산천에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있었다. 보통 산천에 대한 제사는 지역의 지배층이 주도하며 영향력을 과시하였다. 서울 북한산은 백제가 제사를 지내던 신성한 곳이었다. 바로 그곳에 신라왕이 정복한 지역의 유력자들을 이끌고 제사를 주관하며 그 지역의 새로운 지배자임을 널리 알리려 한 것이다. 즉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건립은 영토 확장 기념뿐만 아니라 지역의 지배라로서 위치를 확고히 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담겨 있었다. 

 

이처럼 중요한 의미를 지녔던 비석은 어떻게 만들었을까? 최근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의 암석 성분을 분석한 연구 결과 북한산의 돌이 아닌 경주에 분포한 화강암으로 만들어졌음이 밝혀졌다. 신라의 화강암으로만든 비석을 새롭게 개척한 영토에 세움으로써 영토 확장의 상징적 의미를 더한 것으로 보인다.

 

진흥왕이 공들여 만든 비석은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들에게 점차 잊혔다. 조선시대에는 무학대사가 세운 비석이라고 잘못 알려지기도 하였다. 비석의 존재가 다시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세기 활동한 실학자들에 의해서였다. 특히 추사 김정희는 비석에 새긴 문구를 연구한 끝에 비석을 세운 주인공이 진흥왕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김정희는 비석의 옆면에 자신이 비석을 보고 연구하였다는 기록을 남겨 놓기도 하였다. 비석에 신라의 역사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 실학자의 역사 연구가 더해진 것이다. 시간이 흘러 비석에는 또 하나의 역사가 새겨졌다. 비석 곳곳에 625전쟁 중에 발생한 총탄의 흔적이 무수히 남겨진 것이다.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는 1972년 보존을 위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진품을 보기 위해 박물관을 찾는 것도 좋지만, 순수비가 있던 비봉에도 가보길 추천한다. 사방이 탁 트인 비봉 정상에 올라가 보면 진흥왕이 당시 꿈꿨던 원대한 구상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서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서울 北漢山 新羅 眞興王 巡狩碑)

 

 

 

북한산 순수비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서울 북한산(일명 三角山) 남쪽 승가사(僧伽寺) 서남방에 위치한 비봉(碑峰) 꼭대기에 있었으나,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이 비 부근에 승가사가 있고 조선 태조 때의 국사였던 무학(無學)의 탑비가 있어 종래 ‘무학의 비’ 또는 ‘도선(道詵)의 비’로 알려져 왔으나, 1816년(순조 16) 7월에 김정희(金正喜)가 김경연(金敬淵)과 함께 이 비석을 조사하고, 다시 이듬 해 6월 조인영(趙寅永)과 같이 비문을 조사하여 68자를 심정(審定), 비로소 진흥왕순수비임을 확인하게 되었다.

비가 세워진 연대는 분명히 알 수 없으나 561년(진흥왕 22) 창녕비(昌寧碑)가 건립된 뒤부터 568년(진흥왕 29) 황초령비(黃草嶺碑)와 마운령비(摩雲嶺碑)가 건립되기까지의 기간 중 어느 한 시기일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고, 한편 568년 이후일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 비는 윗부분이 일부 마멸되어 현재 남아 있는 비신은 높이가 154㎝, 너비가 69㎝이다. 비문은 모두 12행이며 행마다 해서체로 32자가 새겨져 있다.

진흥왕은 553년(진흥왕 14) 백제로부터 한강 하류지방을 빼앗아 이 곳에 신주(新州)를 설치했으며, 555년(진흥왕 16) 10월에는 몸소 북한산에 순행하여 강역을 획정한 일이 있는데, 그것을 기념해 순수비를 세웠을 것으로도 보인다.

북한산비에는 일척간(一尺干: 伊飡의 별칭)의 고위관등을 가지고 있던 내부지(內夫智)의 이름이 새겨져 있으며 또한 남천군주(南川軍主)의 직명도 나타나 있어, 신라시대의 인물 및 관직제도 연구에 참고가 된다. →진흥왕순수비

 

 

 

북한산 진흥왕순수비를 밝혀낸 김정희의 예당금석과안록

 

 

 

예당금석과안록

 

 

 

 

