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여지도_전체 크기가 아파트 3층 높이

2016년 6월, 「대동여지도」한 점이 경매에 나오자 사람들의 높은 관심 속에 다양한 궁금증이
쏟아졌다.
"대동여지도는 박물관에 있는 게 아니었나?"
"컬러였어?"
"원래 이렇게 큰가?"
때마침 개봉한 영화 <고산자>도 「대동여지도」의 인기에 한몫하였다. 「대동여지도」는 사진에서 보다시피 펼쳐 놓으면 세로 길이가 아파트 3층 높이에 달하는 초대형 지도이다. 김정호가 정확한 지리 정보를 여러 기관에 쉽게 제공하려고 「대동여지도」를 직접 새긴 목판도 존재한다. 경매에 나온 것은 20개 정도 전해지는 목판 인쇄본 중에서도 인쇄 후 고을별로 색을 입힌 채색본 「대동여지도」로 국내에는 유일하게 남아 있던 것이다. 경매에서는 낙찰되지 않았지만, 뒤에 경매 가격 25억 원을 밑도는 수준에서 익명의 국내 소장가에게 팔렸다고 한다.
우리가 「대동여지도」에 관해 잘못 알 고 있는 사실도 있다.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만들려고 백두산을 7번이나 올랐다느니, 세 차례나 전국 방방곡곡을 답사했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일제 강점기인 1925년에 민족 의식을 높이려고 신문에 처음 실렸는데, 계속 살이 붙어 하나의 신화가 되어 버렸다. 흥선 대원군이 김정호와 그의 어린 딸을 죽이고 목판을 불태웠다는 가공의 이야기도 덧붙여져 조선이 인재도 몰라보는 무능한 나라여서 망했다는 이미지도 만들어졌다. 많은 사람이 국토 정보를 이용할 수 있도록 김정호가 평생에 걸쳐 헌신한 것은 맞지만, 당시 조선에는 굳이 백두산에 오르고 전국을 돌아다니지 않아도 될 만큼 수준 높은 지도가 많이 있었다. 김정호는 축적되어 있던 지도 정보와 제작 기술을 바탕으로 기존의 지도와 지리서를 비교하여 이를 집대성하였다.
기존의 지도들은 대부분 한 장의 큰 지도라서 한눈에 보기는 좋았지만, 각 고을에 관해 상세히 알기는 어려웠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김정호는 먼저 두 권의 책으로 된 「청구도」를 만들었다. 청구도는 한 쪽에 고을이 하나씩 들어 있어 자세히 보기에 편했고, 휴대성도 좋았다. 하지만 책이다 보니 주변 고을까지 연결해서 한눈에 보기에는 불편하였다.
청구도를 다시 업그레이드한 것이 「대동여지도」다. 「대동여지도」는 우리나라 남북을 22층으로 자르고, 다시 각 층을 19면으로 나눠 병풍처럼 접을 수 있는 첩의 형태였다. 첩을 펼치고 위아래로 연결하면 동서남북으로 이어 보기가 가능했다. 게다가 필요한 지역만 접어서 다닐 수가 있어서 지니기도 편했다. 한마디로 정확성, 편의성, 휴대성을 모두 갖춘 만능 지도였다. 김정호는 그의 호 고산자古山子처럼, 조선의 옛 산을 사랑한 지리학자였다.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정의
1861년(철종 12)에 古山子 金正浩 가 목판본 22첩으로 제작한 전국 지도첩이다.
서지사항
오동나무 상자 포곽 안에 2종의 지도가 보관되어 있다. A본은 각 첩마다 표지가 있는 22첩으로 된 分帖折帖式 지도첩이다. 무늬가 없는 황색 종이 표지에 목판으로 인쇄된 四周單邊의 제첨이 있다. 제첨에는 서명과 第○幅의 책차가 함께 인쇄되어 있다. 標題面에 ‘當宁十二年辛酉’, ‘古山子校刊’이라고 간인되어 辛酉本(1861)임을 알 수 있다. B본은 24첩으로 된 지도첩으로, 무늬가 없는 회백색 종이 표지에 서명이 없다. 제1첩에 ‘共二十四葉’, 제2첩에 ‘二’, 제3첩과 제4첩에 ‘三上’, ‘三下’, 제5첩부터 제23첩까지 ‘四’~‘二十二’, 제24첩에 ‘一’이라고 필사된 첨지가 붙어 있다. 제24첩은 A본의 제1첩과 비슷하다. A, B본 모두 군현 경계 등이 채색되어 있으며, ‘李王家圖書之章’이 날인되어 있다.
체제 및 내용
채색 목판본이다. 이전에 작성된 지도들은 지도책 형식으로 제작되었지만, 『大東輿地圖』는 분첩절첩식의 형태로 만들어 휴대와 열람이 편리하도록 고안되었다. 각 층이 연속되는 일련의 지도로 되어 있고, 각 층의 지도를 순서대로 맞추면 조선전도가 된다. 책 크기는 세로 약 30㎝, 가로 약 20㎝이며, 전체를 연결하면 세로 약 6.6m, 가로 약 3.8m가 되는 대축척지도이다.
1첩 1면에 ‘當宁十二年辛酉’라고 간인되어 있어 1861년에 제작된 목판본임을 알 수 있고, 표제는 ‘大東輿地圖’이며, ‘古山子校刊’이라 되어 있다. 2면에 세로 12개, 가로 8개의 방안이 그려져 있고, 방안에 ‘每方 十里’와 ‘每片 縱一百二十里 橫八十里’라고 기록되어 있어 각 도엽면이 세로 120리, 가로 80리이며, 방안도법을 바탕으로 제작되었음을 알려준다. 방안의 크기는 약 2.5㎝이다. 다음으로 경원·온성·종성 일대의 지도와 지도표, 地圖類說, 도성도, 京兆五部圖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도표는 현대 지도의 범례에 해당하는 것으로, 營衙·邑治·城池·鎭堡·驛站·倉庫·牧所·烽燧·陵寢·坊里·古縣·古鎭堡·古山城·道路 등 14종류의 표기 방법을 제시하였다. 2첩부터 22첩까지는 전국 330여 개의 군현과 경계, 산줄기, 하천, 도서 등을 묘사하였다. 특히 11,000개 이상의 많은 지명을 수록하였는데, 유형별로 분류해볼 때 자연 지명은 산지 지명(山·峰·岩 등), 하천 지명(川·江·灘 등), 고개 지명(嶺·峴·峙 등), 해안 지명(島·嶼·串 등) 순으로 비중이 높고, 인문 지명은 행정(邑治·洞·里 등), 진보(鎭·堡·城 등), 창고, 역참, 봉수, 사찰 지명 순으로 분포하고 있다.
