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치원 : 난 제 사 계 토 해
난 : 난랑비문
제 : 제왕연대력
사 : 사산비문
계 : 계원필경
토 : 토황소격문
해 : 해인사 묘길상탑비

1. 최치원
최치원은 남북국시대 신라의 학자, 문장가, 관료이다. 당을 중심으로 한 국제 질서를 인정하면서도 신라의 고유성과 토착성을 알리려고 하였다. 특히, 사람에 도가 있고 사람은 나라의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여, 인간 중심의 보편성과 그에 따른 다양성을 강조하여 신라의 세계화를 이끌었다. 다만, 생존 당시 신라가 쇠퇴하여 정치 이념과 사상은 신라 사회에서 실현되지 못하고, 이후 고려 국가의 체제 정비에 영향을 미쳤다. 그의 문장은 동아시아 문서의 형식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어서 조선시대에도 특별히 주목을 받았다.
최치원의 자취는 석각, 사우 또는 서원, 관련 유적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주로 지금의 경상남도, 경상북도, 전라북도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사우 · 사원과 유적은 대체로 적게는 4곳에서 많게는 8곳에 이를 정도로 큰 차이를 보이지 않지만, 석각은 32곳에 남아 있다. 다만, 전라북도에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반면, 경상남도와 경상북도에 대부분 분포하고 있다. 석각이나 관련 유적은 귀국 후 그의 활동과 관련되어 전승되고 있다.
최치원의 사후에 그를 모시거나 기리기 위해서 건립한 사우와 서원도 전국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모두 24곳의 사우와 서원 가운데 정읍 무성서원, 경주 서악서원, 군산 염의서원 · 현충단․옥산서원 · 진주 남악서원, 김제 벽성서원, 함양 백연서원 등은 최치원 외에 김유신, 설총, 신잠, 고경, 고용현, 이건명, 조태채, 임병찬, 김종직, 김일손, 옥구 선현 14위 등의 위패를 함께 모시고 있다. 이들 사우와 서원은 전형적인 선현봉사(先賢奉祀)의 모습을 띠고 있으므로, 유림들이 건립이나 향사에 적극적으로 관여한 셈이다.
반면에 서산 부성사, 광주 지산재, 울진 아산영당, 서천 도충사, 순창 지산사 등은 최청, 최운한, 최형한, 최익현, 최몽량 등의 후손을 배향하고 있다. 광주 지산재, 대구 문창후영당, 포천 청성사, 하동 운암영당, 청도 학남서원, 울진 아산영당 등은 처음부터 최치원의 영정을 모신 사우로 건립되었다. 안동 용강서원, 군산 문창서원, 대구 문창후영당, 포천 청성사, 하동 운암영당, 창원 두곡서원, 청도 학남서원, 합천 가야서당, 익산 단동사, 영덕 모운사, 대구 대곡영각 등도 최치원만 모시고 있다. 후손을 배향하거나 처음부터, 또는 최치원만 모신 사우․서원의 건립과 향사에는 경주최씨 문중의 영향력이 제법 미쳤다. 최치원의 영정은 현재 19곳에 봉안되어 있다. 그것은 대체로 문인풍의 영정과 신선풍의 영정으로 나뉜다. 문인풍의 영정은 의자에 앉은 상태에서 관복과 관모를 갖추어 입은 모습이 대부분이지만, 심의(深衣)에 복건을 쓴 유학자의 모습이나 옷과 요대, 관모가 서로 어울리지 않는 문인의 모습으로도 표현되었다. 신선풍의 영정은 모두 계곡이 있는 깊은 산속에 앉은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최치원의 영정은 대체로 문인풍이지만, 하동 운암영당의 영정처럼 원래 산신풍의 영정을 문인풍으로 바꾸어 덧칠한 것도 있고, 광주 지산재의 영정처럼 문인풍의 영정에 신선풍이 혼효되어 있기도 하다. 최치원의 영정은 애초에 신선풍으로 제작되었다가 점차 문인풍으로 변화하였다. 최치원을 모시는 사우와 서원은 고려 말에 정읍 무성서원이 건립된 뒤, 1483년에 재건되었고, 1561년부터 숙종 때까지 경주 서악서원, 함양 백연서원, 안동 용강서원, 군산 염의서원과 문창서원 등이 연이어 건립되었다. 1623년에 서악서원이 사액된 다음, 무성서원과 염의서원이 사액되었다. 성종 때 일어난 최치원에 대한 숭모 분위기는 선조 때 부성사가 위패를 모신 문중 사우로 처음 건립되는 데 영향을 미쳤고, 1737년에 광주 지산재가 건립되면서 영정을 모신 문중 사우와 서원이 점차 전국에 건립되었다.
