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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두문자

문성왕 두문자 : 문 장

by noksan2023 2023. 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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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성왕

 

문성왕 : 문 장

 

문 : 성왕

장 : 보고의 난(846)

 

 

1. 성왕

문성왕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재46대 왕으로, 재위 기간은 839~857년이다. 장보고의 반란을 진압하고, 균정계와 헌정계의 화합을 꾀해 정국 주도권을 장악하려 하였다. 중국으로 향하는 해상교통로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강화도에 혈구진을 설치하였다.

 

신무왕은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 장보고(張保皐)와 태종 무열왕계인 김양 등의 도움을 받아 민애왕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재위한 지 얼마되지 않은 839년 7월 23일에 사망하였다. 문성왕은 즉위하자마자, 장보고를 진해장군(鎭海將軍)으로 삼고, 아울러 관복(官服)으로 짐작되는 장복(章服)을 내려주었다. 이는 문성왕이 장보고에게 국왕의 허가를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대외교섭을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였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신무왕이 예전에 장보고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혼인하기로 약속하였다. 문성왕이 장보고의 딸을 맞아들여 둘째 왕비로 삼으려 하자, 조정의 신료들이 장보고의 출신이 미천하다며 반대하였다. 이에 장보고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염장(閻長)에게 살해되었다.

 

장보고가 반란을 일으킨 시기에 대해 『삼국사기』에는 846년(문성왕 8), 『속일본후기(續日本後紀)』에는 841년(문성왕 3) 11월이라 기록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속일본후기』의 기록이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신라 정부는 851년(문성왕 13) 2월에 청해진을 폐지하고, 거기에 거주하던 주민들을 벽골군(碧骨郡,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시)으로 이주시켰다. 841년 3월에 일길찬 홍필, 847년(문성왕 9) 5월에 이찬 양순(良順)과 파진찬 흥종, 849년(문성왕 11) 9월에 이찬 김식과 대흔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되었다. 양순은 신무왕의 즉위에 공을 세운 인물이다. 대흔은 민애왕 편에서 김양이 이끈 군대에 맞섰다가 패한 인물이다. 이는 문성왕이 즉위한 이후 민애왕의 측근을 사면하였음을 반영한다. 김양이 자신의 딸을 둘째 왕비로 들여 정국을 주도하자, 이에 맞서 양순과 대흔 등이 반역을 꾀한 것으로 짐작된다.

 

문성왕은 장인인 김양을 견제하기 위해 삼촌 의정을 상대등으로 삼고, 매부 계명(啓明)을 집사부 시중에 등용하였다. 계명은 문성왕의 할아버지 균정(均貞)과 형제 사이인 헌정(憲貞)의 손자이자 희강왕의 아들이었다. 균정은 조카 희강왕과 왕위계승 분쟁을 벌여 패배하여 죽임을 당하였는데, 문성왕이 균정계와 헌정계의 화합을 꾀해 정국 운영의 주도권을 장악하려 하였음을 말해준다. 문성왕의 재위 기간 동안에 전염병이 창궐하고, 한해(旱害)와 수해(水害), 황해(蝗害), 상해(霜害) 등이 잇따랐다. 문성왕은 죄수를 사면하거나 지방에 사자를 파견하여 백성을 위무하는 등 민심 수습을 위해 노력하였으나, 농민들의 경제생활 안정을 위한 적극적인 정책을 추진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계가 있었다.

 

장보고의 반란 진압 이후 신라의 관문인 당은포(당항진: 경기도 화성시 남양만)에서 중국으로 향하는 해상교통로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844년(문성왕 6) 8월에 강화도에 혈구진을 설치하였다. 강화도는 당은포에서 중국을 잇는 서해 중부 횡단항로 또는 북부 연안항로에 위치한 교통의 요지였다. 851년(문성왕 13)에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아찬 원홍이 불경과 부처의 치아를 가지고 돌아오자, 왕이 직접 교외에 나가 맞이하였다. 855년(문성왕 17)에 문성왕은 현세와 내세에서의 공덕을 쌓기 위하여 창림사 무구정탑(無垢淨塔)을 조성하였다. 문성왕에게 태자가 있었으나 852년(문성왕 14) 11월에 죽었다. 문성왕은 삼촌 의정이 왕위를 잇도록 유언하였다. 문성왕이 857년 9월에 사망하자, 공작지(孔雀趾)에 장사지냈다.

 

 

장보고 : 염장에게 암살당함
장보고 : 염장에게 암살당함

 

2. 보고의 난(846)

장보고는 남북국시대 청해진을 설치하여 당나라와 신라, 일본 간 해상무역을 주도한 상인이다. 출생일은 미상이며 846년(문성왕 8)에 사망했다. 청년기에 당에서 군사 및 해상무역에 대한 경험을 쌓았다. 828년 완도에 청해진을 건설하고 동중국해 해상권을 장악하여 당·신라·일본을 잇는 국제무역을 주도했다. 산동성 적산촌에 법화원을 건립하고 후원했다. 강력한 군대와 많은 선박을 보유하고 부를 축적해 거대한 지방세력으로 성장했다. 왕위계승분쟁이 치열하던 시기에 신무왕 즉위에 관여했고 이후 중앙정부와 반목하다가 옛 부하 염장에게 암살당했다.

 

8세기 이래로 왕성했던 신라인의 해상 활동 능력을 적극 활용해 이들을 묶어 조직화했는데, 이로써 그의 세력이 급속도로 성장하는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이후 강력한 군대와 많은 선박을 보유하고 부를 축적해 하나의 큰 지방세력으로 성장하였다. 그리하여 중앙정부의 정치적 분쟁에도 자연히 관여하게 되었다. 836년(흥덕왕 11) 수도에서 왕위계승분쟁에 패배한 김우징(뒤의 신무왕) 일파가 청해진으로 피난 와서 그에게 의탁하였다. 838년(희강왕 3) 수도에서 다시 왕위를 둘러싼 분쟁이 터져 희강왕이 피살되고, 민애왕이 즉위하였다. 이 정변을 틈타 장보고는 군대를 경주에 보내 반격하며 김우징 일파를 강력히 지원하였다. 그리하여 김우징이 왕으로 즉위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신무왕은 그를 감의군사(感義軍使)로 삼는 동시에 식실봉 이천호(食實封二千戶)를 봉했고, 그의 세력은 중앙정부를 위협할 정도가 되었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중앙귀족들은 그의 딸을 문성왕의 왕비로 맞아들이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 뒤 청해진과 중앙정부 사이에는 대립과 반목이 심화되었다. 그러자 중앙정부에서 한때 장보고의 부하였던 염장을 보내 그를 암살시켰다. 장보고가 죽은 뒤 그의 아들과 부장 이창진에 의해 청해진 세력은 얼마간 유지되었다. 일본에 무역선과 회역사를 보내어 교역을 계속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곧 이어 염장을 비롯한 중앙군의 토벌을 받아 청해진은 완전 궤멸되었다. 851년(문성왕 13) 청해진의 주민을 벽골군(碧骨郡 :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에 이주시키고, 청해진을 없애버렸다. 장보고는 불의에 피살되었으나, 그는 8세기 후반 이후 신라인의 해상활동의 한 정점이 되었다. 또한 신라 말기 각지에서 등장하는 호족세력의 선구적 존재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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