산줄기는 회화식 방법을 사용하여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연맥식으로 그리고, 굵기를 달리하여 산지의 고저와 험이를 표현하였다. 물줄기는 쌍선과 단선을 혼합하여 그렸는데, 쌍선은 수운이 가능한 하천을 표시한 것이다. 군현의 경계는 점선을 사용하고, 도로는 10리마다 방점을 찍어 거리를 알 수 있는 직선으로 그렸다. 바다는 연한 청색으로 채색되어 있으며, 도서는 1,100여 개로 크기와 모양이 단순하면서 실제보다 육지에 근접하게 그렸다. 한반도의 윤곽은 서해안과 남해안은 오늘날과 유사하지만 동북부 지방, 압록강 상류와 동해안 울진 부근은 다소 차이가 있다.
특성 및 가치
김정호 는 조선 후기의 축적된 지도학적 성과를 집대성하여 『大東輿地圖』를 완성하였다. 『大東輿地圖』는 현재 국내외 주요 기관에 40여 점이 확인되고 있다. 1861년의 신유본, 1864년의 갑자본 외에도 부분적인 수정을 거친 목판본과 필사본 또한 제작되었다. 장서각 소장 『대동여지도』는 목판본으로 제작된 신유본으로, 1첩의 지도표·도성도·경조오부도 등이 가채되어 있고 1첩의 지도유설과 2첩의 여백에는 있는 京都의 坊·津堡·烽·驛·戶口를 비롯하여 팔도의 주현·鎭堡·烽燧·驛站·田賦·民戶·人口 등과 濟州의 面·海堡·烽·牧所의 통계가 목판으로 실려 있는 점이 보물 제850-1호로 지정된 성신여자대학교 박물관 소장본과 유사하다. 특히 李王家圖書之章이 있어 왕실에서 『大東輿地圖』를 보유 및 활용하였음을 보여준다.
[서울역사박물관] 유물 소개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서울역사박물관은 ‘서울의 장소와 역사와 기억을 저장하는 도시역사박물관’이다. 역사적 층위가 두터운 ‘서울’이라는 공간의 변화와 그 안에서 삶을 영위해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수집해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유물을 수집할 것인가 선택해야 할 때 유물이 갖는 ‘장소성’의 요소는 중요한 고려사항이었고 이러한 맥락에서 일관되게 수집해왔던 유물이 바로 지도이다. 고금을 막론하고 지도에는 단순히 땅의 생김새만 표현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시간과 흔적이 오롯이 쌓여있고 공동체의 세계관을 포함한 사상과 지식, 그리고 염원이 담겨 있는 시각 자료이기 때문이다.
우리 박물관 소장 지도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유물로 단연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 1804~1866 추정)가 제작한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꼽을 수 있다. 근대 지도와 비교해서도 손색이 없을 만큼 자세하다고 평가 받는 이 지도는, 김정호가 백두산을 일곱 번 오르고 전국을 세 번 답사한 후 제작하였으며 너무도 정확한 지도의 내용에 놀란 흥선대원군에 의해 지도와 목판이 불태워졌다는 후일담까지 덧붙여져 더욱 유명하게 되었다. 물론 이 이야기는 사실무근임이 밝혀졌다. 그러나 막상 《대동여지도》의 상세한 모습을 실제로 볼 수 있는 기회는 드물었고 그 내용과 의미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고 있는 이도 많지 않다. 지도 전체를 펼쳤을 때 세로 약 6m, 가로 약 4m가 넘는 규모로 인해 상설전시를 통한 공개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 박물관은 개관 20주년을 맞이하여 전시 〈명품도시 한양 보물 100선〉(22.5.20.~22.8.7.)에서 《대동여지도》를 공개하고 시민들과 공유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였다.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대동여지도》
대동여지도는 김정호가 1861년 편찬·간행하고 1864년 다시 간행한 22권으로 이뤄진 절첩식(折疊式) 목판본 전국 지도이다. 조선의 국토를 남북 120리(里) 간격의 22층으로 나누어 각 층의 지도를 1권의 첩으로 엮었다. 각 권의 첩은 동서 80리를 기준으로 병풍처럼 펴고 접을 수 있게 만들어 휴대와 열람이 편리하도록 하였다(10리는 오늘날 4.2km 또는 5.4km). 오늘날 30여질의 《대동여지도》가 국내외에 전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는데, 이 가운데 우리 박물관 소장본은 경도(京都), 즉 한양과 각 도별 인구, 군사, 목장, 창고 등의 통계를 수록하여 서지학적인 가치가 있고 인쇄 상태 또한 훌륭한 것으로 평가받아 성신여자대학교 박물관,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본과 함께 보물로 지정되었다. 일반적으로 다른 본들이 22첩인데 비하여 우리 박물관 소장본은 독특하게 21첩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22첩의 제주도 부분을, 제21첩의 추자도의 서쪽에 배치하여 21첩에 포함시켰기 때문이다
《대동여지도》가 만들어지기까지
“김정호는 스스로 호를 고산자라 했다. 본디 교묘한 재주가 많았고 지리학에 깊은 취미가 있었다. 그는 두루 찾아보고 널리 수집하여 일찍이 〈지구도(地球圖)〉를 제작하고 또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는데 능숙하게 그림과 조각을 해서 인쇄하여 세상에 펴냈다. 상세하고 정밀하기가 고금(古今)에 비할 것이 없었다. 내가 한 질을 구해 보았더니 진실로 보배라 할 만한 것이었다. 또한 『동국여지고(東國輿地考)』 10권을 편찬하였는데 탈고하기 전에 세상을 떴으니 정말 애석하다.”