영정을 모신 문중 사우와 서원은 경기도, 경상남도, 경상북도, 광주, 대구, 전라북도, 충청남도 등 거의 전국에 건립된 반면에, 유림이 관여한 서원은 대체로 경상남도, 경상북도, 전라북도에만 분포한다. 전라북도에만 무성서원, 염의서원, 현충단, 옥산서원, 벽성서원 등 5곳이 자리하고 있다. 전라북도 일대에 자리한 서원은 무성서원을 중심으로 최치원에 대한 유림의 숭모와 관련되었는데, 이것은 문인풍의 영정이 대체로 호남과 호서 일대의 사우와 서원에 주로 봉안된 것과도 관련된다. 다만 경상남도, 경상북도의 경주최씨 문중에서는 경주 서악서원의 사액을 기점으로, 문중 공동체의 발전과 유지를 위해서 영당의 건립을 확대해 나갔다. 이것은 영남 일대의 사우와 서원에서 대체로 신선풍의 영정을 모신 것과도 연관되었다. 특히, 영남 일대는 최치원이 자연을 벗삼아 노닐었던 말년의 삶과 연고되었으므로, 다른 지역보다도 신선풍의 영정이나 석각의 전승이 특별히 강조되는 경향으로 나타났다.

2. 난랑비문
난랑비문의 작자는 최치원(崔致遠, 857-908)이다. 전문은 전하여지지 않고 일부만이 『삼국사기』의 「신라본기」 진흥왕 37년(576)조 기사에 인용되어 있다. 「난랑비서」가 있었다는 사실도 『삼국사기』로 인하여 알려진 것이며, 『고운선생속집(孤雲先生續集)』에도 같은 부분만이 수록되어 있다.
「진감화상비서(眞鑑和尙碑序)」와 같은 최치원의 다른 비서의 예로 미루어본다면 「난랑비서」는 본래 화랑에 대한 긴 서설과 자세한 행적으로 엮어진 장편의 문장이었으리라고 여겨진다. 인용된 부분만으로도 화랑도의 정신사적 측면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기 때문에 그 전문이 보존되었다면 신라의 화랑도와 9세기 말엽 화랑의 실태를 극명하게 알아볼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내용을 요약하면 풍류도라는 신라 고유의 가르침이 있어 화랑도는 그 가르침을 받들어 수련하고 있다는 것이다. 『선사(仙史)』가 전하지 않아 풍류도의 전모를 알 수는 없으나 유·불·도 3교가 기본정신에 있어 상호 모순되기보다는 오히려 일치한다는 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최치원이 제시한 6가지의 실천규범은 각각 3교의 장점을 취한 것으로, 그밖에도 고유의 독특한 요소가 포함되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우리 고유의 신선사상에서 유래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눈앞의 사소한 세속적인 일들에 집착하지 않고 초탈하여 자유스러움과 호방함을 보여주는 선풍(仙風)의 성격이 3교의 장점을 포괄하여 풍류도라는 신라의 독특한 사상을 형성하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3. 제왕연대력
최치원이 지은 역사서인 『제왕연대력』 역시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이 책은 『삼국사기』 편찬 당시에는 세상에 전해져서 김부식도 신라본기 지증마립간 원년(500) 조에서 이 책의 일부 내용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언급하기도 했다. "논왈, 신라왕으로서 거서간이라 칭한 이가 한 사람, 차차웅이라 칭한 이가 한 사람, 이사금이라 칭한 이가 열여섯 사람, 마립간이라 칭한 이가 네 사람이었다. 신라말의 이름난 유학자 최치원이 지은 『제왕연대력』에서는 모두를 아무 왕이라 칭하고 거서간 등의 칭호는 쓰지 않았다. 이는 혹시 그 말이 촌스러워 칭할 만한 것이 못된다고 여겨서일까? 『좌전』과 『한서』는 중국의 역사책인데도 오히래 초나라 말인 곡오도, 흉노 말인 탱리고도 등을 그대로 남겨두었다. 따라서 지금 신라의 사실을 기록함에 그 방언을 그대로 쓰는 것이 또한 마땅하다".