『예당금석과안록』은 추사 김정희가 서울 북한산 옛 비석이 진흥왕순수비라는 것을 밝히고, 황초령비와 함께 고찰하여 지은 책이다. 제목은 ‘김정희가 금석문을 보고 기록한 책’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후대에 붙여진 것이다. 북한산비의 실체를 직접 확인하고, 『삼국사기』를 비롯하여 중국의 여러 서적을 참고해 연구한 결과이기 때문에 고증적이고 학술적인 성격이 잘 드러난다. 감상적 측면이 강했던 금석학을 학문으로 정립한 김정희의 주요 기록물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추사 김정희의 『예당금석과안록』
『예당금석과안록(禮堂金石過眼錄)』은 조선 후기 실학자 김정희(金正喜)가 진흥왕순수비 가운데 북한산비와 황초령비를 연구하고 저술한 고증서이다. ‘김정희가 금석문을 보고 기록한 책’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나, 책의 명칭은 후대에 붙여진 것이고 원문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두 기의 진흥왕순수비를 고찰한 글이라는 의미에서 『완당집(阮堂集)』에는 「진흥이비고 (眞興二碑考)」라는 제목이 쓰였다. 『예당금석과안록』은 감상적 측면이 강했던 금석학을 고증적 측면을 보완하여 학문으로 정립한 김정희의 성과라는 점에서 의미 있는 기록물이라고 할 수 있다. 
  
서울 북한산 오래된 비석의 정체
10대 때부터 금석문에 관심이 있었던 김정희는 20대에 중국 연행을 계기로 당대 최고 금석학 대가들과 교유하면서 조선 금석학에도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가 조선에 돌아와 가장 먼저 관심을 보인 비석은 북한산에 있는 오래된 비석이었다. 무학비, 도선비 등으로 불리던 이 비석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뿐 그 실체를 제대로 확인한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하루는 김정희가 김경연(金敬淵)과 함께 승가사라는 절에 놀러갔다가 우연히 이 비석을 발견했다. 비석은 오랜 세월 비와 바람을 맞아 글씨가 뭉개지고 이끼가 껴서 비문을 판독하기 어려웠다. 탁본을 떠서 비문을 확인해 보니 ‘진(眞)’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탁본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서도 내용을 판독하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노력을 기울였다. 주변 친구들에게도 이 소식을 알리고 도움을 받았다. 그러던 중 황초령비의 비문과 비교해 보고는 북한산에서 발견한 비석이 황초령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바로 진흥왕 순수비였던 것이다. 그는 더 자세히 연구한 결과 두 비석의 비문이 글씨뿐만 아니라 내용도 유사하고 비슷한 시기에 세워졌다는 것도 밝혀냈다. 

비석의 실체를 밝혀낸 김정희는 조인영(趙寅永)과 함께 다시 북한산에 올랐다. 그리고 비석의 왼쪽 측면에 이 비석이 신라 진흥왕의 비석이며, 김정희와 조인영이 함께 와서 비문을 읽은 사실을 새겼다. 이후 김정희가 북한산 진흥왕순수비의 정체를 밝혀낸 성과는 청나라에도 그 소식이 전해졌다. 조선 최고의 금석학 대가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두 기의 진흥왕순수비를 연구한 성과는 『예당금석과안록』에 실려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과천 추사박물관과 과지초당
경기도 과천시에는 김정희의 별서 ‘과지초당’이 있었다. 김정희는 이곳에서 4년 간 생활하고 생을 마감하였다. 김정희가 머무른 기간은 길지 않지만 과지초당에서 생애 말년을 보내면서 그의 예술혼을 불태웠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래서 김정희를 연구하며 자료를 모아온 일본 학자가 과천시에 자료를 모두 기증하면서 추사박물관이 만들어졌다. 추사박물관은 김정희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박물관에 방문하면 김정희의 삶과 예술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북한산 비봉에 꼭 한번 가봐야 할 이유, 이 돌 때문입니다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현재 비봉 정상에 세워진 건 2006년에 세운 복제비다

 

 

 

 

북한산에는 꼭 한 번 가보고 싶은 장소가 있었다. 바로 비봉(碑峯)으로,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봉우리 위에 비석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이 비석은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로, 향로봉에서 비봉 방향으로 걸어가다 보면 비봉의 형태와 정상에 세워진 비석을 한눈에 볼 수 있다. 비봉으로 가는 코스는 비봉탐방지원센터(서울 종로구 구기동 192-1)로 올라가거나 진관사 계곡 코스로 가는 것이 빠른 편에 속한다.

