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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두문자

진성여왕 두문자 : 진 여 삼 최 원 견 적 풍

by noksan2023 2023. 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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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성여왕과 거타지
진성여왕

 

진성여왕 : 진 여 삼 최 원 견 적 풍

 

진 : 

여 : 

삼 : 대목(888)

최 : 치원

원 : 종 애노의 난(상주 889)

견 : 원의 반란(892)

적 : 고적의 난(896)

풍 : 도선 수지리설 전래

 

 

진성여왕(887~897)
진성여왕(887~897)

 

1. 왕(887~897)

진성여왕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제51대 왕이다. 재위 기간은 887~897년이다. 즉위 초에는 조세를 면제하고 황룡사에 백좌강경을 설치하는 등 민심수습에 노력했다. 그러나 숙부이자 남편이던 상대등 위홍이 죽자 정치기강이 갑자기 문란해졌고 사방에서 도적이 봉기했다. 원종과 애노의 난도 평정하지 못했고 북원의 양길은 궁예를 시켜 명주를 함락시켰으며, 완산주에서는 견훤이 후백제를 건국했다. 894년 당에서 돌아온 최치원이 시무10조를 올렸지만 시행되지 못했다. 897년 헌강왕의 아들 요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그 해에 죽었다.

 

 

삼대목 : 향가집
삼대목 : 향가집

 

2. 대목(888) : 향가집

삼대목 888년 각간 위홍과 대구화상이 왕명을 받아 편찬한 향가집이다. 책이 전하지 않아 권수와 책수 등은 알 수 없다. 단지, ‘삼대’라는 말이 신라의 상대·중대·하대를 뜻하고, ‘목’은 절목(節目) 혹은 요목(要目)이라는 뜻으로, 내용의 분류체계의 조목에 쓰였다고 추정된다. 신라시대의 향가를 삼대로 나누어 분류한 것으로 보아 규모의 방대함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신라의 세 시대에 걸친 가집(歌集)이므로, 그 내용도 찬가(讚歌)·기원가(祈願歌)·주가(呪歌)·민요·제의가(祭儀歌) 등의 다양한 모습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가요를 수집, 정리, 집성한다는 사실에서, 향가가 전성기를 지나 쇠퇴기로 넘어가던 시기에, 그 인멸을 막거나 부흥시키기 위한 의도가 깔려 있다고 판단된다. 문헌상에 기록된 최초의 가집이라는 문학사적 가치를 지닌다.

 

 

최치원 : 18세 빈공과 장원
최치원 : 18세 빈공과 장원

 

3. 최치원

최치원 남북국시대 신라의 학자, 문장가, 관료이다. 당을 중심으로 한 국제 질서를 인정하면서도 신라의 고유성과 토착성을 알리려고 하였다. 특히, 사람에 도가 있고 사람은 나라의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여, 인간 중심의 보편성과 그에 따른 다양성을 강조하여 신라의 세계화를 이끌었다. 다만, 생존 당시 신라가 쇠퇴하여 정치 이념과 사상은 신라 사회에서 실현되지 못하고, 이후 고려 국가의 체제 정비에 영향을 미쳤다. 그의 문장은 동아시아 문서의 형식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어서 조선시대에도 특별히 주목을 받았다.

 

최치원은 약 17년 동안 중국에서 활동하면서 중국의 문물과 제도를 익혔다. 하지만 그는 신라 전통을 은연 중 강조하기도 하였다. 그것은 중국과 신라의 왕실을 중심으로 두 나라의 역사를 정리한 『제왕연대력』에 반영되었다. 최치원은 신라를 군자국으로 인식하였다. 그것은 유교적 이상인 인(仁)에 투철하였고, 중국 문화의 기반인 유학을 진흥하여 인을 크게 흥성하였기 때문이었다.유학 진흥을 강조한 군자국 인식은 최치원뿐만 아니라 신라 하대에 활동하였던 유학 지식인들에게 공유되었다. 최치원 역시 다른 유학 지식인처럼 신라가 중국의 제후국임을 유념하였다. 다만, 그는 자신과 같은 한림(翰林)에 의해서 신라가 중국의 문물과 제도에 투철하여 중국을 개벽할 만큼 중국의 제후국 가운데 가장 뛰어난 나라로 발전하였음을 강조하였다. 또한 그러한 발전이 이미 신라가 어진 나라였기에 비로소 가능하였음을 설명하였다. 최치원은 신라를 중국의 제후국으로 위치하는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가졌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중국 문화의 수용과 발전이 신라의 전통적 토착 문화를 토대로 구현되었음을 부각하는 소중화적 자존의식(小中華的 自尊意識)도 함께 지녔다.

