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성보 전투_신미양요 누가 진정 야만인가

조선 전쟁(COREAN WAR), 독자들은 로저스 제독이 조선 야만인들과 짧았지만 중요한 전투를 벌인 것을 이미 알고 있으니, 이 삽화는 적의 공격으로 죽은 용맹한 젊은 장교의 이름을 딴 포트 맥키(Fort M'Kee) 내부 모습이다. 이번 원정은 향후 조선 해안에서 우리 배가 난파했을 때 선원들의 안전을 보장받는 조약 체결을 위해 수행되었다고 기억될 것이다.
신미양요 직후 어느 미국 신문에 실린 기사이다. 기사에서 미국은 행상 사고에 대비하는 조약을 체결하러 함대를 파견했다며 조선 전쟁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다. 또한 전투 중 사살된 맥키 소위의 죽음을 부각하면서, 신미양요를 정당하고도 평화적인 미국 협상단을 조선 야만인이 공격한 사건으로 그렸다.
그러나 신미양요는 가만히 있는 미국을 조선이 야만스레 공격한 사건이 아니다. 오히려 폭력을 동원하여 자주국의 영토를 침략하는 야만적인 행위를 벌인 건 미국이었다. 미국은 군함 5척에 해병 1천 명을 태워 강화 해협을 무단 침입하였다. 이는 십여 년 전 일본을 폭력적으로 개항했던 방식이다. 강화도는 수도 서울로 바로 연결되는 길목이었기 때문에 미국 군함이 접근하자 손돌목 포대의 조선군은 경고의 의미로 대포를 발사했다. 이후 조선과 미국은 강화도 입구 율도 백사장에 긴 막대기를 꽂아 놓고 편지를 매다는 식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미국은 5년 전 일어난 제너럴 셔먼 호 사건을 계속 물고 늘어졌다. 그러나 이것은 그저 침략의 구실이었다. 제너럴 셔먼호 사건에 관해서 조선은 미국에 이미 두 차례나 문서로 설명하였다. 하지만 미국은 조선의 설명과 상관없이 답은 정해져 있다는 식으로 조선의 개항을 요구했고 거절하면 무력으로 응징하겠다고 협박하였다.
조선이 개항에 응하지 않자, 미국은 계획대로 무력 침공하였다. 강화도의 초지진과 덕진진을 차례로 점령하고, 광성보를 공격하였다. 이곳을 지키던 어재연과 조선군은 부채 하나에 자기 이름들을 빼곡히 적은 일심선一心扇을 만들며 마음을 모았다. 그리고는 대형 장군기인 수자기帥字旗를 내걸고 미국의 침략에 맞서 끝까지 싸웠지만, 어재연을 포함해서 대부분 전사하였고 광성보는 함락되었다.
광성보 전투의 끔직함은 그림에서 그대로 전해진다. 그런데 여기에는 약간의 연출이 들어갔다. 사진사는 촬영 전에 야만인과의 전투 흔적이 실감나게 보이도록 시신들을 인위적으로 배치하였다. 맹수를 사냥하고 이를 기념해 포즈를 취할 때와 비슷한 연출이었다. 세상을 문명과 야만으로 나누고 자기와 다르면 인간도 동물처럼 취급하는 발상, 과연 누가 야만인 것일까? 처참한 시신을 보고 전쟁의 참혹함이 아니라 야만을 물리친 미국의 위대함을 느낀다면 문명국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강화 광성보 (江華 廣城堡)

강화 광성보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에 있는 조선 후기 군사 진보이다. 조선 효종~숙종 연간에 강화도 해안을 따라 설치된 군사 진보 가운데 하나로 1658년(효종 9) 신설되었다. 별장의 지휘 아래 광성돈대 등 2~3개의 돈대를 관할하였다. 1871년(고종 8) 신미양요 당시 최대 격전지로 미군의 상륙 부대와의 전투에서 지휘관인 중군 어재연과 조선군 수비대 대부분이 전사한 역사적 현장이다.