 

비봉의 높이는 해발 560m에 불과하지만, 정상까지 암릉 구간이 이어져 있고, 별도의 안전장치가 없기에 만만히 생각한다면 올라가기가 쉽지 않다. 안전에 유의하면서 정상까지 가는 건 초보자도 충분히 가능하며, 정상을 가다 보면 사진 명소인 코뿔소 바위를 만날 수 있다.

그렇게 비봉의 정상에 올라 진흥왕 순수비(복제본)를 마주하면서 주변을 돌아보면 주변 풍경이 그야말로 멋진 장관을 연출한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비석이 품고 있는 천사백 년 전 신라의 위용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코뿔소 바위비봉으로 올라가는 길에 볼 수 있는 관광 명소다.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은 신라의 전성기를 이끈 정복 군주로 유명하며, 그의 재위 기간 신라는 북진을 통해 영토를 비약적으로 확장했다. 이를 보여주는 흔적이 바로 진흥왕 순수비로, 현재까지 밝혀진 진흥왕 순수비는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황초령 진흥왕 순수비 

▶마운령 진흥왕 순수비 

▶창녕 진흥왕 척경비 등이 있다.

 

또한, 연구자에 따라 파주 감악산 정상에 있는 감악산비를 진흥왕 순수비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유는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와 형태가 유사한데다 지난 2022년에 비면에서 '전(典)' 글자가 확인되는 등 정황상 진흥왕 순수비로 볼 만한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감악산비는 심증이 있지만, 명확하게 순수비로 확정된 건 아니기에 추정의 범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이처럼 비봉에서 만날 수 있는 진흥왕 순수비는 신라 멸망 후 조선시대까지 오랫동안 그 존재가 잊혀졌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비봉에 세워진 비석과 관련한 언급이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택리지(擇里志)>의 기록을 인용해 비봉에 세워진 비석에 무학왕심도차(無學枉尋到此)가 새겨진 사실과 도선(道詵)이 세운 것이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완당전집>에도 해당 비석을 요승무학왕심도차지비(妖僧無學枉尋到此之碑)로 언급하고 있다. 즉, 비봉에 세워진 비석의 존재는 인지했으나 해당 비석을 무학대사 혹은 도선의 비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조선 후기에 실학자들에 의해 비석에 대한 정밀 분석이 시작되었고,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에서 서유구(徐有榘, 1764~1845)는 비봉에 신라진흥왕북순비(新羅眞興王北巡碑)가 있으며, 비문 중 10글자를 알아볼 수 있다고 기록했다.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순수비임을 고증하기 전부터 이미 진흥왕 북순비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완당전집>과 순수비 옆면의 새긴 명문을 통해 김정희는 1816년(순조 16)과 1817년(순조 17), 두 차례 비봉을 방문해 비문을 읽고 고증하며 총 68글자를 판독했는데, 이를 통해 당시 진흥왕의 영토 순행 사실과 신라와 고구려간 경계 비석을 세운 사실을 확인했다.

 

비석의 정확한 건립 시기는 오랜 풍화로 인해 일부 마모된 부분으로 인해 확정할 수 없지만 두 가지 견해가 존재한다. 첫 번째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555년(진흥왕 16) 10월 진흥왕이 북한산 순행한 기록을 근거로 이 시기에 비석이 세워졌을 가능성이다.

두 번째는 김정희가 비문을 판독한 뒤 순수비에 새겨진 '남천군주(南川軍主)'의 명문을 주목했는데, <삼국사기>에는 568년(진흥왕 29) 10월에 북한산주를 폐하고, 남천군주를 설치한 기록이 있다. 따라서 순수비에 남천군주 명문이 있다는 것은 비를 세운 시기가 568년 이후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김정희는 비를 세운 시기를 568년에서 576년을 벗어나지 않을 것이라 주장하기도 했다.

 

현재 국보로 지정된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의 원본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져 보존되고 있으며, 원 위치인 비봉에는 지난 2006년에 복제본이 세워졌다. 또한, 순수비가 있던 자리는 사적(북한산 진흥왕 순수비지)으로 지정된 상태다.

북한산의 비봉과 진흥왕 순수비는 신라의 영토 확장과 북진 정책을 보여주는 문화유산이자 지금도 많은 등산객들이 찾고 있는 북한산의 대표 명소로, 훌륭한 역사·문화 자원인 동시에 관광자원으로서 주목되는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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