 

최치원은 선사의 비명과 사찰 관련 글을 작성하면서 신라의 고유 제도나 언어를 제시하였다. 특히, 중국적 세계관을 유념하면서 중국 독자를 염두하여 그 뜻을 세주(細註)로 풀이하였다. 그의 신라 토착 문화에 대한 이해와 언급은 중국 문화와 대비하는 과정 속에서 제시되었다. 한편으로 그는 이전부터 신라 전통으로 전해져 왔던 토속어(土俗語)를 그대로 사용하기도 하였는데, 불교적 의미를 함축한 고유어에 특별히 유념하였다. 신라 불교의 융성과 승려의 업적을 찬양하면서, 그것이 신라 문화의 발전과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루었던 요인이었음을 강조하였다. 다만, 신라의 불교와 유학이 동일한 신라 전통에 기반하여 비로소 발전하였음을 특기하였다. 그는 신라를 중국의 제후국으로 상정하는 인식을 유지하면서, 한편으로 중국의 문물과 제도를 적극 수용하고 유학의 진흥과 불법의 숭상을 통해서 왕권강화를 도모하였던 경문왕계 왕실의 치적을 강조하였다. 경문왕은 제왕의 권위를 수식하며 치국의 유교적 관념을 담은 금도(琴道)를 중흥하였다. 화랑과 관계하였던 대구화상(大矩和尙)은 유교적 이상을 담은 노래를 지어 금도의 중흥을 꾀한 경문왕의 권위를 제고하였다. 때문에 진성왕 대에 대구화상은 위홍과 함께 『삼대목』을 편찬하여 신라 전통을 정리하고 부흥하려고 노력하였던 경문왕계 왕실의 권위와 존엄을 국내외에 강조하였다.

 

886년(헌강왕 12) 북적(北狄)의 침입과 892년(진성왕 6) 견훤의 후백제 건국은 신라 왕실의 권위와 위엄을 약화시켰다. 경문왕계 왕실의 문한관으로 활동했던 최치원은 신라의 국운이 크게 약화되자, 경문왕계 왕실이 중국의 제후국 가운데 가장 뛰어난 군자국을 만들었음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다. 자연히 그는 신라의 왕호를 ‘왕’으로 부르면서 화이(華夷) 양국 왕실의 사적을 정리하여 『 제왕연대력』을 찬술하였다. 최치원이 활동하였던 당시에 신라는 발해와 외교적인 다툼을 벌였고, 진성왕은 자신의 즉위가 부적당한 것임을 밝히며 효공왕에게 선위하고 북궁으로 물러났다가 곧 훙거하였다. 신라는 국내외에서 여러 어려운 상황을 맞이하였다. 최치원은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였고, 그것을 당시 당나라에 보낸 외교 문서에 반영하였다. 최치원은 884년(헌강왕 10) 가을부터 898년(효공왕 2) 정월까지 외교 문서를 집중적으로 작성하였다. 그는 당 황제에게 보내는 표나 장뿐만 아니라 배찬, 이극용(李克用), 고상(高湘) 등 관료에게 보내는 글에서도 발해를 언급하였다. 발해에 대한 언급은 주로 외교 문서에서 제시되었지만, 최치원 개인의 의견이 구체적으로 투영되었다. 최치원은 발해를 고구려의 후예로 표현하였다. 당시 당나라 사람들은 발해가 고구려의 후예라는 점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것은 당 황제의 교화가 두 나라에 미쳐 천하의 풍속을 이루었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최치원은 숙위학생으로 활동하면서 당시 당나라 사람들이 가졌던 발해 인식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그의 발해관은 당을 중심한 세계관을 토대로 신라와 발해를 이해하는 모습이었다. 다만, 신라가 발해보다 먼저 황제의 교화를 받들었음을 강조하면서, 당 중심의 세계관 속에 신라의 위상을 강조하는 이중적인 발해관(渤海觀)을 가졌다. 최치원은 효공왕이 왕위에 오른 뒤에는 발해를 부정적으로 묘사하였다. 그는 발해를 속말갈의 후예로 규정하였고, 이전부터 부르던 ‘북국(北國)’이 아닌 신라의 위계를 받은 ‘적국(狄國)’이라 불렀다. 이를 통해 발해가 신라의 속번으로 애초부터 신라와 비교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님을 지적하였다. 또한 신라가 예부터 많은 숙위학생을 파견하여 문덕을 닦았고, 여전히 숙위학생을 꾸준히 파견하고 있기에, 당 황제의 교화를 이룰 유일한 나라라고 자부하였다. 그는 신라와 발해를 함께 이해하는 발해관을 가졌지만, 신라를 중심으로 한 발해관을 제시하였다. 발해 관련 글을 작성할 때 최치원은 진성왕과 효공왕의 왕위 계승에 관련된 외교 문서를 작성하였다. 또한 그는 왕위 계승과 관련한 외교 문서를 가지고 897년 6월 전후에 직접 사행을 맡기도 하였다.