1658년(효종 9) 강화도 방비를 위해 해안가에 설치된 군사 지휘소다. 조선은 병자호란 당시 강화가 함락된 역사적 경험을 교훈 삼아 섬의 방비를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 일환으로 우선 효종~숙종 연간에 단계적으로 강화 연안을 따라 13개의 진 · 보를 다른 지역에서 옮겨 오거나 새로 설치하였다. 광성보는 당시 강화에 신설된 진 · 보 가운데 하나이다. 종 9품 별장의 지휘 아래 군관 15인, 토졸 45인이 배속되었고, 군선 9척과 조총, 활, 화포, 완구, 불랑기 등 각종 화포와 탄환, 화약이 비치되었다. 1679년(숙종 5) 강화 연안을 따라 축조한 48개의 돈대 가운데 광성 · 손돌목 2개의 돈대를 관장하였다가 이후 광성 · 화도 · 오두 등 3개의 돈대를 관할하였다.
광성보는 신미양요 당시 최대 격전지였다. 1871년(고종 8) 6월 1일(양력) 초지진을 거쳐 강화해협(염하)을 따라 북상하던 미국 함대가 손돌목 근처에 도달하자 광성보에서 사격을 하였고 남쪽의 덕진진과 대안(對岸)에 위치한 덕포진에서 이에 호응하면서 함대의 북상을 막았다. 북상에 실패한 미군은 6월 10일 초지진에 상륙하여 이튿날 점령하고 이어 덕진진을 함락한 뒤 광성보로 향하였다. 미군 상륙 부대의 마지막 공격 목표였던 광성보에는 진무중군 어재연(魚在淵)이 지휘하는 350여 명의 조선군이 방어하고 있었다. 군함의 함포 지원 사격을 받으며 공격한 미군은 조선군을 전멸시키고 광성보를 점령하였다. 당시 돈대의 성첩과 문루가 파괴되었으며 ‘수(帥)자기’를 비롯한 깃발과 화포 등이 미군에게 노획되었다.
신미양요 직후 파괴된 성축 등을 수리하였다. 1874년(고종 11)년 광성보와 덕진진, 초지진에 포대를 축조하여 염하 수로의 방비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또 신미양요 당시 미국 함대에 유효한 타격을 가하지 못했던 경험을 교훈 삼아 원거리 타격이 가능한 화포가 광성보와 덕진진, 초지진에 보급되었다.
광성보는 1971년 12월 29일 사적 제227호로 지정되었으며 1970년대 강화 전적지 보수 정화 사업을 시행하면서 돈대와 문루주9를 복원하여 지금의 모습에 이르렀다. 2011년 광성보에서 강화 광성보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매년 음력 4월 24일에는 신미양요 당시 순국한 어재연 장군과 무명용사의 넋을 기리기 위한 ‘광성제’가 거행되고 있다.
광성보는 강화 동남쪽 해안선이 손돌목 방향으로 돌출한 언덕에 자리한다. 약 1.5km 남쪽에는 덕진진이, 강화해협(염하) 건너편에 덕포진이 위치한다. 현재 광성보 경내에는 광성 · 손돌목 · 용두 등 3개의 돈대와 강화외성 6개 문루 가운데 하나인 안해루(按海樓)가 위치한다. 손돌목돈대 남측 해안 저지대에는 3개의 지점에 총 16개의 포좌를 갖춘 포대가 복원되어 있다. 광성, 손돌목돈대는 1679년(숙종 5)년에 축조된 것이고, 용두돈대는 해안 포대와 함께 19세기 후반 두 차례의 양요를 겪으면서 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안해루는 1745년(영조 21) 강화외성을 석성으로 개축하면서 건립된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 사적으로 지정된 경내 전체가 광성보의 영역으로 인식되지만 보(堡)는 개별 성곽이나 방어 시설이 아니라, 군사 지휘부이다. 광성보의 본진이 따로 존재하였고 옛 지도를 통해 광성돈대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나 지금까지 구체적인 위치는 확인되지 않았다.