김부식의 불평에 의하면 최치원은 『제왕연대력』에서 왕이란 칭호가 생기기 이전의 거서간·차차웅·이사금·마립간 등 신라 고유의 왕호를 한결같이 왕이라 호칭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현재 우리가 이 책의 내용에 대해서 알고 있는 지식의 전부이다. 최치원이 신라 고유의 왕호들을 뭉뚱그려 왕이라 지칭한 것은 그가 중국적인 지식을 갖고, 즉 당에서 배운 새로운 개념을 갖고서 신라의 역사를 자기 나름대로 해석한 결과로 보기도 한다. 김대문의 저술이 전통문화에 기반을 두었다면 최치원은 동시대 신라인 누구보다도 중국을 잘 이해했기 때문에 중국적 가치관과 역사개념을 보편적인 것으로 생각하여 이에 집착했다고 보기도 한다. 한편 당나라 승려 영실이 지은 책의 이름과 똑 같은 『제왕연대력』은 어쩌면 연표류가 아닐까 생각된다. 종전부터 있어왔던 신라의 연대기를 정리·편찬한 것으로 우리나라 고유한 것에 바탕을 둔 연대사가의 계통이라는 것이다. 책이름에 '제왕'이 붙어 있는데 아마도 이는 중국의 제와 신라의 왕을 함께 가리키는 것으로 훗날 『삼국유사』 왕력편이나 이승휴가 지은 『제왕운기』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고도 한다.

4. 사산비문
네 편의 비문은 ①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성주사 터에 있는 대낭혜화상탑비(국보, 1962년 지정), ②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쌍계사 경내에 있는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국보, 1962년 지정), ③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면 말방리 대숭복사에 있었던 초월산대숭복사비명, ④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면 원북리 봉암사 경내에 있는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국보, 2010년 지정)를 가리키며, 위의 네 군데 산 이름을 취하여 일반적으로 ‘사산비명’이라 일컫는다.
신라 불교사에서 우뚝한 위치를 차지하는 세 선사(禪師)의 일생 행적과 화엄종 계열의 왕실 원찰인 대숭복사의 창건 내력을 적은 비문으로서, 사비명(寺碑銘)의 찬술은 <문선>에 보이는 왕건(王巾)의 ‘두타사비명(頭陀寺碑銘)’에서 그 선례를 찾을 수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이전에 유례가 없었던 일이다. 네 비 모두 왕명에 의해 찬술되었으며,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귀국한 뒤로부터 은거하기 이전에 걸쳐 찬술되었다. 현재 대숭복사비를 제외한 세 비가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보전되어 있으며, 임진왜란 때 절과 함께 파괴된 것으로 알려진 대숭복사비는 1931년 이후 그 잔편(殘片)이 몇 차례 발굴되었다. 진감선사비와 대숭복사비는 최치원이 직접 글씨까지 썼으며, 대낭혜화상비는 화상의 종제(從弟)인 최인연이, 지증대사비는 분황사 승려 혜강(慧江)이 썼다.