그의 발해관은 진성왕과 효공왕의 왕위 계승 과정과 긴밀하게 연결되었다. 최치원은 신라와 발해의 경쟁이 격렬해지자, 제후국인 신라와 신라의 속번인 발해와의 관계를 당에 구체적으로 알리고자 하였다. 또한, 진성왕과 효공왕의 왕위 계승이 급박하게 전개되고, 효공왕을 둘러싼 정치 세력의 대립이 점차 격렬해지자, 최치원은 왕실의 안녕을 해치는 귀족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숙위학생 파견을 통해 군자국 신라를 이룬 경문왕계 왕실의 노력을 애써 부각하였다.

 

 

원종 애노의 난(889)
원종 애노의 난(889)

 

4. 원종 애노의 난(889)

신라는 중대의 전성기를 지나 하대로 접어들면서 정치·사회적인 모순이 심화되어 갔다. 왕위 계승을 둘러싼 중앙 진골 귀족 간의 잦은 정쟁으로 중앙 정부의 지방 통제력이 약화되었으며, 관(官)이나 귀족 및 사원의 토지 겸병 확대로 일반 농민들은 점차 토지로부터 유리되어 갔다. 국가 경제의 기반인 농민층이 분해된 반면, 사치와 향락의 풍조로 중앙 정부의 재정 수요는 점점 늘어만 갔다. 진성여왕 대에는 이러한 모순이 극도로 심화되었음에도 근본적인 개혁안을 마련하지 못하였다. 889년 지방의 주·군에서 세금을 바치지 않아 국고가 텅 비고 재정이 궁핍하게 되자, 중앙 정부는 사자를 파견해 오히려 조세를 독촉하였다. 이러한 조세 부담은 피지배층인 일반 농민에게 그대로 전가되었으며, 이에 저항하는 농민 봉기가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대표적인 농민 봉기가 바로 사벌주를 근거로 해 일어난 원종과 애노의 난이다.

 

중앙 정부는 이 난을 진압하고자 나마(奈麻) 영기(令奇)를 파견했으나 오히려 농민군의 세력에 눌려 공격조차 못하였으며, 촌주(村主) 우련(祐連)이 전사하였다. 이 일로 영기는 처형되었으며, 10세 정도인 우련의 아들이 촌주를 계승하게 되었다. 이 때 반란군이 진압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다른 반란군의 무리나 지방 세력에 의해 흡수, 통합되었거나 또는 거세된 것으로 보인다.

 

이 난은 중앙 정부와 지방 토호 세력에 저항하며 일어난 신라 하대의 농민 봉기로서는 선구자적 의의를 지니며, 이후 지방 세력의 형성과 성장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신라 고대국가를 붕괴시키는 기폭제 구실을 하였다.

 

5. 원의 반란(892)

견훤은 남북국시대 후백제를 건국한 시조이다. 재위 기간은 892년~935년이며, 신라 서남해안의 변방비장으로 공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진성여왕 때 각 지역의 호족들이 지방을 점거하여 독립적인 세력을 이루는 사태에 이르자, 892년 무진주를 점령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후삼국 분쟁에서 뛰어난 전투력으로 명성을 날렸으나, 왕위계승 다툼이 일어나 아들 신검에 의해 금산사에 유폐당했다가 도망쳐 왕건에게 의탁하다가 936년에 사망했다. 특정한 지역기반이 없었고 혼란기를 해소할 분명한 비전을 제시하지 못해 단명으로 끝났다는 평가를 받는다.