광성보 경내에는 신미양요 당시 전사한 어재연 · 어재순 형제와 조선군을 기리기 위해 1873년 건립한 2기의 순절비인 쌍충비(雙忠碑)와 무명 순국자들의 시신을 7기의 무덤에 나누어 합장한 것으로 전하는 신미순의총(辛未殉義塚, 순절묘단)이 조성되어 있다.
광성보는 17~18세기 보장처 강화와 도성의 방어 체제 구축과 관련된 유적 가운데 하나이다. 1871년 신미양요 당시의 최대 격전지로서 조선 후기 국토 방위와 국난 극복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역사적 현장이기도 하다.
강화 광성보 (江華 廣城堡)

강화 광성보*는 병자호란으로 강화도가 처참하게 함락된 후 체계적으로 방어하기 위하여 조선 효종 9년(1658) 강화 해협 주위에 설치한 12개의 진과 보 중의 하나로 화도돈대**, 오두돈대, 광성돈대를 관할하였다.
무역 통상을 요구하며 미국 함대가 침범한 사건인 신미양요(1871) 때 미국 군대와 사투를 벌여 어재연 등 모든 군인이 전사하였다. 이 때 문의 누각과 성이 파괴되었던 것을 1976년에 새롭게 복원하면서 광성보 유적지 안에 신미양요 때 순국한 어재연 장군을 기리는 전적비와 순국용사 350여 명을 기리는 신미순의총, 전적지를 수리한 내용을 기록한 비석 등을 함께 만들어 세웠다.
*보(堡): 일정한 규모를 가진 부대의 단위, 지휘소, 병사의 주둔지, 창고 등을 포함
**돈대(墩臺): 경사면을 절토하거나 성토하여 얻어진 계단 모양의 평탄지를 옹벽으로 받친 방위시설.
어재연 (魚在淵)
어재현은 조선후기 공충도병마절도사, 회령부사, 병조판서지삼군부사 등을 역임한 장수를 가리킨다. 본관은 함종(咸從). 자는 성우(性于). 어용인(魚用仁)의 아들이다.
1841년(헌종 7) 무과에 급제, 1864년(고종 1) 장단부사(長湍府使), 1866년 공충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866년 프랑스 로즈(Roze,P.G.)함대가 강화도를 침략하였을 때 (병인양요) 병사를 이끌고 광성진(廣城鎭)을 수비하였다. 이어 회령부사가 되어 북쪽 변경지방의 비적을 토벌, 치안을 확보하였다. 또한 이 때 장시(場市)를 개설하는 등 변경 무역을 활성화하였다.
1871년 미국 아시아함대의 강화도 내침으로 신미양요가 발생하였다. 6월 1일 손돌목[孫乭項]포격사건이 발생해, 한미간에 최초의 군사충돌이 일어났다. 이를 보고하자 진무중군(鎭撫中軍)에 임명되어 광성보(廣城堡)로 급파되어 6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광성보에 부임, 미군과 대치하였다.
6월 10일 미군은 강화도상륙작전을 전개, 초지진(草芝鎭)을 점거하였다. 6월 11일 덕진진(德津鎭)을 함락한 미군은, 마지막으로 광성보공략에 나섰다. 이 때 광성보에 수자기(帥字旗)를 게양하고 침공해 오는 미군을 격퇴할 태세를 취하였다.
미군은 광성보에 대한 수륙양면작전을 개시해서, 해상에서는 함포사격, 지상에서는 야포사격으로 초토화작전을 전개하였다. 드디어 광성보로 돌입한 미군과 어재연군 사이에는 육박전으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어재연은 임전무퇴의 결의로 칼을 손에 잡고 적을 무찔렀고, 대포알 10여 개를 양손에 쥐고 적군에 던져 항전하다가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신미양요 (辛未洋擾)

신미양요라 함은 1871년(고종 8) 미국 아시아함대가 강화도에 쳐들어온 사건을 말한다. 미국은 1866년 8월 평양 대동강에서의 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號) 사건을 계기로 조선의 개항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사건 발생 뒤 미국은 두 차례 탐문항행(探問航行)을 실시하였다.