이 글은 유재건(劉在建, 1793~1880)이 중인(中人) 이하의 신분으로 특이한 행적을 남긴 사람들에 대해 쓴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에 실려 있는 김정호에 관한 짧은 기록이다. 이 밖에 실학자 최한기(崔漢綺, 1803~1877)가 써준 《청구도(靑邱圖)》 서문을 제외하면 그의 생애와 저작에 관한 기록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리하여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만들기까지 과정에는 다양한 상상력이 더해졌고 일반 대중은 그의 남다른 업적을 개인의 뛰어난 능력과 온갖 어려움을 극복한 노력의 결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강하였다. 그가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에 관해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대동여지도》가 18세기 비약적으로 발전한 조선 지도학과 지리학의 성과의 토대 위에서 완성되었다는 점이다.
최근까지 많은 연구 성과가 쌓여 《대동여지도》를 비롯한 김정호의 지도 제작 과정과 성과에 대해 우리는 보다 객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18세기 이전까지의 지도는 비교적 넓은 지역을 간략하게 나타내는 소축척지도(小縮尺地圖)가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또한 넓이와 형태가 제각각인 각 지방을 동일한 크기의 지면 안에 담아냈기 때문에 같은 지도책 안에서도 지도마다 축척이 달랐으며 지역 간 경계를 맞추어보기도 어려웠다. 그런데 18세기 중반에 이르러 실학자이자 지도학자였던 정상기(鄭尙驥, 1678~1752)가 『동국지도(東國地圖)』를 제작하며 각 도별(道別)지도에 ‘백리척(百里尺)’이라는 일정한 축척을 적용하여 실제 거리를 산출할 수 있고, 도별지도를 이으면 조선전도가 되도록 고안하였다. 또한 약 1:420,000 축척의 비교적 큰 지도로 제작하여 함경, 평안도 지도의 부정확성을 극복하면서 한반도의 윤곽을 실제에 가깝게 그려내 지도 제작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방안지도의 발달 역시 김정호의 지도 편찬 작업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방안지도는 일정한 거리 간격의 방안좌표를 만들고 지도의 모든 부분이 같은 비율로 그려지게 한 지도로 방안 그 자체가 축척의 역할을 하게 한 것이다. 이처럼 대축적의 전국지도를 편찬할 수 있는 지도학적 기반이 마련된 것에 더하여, 김정호의 작업에 대한 후원자들의 공감과 적극적인 지원도 큰 역할을 하였다. 헌종, 철종연간 고위 관료였던 신헌(申憲, 1810~1888), 실학자 최한기(崔漢綺, 1803~877)와 최성환(崔珹煥, 1813~1891) 등이 지도 제작에 필요한 자료와 정보를 제공하였고 재정적인 면에서 도움을 주었던 사실이 잘 알려져 있다.
그동안 축척 된 지도학적인 성과와 동시대 사람들의 후원 속에서 김정호는 평생을 지도 제작과 지리서 편찬에 힘을 쏟으며 탁월한 역량을 보여주었다. 1834년 《청구도》를 시작으로 《동여도》(1856~1872)와 《대동여지도》의 전국지도를 제작하였고 『동여도지(東輿圖志)』(1834~1861), 『여도비지(輿圖備志)』(1853~1856), 『대동지지(大東地志)』(1861~1866) 등의 전국 지리서를 편찬하였다. 그는 지형의 사실성과 정보의 정확성을 높이고 사용자가 정보를 효과적으로 습득하고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자신의 지도를 발전시켜 나갔다고 할 수 있다. 김정호가 만든 첫 대축척 전국지도 《청구도》는 2권의 지도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당시 대축척 지도의 크기가 너무 커서 펼쳐보기 힘든 불편함을 보완하기 위해 여러 도면에 나눠 담는 방식이다. 남북을 100리 간격으로 28층으로 나누고 각 층의 지도를 동서 70리 기준으로 나누어 지도책의 한 페이지에 담았으며, 방안선은 그리지 않고 가장자리 부분에 10리 단위로 눈금을 표시하였다. 산과 하천, 읍치, 성곽, 창고, 봉수 등 인문지리적인 정보가 매우 상세하게 표현되어 있을 뿐 아니라 지리서의 전통을 따라 각 고을의 호구 수, 토지면적, 세곡(稅穀)의 양, 병력 수, 서울까지의 거리 등을 기록하여 해당 고을의 현황을 바로 파악할 수 있게 하였다. 이는 지도와 지리서의 정보를 종합하려 했던 조선 지도학의 전통을 잘 따른 예라고 할 수 있다.

지리서의 정보를 지도에 가능한 한 통합하려 했던 《청구도》 이후, 김정호는 내용이 풍부하면서도 사용이 편리한 독립된 형태의 지도를 추구하였다. 《동여도》는 《대동여지도》 전에 제작했던 것으로 보이는 대축적 전국지도이다. 일부 연구자들은 《대동여지도》 제작 이후에 만든 것으로 보기도 한다. 22층의 절첩식 구성과 표현 양식, ‘방안표’와 ‘지도표’를 고안한 점 등에서 《대동여지도》와 유사하며 오히려 7천여 개의 지명이 더 수록되어 있다. 《청구도》와 달리 도엽(圖葉)을 새롭게 재구성하였으며 제책(制冊)을 보다 합리적으로 하여 새로운 양식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축적된 우리나라 국토 정보와 지식, 지도 제작 경험을 바탕으로 『대동여지도』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동여지도』는 오랜기간 축적되었던 지도학과 지리학의 성과를 집대성한 결과물로, 당시까지 제작된 지도 중 우리 국토를 가장 자세하고 정확하게 구현하면서 기호로 제공할 수 있는 인문지리 정보를 최대로 수록한 목판 지도라는 점에서 매우 귀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의 지리 정보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다

머리말 - 청구도와 대동여지도에 담긴 김정호의 꿈
김정호는 19세기에 조선의 국토정보를 집대성하고 체계화하여 지도와 지지에 담아낸 인물이다. 그는 지도와 지지를 아울러 종합적으로 지리지식을 정리한 지리학자이자 훌륭한 판각기술까지 보유한 지도제작자였다. 그는 지리정보의 대중화를 위해서 정확하면서도 이용하기 편리한 지도를 만들고자 하였다. 그의 천재적 재능과 탐구의 열정과 부단한 노력의 산물로서 만들어낸 작품들은 『청구도(靑邱圖)』, 『동여도(東輿圖)』, 『대동여지도(大東與地圖)』 등 3대 지도와 『동여도지(東輿圖地)』, 『여도비지(輿圖備誌)』, 『대동지지(大東地志)』 등 3대 지지로 정리할 수 있다.