 

정치가로서 견훤의 특징은 일찍부터 외교에 눈을 돌렸다는 점이다. 스스로 만들어 사용한 상당히 긴 직함도 외교상의 필요에 의한 것이었고, 925년에는 후당(後唐)주2에 들어가 번병으로 칭함으로써 ‘백제왕’이라는 칭호를 받아 중국으로부터 외교적 승인을 얻어냈다. 이듬해에는 오월(吳越)주3과 통했으며, 927년에는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의 사신 사고(娑姑) · 마돌(麻咄) 등 35인이 당도하자 이들을 전송하기 위하여 장군 최견을 보냈다. 그들은 바다를 건너 북쪽으로 가다가 태풍을 만나 후당의 등주(登州)에 이르렀으나 모두 잡혀 죽었다.

 

그러나 거란(契丹)과의 연결은 고려를 배후에서 위협할 수 있게 하였다. 또 922년과 929년 2차례에 걸쳐 일본에도 사신을 파견하였다. 이처럼 국제관계의 변동에 큰 관심을 보인 것은 서남해안의 비장으로 있으면서 얻은 경험에 의한 것이었다. 이 지역은 이미 장보고에 의해 중국과의 무역이 크게 성행했고, 또 당시 지방호족들이 중국과 사무역(私貿易)을 빈번하게 행하던 곳이었다. 후삼국의 쟁패 과정에서 왕건에게 패한 것은 쇠망해 가는 신라의 관리로서 출발한 세력기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지방에 확실한 근거를 가진 것이 아니라, 군인으로서 변방에 파견되어 이미 해이해진 신라의 군사조직을 자신의 세력기반으로 흡수한 것이다. 또한 기성사회에서 권력을 잡고 난 뒤, 이를 유지하기 위해 오히려 신라와 똑같은 방식의 권력구조를 강화하려 했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는 지방호족이 중심이 되어 신라의 국가체제를 부정하면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즉, 후백제를 건국한 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역행했기 때문에 후삼국의 통일에 실패하고 말았다.

 

 

적고적
적고적

 

6. 고적의 난(896)

9세기 후반 신라의 상황은 당시 진성여왕의 실정으로 국가 질서가 극도로 문란하였다. 특히, 889년(진성여왕 3)에는 많은 지역에서 주민들의 세금이 수납되지 않아 국고가 고갈되었다. 이에 중앙정부에서는 관리를 파견하여 세금을 독촉하였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농민반란의 기폭제 구실을 하였다. 그리하여 889년 원종(元宗)·애노(哀奴)의 난 등 농민반란이 일어나고 독자적인 할거 세력이 나타나 전국적인 내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들 반란군 가운데 붉은 바지를 입은 무리가 있었는데, 이들을 당시 적고적(赤袴賊)이라 불렀다. 896년(진성여왕 10) 적고적은 동쪽으로 진격하여 신라의 수도인 경주 서남방면까지 진격할 정도로 기세를 보였다. 그러나 그뒤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는데, 아마 진압되었든지 아니면 다른 농민반란군에 흡수되었을 것이다.

 

7. 도선 수지리설 전래

풍수는 생기가 흩어지고 머무는 현상에서 시작해 음양론과 오행설을 토대로 땅에 관한 이치를 체계화하여 길흉화복을 설명하는 종교용어이다. 풍은 기후와 풍토를 지칭하며, 수는 물과 관계된 모든 것을 가리킨다. 우리 고유의 풍수사상이 있었으나 중국에서 도입되어 신라말 도선과 그 제자들에 의해 널리 보급되고 뿌리를 내렸다. 고려와 조선의 수도를 정할 때 풍수론이 활발하게 토론되었을 정도로 우리 문화의 근저에 뿌리잡은 사상이다. 미신적인 것을 제외한다면 풍수가 궁극적으로 찾아내고자 하는 것은 조화된 풍토와 자연환경이 어우러지는 이상향이다.

 

도선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도선비기』, 『송악명당기』, 『도선답산가』 등을 저술한 승려이다. 827년(흥덕와 2)에 태어나 898년(효공왕 2)에 사망했다. 영암 출신으로, 15세에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승려로서도 명성이 높았으나 음양풍수설의 대가로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당나라에 유학하여 풍수학을 배웠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치 않다. 송악에서 고려 태조가 탄생할 것을 예언한 일로 특히 유명해졌으며, 태조를 비롯한 고려조의 왕들은 그를 극진히 모셨다. 특히 고려 태조는 훈요십조를 남기면서 도선의 풍수사상을 직접 거론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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