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상알현도_허리 숙인 남자와 두 손 모은 여자

나귀를 탄 사람은 차림새로 보아 한눈에 양반임을 알 수 있다. 반면 허리를 깊게 숙이고 절을 하듯, 두 손을 공손히 모아 인사를 하는 남녀는 양반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길에서 만난 이들은 무엇을 하는 것일까?
이 풍속화를 그린 김득신은 조선 시대 그림을 담당하던 국가 기관인 도화서에 소속된 화원으로, 그림에 별도의 제목이나 글을 적지 않았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양반과 상민(평민)을 그렸다는 의미로 「반상도」, 또는 길 위에서 지체 높은 사람을 만나 인사한다는 의미의 「노상알현도」로 이름 붙였다.
조선은 전형적인 신분제 사회였다. 신분제를 가장 잘 보여 주는 것은 신분에 따라 다르게 입었던 복장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당시를 살아간 사람들의 일상을 그린 풍속화는 화가가 의도하지 않아도 신분제 사회의 모습을 보여 줄 수밖에 없다. 김홍도와 신윤복의 다양한 풍속화에 등장하는 인물의 신분을 우리가 알아볼 수 있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이 그림에 후세 사람들이 붙인 이름 「노상알현도」나 「반상도」는 합당한 것일까? 혹시 조선 시대 풍속화를 신분제라는 틀에 넣어 보면서 풍속화에 담긴 다양한 사회상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김득신은 김홍도, 신윤복과 비슷한 시기에 도화서 화원으로 명성을 날렸다. 그는 신분제가 굳건하던 시대에 굳이 신분제를 표현할 목적으로 이 그림을 그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나가는 길에 목격한 인상적인 장면을 떠올리며 그린 것은 아닐까? 화가의 의도를 모른 채 단순히 신분제를 보여 주는 풍속화로 정의하는 것은 이 풍속화에 담긴 사회상을 너무 좁게 해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심규석 화가의 해석은 색다르다. 그는 허리를 깊이 숙인 남자가 두루마기를 입었고 여자는 외출할 때 쓰는 모자인 전모를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어떤 목적을 가지고 외출한 남녀로 추정한다. 나귀를 탄 이는 마부와 아전(향리)을 동반한 수령(지방관)으로 보았다. 그리고 민원을 넣기 위해 외출한 남녀가 길거리에서 수령을 만나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그래서 이 그림을 「노상소원도」로 부를 것을 제안하였다. 심 화가의 예리한 눈을 빌려 그림을 다시 보니 관계를 단정할 수 없는 남녀가 사또를 만나 무슨 소원을 빌었을까 궁금해진다.
여성이 쓰고 있는 전모는 우산처럼 펼쳐진 테두리에 살을 대고 종이를 발라 제작한 것이다. 전모는 양반가 사대부 여인들은 사용하지 않고 주로 의녀와 기녀들이 사용하였다. 따라서 풍소고하에 등장하는 여인을 양반으로 추정하는 것도 무리다.
긍재 김득신
김득신(金得臣, 1754년(영조 30년) ~ 1822년(순조 22년)은 조선 시대 후기의 화가이다. 자는 현보(賢輔), 호는 긍재(兢齋), 홍월헌(弘月軒), 본관은 개성(開城)이다.
도화서 화원 출신으로 초도 첨절제사(椒島 僉節制使)에 이르렀다. 자연과 풍속화를 잘 그렸는데 심사정, 정선과 함께 영조 때의 삼재(三齋)로 불렸다. 화적으로는 덕수궁 미술관 소장 <곽분양자 행락도>(郭紛陽子 儀行樂圖),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부취도>(扶醉圖), <귀시도>(歸市圖), 간송 미술관 소장 <풍속화첩>, <숙상야우도>(潚湘夜雨圖), 개인 소장 <오동 폐월도>(梧桐吠月圖) 등이 있다.








긍재 김득신
본관은 개성(開城). 자는 현보(賢輔), 호는 긍재(兢齋), 초호는 홍월헌(弘月軒). 김응리(金應履)의 아들이며, 화원이었던 김응환(金應煥)의 조카이다. 화원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낸 한중흥(韓重興)의 외손자이다.
개성 김씨 가문은 김응환때부터 도화서 화원을 지속적으로 배출하는 명문 화원 가문을 이루었다. 따라서 김득신 집안의 구성원은 화원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김득신은 화사군관으로 초도첨사(椒島僉使)를 지냈고 동생인 김석신(金碩臣), 김양신(金良臣), 그리고 아들인 김건종(金建鍾), 김수종(金秀鍾), 김하종(金夏鍾)이 모두 화원이었다.
김득신은 활약상에 비해 기록이 적으며 생애도 뚜렷하지 않은 편이다. 『근역서화징』에는 김득신의 생년이 1754년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부친 김응리의 생년과 11년, 김응환과는 12년 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것이어서 그의 생몰년에는 의문이 남는다.
김득신은 흔히 김홍도의 영향을 받은 화가로만 이야기되어 왔으나 그의 회화적 기량은 조선 후기 도화서를 대표하는 화가로 불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 그의 화풍을 보면 초기에는 김응환을 통해 집안의 화풍을 계승하였고, 이후에는 김홍도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나타난다. 도석인물(道釋人物), 산수, 영모(翎毛) 등에서 김홍도의 영향을 받았으나 풍속화의 경우 더욱 두드러진 영향을 보인다. 그는 김홍도의 후기 풍속화풍을 계승하는 동시에 산수를 배경으로 삽입한 점이 특징이다. 여기에 해학적 분위기와 정서를 더욱 가미하여 풍속화에서 김홍도 못지않은 역량을 발휘하였다.
김득신은 1772년『육상궁시호도감의궤(毓祥宮諡號都監儀軌)』부터 의궤에 이름이 나타난다. 이때 나이는 18세로서 이후 꾸준히 의궤에 이름이 기록되고 있다. 1791년 정조어진의 원유관본(遠遊冠本)을 그리는 데에 이명기(李命基), 김홍도(金弘道), 신한평(申漢坪)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또한 「곽분양행락도(郭汾陽行樂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와 같은 공필(工筆)의 고사도(故事圖)를 남기고 있어 다양한 화풍을 구사한 화가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대표작으로는 「파적도(破寂圖)」(간송미술관 소장), 「긍재풍속화첩」(간송미술관 소장), 「귀시도(歸市圖)」(개인 소장), 「오동폐월도(梧桐吠月圖)」(개인 소장), 「풍속팔곡병(風俗八曲屛)」(삼성미술관 리움), 「신선도」(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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