김정호의 본관은 청도(淸道)로 추정한다. 황해도에서 출생하였다고 한다. 생년은 그와 친교가 깊은 최한기(崔漢綺)(1803~1877)와 비슷한 연배로 추정하고, 몰년은 대동지지에서 발견된 마지막 역사적 사실의 연대를 기준으로 하여 추정한다. 생몰 연도, 고향, 주요 활동지, 본관, 가계 어느 것도 정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그의 후손들에 대해서도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김정호의 자는 백원(伯元), 호는 스스로 고산자(古山子)라고 칭했다. 유재건(劉在建)의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에 김정호에 대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중인 이하의 신분일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향견문록』에는 김정호가 지도학에 관심이 깊어서 일찍이 지구도를 제작하였고, 또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는데 상세하고 정밀함이 고금에 없으며, 『동국여지고(東國輿地攷)』를 미처 탈고하기 전에 세상을 떴으니 애석하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김정호와 관련된 기록은 많지 않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흥선대원군 집정 때에 나라의 기밀을 누설시킬 우려가 있다는 혐의를 씌워 판목을 압수, 소각하고 그도 옥에 가두어 마침내 옥사하였다고도 하고, 세 차례 전국을 답사하고 백두산에도 7~8회 올라갔다고 하는데 이러한 말은 모두 사실이 아니다.
최한기와의 친교와 신헌(申櫶)으로부터 받은 후원은 그의 지도제작에 큰 힘이 되었다. 최한기와 같은 학자와의 교류를 통해 그는 동서양의 다양한 지리지식을 접할 수 있었고 세계지도를 목판으로 새기는 기회도 얻었다. 또 신헌과 같은 관리의 도움으로 규장각이나 비변사에 소장된 뛰어난 관찬 지도들을 열람하고 가르침에 힘입어 지도를 제작할 수 있었다.
군사전략가로서 민보론을 주장하기도 했던 신헌은 누구보다 지도의 효용을 깊이 인식했을 것이다. 따라서 김정호에 대한 그의 신뢰와 후원은 김정호의 지도 제작 작업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했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은 모든 군현에 지방관을 파견하여 직접 통치한 중앙집권국가로서 전국 각 지역의 정보를 체계적으로 수집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여지도서(輿地圖書)』 등의 지리지와 조선 전기 양성지의 『동국지도(東國地圖)』, 조선 후기 정상기의 『동국지도[영조](東國地圖)』 등 전국지도, 그리고 고을 내부의 세세한 정보까지 담고 있는 그림식 고을지도책 등이 제작되었다.
김정호는 이와 같은 축적된 조선지도학의 성과에 힘입어 지도제작과 지지편찬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기존의 지도와 지리지를 기초로 하여 보충하고 수정하는 과정을 거쳐 종합하고 집대성하였다. 최한기는 「청구도제」에서 김정호는 성인이 될 때쯤부터 지도와 지리지에 깊이 뜻을 두고 오랫동안 찾아 열람하여 여러 방법의 장점과 단점을 자세히 살폈다고 하였다. 김정호가 직접 작성한 『청구도』 범례에서는 여러 지리지와 지도들 사이의 모순, 지도에 기록된 것과 지방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의 차이 등을 조사하여 확인된 사실에 대해서는 교정하고 확인이 안 되면 옛 것을 그대로 따르되 후고를 기다린다고 밝혔다. 이처럼 그는 여러 지리지와 지도 등의 자료를 확보하여 꼼꼼하게 비교 검토하여 지도를 제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전국을 돌아다니고 백두산에 오르고 하여 지도를 제작한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가 만든 첫 전국지도인 『청구도』는 바로 기존의 지도들을 살펴서 그 문제점을 찾고 개선하기 위하여 만든 지도였다.
2 완벽한 지도를 향한 길 1 - 청구도를 중심으로
김정호의 첫 전국지도인 『청구도』는 기존 지도에 대한 비판의식으로부터 나왔다. 그는 기존 지도의 문제점에 대해서 지적하기를, 지도 위에 방안선을 그리다 보니 강을 자르고 산을 끊는 것을 피할 수 없으며, 여러 고을을 나누어 흩어 놓으니 표를 살펴도 경계를 알기가 어렵다고 하였다.
1834년(순조 34)에 필사본 전국지도로 만들어진 『청구도』는 분첩식으로 제작된 기존의 조선전도들과 차별화하여 보통의 책과 같은 장정을 선택하였다. 또 전국을 동서 22판, 남북 29층으로 나누어서 홀수 층의 지도를 제1책에 담고 짝수층의 지도는 제2책에 담았다. 두 책을 상하로 붙여 펼칠 경우에는 서로 인접한 두 층의 지도를 한꺼번에 볼 수 있도록 기획한 것이다. 또 일종의 색인지도에 해당하는 본조팔도주현도총목을 두어 보고자 하는 지역의 지도를 쉽고 빠르게 찾을 수 있도록 하였다.
내용적으로는 지도와 지지의 장점을 동시에 취할 수 있는 방법으로 지도에 역사지리정보를 기입하는 발상을 하였다. 즉 모든 고을마다 호구 수, 토지 면적, 군사의 총수, 세금으로 거두어들인 곡식의 총량, 한성까지의 거리 등을 기록하고,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있었던 곳에는 그 내용을 기록하였다.
이규경(李圭景)은 『청구도』에 대해서 말하기를, 각 면마다 하나의 지도로 만들어 책에 넣었는데 번호를 따라 취해 보면 눈앞에 나열되어 손바닥을 보듯 하니 헷갈림이 없게 되었다고 하면서 그 생각하는 바가 앞 사람들을 훨씬 뛰어넘고 정밀함이 평범함을 넘어섰다고 평가하였다.