또 셔먼호사건을 응징하고 이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동시에 조선과 통상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두 차례나 조선원정계획을 수립했지만 실천에 옮기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1871년, 미국은 전통적인 포함 외교에 의해 조선을 개항하기 위해 마침내 조선 원정을 결정하였다. 주청미국공사 로우(Low, F. F.)에게 전권을 위임하면서 아시아함대 사령관 로저스(Rodgers, J.)에게 해군함대를 동원, 조선 원정을 명하였다.
로저스는 기함 콜로라도호(Colorado號)를 비롯하여 군함 5척에, 수해병 1,230명, 함재대포 85문을 적재하였다. 5월 초순 일본 나가사키[長崎]에 함대를 집결, 약 보름 동안 해상기동훈련을 실시하고 5월 16일(음력 3월 27일) 조선원정 길에 올랐다.
로저스는 조선측이 평화적 협상을 거부할 경우에는 무력시위 및 군사작전으로 강제적으로 입약(立約)을 성취시키겠다는 포함 책략을 수립하고 인천 앞바다에 내침하였다. 로저스는 서울로 가기 위한 수로를 탐색하기 위해 강화해협을 탐측하겠다고 조선 대표에게 일방적으로 통고하였다.
그리고 6월 2일(음력 4월 15일) 강화해협의 탐측 항행을 강행하였다. 함대가 손돌목[孫乭項]에 이르자 연안 강화포대로부터 기습공격을 받아 조·미간에 최초로 군사적 충돌사건이 벌어졌다. 이를 ‘손돌목 포격사건’이라 한다.
미국 대표는 조선측에게 평화적으로 탐측활동을 벌이고 있는 미군 함대에 대한 포격은 비인도적 야만행위라고 비난하였다. 그러면서 조선 대표를 파견해서 협상할 것, 포격사건에 대한 사죄 및 손해배상을 해줄 것 등을 요구하였다.
만약 이 같은 요구 조건을 거부하면 10일 후에 보복상륙작전을 벌이겠다고 위협하였다. 조선측은 강화해협은 국방 안보상 가장 중요한 수로이기 때문에 미군 함대가 조선당국의 정식 허락없이 항행한 것은 주권침해요, 영토침략행위라고 규탄하면서 협상 및 사죄를 단호히 거부하였다.
평화적 협상이 결렬되자, 미국은 6월 10일 초지진(草芝鎭) 상륙작전을 단행하였다. 상륙 군 부대를 10개 중대로 편성하고, 포병대·공병대·의무대, 그리고 사진촬영반 등이 동원되었다. 수륙 양면공격을 개시하여, 역사상 최초로 조·미전쟁(朝美戰爭)이 발생하였다.
미군은 함상 함포사격으로 초지진을 완전 초토화시키고 점거하였다. 미군은 6월 11일(음력 4월 24일)에는 덕진진(德津鎭)을 무혈 점거하였다. 마지막으로 광성보(廣城堡) 작전을 수행하였다. 광성보에는 진무중군 어재연(魚在淵)이 이끄는 조선 수비병 600여 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미군은 수륙 양면포격을 한 시간 벌인 끝에 광성보를 함락하였다. 광성보전투에서 미군 측 기록에 의하면 미군은 전사자 3명, 부상자 10명이었고, 조선군은 전사자 350명, 부상자 20명이었으나 조선 측 기록에 의하면 조선군 전사자는 57명으로 되어 있어서 다소 차이가 있다. 미군은 광성보를 점거하고 수자기(帥字旗)를 탈환하고 성조기를 게양, 전승을 자축하였다.