『사산비명』은 우리나라 금석문의 신기원을 여는 웅문거편(雄文巨篇)으로서, 화려한 수사(修辭)에다 함축미와 전아(典雅)함을 잘 갖추고 있다. 『계원필경집』주1이 재당시(在唐時)에 이룩한 대표적 저술이라면 『사산비명』은 귀국한 이후에 남긴 저술 가운데 백미(白眉)라 할 수 있다. 『사산비명』의 자료적 가치와 중요성은 종래 불교학인들 사이에서 과외독본(課外讀本)으로 널리 읽혀져 왔다는 점과 함께 다수의 주해본이 계속해서 나올 만큼 식자층의 관심이 높았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사산비명』은 조선 선조 광해군 때 명승(名僧) 해안이 처음으로 <고운집>에서 네 비문을 뽑아 책으로 엮고 주석을 붙인 이래, 연담 유일 · 몽암(蒙庵) · 홍경모 등의 주해가 이어졌으며, 근세까지 십 수종의 주해본이 나왔다. 이 가운데 정주(精註) · 정교본(精校本)으로는 『문창집(文昌集)』(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과 『계원유향(桂苑遺香)』(崔完秀 소장), 『사산비명주』(梵海 覺岸註), 『정주사산비명(精註四山碑銘)』(石顚 朴漢永註) 등이 꼽힌다. 이 『사산비명』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보다 연대상으로 훨씬 앞설 뿐만 아니라, 당시의 생생한 사실(史實)을 담은 제1차 자료라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높다. 우리의 고대사 연구, 특히 신라의 선종사를 비롯한 불교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는데, 이덕무, 정약용, 성해응과 같은 저명한 실학자들이 『사산비명』을 신라시대의 귀중한 사료로 여겨 중시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사산비명』의 문체는 만당(晩唐) 시기에 크게 유행했던 변려문체(騈儷文體)로서, 육조풍(六朝風)의 기어(綺語)주2와 묘구(妙句)주3가 많고, 변려문에서 구사(驅使)되는 각종 수사기법과 기교, 그리고 중국 역대 금석문의 법식(法式)이 풍부하게 활용되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기교에 흐르거나 나열식의 기술로 꾸며진 것이 아니고, 매우 입체적이고 생동감 있게 서술되었다.
또한 문의(文意)가 창달, 원만하고 음조(音調)가 잘 맞으며, 전고(典故)의 사용이 적절할 뿐 아니라, ‘화려함이 많지만 부박(浮薄)하지 않다’는 평을 받고 있다. 비문이라는 제약된 형식 때문에 문학적 가치를 충분히 평가하기는 어렵지만, 명(銘)을 비롯하여 문학으로 접근할 수 있는 단서가 적지 않다. 문체적 특성 역시 당시의 문풍(文風)과 문장 스타일 등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참고자료가 된다. 또 『사산비명』은 글의 성격이나 형식상 최치원의 사상과 철학을 체계적으로 서술한 것은 아니지만, 여느 비문과는 달리 찬자(撰者)의 사상적 · 철학적 편린들을 많이 담고 있으므로, 그것을 통해 최치원의 철학사상까지도 추론(推論)할 수 있다. 특히 당시 학인(學人)들의 삼교관(三敎觀)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함께 최치원 철학사상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동인의식(東人意識)과 동방사상(東方思想)을 고찰함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자료라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높다.

5. 계원필경
계원필경은 885년(헌강왕 11) 중국 회남(淮南)에서 귀국하여 그 이듬해인 886년(정강왕 1) 그의 나이 서른 살이 되던 해에 당나라에 있을 때의 작품을 간추려 정강왕에게 바친 문집이다. 『계원필경』의 자서(自序)에 의하면, 『계원필경』 20권과 아울러 『사시금체부(私試今體賦)』 1권과 『오언칠언금체시(五言七言今體詩)』 1권, 『잡시부(雜詩賦)』 1권, 『중산복궤집(中山覆簣集)』 5권을 함께 바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지금 전하는 것은 『계원필경』 20권뿐이다. 고변(高騈)의 휘하에서 4년간 창작한 작품이 1만여 수나 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이 도태(淘汰)되고 그 중 10분의 1 내지 2 정도의 분량이 『계원필경』 20권으로 편집되었다.