김정호는 『조선지도』나 『팔도군현지도』와 같이 신경준(申景濬)이 주도하여 제작한 고을지도책 계통의 지도와 『해동여지도』를 참고하여 그 지도들에 수록된 고을 지도를 동일한 축척으로 확대·축소하여 『청구도』를 편찬하였다. 그리고 이후 3차에 걸친 개정판을 간행하면서 계속 보완하였다.
『청구도』를 제작한 즈음 『동여도지』도 만들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서문에서 ‘지도로 천하의 형세를 살필 수 있고 지리지로 역대 왕조의 역사를 알 수 있으니 이는 실로 나라를 다스리는 큰 틀이다.’ 라고 밝힌 바와 같이 『동여도지』는 지도와 지지를 함께 엮은 지리지를 추구하였다. 이규경은 『동여도지』에 대해서 말하기를, “『동국여지승람』을 취해 잘못된 것을 고치고 시문을 삭제하여 없는 것의 소략함을 보충했으니 매우 해박하다”고 하였다.
1853년(철종 4)~1856년(철종 7) 경에는 최성환(崔瑆煥)과 함께 『여도비지』를 제작하였다. 『여도비지』란 이름 역시 지도와 지지를 결합한 지리지란 뜻이지만 전도, 도별도, 도성도만 있을 뿐 고을의 지도는 수록되어 있지 않다. 『동여도지』나 『여도비지』 모두 지도와 지지가 결합된 지리지의 편찬을 시도한 것 같으나 성공하지 못하였고, 이후에는 지지적 속성이 강한 지리지의 편찬과 지도적 속성이 강한 지도의 제작에 각각 집중하였다.
한편 1834년(순조 34)에 최한기가 청나라 사람 장정부의 『지구전후도』 탑본을 입수하여 김정호에게 새기게 하였다. 그때까지 우리나라에 지구를 목판에 새겨 지도로 만든 것은 없었다.
『지구전후도』가 지니는 가장 큰 의의는 대중적 영향력이다. 휴대와 열람에 편리한 소규모첩의 형식으로 목판 인쇄됨으로써 이전 시기 큰 병풍으로 제작되었던 『곤여만국전도』나 『곤여전도』에 비해 대중성과 보급성을 획득했다. 김정호는 『지구전후도』 판각 경험을 토대로 1848년(헌종 14) 이후에 또 한 번 목판본 세계지도인 『여지전도』를 제작했을 것으로 보인다.
1840년대(1846~1849 추정)에 『수선전도(首善全圖)』를 제작하였다. 『수선전도』는 서울지도라는 의미인데 서울의 정보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궁궐, 종묘와 사직, 관서 등이 밀집된 도성 안에는 대축척을 사용하였고 상대적으로 정보가 희박한 도성 밖에는 소축척을 적용하여 그렸다. 수록된 내용이나 표현 기법으로 볼 때 목판본 도성도 가운데에서 수작으로 평가되며, 판화로서의 예술적 가치도 높은 것으로 인정되었다. 이렇게 『수선전도』를 만들었던 경험은 『대동여지도』에서 도성도를 강화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이상을 종합해보면 그는 효과적으로 지리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서 지도와 지지를 결합하고자 하였고 그러한 의도는 『청구도』에 반영되었다고 보인다. 또 그는 완벽한 지도를 만들기 위해서 끊임없이 고안하고 노력하였는데 3차 개정을 거친 『청구도』의 변화 과정에서 그러한 모습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청구도의 큰 장점 중 하나인 찾아보기 기능이 점점 강화되었고, 거기에 이어보기 기능이 보완되었으며, 수요가 많은 지도인 한양지도가 첨부되었다. 『청구도』는 휴대와 이용의 편리라는 측면에서 큰 진전이 있었던 지도라고 할 수 있다.

3 완벽한 지도를 향한 길 2 - 대동여지도를 중심으로
지도와 지지의 결합을 추구했던 『청구도』와는 달리 그는 이번에는 지리지의 내용을 배제하고 자연지형과 지리정보만으로 구성되는 전국지도를 구상하였다. 또 산줄기를 아예 그리지 않았던 『청구도』와는 다르게 국토를 사람의 몸에 비유하는 유기체적 국토관에 입각하여 크고 작은 모든 산줄기가 백두산에서 뻗어 나오도록 구성하였다. 형식적으로도 색인지도를 두어 찾아보기 기능이 강했던 청구도와 달리 이어보기 기능을 강화하기 위하여 병풍식의 첩 형태를 취하였다.
1853년(철종 4)~1856년(철종 7) 경 제작한 동여, 필사본 『대동여지도』 14첩, 필사본 『대동여지도』 18첩과 1861년(철종 12) 제작한 목판본 『대동여지도』 22첩 등이 모두 이어보기 기능을 강화한 지도이다. 병풍식의 첩 형식은 부피가 많아져 상대적으로 휴대에 불편한 반면 책 형식의 『청구도』에서 구현할 수 없었던 남북과 동서의 자유로운 이어보기가 가능해졌다.
1856년(철종 7)~1857년(철종 8) 경 제작한 『동여도』 23첩은 내용적인 면에서도 『청구도』와 차이가 많다. 지리지와 관련지어 생각해보면 앞서 제작된 『동여도지』나 『여도비지』와는 다르고 1861년(철종 12) 이후 편찬된 『대동지지』의 내용과는 합치한다. 이것은 김정호가 『청구도』를 만들 당시와 비교하여 내용을 많이 수정하고 보완해나갔다는 뜻이다.
1861년(철종 12) 제작한 목판본 『대동여지도』 22첩은 형식과 내용 모두 보완하여 제작하였다. 『청구도』의 색인지도인 본조팔도주현도총목 대신에 각 첩에 수록된 고을의 이름을 표지에 적어 찾아보게 하는 방식으로 찾아보기 기능을 보완하였고, 12개의 기호를 사용하였던 『청구도』에 비해 22개의 기호를 사용함으로써 지도적 속성을 더욱 강화하였다. 내용적으로도 『청구도』가 기본정보에 대해 『해동여지도』 계통의 것을 거의 그대로 따른 반면에 목판본 『대동여지도』는 『동여도』와 마찬가지로 교정된 내용을 많이 반영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목판본으로 제작하여 보급성을 고려하였다.