미군의 강화도 내침은 분명한 제국주의적 침략전쟁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처음부터 군사적으로 조선을 정복, 지배하여 영토 분할이나 식민지화하기 위한 침략전쟁을 계획한 것은 아니었다.
포함책략에 의해 조선을 무력적으로 굴복시켜 조선 개항을 실현시키려는 일시적 침략전쟁이었다는 점에서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전쟁과는 성격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중국·일본·동남아시아 등 여러 나라에는 미국의 포함외교가 대성공을 거두었지만, 1871년의 대한포함외교정책은 완전 실패로 끝났다.
미국은 흥선대원군의 강력한 쇄국양이정책(鎖國攘夷政策)에 부닥쳐 조선 개항을 단념하고 7월 3일 함대를 철수하였다. 조선측은 조·미전쟁에서 완전 패전하였지만, 미군 함대의 철수를 곧 패퇴로 간주하였다.
그 결과 배외감정이 더욱 고조되었다. 미국이 남북전쟁 이래 최대 규모의 해군병력을 동원하여 조선 원정을 단행한 지상목표는 조선 개항이었다. 그러나 조·미전쟁 결과 조선 개항은 무위로 끝났다.
실패 요인은 여러 측면에서 찾을 수 있다. 첫째, 미국은 조선 당국과의 입약 교섭에서 화해적 교섭을 지양하고 시종일관 포함책략으로 대처했다는 것이다. 물리적 힘으로 조선을 굴복시켜 개항하고자 하였다.
둘째, 문화적 배경의 차이에 대한 상호 이해가 부족하였다는 것이다. 셋째, 조선이 철두철미하게도 미국과의 불교섭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양이에 대한 불신감과 배외감정이 강한 조선은 미군을 오랑캐로 간주하였다.
반면 미군은 백인우월감을 가지고 조선을 호전적 야만국으로 간주하였다. 여기에서 양국간의 화해적 교섭은 불가능하였다.
넷째, 미국은 조선원정을 단행할 때 처음부터 조선과 전쟁을 각오하고 강화도에 내침하였다는 것이다. 강화해협은 역사적으로 외국배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는 군사적 제한지역이었다. 그러기에 해협 입구에는 외국배의 항행을 금지하는 이른바 ‘해문방수타국선신물과(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 비가 서 있었다.
이처럼 국방 안보상 중요한 수로에 정식허가 없이 미군 함대가 들어온 것은 엄연한 주권침해이고 영토침략행위였다. 그러기에 조선 측은 이를 틈입(闖入: 느닷없이 불쑥 침입함.) 또는 내범(內犯)으로 단죄하고 있다.
다섯째, 1871년 조선은 아직도 개항 여건이 조성되지 못한 가운데 미군 함대를 맞이했다는 것이다. 미국은 1854년의 일본개항 성공을 역사적 교훈으로 삼고, 1871년에도 동일한 결과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조·일양국의 개항 여건은 정반대였다.
일본은 이미 1641년 나가사키에 네덜란드상관[和蘭商館]을 설치, 유럽 열강과 교역하면서, 유럽 선진문물을 수용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일본은 1854년 페리(Perry, M. C.)의 미군 함대가 내침하였을 때 피 한방울 흘리지 않고도 평화리에 미일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조선은 나가사키와 같은 교역 항구도 없었고, 양반지도층은 여전히 서구문물에 어두웠기 때문에 개항은 곧 망국인 양 쇄국정책을 고수하였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조선 개항의 관건을 쥐고 있는 청나라가 조선 개항을 반대하였다는 점이다.
청나라는 조선이 개항하면 대조선종주권(對朝鮮宗主權)이 상실될까 우려하였기 때문이다. 청나라는 조선이 계속 쇄국정책을 고수하여 조·청간의 전통적인 조공관계를 유지하기를 희망하였다.
결국 위정척사사상에 젖어 있는 흥선대원군은 조·미전쟁 직후 쇄국양이정책을 더욱 강화하여 전국 각지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워, 양이와의 화친은 매국이요 망국행위라고 경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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