『계원필경』의 제목은 “모래를 헤쳐 금을 찾는 마음으로 계원집(桂苑集)을 이루었고, 난리를 만나 융막(戎幕)에 기식하며 생계를 유지하였기 때문에 필경(筆耕)으로 제목을 삼았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계원필경』은 서거정(徐居正)이 “우리 동방의 시문집이 지금까지 전하는 것은 부득불 이 문집을 개산비조(開山鼻祖 ; 시조)로 삼으니 이는 동방 예원(藝苑)의 본시 (本始)이다.”라 칭하였다. 현전 최고 최초의 개인문집이다. 『계원필경』은 최치원이 고변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재직할 때의 작품인 만큼 우리나라와는 별로 관계가 없는 시문이 대부분이다. 『신당서(新唐書)』 예문지(藝文志)에는 “최치원은 고려인이며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고 고변의 회남종사(淮南從事)가 되었다. 문집인 『계원필경』 20권과 『사륙(四六)』 1권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계원필경』이 『신당서』에 실릴 만큼 국제적인 저술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계원필경』 서문 말미에 “중화 6년 정월일 전도통순관 시어사내공봉 사자금어대 신 최치원 장주(中和正月日前都統巡官侍御史內供奉賜紫金魚袋臣崔致猿狀奏)”라는 기록이 있다. 중국에서 받은 관직을 사용하고 있으며 중국연호를 적고 있음이 특이하다. 이 때문에 『계원필경』을 사대문학의 남상(사물의 처음이나 기원)이라고 평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 신라가 당나라의 법제를 대부분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된다.
『계원필경』이 1,000여 년을 두고 인멸되지 않고 계속 간행된 까닭은 후대 과문(科文)의 한 전범(典範)으로 원용되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이 문집은 사륙변려문(四六騈儷文)의 유려한 문체가 수많은 전고(典故)를 담은 채로 수록되어 있다.
이 문집과 함께 왕에게 올린 8권의 저술 이외에도 『삼국사기』에 의하면 『제왕년대력(帝王年代歷)』과 문집 30권이 간행되어 세상에 전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이 언제 누구에 의하여 간행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김부식(金富軾)이 『삼국사기』를 저술할 때에 이를 참고하였음은 분명하다. 최치원의 정치적 경륜을 엿볼 수 있는 것으로는 894년에 진성여왕에게 올린 「시무십여조( 時務十餘條)」가 있다. 지금 전하지는 않지만 후세 정치가들의 상소문의 모범이 되었다. 『고운선생문집(孤雲先生文集)』은 후대에 와서 여러 책들에 실린 최치원의 글들과 금석문에서 나온 것들을 모아 후손 최국술(崔國述)이 1926년에 편찬하였다. 같은 해에 최면식(崔勉植)·최영하(崔榮夏)가 또한 편찬한 바 있다. 『고운선생문집』에서 그의 진면목을 보다 요연하게 접할 수 있다. 『계원필경』은 최치원 자신의 느낌과 감상을 적은 글은 거의 없다. 대부분 고변을 위하여 대작(代作)한 것이다. 우리 나라와는 깊은 관계가 없는 생소한 중국의 사실들로 점철되어 있다. 『계원필경』 20권의 체재와 내용은 서문을 서두로 하여 권1·2에 표(表) 20수, 권3에 장(狀) 10수, 권4·5에 주장(奏狀) 20수, 권6에 당장(堂狀) 10수, 권7∼10에 별지(別紙) 80수, 권11에 격서(檄書) 4수와 서(書) 6수, 권12·13에 위곡(委曲) 20수, 권14에 거첩(擧牒) 50수, 권15에 재사(齋詞) 15수, 권16에 제문·서(書)·소(疏)·기 10수, 권17에 계(啓)·장 10수, 권18에 서(書)·장·계 25수, 권19에 장·계·별지·잡저 등 20수, 권20에 계·장·별지·제문·시 등 40수로 구성되었다. 『계원필경』 권1∼5까지는 고변이 황제에게 올리는 표와 장을 최치원이 대필한 것이다. 권6∼권10까지는 고관대작들에게 주었던 공문별지(公文別紙)이다. 권11은 유명한 「격황소서( 檄黃巢書)」를 비롯한 격문과 서(書)로 짜여져 있다. 이들은 대체로 받는 이들을 설득시키는 힘이 강한 변려문으로 많은 고사를 인용한 화려한 문체이다. 풍부한 고사와 적절한 대구(對句)와 압운(押韻)은 후세인의 경탄을 자아내기에 족하다.