또 『대동여지도』에는 두 점의 서울지도를 수록함으로써 수도지역의 지도를 특화시켰다. 「경조오부도」는 조선의 수도를 관장하는 한성부의 관할 지역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광역의 서울지도이고, 「도성도」는 왕궁과 각종 관청 등 국가 중요시설이 집중되어 있는, 한성 성곽 내부의 시가지를 상세히 그린 지도이다. 『대동여지도』에 수록된 다른 지역보다 훨씬 큰 축척으로 제작되어 수도 지역의 상세한 지리정보를 전하고 있다.
『대동여지도』 서문에 해당하는 지도유설에서는 지도 제작의 목적과 효용에 대해서 밝히고 있다.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국방상의 요충지를 잘 알아야 하고, 재물과 세금이 나오는 곳과 군사를 모을 수 있는 원천을 잘 알아야 하며, 여행과 왕래를 위해 지리를 잘 알아야 하므로 지도를 제작한다고 하였다. 또 세상이 어지러우면 쳐들어오는 적을 막고 사나운 무리들을 제거하는 데 지도가 쓰이고, 시절이 평화로우면 나라를 경영하고 백성을 다스리는 데 지도가 소용된다고 하였다.
한편 목판본 『대동여지도』 22첩을 모두 연결하면 남북 약 6.6m에 이르는 거대한 조선전도가 되어 조선 전체를 한 눈에 보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었다. 이 점을 개선하기 위해 김정호는 남북 115.2cm, 동서 76.4cm로 축소하여 조선전도를 제작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이 바로 목판본 『대동여지전도』이다.
『청구도』에서는 지지 정보를 함께 수록하였던 반면에 목판본 『대동여지도』에서는 지지 정보를 따로 정리하였다. 그리하여 『대동여지도』가 제작된 이후에 『대동지지』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앞서의 지리지인 『동여도지』와 『여도비지』가 이름에서부터 지도와 지지의 결합을 보여준 것에 비해 『대동지지』는 이름에서부터 지지로 특화되어 있다. 또 『대동지지』의 구성을 보면 도별로 소속 군현의 지리지를 수록하고 후반부에 산수고, 변방고, 정리고, 방여총지 등을 수록하여 종합적 지리지로서의 모습을 갖추었다. 『대동지지』는 미완성이지만 당시의 지지를 집대성한 지리지 편찬 작업의 결정판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이상을 종합해보면 그는 이어보기에 편한 지도와 대량으로 보급할 수 있는 목판본 지도를 추구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앞서 『청구도』나 『동여도지』, 『여도비지』 등에서 지도와 지지의 결합을 시도했던 것에 비해 대동여지도 계열의 지도에서는 지도와 지지를 분리하였다. 대신 『대동여지도』와 『대동지지』를 함께 만들어서 지도와 지지의 보완 관계를 설정하였다.
4 김정호의 지도제작과 지지편찬의 의의
김정호가 제작한 지도의 의의는 다음과 같다. 『청구도』, 『동여도』, 『대동여지도』는 우리나라 전체를 그린 전도(全圖)로서 전국지도·도별지도와 군현지도를 결합하여 군현지도 수준의 상세함을 갖춘 대축척 전국지도이다. 김정호는 『청구도』를 만들 때 지도와 지지의 결합을 추구하여 지도 위에 역사지리정보를 기입하였으며, 휴대의 간편함과 이용의 편리함을 위해 책의 형태를 취하고 색인지도를 첨부하였다. 『동여도』와 『대동여지도』를 만들 때에는 이어볼 수 있도록 병풍식의 첩 형태를 취하였고, 지도와 지지를 분리함으로써 지도적 속성을 더욱 강화시켰다. 그는 지도의 정확성과 함께 이용자의 편의를 고려하여 지도와 지지의 결합, 찾아보기 기능, 이어보기 기능 등 여러 가지 방법을 고안하였다. 따라서 그가 제작한 지도 간에 우열을 따지기 보다는 각각의 특징을 그의 의도대로 파악하는 것이 그의 지도를 올바로 이해하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또 그는 지도를 만드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도의 대중성, 보급성까지도 생각하여 궁극적으로는 목판본 지도를 지향하였고 한 눈에 보기 쉽게 축소된 『대동여지도』 즉 『대동여지전도』까지 따로 만드는 섬세함을 보여주었다.
김정호가 편찬한 지지의 의의는 다음과 같다. 『동여도지』와 『여도비지』의 제작을 거치면서 지도와 지지의 결합이 어렵다는 점을 알고 지지만을 특화시켜 풍부한 내용을 담은 지리지인 『대동지지』를 만들어내었다. 『대동지지』는 전국을 대상으로 하여 서술한 전국지리지로서 지역 단위로 지역의 특성을 기술하는 지역별 지리지와 강역·도로·국방·산천 등의 주제별 지리학을 결합시켜 종합적으로 구성된 지리지였다. 이전의 전국 지리지나 읍지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독특한 구성이다. 동국여지승람 편찬 이후 제작된 가장 훌륭한 사찬 전국지리지로 평가되고 있다.
결론적으로 그가 생각한 완벽한 지도는 『대동여지도』, 『대동지지』, 『대동여지전도』 3종을 한 묶음으로 하는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그 뜻과 진실
지도는 기술이며 문명입니다. 인공위성도 없던 시대에 정확한 지도를 만든다는 것은, 지금으로 치면 첨단기술을 가진 것과 같다고 합니다. 이런 일을 해낸 사람이 고산자 김정호지만, 흥선대원군 일화 등 알게 모르게 잘 못 알려진 것들이 꽤 많습니다.
다행히 대동여지도의 진실이 서서히 알려지고 있긴 합니다. 김정호의 호인 고산자의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김정호는 인생의 많은 시간을 정확한 지리정보를 위해 헌신한 인물입니다. 그의 헌신 덕분에 우리는 대동여지도라는 세계적인 지도를 가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대동여지도란 뜻은 '큰 조선 땅의 지도'라는 뜻입니다.
고산자 김정호와 흥선대원군에 얽힌 오해와 진실
이제는 제법 알려져서 다행이지만, 한동안 잘못된 정보 때문에 지식인들이 안타까워했던 것이 있습니다. 바로 흥선대원군과 고산자 김정호에 대한 얘기, 대동여지도의 진실입니다.
대동여지도란 뜻은 조선(大東) 여지(輿地) 도(圖)입니다. 여지는 수레라는 의미에서 파생해서 땅이라는 의미로도 쓰입니다. 고산자 김정호가 지도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겨우 대동여지도를 완성했더니, 이를 본 흥선대원군은 대로하여 김정호를 옥에 가두고 고문했다는 것입니다. 쇄국정책을 하던 흥선대원군의 눈에는 국내의 군사, 지리 정보를 유출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였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제는 대동여지도의 진실이 많이 바로잡혔지만, 아직도 몇몇 어린이 역사만화에는 이런 얘기가 있다고 합니다. 어릴 때 이런 일화를 읽으며 자란 성인 중에는 아직도 이것을 사실처럼 알고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하지만 막상 역사를 뒤져보면 흥선대원군이 고산자 김정호를 옥에 가두고 고문을 했다는 사실은 찾아볼 수가 없다고 합니다. 더구나 흥선대원군이 대동여지도의 인쇄 목판본을 불에 태워버렸다는 설은, 목판본들이 멀쩡히 발굴됨으로써 낭설이라는 것도 밝혀졌습니다. 실제로 국립중앙박물관 등에는 목판본이 전시 중입니다.
이런 거짓의 시초는 '조선어독본'이라고 합니다. 조선어독본은 일제강점기의 국어교과서였습니다. 초기에는 국어독본이 필수였지만, 일제의 말살정책이 강화되면서 일본어가 기본 필수과목이 되고 조선어는 선택과목이 되었습니다. 일제가 국어교과서인 조선어독본에 이런 거짓을 넣은 이유가 뭘까요?
조선인의 정신을 무력화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흥선대원군의 조선 정부는 대동여지도의 중요성도 모르는 무식한 정부라고 주입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조선어독본에 고산자 김정호와 흥선대원군의 거짓 일화가 적힌 것에는 육당 최남선이 조선어독본에 참여한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최남선은 당시 이광수, 홍명희와 함께 조선 3대 천재로 꼽히던 인물입니다. 신체시인 <해에게서 소년에게>로도 유명한 최남선은 처음에는 친일인사가 아니었습니다. 3.1 만세운동에서 민족대표 33인 중 하나로, 기미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인물이 최남선입니다. 일제의 식민역사에 맞서 단군론을 주장하기도 했지만, 말기에는 조선 청년들에게 일본 황국의 병사로 전쟁에 참여하라고 주장하며 친일파로 변절하였습니다.
나름 지도에 관심이 있고 고산자 김정호의 공을 높이 샀던 최남선은 어떤 신문에서 흥선대원군과 김정호에 대해 언급하였는데, 그 글이 조선어 독본에 그대로 실렸던 것입니다. 일제의 입장에서는 정신 말살에 좋은 자료인 셈입니다.

흥선대원군과 김정호에 대한 오해와 진실 외에도 또 하나의 논란이 있는데, 고산자 김정호가 정말로 전국을 다녀서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냐는 것입니다. 이 역시도 최남선의 <고산자를 회함>에서 최초로 언급되며 오해를 불러일으킨 속설입니다. 악의적인 의도가 없이 김정호의 노력을 높이 사기 위해 언급된 말이지만, 그 후 한동안 대부분의 대한민국 사람이 정말로 믿게 되는 문제를 낳았습니다. 조선 말기는 낡고 무식했다는 의식이 강하다 보니 김정호가 혼자의 힘으로 거대한 일을 해냈다는 얘기가 먹힐만한 소지가 있었습니다.하지만 대동여지도를 살펴보면 고산자 김정호가 이전의 다른 지도들을 참고한 흔적이 발견될 뿐만 아니라, 관인으로써 지도제작을 맡은 기간 안에 당시의 교통 수준을 이용해서 이렇게 정밀한 지도를 만든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라고 보입니다. 이렇듯 대동여지도의 진실은 따로 있었습니다.

고산자 김정호의 놀라운 대동여지도와 독도
전국을 일일이 다닌 것이 아니라 일부만 답사된 것이고, 그 외에는 기존에 만들어졌던 다른 지도들을 종합하여 만들어졌다는 것이 정설인 대동여지도. 그러나 현대인도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정확하고 거대한 규모로 놀라움을 주고 있습니다.
대동여지도의 크기는 3층 높이 정도의 공간이 있어야만 전체를 펼칠 수 있을 만큼 거대합니다. 축척은 실물의 16만 분의 1 크기입니다. 그래서 고산자 김정호는 대동여지도를 200여 개의 조각으로 나눠서 제작한 후 다시 연결하여 접었다가 펼칠 수 있도록 고안하였습니다.
흥선대원군에 의해 김정호의 목판이 부서졌다는 낭설이 있는데 지도를 찍기 위한 인쇄용 목판의 일부가 현존하고 있으며, 목판만 해도 60여 개가 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지도가 너무 크다 보니 전도를 발간하기가 힘들어서, 간행된 대동여지도들은 대부분 축소된 영인본들이라고 합니다.
흥선대원군의 미움을 샀다는 낭설과는 다르게, 실제 조선은 지도가 더욱 필요했던 국가입니다. 중앙에서 지방 곳곳에 관리를 보내 다스리는 중앙집권 국가였기 때문입니다. 고산자 김정호가 어떤 경로를 밟아서 지도제작에 참여하게 되었는지 기록이 없어서 확인할 길은 없습니다. 심지어 대동여지도의 제작자가 김정호인가의 진실도 의문을 가지던 때가 있었습니다.
대동여지도의 제작은 1800년대 역사에서 실학과 지리정보학에서 큰 획을 그은 사건입니다. 김정호가 교류했던 신헌, 김정희 등이 흥선대원군의 주변에 있었기 때문에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대동여지도는 김정호가 창안한 기호체계로 기록되어, 과거에 일일이 한자로 써넣었던 지도에 비해 편리하고 직관적인 지도입니다. 서양의 과학기술을 받아들여 훨씬 정확해졌으며, 대량 인쇄 보급도 가능했고, 인구와 면적 등이 조사된 통계자료까지 담고 있습니다.