최치원의 변려문은 이덕무(李德懋)와 홍석주(洪奭周)에게 “중국에서 유행이 지나 한물간 문체를 모방한 아류(亞流)에 불과하다.” 고 혹평을 받았다. 그의 문재(文才)는 역시 후인의 추종을 불허한다. 『계원필경』 권15의 「재사」 15수는 당대(唐代)의 도교(道敎)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알려져 있고, 권16의 「보안남록이도기(補安南錄異圖記)」는 월남(越南)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 필요한 사료로 평가되고 있다. 권17에서 사도상공(司徒相公)인 고변에게 중국 역대의 영웅들을 나열하여 그에게 대비시키며 칭송한 「기덕시(記德詩)」 30수는 주제가 너무 노골적이어 시로서의 품격을 잃고 있다. 시를 통하여 그의 상사인 고변을 장량(張良)에 비유하여 천하를 평정한 국태민안의 주역으로 과대평가하고 있다. 또, 「안남(安南)」이라는 시에서는 남만(南蠻)인 안남을 마음껏 멸시하고 있다.

6. 토황소격문
격(檄) 또는 격서(檄書)라고도 한다. 적군을 설복하거나 힐책하는 글과 급히 여러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각 곳에 보내는 글도 이에 포함된다. 이러한 격문은 전쟁 또는 내란 때 군병을 모집하거나 침략의 부당성을 널리 알리거나 항복을 권유할 때에 많이 이용되었으며, 또한 혁명의 주모자가 그들의 정치적 주장을 알리는 선전매체로도 사용되었다. 오늘날 대학입학 시험장 등에 내거는 현수막에 쓰여진 간단한 격려문구라든가, 전단에 자신들의 주장이나 선동 · 선전 등을 위한 글귀들을 인쇄하여 돌리는 것도 일종의 격문이라고 할 수 있다.
격문은 고대 중국에서부터 널리 사용되어 왔으며, 우리 나라에서도 일찍부터 활용되어, 주로 문자가 보급되기 시작한 삼국시대부터 선전 · 선동의 설득수단으로 이용되었다. 612년(고구려 영양왕 23)에 수나라 양제(煬帝)가 고구려를 침입했을 때 살수대첩을 이끈 을지문덕이 적장 우중문(于仲文)에게 보냈던 「여수장우중문시(與隋將于仲文詩)」도 격문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다. 신라의 최치원이 당나라에 있을 때 황소(黃巢)의 난이 일어나자, 황소를 성토하기 위하여 지은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도 유명한 격문으로서, 황소가 이 격문을 읽다가 자신도 모르게 침상에서 내려앉았다는 일화가 있다.

7. 해인사 묘길상탑비
해인사묘길상탑지는 모두 4매이고, 건녕(乾寧) 2년인 895년에 조성되었다. 크기는 가로와 세로 각각 23㎝의 정사각형이고, 두께 2.4㎝의 전판(塼板)으로 제작되었다. 각 판의 앞뒷면에 걸쳐서 해서체로 음각된 명문이 기록되어 있다. 해인사길상탑지의 찬자는 최치원(崔致遠)이고 서자는 미상이지만, 다른 탑지와 서체가 다른 것으로 미루어 최치원의 서체일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그리고 오대산사길상탑지의 찬차는 승훈(僧訓)이고, 서자는 석희(釋喜)이다. 탑지는 해인사 일주문에서 남쪽으로 약 50m 지점의 도로변에 위치해 있으며 1996년 보물 로 지정된 해인사 길상탑에 봉안되어 있었다. 1960년대에 도굴되었던 것을 1966년에 사리장엄구와 함께 회수하면서 알려지게 되었으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해인사탑지의 내용은 제1판이 길상탑을 건립하는 원문과 건립 자원 및 건립 집단에 대한 것이고, 제2판은 56명의 승속(僧俗) 전망자(戰亡者)의 이름을 나열하였다. 오대산사탑지는 곡치군(哭緇軍)이라는 탑사(塔詞) 서(序)와 탑사이고, 백성산사탑지는 탑 안에 봉안한 법침(法賝)의 목록을 기록하였다. 해인사묘길상탑지는 통일신라 말 지방세력의 동향과 사찰을 중심으로 한 승군(僧軍)의 활약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탑의 건립과 관련하여 규모·비용·인원 등 사원경제에 대한 연구뿐만 아니라 신라 말기에 성행하였던 조탑(造塔)신앙과 경전 등 당시 불교신앙의 동향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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