대동여지도의 김정호가 스스로 호를 고산자(古山子)라고 붙인 뜻은 그만큼 지도에 대한 애착을 알 수 있는 단면입니다. 어릴 때부터 지도 그리기를 좋아하던 김정호의 3대 지도는 청구도, 동여도, 대동여지도입니다. 그중에 청구도가 첫 지도인데 대동여지도와는 다르게 책처럼 되어 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학생들의 역사지리부도와 같은 형식입니다.
청구도도 뛰어난 점이 많지만, 인쇄본이 아니라서 직접 베껴 쓰는 필사본으로 간행되다 보니 점점 오류가 많아지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대동여지도를 만들기 전에 동여도를 먼저 만들어보고(그러나 지리정보는 동여도가 훨씬 많다), 최종적으로 대동여지도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직접 발로 뛰어 만들었다는 속설과 달리, 고산자 김정호는 삼국사기, 고려사부터 신동국여지승람, 팔도총도, 동국팔역도, 해동여지도 등 수많은 지도를 연구한 후 대동여지도에 흡수시켰습니다. 뿐만 아니라 지구전후도 같은 세계지도 제작에도 참여했다고 합니다.
항간에는 대동여지도에 독도가 없어서 곤란하다느니, 대마도가 나와 있다느니 하는 오해도 많습니다. 1500년대에 만들어진 조선방역지도에는 대마도가 표기되어 있었지만, 대동여지도에는 대마도가 있지 않습니다. 다만 대동여지도를 축소하여 새로 만든 대동여지전도에는 대마도가 표시되어 있는데, 대동여지도와 혼동하는 경우가 자주 있는 것입니다.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의 최초 목판본에는 독도가 표시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당시에는 무인도일 뿐인 섬을 위해 목판본을 더 추가하는 것이 어려웠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 대동여지도의 목판본과 거의 동시대에 만들어진 대동여지도 필사본에 독도가 그려져 있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대동여지도는 제작 기간만 해도 10년이지만 이후에도 추가 작업은 계속되었는데, 이 대동여지도 필사본은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진실인 듯 보입니다.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뜻과 진실
고산자 김정호는 딱히 기록이 남겨지지 않아서 출생과 행적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조선은 기록문화가 발달했고 족보 제도가 있었으므로 이런 기록이 없다는 것은 그가 중인이 아니었겠냐는 추측을 하게 합니다. 하지만 친구 최한기가 양반이었고, 이후에도 여러 양반 신분들과 교류를 했던 것으로 보면 몰락한 양반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김정호는 1800년대에 황해도에서 태어났고, 지리학자이며 실학자입니다. 당시 청나라는 서구의 과학과 문화를 받아들이고 있었는데, 그 영향이 조선에 와서 실학으로 연구되고 있었습니다. 지인들의 기록에 의하면 스무 살 때부터 지도제작에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나타납니다. 김정호의 호인 '고산자'의 뜻은 옛 고, 메 산, 아들 자로 되어 있습니다(古山子). 다른 기록에 의하면 김정호 스스로 고산자를 지었다고도 합니다.
동시대를 살았던 김정호의 인맥으로는 최한기, 신헌, 김정희 등이 있습니다. 최한기는 김정호와 매우 친한 친구 사이였는데, 부유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서 중국의 수많은 책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최한기도 지리, 천문 등에 다양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김정호를 여러 방면에서 지원해 주었으며 수집한 자료들을 김정호와 함께 연구하기도 했습니다. 고산자 김정호에게 최한기 같은 친구가 있었기에 중앙에 있는 인맥을 통해 고급 자료들을 접할 기회가 생겼을 것입니다.
최한기는 실학자 김정희의 제자였기에 김정호도 추사 김정희와 교류를 할 수 있었습니다. 서예가로 유명하지만 김정희는 고증학자이며 실학자이기도 했습니다. 더불어, 흥선대원군 시절 병조판서를 지낸 신헌의 도움도 컸습니다. 덕분에 김정호는 희귀한 규장각 도서를 볼 수 있는 길이 열렸던 것입니다.
보통은 김정호의 작품으로 대동여지도만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청구도, 동여도, 대동여지도를 3대 작품으로 꼽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산자 김정호는 지리서도 제작했는데, 동여도지, 여도비지, 대동지지를 그의 3대 지리서라고 합니다. 지리서는 그림으로 표현 못 하는 기록과 묘사를 글로 적은 것인데, 당시의 사회상을 짐작할 수 있는 소중한 유산이기도 합니다. 대동여지도의 뜻 자체가 '큰 우리 땅의 지도'인 셈입니다.그리고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는 하나가 아닙니다. 김정호는 죽을 때까지 자료를 보강하였는데, 그가 남긴 대동여지도는 목판본 외에도 여러 가지 필사본(손으로 직접 베낀 것)이 있습니다. 접는 방식에 따라 몇 개의 그림으로 구성된 지도냐를 가지고 14첩, 18첩, 22첩 등의 대동여지도가 따로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목판본의 규모가 너무 크기 때문에 사용자의 편리까지 염두에 둔 작업이었습니다.
10년이 넘는 기간의 제작 열정과 끝없는 자료조사를 통해 인간 승리의 집념. 이런 점에 의해 고산자 김정호는 후대의 여러 인사에게서 추앙받았고, <고산자 회함> 같은 글이 일제강점기에 조선어 교과서인 조선어독본에도 실렸습니다.
그러나 일제의 조선인 정신 말살정책에 의하여 조선 정부를 비난하는 도구로 역이용되어 대동여지도의 진실이 덮였습니다. 흥선대원군이 벌을 주었다는 얘기나 전국을 직접 발로 뛰며 지도를 만들었다는 오해도 여기서 생깁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당시 서양문물을 더 일찍 접한 일제도 놀랄 정도로 정교한 작업을 한 인물이었으며, 지금에도 역사적으로 중요한 일을 해낸 인물로 남을 만큼 대단한 업적을 남긴 사람이 고산자 김정호입니다.
이렇듯 큰 획을 그은 김정호이지만, 말년에 어떻게 살았는지 어떻게 죽었는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일설에는 폐결핵에 걸려 죽었다는 말도 있지만 그것도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죽을 때까지 지도를 계속 연구하고 수정하며 살았던 것은 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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